맨 처음엔 ADHD를 의심했었다.

내가 자주 깜빡깜빡 하는 건가? 내가 신경을 잘 못쓰나? 내가 잊어버리는 건가?

   

요즘 들어 부쩍 잃어버린 게 많아졌다.

사무실에서 쓰던 볼펜, 샤프라던가,

거스러미를 자르기 위해 가져다 놓은 손톱깎이,

그놈의 냉난방 온도 제한을 버티기 위해 준비한 부채나 담요,

큰맘 먹을 것 까진 없었지만, 나름 심사숙고해서 구매했던 1L 크기의 텀블러 등등등

   

그나마 업무상 자료를 잃어버리거나

일정을 잊는 게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나온 ADHD 테스트에선 딱히 문제도 없었기 때문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진짜 생활에 문제가 될 물품들... 예를 들어 차키라던가, 스마트폰이라던가, 없어진 건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분명 이상했다.

꺼낸 적 없던 지갑에서, 신분증이 사라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편의점에서 꺼내 봐야 할 일도 없었다.

술집에서도 민증검사를 할 만한 동안이나 패션센스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까지 없어진 물건들과는 다르게,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건이 사라진 것이었다.

옆자리 회사 동료에게, 혹시 누군가 내 자리에 왔다 간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봤지만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라며 모르쇠다.

   

옆자리 직원의 책상위에 없어진 볼펜이나 담요가 보이지 않으니 용의선상에서 제외한다.

애초에, 같은 부서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직원을 의심하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아무래도 회사에서 사라진 것 같지는 않고...

오늘 집에서 나온 뒤의 동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골몰하고 있자, 동료 직원이 재차 질문을 해온다. 

   

"아뇨.. 요즘 자꾸 물건을 잊어버려서요."

   

"누가. 훔쳐가기라도 한건가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볼펜이나 이런 거면 괜찮은데. 신분증이 사라져서 말이죠."

   

"신분증이요? 이거 보통 일이 아닌데요?"


하긴, 아무리 개인정보가 공공재라지만, 신분증이 사라진 거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각종 금융 업무는 신분증 하나만 있어도 비대면으로 대출까지 진행되는 게 요즘 시대다.

"일단, 신분증부터 재발급 받아야겠어요."

기존 신분증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면, 빠르게 재발급을 받는 게 최고다.

   

"혹시... 요즘에 누가 따라다니는 느낌은 못 받으셨어요?"

옆자리 동료 직원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네 온다.

   

"아뇨.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설마, 스토커라도 있으려고요"

   

"생각해 보셔 봐요, 지갑에 신용카드나 현찰은 그대로 두고, 신분증만 쏙 빼간 이유가 뭐겠어요"

하긴, 금전적인 목적이 있었다면, 현찰이라도 빼가는 게 현실적 이였다.

   

하지만 포인트 카드니 자잘한 동전까지도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신분증만 귀신같이 사리진 것이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설마요"

나 또한 대한민국의 평범한(?) 성인 남성이다.

학창시절엔 연애라곤 한번 못해봤고, 티비속에 나오는 사생팬들이 드글드글한 남자 연예인들과는 거리가 멀다.

   

"혹시 모르니까, 이번 주엔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셔요."

   

"아휴, 아니래도요. 그냥 제가 건망증이 심한 거겠죠. 걱정 마셔요"

남자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경찰서에 신고할 생각보단, 정신과에서 ADHD 검사를 받는 게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그렇게 잠시 쉬는 시간에, 정신과에 전화를 걸어 상담 예약을 잡아 놨다.

정신과 의원에선 예약이 밀려있으니, 다음 주 목요일 지나서야 상담이 가능하다고 한다.

   

티비나 유튜브에서, 어른이 되고 알고 보니 약한 ADHD이었다는 글들을 많이 봤다.

그걸 넘어서, 경계선 지능장애인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퇴근길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청년치매 이야기까지 나온다. 

상담은 왜 또 한참 늦게 잡혀가지고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살고 있는 원룸 빌라엔 주차공간이 적어서 문제다.

오늘도 빌라 내 주차는 허탕치고, 주변 공영주차장으로 향했다.

이런 빌라촌 공영주차장은 보통 야간엔 무료로 풀어놓기 때문에 이용하기 좋다.

   

구석 자리에 주차를 하고 집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를까 고민을 하는데

주차된 곳 맞은편 대각선에서 갑자기 사람이 한 명 내린다.

분명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주차 되어 있던 차량인데....

   

갑자기 옆자리 동료직원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설마 싶긴 하지만.... 걸음을 재촉해서 편의점으로 향한다.

   

조금 빠른 걸음걸이로 걷고 있음에도, 차에서 내린 사람은 여유롭게 나를 뒤쫓아 오고 있다.

혹시나 해서 걷는 속도를 늦추어 보았는데, 뒷사람은 나를 지나쳐 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부리나케 다리를 달려서 항상 가던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괜스레 편의점 직원의 인사가 오늘따라 반갑다.

   

"휴우. 이정도면 쫒아올 생각은 안하겠지"

구둣발 이였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서 뜀박질을 했다. 음료수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탄산음료를 하나 끄집어내는데...

   

"어서 오세요"

편의점 직원이 새로 들어온 손님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분명, 차에서 내려 나를 쫒아오던 사람이다.

나는 몸을 피해서 컵라면 진열대 사이로 몸을 숨겼지만, 이미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쳐 버렸다.

   

발소리가 점점 내 쪽을 향해 다가온다.

나는 다가오는 발걸음을 피해, 일회용품 코너를 지나 계산대로 향했다.

   

다행히 따라오던 사람은 삼각김밥 진열대 앞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부디 내 오해였으면 좋으련만.

   

나는 계산대 앞에서 초콜릿을 고르는 척 하며 시간을 때웠다.

부디, 저 사람이 먼저 나가길 바라며...

저 사람이 먼저 계산을 마친 뒤에 나갈 생각이다.

   

하지만 나를 따라오던 사람은 삼각김밥을 한참동안이나 고르더니, 이제는 컵라면 진열대 앞에서 세월아 네월아 골몰하는 척 하고 있다.

   

"하..시발... 진짜 무서운데"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경찰을 부르기도 애매하다.

   

나는 계산대에 집어온 음료수를 내버려 둔 채

쏜살같이 내 집을 향해 뛰어나갔다.

   

직원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 살고 볼 일이다.

그리고 내가 나온 조금 뒤에 편의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볼 새도 없이 나는 다리를 더욱 재촉해서 집을 향해 뛰었다.

빌라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 올라와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모두 걸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 밖의 동태를 살폈지만, 다행히 빌라 안쪽까지 쫒아온 모양새는 아니었다.

시발. 차라리 스토커라도 있으면 좋을 거 같다느니, 그까짓 거 뿌리치고 싸우면 그만 아니냐느니

다 인터넷 망상병 환자들의 상상일 뿐이다. 인간은 미지의 존재에게 두려움만을 느낄 뿐이다.

   

혹시나 누군가 방문을 두드릴까, 3층임에도 창문으로 엿보진 않을까 온갖 상상을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길에 올랐다. 주차장에 가면 다시 그 사람을 마주칠까 무서워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회사에 출근하자, 나보다 먼저 출근해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옆자리 동료가 보였다.

나는 동료를 붙잡고 아침부터 하소연을 했다

   

   

"아무래도 해주신 말씀이 진짠가봐요. 어떡하죠? 어제도 잠 한숨도 못자고 죽는 줄 알았어요. "

   

내가 횡설수설하며 이야기를 이어가자 옆자리 동료가 양손으로 어깨를 꽉 붙잡아 날 진정시키며 말했다.

   

"차근차근,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말해요"

   

나는 침을 한번 꿀떡 삼키고,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갔다.


어제 주차장에서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내리자 다른 차에서 내린 사람이 날 쫒아왔다. 

떨어뜨리려고 갖은 수를 써 봤지만, 집요하게 따라왔다. 

아무래도 스토커 같다.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상세히 이야기 해주었다.

   

"경..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을까요? 세..세콤이라도 가입할까요?"

   

"아뇨. 심증만으론 경찰도 움직이긴 힘들어요.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까진, 정보를 모으는 게 좋아요.

   

잠깐, 이것 좀 봐보셔요"

   

동료 직원은 인터넷으로 몇 가지 물품을 검색해 보여주었다.

   

"요즘엔, 굳이 보안업체 안 불러도 간단하게 홈캠으로 CCTV 설치할 수 있어요. 태그 같은 물건으로 중요한 물건들은 도난당할 염려를 줄일 수도 있고요. 가격도 저렴해요. 설치하기 어려우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꽤나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지..진짜요?"

   

"제가 뭣 하러 거짓말을 해요. 지금 주문하면 당일배송 된다니까, 바로 하죠."

   

그녀는 내 의견을 구하지도 않고 자신의 돈으로 홈캠과 태그를 주문했다.

   

내가 한사코 말리자, 스토커 잡으면 밥이나 한번 사란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하였고, 우리는 각자 자리로 돌아가 업무를 보았다.

   

------

퇴근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무실에 나와 동료만 남았을 때

   

"택배요"

택배기사님이 주문한 물품들을 가지고 사무실에 도착했다.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향했다.

빌라 내부엔 또 주차할 공간이 없었다. 다시 공영주차장으로 향해 차량을 돌렸다.

   

다행히도, 어제 보였던 그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없나봐요. 다행이다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집 쪽으로 동료를 안내했다.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한숨 돌린 내가 동료에게 이야기를 건네려 하자

   

"잠깐만요, 조용히 앞만 보고 가세요."

동료가 내 팔짱을 끼며 주의를 건넨다.

   

"왜..왜 그래요 갑자기"

부드러운 감촉에 내가 팔을 빼려고 하자, 그녀가 더욱 내 팔을 휘어잡는다.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아요. 오른쪽 뒤편, 쳐다보지는 말구요"

   

"히..히익"

   

나는 그대로 굳은 채, 로봇처럼 그녀에게 이끌려 걸어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잠깐 다른 길로 빠지죠."

   

그녀와 나는 팔짱을 낀 채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구석을 꺾을 때 언뜻 언뜻 뒤를 보며,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일 확인한 뒤에야 우리는 집으로 들러올 수 있었다.

   

집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손님이 오셨는데 응대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동안, 그녀는 택배박스를 뜯어 홈캠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저도 같이 할게요"

   

"안 도와주는게 도와주는 거에요. 저기 가서 잠깐 앉아 계셔요"

   

남자로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수치스러운 말을 들은 난, 풀이 죽은 채로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그녀는 홈캠을 현관에서 침대 쪽을 바라보도록 설치하고 난 뒤, 

태그를 건네며 한소리 했다.

   

"아니, 세상에. 요즘시대에 와이파이를 비밀번호도 없이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거기다가,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는 왜 또 생일이에요? 어휴.. 현관문 비밀번호는 당장 바꾸시고, 여기 태그는 차키나 지갑 같은데 하나씩 넣어두셔요"

   

그리고선 내 핸드폰을 뺏어가 몇몇 어플을 설치해 주었다. 핸드폰 비밀번호도 생일로 되어있는걸 확인하자, 그녀는 나를 한번 흘끗 째려보았다.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온갖 비밀번호를 모두 바꿔야 했다

회사 메일 비밀번호가 1q2w3e!! 인걸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자요, 여기 버튼 누르면, 언제든지 홈캠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어요. 돌려보는 건, 1주일정도 분량이 가능할거에요"

그녀는 화면 위의 버튼을 가리키며, 핸드폰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설치된 홈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핸드폰에선 손을 흔드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말로만 하지 말고, 나중에 밥이라도 사요. 한번 말고 여러 번!"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선 현관문을 나섰다.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려 했지만, 스토커가 아직 있을지 모른다며 나를 다시 집안에 밀어 넣었다.

   

어제보단,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

다음 날부턴, 조금 용기를 내서 주차장에 있는 차를 타고 출근을 했다.

그녀와 팔짱을 끼고 온 동네를 누볐던 덕분인 걸까?

이틀 동안은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직장 동료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금요일 저녁에 식사를 제안했다.

그녀는 

   

"불금 저녁엔 퇴근해야지 식사하자는 꼰대가 어디 있어요? 됐고, 토요일에 밥하고 커피까지 모두 사줘요. 

아, 홈캠 설치된 거 확인도 해보려니까, 댁 앞에서 보죠."

라고 말했다.

   

주말에 직장동료를 만나는 게 더 이상했지만...그녀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대꾸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가온 토요일 아침, 으레 공영주차장에서 나는 직장동료와 만났다.

나는 내 차를 꺼내서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시 외곽에 있는 소고기 집으로 향했다.

   

'단순한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라던가, 은혜를 갚으려면 소고기, 한우가 적당해 보였다.

   

처음엔 그녀도

   

"아니, 아저씨도 아니고 진짜 정육식당을 가자고요?"

라며 불만을 표했지만

   

"흠...한우라면 넘어가 주도록 할게요. 대신 카페는 제가 고를 거에요"

라며 입맛을 다셨다.

   

해가 창창한 정오부터 소고기집에서 두 남녀가 불판을 달궜다.

그녀는 기회를 잡은 듯, 소주까지 시키며 분위기를 올렸다.

   

"어머, 저만 먹어서 어떡해요, 운전수는 술도 못 먹고"

라며 소주잔을 들고 나를 놀린다.

   

기름진 소고기엔 나 역시도 소주가 땡겼지만

사이다 한잔으로 건배만 해줄 뿐이었다.

   

순식간에 소고기 한 근을 해치우고, 서비스로 나온 차돌박이까지 알차게 구워먹었다.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아진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그녀가 찾아본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로 향했다.

   

잠깐 술도 깨고, 고기냄새도 뺄 겸, 창문을 열고 외각 고속화도로 달렸다.

   

"하~시원하다"

발그스름한 얼굴로 미소 짓는 그녀는 곁눈질로 보아도 귀여워 보였다.

   

카페에선 아까 먹은 소고기는 개의치 않다는 듯

케이크에 쿠키에 블루베리스무디까지 소반 한가득 담는 그녀.

이외로 빵은 맛이 좋아서 내가 먼저 더 시켜먹자고 했었다.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먹으며 그녀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오늘, 일부러 댁 앞에서 보자고 한거에요"

   

"그.. 스토커 때문에요?"

   

"맞아요, 어차피 스토커한테 제 얼굴이 팔린 이상, 빨리 잡아 버리는 게 저한테도 좋거든요"

   

"설마, 이렇게까지 했는데 다시 나타나려고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그 러 니 까"

   

"그러니까?"

   

"다음 주 토요일에도 시간 비워 놓으세요"

   

"네?"

   

"설마, 스토커의 표적이 된 직장 여자 동료를 그냥 이렇게 내팽겨 버리시려고요?"

   

"아니..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러면, 이렇게 발 벗고 나서는 사람한테, 소고기 한번 사주고 입 싹 닦으려고요?"

   

"아니 저.. 그"

   

"거 참, 남자가 입이 참 기네. 비우라면 비워요, 알겠죠?"

   

그렇게 남은 케이크를 맛있다는 듯 해치운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듯 했지만 나쁠 건 없어보였다.

   

그렇게 매 주말마다, 그녀와 스토커 대처라는 명목으로 여기저기 외출을 나갔다. 

자동차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멋들어진 양식집에서 파스타도 먹어보고, 괜스레 바닷가에 가서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스토커에 대한 걱정도 차츰 사라지고, 내 마음속엔 다른 생각이 점점 솟아 오르고 있었다. 

보잘것없는 남자의 마음일지라도, 소중한 것이었다.

   

라고 생각했던 게 어리석었다.

저번 주 토요일에도 그녀와 데이트를 마치고, 월요일 회사에 그녀와 잡담을 나누고,

이번 주 토요일엔 어디에 갈까 의견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문 도어락이 부숴지고, 문짝은 우그러지다 말고선 집 내부를 조금 비추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조언을 듣고 새로 바꾼 도어락이 제 기능을 하였는지, 문이 강제로 열리진 않았다.

   

나는 바로 경찰에 전화를 했다.

남자인 내가 스토커 소리를 하자 처음엔 심드렁한 경찰관도

뜯겨져 나간 문짝을 보자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바빴다.

   

순식간에 현관문에 폴리스라인이 쳐지고,

집에 사는 나도 출입을 제한 당했다. 과학수사대가 올 때까진 현장보존이 중요하데나 뭐래나...

   

오갈 데가 없어진 나는 회사에서 잘 요량으로 다시 회사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괜스레 무서워진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는 

   

"퇴근하고 나서 전화하는 거, 실례인거 몰라요?"

라며 장난을 친다.

   

"하하... 그게 아니라, 결국 또 왔나봐요. 그 스토커"

   

"네?"

   

"집에 오니까 문짝이 죄 뜯겨져 나가있는거 있죠? 그래도 도어락이 튼튼해서 열리진 않았어요.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그럼. 지금 어디세요?"

   

"경찰이 함부로 출입하지 말래서, 회사로 가서 자려고요."

   

"아니. 스토커가 또 어디서 나올 줄 알고요. 당장 이리로 오세요."

   

"네?"

   

"우리 집으로 오라고요, 하루이틀 정도는 괜찮으니까"

   

"저...그래도 그건 좀;;"

   

"하. 거참, 남자가 혓바닥이 왜 이리 길어요? 오라고 할 때 좀 와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울려 퍼진다.

   

"네. 바로 갈게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뒤, 그녀가 보내준 주소를 향해 차를 돌렸다.

   

---------

   

"경찰도 참 그래, 피해자를 보호조치도 없이 그냥 내버려둬요?"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나를 보고선 계속 화를 내고 있다.

   

"뭐.. 별일이라도 있겠어요."

   

"별일이 있잖아요. 지금! 어휴"

   

괜스레 한마디 보탰다간, 본전도 못 건질 판이다.

나는 그녀가 주는 옷을 받아들고 황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은 이외로 나에게 딱 맞았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데.... 

   

"이것저것 감사합니다. 옷은... 누구 거에요?"

 샤워실에서 나오자마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흐음~, 왜요? 제가 남자친구라도 있을까봐?"

   

"아..아뇨. 그냥,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 옷이 있어서..."

내가 말끝을 흐리며 어영부영 하고 있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쿡쿡 찌른다.

   

"왜요. 질투 나요?"

   

나는 얼굴이 빨개져선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꺄하하하. 빨개진 것 좀 봐. 오빠꺼에요 친오빠꺼. 안 입는 옷 편하게 입으려고 훔쳐온 거에요. 잘 맞아서 다행이네"

   

"아.. 오빠분이 계셨구나."

   

"웬수에요 웬수. 아, 그리고, 여자의 비밀을 그렇게 함부로 물어보는 거 아니에요"

   

"아...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기 작은 방엔 절대 들어가시면 안돼요?"

   

"네? 거기에 뭐가 있기에"

   

"그...옷방인데... 속옷 같은것도...크흠"

   

"아! 죄송합니다."

역시, 아까도 그렇고 괜한 건 물어보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경찰이 뭐 해줄 때까진, 당분간 여기서 출퇴근 하세요. 옷이야 급하면 한두 벌 정도는 사면 되니까. 알겠죠?"

   

"감사합니다."

   

"그럼, 맥주 한 캔만 나가서 좀 사와요"

   

"네?"

   

"그럼. 맨 입으로 넘어가려고 했어요?"

   

"아뇨 아뇨. 안주는 뭐 드실래요?"

   

"오~, 센스가 늘었는데요?, 핫바 하나만 부탁해요"

.... 다음 달 신용카드 납부일이 슬슬 두려워진다.

   

   

다음 날, 그녀를 태우고 내 차로 같이 출근을 했다.

회사 사람들이 보면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정작 회사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침 열시쯤 되자,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네..네.. 맞습니다. 잡혔다고요? 네... 고생하십니다. 감사합니다."

   

범인이 잡혔으니, 사건조사를 위해 진술서를 써달라는 경찰의 전화였다.

뜯겨진 문짝에 지문이 죄 다 묻어있어 금방 잡았다고 한다. 

  

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부장은 옆자리 동료까지 같이 경찰서에 다녀오라고 한다.

"경찰서 그런데 혼자 가는 거 아냐, 같이 다녀와"

   

어차피 진술서는 혼자 쓰더라도, 밖에서 누군가 기다리는 것만으로 경찰의 대우가 달라진다고 한다.

부장님은 왜 이런데 해박하신건지...

--------------------------------------

   

경찰서에서 진술서를 쓰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어디 사는지, 무얼 하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같은 기본적인 신상정보부터

최근 이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는지, 왜 경찰에 바로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

홈캠에 찍힌 자료를 공유해줄 수 있는지, 가해자가 아는 사람인지 등등은 벼라별것을 다 물어보았다.

   

하도 꼬치꼬치 캐묻기에 왜 그러시냐고 오히려 경찰을 타박하자

   

"거 용의자가, 면식범인거 같아서 그래요. 정말 몰라요?"

경찰은 용의자의 사진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몰라요, 이런 사람. 왜 자꾸 그러시는데요."

   

"글쎄. 이 사람이, 자꾸 당신을 지키려고 그랬데잖아"

   

"지키긴 뭘 지켜요. 지가 오히려 날 해코지 했으면서"

   

"저 밖에 계신 여자친구 분으로부터 당신을 지키려 했데요. 나 참"

   

"네?"

   

"밖에 같이 오신 분, 여자친구분 아니세요?"

   

"아.. 저....그..."

   

"거. 같은 남자로서 하는 말이지만, 괜히 여자친구 눈에서 피눈물 나올 짓은 하지 맙시다. 남사시럽게시리"

   

"아 진짜. 모르는 사람이래두요!"

경찰이랑 푸닥거리를 마치고, 겨우 조사실을 나왔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에게 조사실에서 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글쎄, 스토커가, 절 지켜주려고 한 거라네요"

   

"뭘로부터요?"

   

"제 여자친구 한테서요"

   

".....여자친구요?"

순식간에.. 그녀의 표정이 돌변했다. 

도끼눈을 뜨고선 매섭게 나를 쳐다보는데

잠깐 복수삼아서 놀려주려고 한거지만 이놈의 혓바닥이 문제다

   

"아..아니. 우리 둘을 연인으로 착각했나봐요"

   

"아...아아..."

   

"저, 얼른 돌아가죠."

나도, 옆자리 동료도 얼굴이 벌게진 채로 경찰서를 나섰다.

돌아오는 차 안에선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적막한 분위기를 버티지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 했다.

   

"저, 그... 아까 여자친구 이야기 있잖아요."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고백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물며 시작부터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 여자친구 이야기를 먼저 해서 어쩌자는 건지 나도.

   

"어휴. 남자가 되가지고는"

   

"거 자꾸 남자 남자 그러시는데, 좀만 기다려보세요."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해야 하나요?"

빨간불에 멈춰 서자, 그녀가 나의 얼굴을 돌려 눈을 마주친다.

   

"그... 이번 주말까지만 기다려주세요"

나도, 고백할 땐 멋들어진 장소에서 여자친구를 만들어 보고 싶다.

남자라도, 로망이 하나쯤은 있는 것이다.

   

"흐음... 저번처럼 정육식당은 안돼요. 알았죠?"

그녀는 이정도로 봐 주겟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본다.

   

하지만, 창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약간 붉어진 듯 해 보였다.

   

다음 달 신용카드 납부일이 두렵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주변 5성호텔 뷔페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가능하다면. 숙박까지

   

   

--------------------------------------------------------------------------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에 누워 발을 동동 구른다.

   

"어떡해 어떡해, 진짜 고백하려나봐"

다 큰 성인일지라도, 사랑 앞에선 소녀가 되는 법이다.

   

"하.. 어떻게 주말까지 기다리지?, 그냥 아까 차 안에서 확 고백해주면 좀 좋아?"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인형을 꽉 끌어안으며 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다.

   

"하아.. 처음에 그이가 물건 없어진 거 물어봤을 땐 진짜 다 망했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일이 잘 풀리네."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한다.

   

 이윽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다 말린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뒤적거리다, 

남자가 벗어놓고 간 옷들을 빨랫바구니에서 꺼내 입는다.

   

"스읍~..하아.."

상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선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다.

여자의 얼굴에서 안도감이 넘쳐흐른다.


역시, 언젠가 그이가 집에 찾아올 때를 대비해, 미리 조사해 놓은 치수대로 사놓길 잘했다.

친오빠라고는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 딱 한번 도움이 되었다.   


"하여튼, 스토커 그 썅x은 정도라는 게 없어요. 괘씸한 게 감히 신분증을 훔쳐?, 나도 그이의 증명사진은 아직 못 가져 봤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신분증을 훔치고, 남자의 뒤를 쫒고, 남자 집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힌 것은 그 스토커이지 그녀가 아니다.

   

 그녀는 그이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하지만 그녀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들부터 가져왔다.


"집수리도 오늘 저녁에 마쳤다니까, 그이도 이제 집에 들어갔겠지?"

스마트폰을 들어, 남자에게 건네준 태그의 위치를 확인하는 그녀

   

"아핫. 다른 데로 안 새고 집에 잘 들어갔네."

그녀의 스마트폰에선, 태그의 위치가 남자의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두 치수는 커 보이는 옷을 입고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컴퓨터를 키고선 남자 집에 설치해놓은 홈캠에 접속한다.

자신이 직접 설치한 홈캠이기에, DDNS를 통한 접속은 물론,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다.

   

"오 늘 의 그 이 는 무 엇 을 할 까 요"

화면 한쪽에 홈캠을 틀어놓은 채로, 드레스 룸에서 몇몇 보물들을 꺼내오는 그녀.

   

남자가 잃어버린 텀블러에 물을 담고

남자가 잃어버린 담요를 무릎에 덮고

남자가 잃어버린 볼펜을 입에 물고선

남자의 집에 설치된 홈캠을 유심히 살펴본다. 

   

꽤나 공들여 물건을 골랐는지, 화면에는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온다.

   

"헤헤...에헤헤....."

입에 물린 볼펜 때문인지, 기괴한 웃음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