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교활동에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베일에 싸인 4황녀.

 

항간에는 그녀에 대한 소문만 무성했다.

 

얼굴에 화상 흉터 때문에 숨어 지낸다느니

진짜는 이미 ‘피의 만찬’ 때 죽었고 지금 활동하는 건 대역이라느니

 

호사가들이나 좋아할 법한 여러 이야기들이 나돌았지만

그녀를 직접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평가를 내렸다.

 

황녀는 미쳤다고.


침묵하던 공주는 폭군이 되어버렸다고.

 

물론 그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 말을 입밖으로 낸 순간 대가를 치러야 했다.


 

“끄으윽..!”


 

혓바닥을 잘린 남자가 고통스럽게 무릎 꿇는다.

 

꽉 깨문 이빨 사이 흘러내리는 피가 하얀 대리석 바닥을 붉게 적셨다.

 

 


"흠....."

 


웅장한 황궁 알현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상석에 위치한 금발의 여인은 침음성을 흘렸다.


 


“치워.”

 

 

 

나지막한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움직이는 인원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핏방울만 남긴채 알현실 밖으로 끌려나갔다.

 

 

 

“다음.”

 

 

 

어린아이 정도나 될까 한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였지만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에 주위의 신하들 뿐만 아니라

도열한 기사들조차 작게 몸을 떨었다.

 

 

 

“.... 분부하신 자들은 방금 전의 남자가 마지막입니다.”

 

 

 

백발의 원로가 황녀에게 간언했다.

 

주위 신하들 중 거의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은 모습.

 

아마 오랜 기간의 정치 경력 덕분이었으리라.

 

 

 

“후우....”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쉰 황녀는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자신에 대한 음험한 소문을 퍼트린 놈들을 잡아와 직접 벌을 내렸다.

 

세치 혀를 놀리던 건방진 음유시인은 혓바닥을

무도회장에서 낄낄대며 춤추던 귀족은 두 발을

가소로운 편지를 주고받던 두 기사는 손목 하나씩을

 

모두 받아야 할 벌을 받았을 뿐

손속에 과한 것은 없었다.

 

샅샅이 파헤쳐보면 여태 벌을 주었던 놈들보다 벌을 받아야 할 놈들이 훨씬 많았겠지만

이정도 본보기를 보였으니 더 이상 감히 자신을 깔볼 수 없을 것이었다.

 

이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잠시동안 이어진 정적을 깨며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본녀는 사슴 스테이크, 미디움으로."



 

갑자기 무슨 말인지.


뜬금없는 그녀의 한마디에

몇몇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고

또 다른 이들은 드디어 끝났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고 있다, 사냥꾼들을 시키면 된다."


 

주변의 엇갈리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간 그녀는

턱을 괴고는 허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음.... 그렇다면 기사라도 부르거라."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미소만 본다면

그저 달콤한 사랑에 빠진 평범한 여인이라 생각될지도 모르겠으나.  

 

그 시선의 끝에는 소름돋게도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흠흠......"

 

 

 

원로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간의 경험상, 황녀는 한번 발광하다 잠잠해지면

당분간은 저런 식으로 헛것과 대화하곤 했다.

 

그것도 모자라 어느 때는 한없이 잔혹했다가 또 어느 때는 부드러워졌다가.

 

미쳐버린 전대 황제의 병환은 대물림되는 것이었는지

황녀는 어느 순간 인격장애도 함께 앓기 시작했다.

 

그렇게 얻게 된 그녀의 멸칭.

 

‘미치광이 황제 2세.’

 

그는 제국의 기울어가는 명운에 속으로 한탄했다.




"언제부터 그런걸 신경썼다고."

 

 

 

이젠 황제대리가 된 황녀는 타들어가는 가신의 속도 모른채 혼잣말을 계속했다.

 

물론 그의 생각에 대답한 것은 아니겠다만

그녀는 정말 그녀의 말 대로 행동했다.

 

당장 황궁의 정기 회의시간인 지금도 그러한 것처럼

그녀의 혓바닥은 때와 장소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럼 계속 진행합시다.

 



원로가 애써 다시 한번 웅성거리는 좌중을 다독였다.

 

자신과 같은 중역들이야 그녀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나

이번엔 처음 회의에 참가한 젊은 귀족들이 있었다.

 

최대한 빨리 회의를 끝마쳐야 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황녀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랐다.

 

노인의 턱짓에 사회자가 회의를 재개했다.

 

 

 

".....다음 안건은 이번년도 세수에 대한 의결입니다."

 

"푸흣...."

 

"올해 가뭄이 들어 흉년이...."

 

"푸하하하!"


 


뜬금없는 그녀의 광소에

힘겹게 바로잡은 분위기가 모두 깨져나갔다.

 

물론 안건에 대해 반응한 건 아니었을 텐데, 

이번엔 원로들조차 굳어진 표정을 펼 줄 몰랐다.

 

애써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진행자도 눈만 굴리는 걸 보니

아마 또 한 번 자신이 나서야 할 때이리라.

 



"이 안건은 미리 이야기된 대로 하지요."



 

다시금 조용해진 알현실.

 

노인은 터져나오는 한숨을 꾹 참아냈다.

 

황녀가 포악한 행동을 보일 때마다

언젠가 성녀에게 들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결국은 썩은 부분을 잘라내야 살아남을 수 있지요.’

 

미쳐버린 황제를 축출하고 새로운 인물을 즉위시키자는 말.

 

막상 그땐 단순히 반역을 종용하는 악마의 속삭임으로만 느껴졌었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결국 그녀가 옳았다.

 

성녀가 가진 예언의 능력 때문일까.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는 있었지만

그녀의 행동엔 적어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친황제파인 자신들에게 배신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것조차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이젠 오래도록 한 국가에 충성해왔다는 그들의 자부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다른 이들의 구겨진 면면을 보니

그들도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듯 했다.

 

 

 

"이어서 전쟁 포로의 처분에 대한 의결입니다."

 

 

 

잠시 잡념에 빠졌던 사이 상당히 시간이 지났는지

준비되었던 안건들이 가결되고, 다음 안건들이 언급되길 반복했다.

 

 

 

“이것도 대신회의에서 결정된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오가는 여러 주제들에 대한 모든 결정들은 

황제대리인 그녀의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내려지고 있었다.

 

황제대리라고는 하지만 허울뿐인 직책.

 

정확하게는 권력은 있지만 국정운영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게 옳을 것이다.

 

참석한 인원들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누구도 이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혹은 황녀가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나.

 

물론 그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회의는 벌써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국경 장군들의 재배치....”

 

"....그 입 닫으라!"

 

 

 

드디어 등장한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기뻐했던 것도 잠시.

 

다시금 그녀의 발작이 터지고 말았다.

 

 

 

"입 닫으라고 하였다!!"



 

미치광이 황녀의 분노에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참석해있는 인원들은 혹시나 자신에게 화가 닥칠까 두려움에 떨었다.

 



"이놈! 지금 뭐라 씨부리는 것이냐!"

"한번만 더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내 친히 벌을 내릴 것이야!"


 


다행스럽게도 이번에 황녀의 분노를 불러온 대상은

여태 대화하던 환상 속의 인물인 듯 보였다.

 

그들로 인한 것이 아닌 이상

조용히만 있으면 곱게 지나갈 터.

 

모두들 그녀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 현실에까지 불똥튀지 않도록 몸을 사렸다.

 

하지만

 


".....단단히 미쳤군."


 

신하들 사이에서 나직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허공만을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휙 돌렸다.


 


"방금 뭐라 하였느냐."



 

모든 시선이 입을 연 하급 귀족에게 쏟아졌다.

 

그가 바로 오늘 처음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 중 한명이었는지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실언을 뱉고 만 것이리라.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는지

당황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인지하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비록 처음 참가하는 것이긴 했지만

남자도 황녀의 광기에 대해 익히 경고를 들어왔다.

 

때에 따라 달라지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파.

 

얼마 전, 그녀를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다니던 공작을 직접 처형한 것처럼

대상도, 직위도 그녀에겐 상관없었다.  

 

오로지 그녀에게 영향을 주는 건 자신의 감정 뿐.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목소리에 비해 그렇게까지 분노한 건 아니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린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남작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신께 기도했다.


 

 

"뭐라 하였느냐 물었다."

 

"살려주시옵소서!"

 

"너는 지금 본녀가 대화하는게 보이지 않느냐?"


"보입니다! 너무도 잘 보입니다!"

 



그녀는 신하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척 보기에도 위기를 모면하려고 내뱉은 발악.

 

그 정성이 갸륵하게 느껴져 기회를 한번 주기로 했다.


 


"그럼 나와 대화하던 상대는 누구지?"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남자에게 던져졌다.

 

황녀의 아량을 받아내려면 이정도는 풀어낼 능력이 있어야 했다.

 

물론 그녀 혼자서만 아량이라 생각하는 것일 뿐이지만

세상에서 그녀에게 트집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저 멀리,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저...그게....!"

 



용서해주고 싶다는 그녀의 태도와는 다르게

질문의 답을 남작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독심술사도 아니고, 

그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리겠는가.

 

하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반응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허어......두개나 있어도 도저히 보질 못하다니."


 

 

역시는 역시.

기대한 자신이 바보였다.

 

과거 비슷한 상황에서 정말로 알아맞힌 몇 명이 존재했었기에

그녀의 실망감은 더욱 컸다.

 

물론 남자의 답을 맞히고자 하는 열망만큼은 뚜렷하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오답에 대한 댓가는 치러야 하는 법.

 

그녀는 엎드려 용서를 빌고 있는 남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고개를 들라."



 

방금전보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용서의 가능성을 읽었는지

남자는 급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황녀는 안타깝다는 듯이 팔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작은 키 때문이었는지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무릎꿇은 남자의 얼굴에 충분히 손이 닿았다.

 

 


"그런 쓸모없는 눈깔 하나쯤은."


"전하?!"


 

그녀는 자신의 여린 손을 남자의 눈두덩이에 가져다댔다.

 

고된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듯한 남자의 창백한 피부.

필시 농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이 틀림없었다.

 

황녀는 살짝 미소지었다.




"없어도 되겠지?"


 


남작이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그의 눈알에 찔러넣었다.

 

순식간에 눈꺼풀 아래로 파고든 잘 정리된 손톱에

물컹거리는 수정체가 잘려나가며 희멀건 액체를 흘렸다.



 

"아아악!!!!"



 

남자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황녀의 팔을 잡아떼려 했지만 

그녀는 그럴줄 알고 있었다는 듯

순식간에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눈알을 빼냈다.

 

찢겨지는 시신경과 함께 딸려나오는 반쪽 눈알.

 

한번에 깔끔하게 적출해내지 못했지만

아마 이 정도로도 충분한 벌이 되었으리라.



 

"나머지는 알아서 빼거라."


 


피범벅이 된 눈가를 붙잡고 쓰러져

돼지 멱 따는 소리만 내지르던 놈의 주변으로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 대기하던 시녀들이 순식간에 둘러쌌다.

 

 

 

“흠....”

 

 

 

손가락에 묻어있는 뭔지 모를 액체들

쳐다보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깔끔히 닦아내고는

더러워진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회의는 내일 계속하지."

 

 

 

대신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말과 함께

황녀는 굳어있던 그들을 뒤로한 채 발길을 돌렸다.



























"우욱!"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웨에엑!!"




환상이 보이느냐고?


아니.


그딴건 없었다.


오직 보이는건

미친 척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 뿐.




"으읍!"




자신이 벌린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떠오르자

다시금 속에서 진물이 올라왔다.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지금도 손끝에 남아있는 불쾌한 감각은 적응될 기미가 없었다.




"하아, 하아..."




속에 있던 걸 모두 게워낸 그녀의 몸은

연속된 역류에 지쳤는지 그대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누누이 들어왔던 황족의 위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겉치레 따위가 생존보다 중요하겠는가.

결국은 살아남아야 뭐든 있을텐데.




"아....."




등에 닿는 차가운 타일이 흐리멍텅했던 정신을 조금 일깨워주었다.


조금만 더 잘했다면,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멍하니 올려다본 높은 천장은

너는 절대 닿을 수 없다며 한심하게 비웃는 듯 했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져 있을 순 없었다. 

중요한 순간,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한번이라도 삐끗하는 순간 여태까지 해온 모든게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일어나."




쉽사리 움직이지 않던 몸에게 명령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생각만으론 옴짝달싹도 하지 않던 육체가 의지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금 찾은 원래의 높이.


누워있을 땐 멀게만 보였던 천장이 

이젠 손만 뻗으면 닿을 듯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하아."




다리는 후들거리고 눈앞은 어지러웠지만 

아직 자신은 살아있었다.


쉬는건 일이 모두 끝나고 해도 된다.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고 세면대로 향한 그녀는

겨우 컵을 들어 입을 헹궜다.




"한달.... 딱 한달이야..."




그간 버텨왔던 고통들에 비하면

아주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지 않은가.


그때가 되면 모든게 괜찮아지리라.


그녀는 긴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들을 털어내며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후우....."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하얀색 가구들.


18년간 써온 익숙한 침대와 테이블은 

특유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자신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대신 시선을 돌리자 탁자 위의 수북한 서류뭉치들이 보였다.


거르고 걸러진 서류들. 


유명무실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그녀의 인장이 찍혀야만 하는 것들.


황제의 업무였다.




"하나....둘....셋....."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는 

서류뭉치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남은 서류가 몇 개인지는 관심 없었다.

그건 단지 일에 집중하기 위한 그녀만의 루틴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불필요해 보이는 행동들.


아마 그가 보았다면 그러지 말라고 훈계를 했겠지.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아무도 없어야 할 황녀의 방 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서 앉으십시오, 얼마 안걸립니다.'


"시끄러."




까칠한 대답과는 반대로 

그녀는 얌전히 남자의 말에 따랐다.


주어진 일에서 도피하려던건 아니었다.


어차피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의자를 끌어 앉기 전, 해야할 일이 남아 있었다.


서류뭉치를 세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루틴.


그녀는 침대 위에 곱게 접혀져 있던 붉은색 담요를 탁자로 가져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더럽고 오래돼 보이는 담요는

고귀한 황족보다 모험을 즐기는 용병에게나 어울려 보였다.




"......"




다시 의자에 앉으려 하던 찰나.

그녀는 입고 있던 옷을 슬쩍 내려다봤다.


세상에 하나뿐인 여황제의 품격에 걸맞게 

자신의 몸에 딱 맞춰 완벽하게 제단된 아름다운 하얀색 드레스.


티끝 하나 없이 깔끔해 보였음에도 

그녀에겐 원단에 깃든 수많은 탐욕이 보였다.


당연히 이딴걸 입고 저 소중한 담요를 덮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탁자위에 놓여있던 편지 봉투용 칼을 쥐고는

단번에 등 뒤의 코르셋을 잘라냈다.




"읏...."




뽀얀 살결을 스치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도 잠시.


묶여있던 매듭이 풀리며 하얀 드레스가 

툭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내 드러난 새하얀 나신.


나올데 나오고 들어갈데 들어간 충분히 매력적인 몸매였지만

150cm의 왜소한 체구는 그녀에겐 큰 컴플렉스였다.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애써 외면한 그녀는

곧바로 팬티를 제외한 어떤 것도 입지 않은 채

새빨간 담요를 둘렀다.




"흐응......."




드레스가 주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거기다 맨살에 닿는 담요의 보드라운 감촉까지.


작업을 시작하기엔 최적의 상태였다.




'이젠 진짜로 시작하시겠지요?'




자리에 앉아 펜을 잡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예민해진 신경을 긁어댔다.




"한다고, 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됐지만

여태까지 쌓아온 습관들에 입이 먼저 반응했다.




"진짜도 아니면서...."




아, 실수했다.


지금 가장 하면 안되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겨우 펜을 쥔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생각하면 안돼, 생각하지마.


생각하지 말라는 그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시 원점으로.


온몸을 짓누르는 강박에 겨우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팽팽 돌았다.


그녀는 이럴 때마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쳤던가?

그에게 미쳐버린건가?

시도 때도 없이 계속 생각나서

일상생활조차 못하는게 미친게 아니면 뭐겠는가




"제발....!"




황궁을 장악한 성녀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연기.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그의 목소리는 

미친척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버틴 시간이 벌써 1년.


오랜 연기 끝에 이젠 자신이 미치광이 연기를 하는건지

아니면 진짜로 미쳐버린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다시 만나려면 먼저 살아남아야 했으니.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도와줘...."




그가 떠난지 오랜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곁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붉은색 헌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조용히 숨죽여 울었다.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긴 듯

포근한 담요의 감촉 그 사이에서.


그녀는 지나간 옛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불행했다.


황궁의 다섯 자매 중 넷째.


애매한 그 숫자처럼, 황족으로서 무엇 하나 잘난 것 없는 능력에

황제에게는 물론이고 생모인 황후에게조차 외면받았다.


하지만 승부욕 강한 자매들에 비해 그녀의 성정은 너무도 여렸다.


늘 남들에게 빼앗기기만 하는 삶.


강한자만 살아남는다는 제국의 신조처럼

약했던 그녀에겐 제왕학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선생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항상 손가락질 받던 어린 그녀는 열등감에 허우적댈 뿐이었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는 법.


신은 그녀에게 두 번의 기적을 내려주었다.




첫 번째는 성녀의 탄생이었다.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그마한 시골에서 새로운 성녀가 탄생했고,

교단의 열렬한 신자였던 황제는 그 소식을 듣고는

성녀를 수도로 데려와 신탁을 부탁했다.


신탁이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그들만이 알았겠으나

그 후, 정말로 신의 뜻이 맞다는 듯

황제는 기적과도 같은 국정 운영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제국은 나날이 번성해 갔지만 

황제가 성녀에게 의존할수록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입 싼 시녀들의 소문에 의하면

증세의 원인은 모두 성녀가 준 약 때문이었다.


걸핏하면 일어나는 공황발작, 뇌리를 파먹는 정신분열과 함께

황제다웠던 근엄한 외모는 아편굴의 중독자와 같아졌고,

남아있던 약간의 온정은 내면의 포악함에 잡아먹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옛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미쳐버린 왕에게 결말은 파멸 뿐.


하지만 황제는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자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거나 추방했다.


조용하던 어느날의 저녁식사는 순식간에 피의 만찬으로 변했다.


다행히도 미리 계획해둔 일은 아니었는지 그 난리통 속에서도 

황녀들은 저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황궁에서 도망쳐나갈 수 있었다.


그녀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황제는 늘 무시하던 그녀에게까지 의심이 미치지 못했는지

해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4황녀를 다음대의 황제로 지목했다.


무시받던 네 번째 황녀에서 유력한 차기 황제로.

순식간에 위치가 뒤바뀌었지만 실상은 변한게 없었다.


각각의 황녀들을 지지하던 가신들은 귀족파로 전향했고

드물게 남아있는 친황제파는 그녀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게 겨우 붙잡아둔 희망의 불씨마저 꺼져갈 때.


찾아온 두 번째 기적.

























"안녕하십니까 전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생에 처음으로 주어진 호위기사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군데도 없었다.




"전하, 식사시간입니다."


"경, 분명 안 먹는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식사는 하셔야합니다."




흰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운 은발과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만한 부드러운 인상.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릴 만한

전형적으로 귀족스러운 미남형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려한 외모와는 달리

그의 성격은 무척이나 깐깐했다.




"하루종일 앉아만 계시면 병이 납니다."


"식사를 하실땐 꼭꼭 씹어 드셔야지요."


"가끔씩은 파티에도 나가서 다른 귀족들과 교류하는걸 추천드립니다."


 


호위기사인지 보모인지 모를 수준.


안전을 핑계로 화장실만 빼면 

가는 곳이 어디든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는 듯

언제나 옅은 미소로 살갑게 대했음에도

그녀는 그 남자에게 마음을 열 수 없었다.




"성녀가 제 사생활까지 간섭하라던가요?"




황제가 미쳐버린 지금 

황궁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성녀의 파벌밖에 없었다.


그리고 궁 안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한 남자.


오랜 수모로 인한 그녀의 처세술은

그가 성녀쪽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음....제가 성녀와 인연이 있긴 합니다." 


"하, 역시."


"하지만 황녀님이 생각하시는 그런건 아닙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자 

그의 말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도도 확실했고 목적은 뻔했다.


정신이 나가버린 아버지를 보아하니 

자신에게도 은근슬쩍 그 약을 먹이려고 하나본데.


그녀에겐 알고도 당해주는 취미 따윈 없었다.




"난 당신 못 믿어."




성녀를 속이려면, 살아남으려면 

연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정신병자 연기.


비록 한 줌 의미조차 없는 비루한 인생이었지만

무뢰배들의 꼭두각시는 되고 싶지 않았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택은 온전히 전하의 것입니다."




자신의 차가운 말에도 미소짓는 그를 보고는

절대로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


그날 이후, 그녀의 마음의 조각은 

전보다 조금 더 뾰족해졌다.




"난 사람이 있으면 식사 못해."


"이전엔 꽤나 잘 드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요새 소화가 잘 안된다고!"


"시녀에게 소화제를 가져오라 이르겠습니다."


"아니, 내 말 의미를 이해 못하겠어? 꺼지라고!"


"황녀님의 직속 호위 기사로서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밥을 먹을 때부터.




"책 읽는데 방해되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져."


"사우턴 왕국의 전례에 따르면 도서관에서도 암살자가 활동할 수 있습니다."


"너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내가 먼저 죽겠다고!"


"스트레스 푸는덴 활사냥이 제격입니다. 원하신다면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하, 잘 됐네, 죽이고 싶은 사냥감 하나 있는데."


"황녀님이 쏘시는건 피할 자신 있습니다."




도서관까지.


날카로운 반응에도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그녀를 따라다녔다.


거기다 그녀의 말은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는 능글맞은 태도


불신의 감정 이전에 잔뜩 뿔이 나버린 황녀는 

어떻게든 저 잔잔한 미소를 부숴버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의 고민을 거친 그녀는

마침내 마음속에만 담아두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너, 내 눈앞에서 사라질 때 까지 밥 절대 안먹는다."




과거에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인지

혹은 여윈 자신에게 연민을 느껴서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성녀의 명령 때문인지.


그는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식사를 거르는 것 만큼은 도저히 참지 못했다.


그녀가 한 단식선언은 아이나 다름없는 유치한 협박이었으나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리는 데 성공했다.




"흠...."




극단적인 그녀의 말에 남자는 지긋이 눈을 감고서

언젠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찌푸리면서 생긴 미간의 주름이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 열심히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겠지만 

그녀가 생각하기론 그런 것 따윈 없었다.


만약 자신의 눈에 띄면 밥을 안 먹으면 그만이니.


평소에도 방안에 틀어박혀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던 그녀에겐 

이건 이길 수밖에 없는 내기였다.




"제가 사라진다면 식사를 하시는게 확실하시지요?"


"그래, 황족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게."




물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변.


비록 남아있는 명예 따윈 없었지만

여태까지의 그를 봤을 때 통할 것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황녀 전하."


 


호위기사로서 자신의 곁을 지켜야 한다더니

역시나 별 의미없는 감시에 불과했던 것인지

인사를 마친 그는 쿨하게 사라졌다.




"뭐야..."




그러지 말라고 질척거리며 애원하는 모습을 상상했건만.

생각보다 너무 쿨한 모습에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이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성격이 절대 아닐텐데.


분명 무언가 검은 속내가 있을 것이었다.




"하.... 이렇게 쉽게 갈거면서 말이야."




찝찝함을 떨쳐내려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이렇게 있어봤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신경을 끄고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게 맞았다.


복잡한 마음이 담긴 한숨과 함께 

깨작대는 포크질로 집어먹은 고기 한덩이.




"쿨럭...."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머릿속에 넘치는 많은 생각들 때문이었는지

죄없는 자에 대한 미움의 벌이었는지

연신 터져나오는 기침들에 목이 매여왔다.


다행히 바로 옆에 있던 물 한잔으로 겨우 잠재우는데 성공했지만

그 사이로 부스럭거리는 창문 밖의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




평생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두다가  

이제와서 누가 찾아오지는 않을 테고.


시녀도, 주방장도 이미 다녀간 지금

암살자 외엔 자신을 건드릴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도 알아챌 정도로 부스럭거리는 수준의 실력이라면

애초에 황궁의 경비를 뚫어내지조차 못했으리라.


남은건 하나 뿐.


너무 쉽게 떠났나 싶더니, 역시는 역시였다.




"허, 참나.... 야, 그냥 나와-"




짜증스럽게 그를 불러내려는 찰나

머릿속에서 못된 장난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에 성공만 한다면 그 잘난 얼굴을 왕창 구겨줄 수 있으리라.


성공의 예감에 비실비실 미소가 새어나왔지만

혹시 그에게 들킬까 꾹 참아냈다.  


새침한 표정으로 고풍스럽게 포크를 내려두고

손수건으로 입가를 깔끔하게 닦아 낸 다음. 




"으으윽.....!"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식탁 아래로 쓰러졌다.




"황녀전하!"




방 안에서 들리는 고통어린 신음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호위기사.


늘 걸려있던 입가의 옅은 미소는 찾아볼 수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아든 그의 얼굴은 충격과 다급함으로 가득했다.




"으윽.....!"


"전하! 괜찮으십니까!"


"으.으.윽."


"시녀! 의사를 데려와라!"


"......."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정말로 난리가 날 것같아 

억지로 짜내던 신음을 멈췄다.




"야."


"황녀전하! 정신!...."




순식간에 무표정해진 얼굴에 당황한 남자.

처음으로 가면 안쪽을 본 기분이었다.




"도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 붙어있는 이유가 뭔지.


정말 성녀에게 약점이라도 잡힌건지

아니면 빈털터리인 자신에게서 얻어낼 것이라도 있는건지.


여태까지 비슷한 방식으로 괴롭혀서 쫓아냈던 성녀의 끄나풀들은

항상 이맘때 쯤 되면 자신의 주인에게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쳤었는데.


남자는 그들의 몇 배나 되는 시간동안 끈덕지게 달라붙어있었다.


한번도 순수한 호의를 경험해 본 적 없는 그녀는

그의 진심을 알 수 없었다.




".....제가 그렇게도 싫으셨습니까."


"응."




남자의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미인의 눈물은 사람을 홀리는 능력이 있었다.

이건 여자건 남자건 상관없었다.


절대로 쳐다보면 안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에겐 저 눈물은 독과 같았다.


그녀는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따스한 마음씨 때문에

거짓연기임을 알고 있음에도 저런 감성팔이에 자꾸 눈길이 갔다. 


눈속임에 속아 괜히 어줍잖게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한다면 더욱 골치가 아팠다.




"약속을.....지키겠습니다...."


"진작 그랬어야지."




그녀는 자신이 인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의 배신 끝에 깨달은 사실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혹시나 이번은 아니겠지,

이번만큼은 아닐거야.


라고 생각할 때마다 그녀의 믿음은 무참히 깨져나갔다.


부서져 깨진 얼음조각들은 눈이 되었다.


눈은 굴리면 점차 커진다.


그녀의 불신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덮고도 남았다.




"여태까지 실례했습니다. 황녀 전하."


"그래, 빨리 사라져버려."


"그럼 안녕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정말로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이겼다.


아픈척을 해도, 숨어있는거 알고 있다고 블러핑을 해봐도.

그는 영영 사라진 것인지 더 이상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히 내 승리다.


시녀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본적 없다는 것 뿐.

아예 제국의 수도를 떠난 듯 보였다.




하지만 원하던 걸 얻었음에도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왜일까?


이런 식의 궁금증들은 항상 답을 찾지 못한 채 마음 저 한구석에 가라앉는다.


언젠가 나타날 해답을 기다리며.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굳게 닫힌 페이지를 다시 열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열어볼 필요가 없었다.

여태껏 어떠한 답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일상을 되찾았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세상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


그녀는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처럼

외로움을 견뎌내야만 얻을 수 있는 진짜 자유.


다행스럽게도 외로움은 익숙했으니

남은 건 좋은 것들 밖에 없었다.


좋은 것은 좋은 것.


독수리는 독수리.


외로움의 본질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그렇게 계절이 하나 바뀌고 여름이 찾아왔지만

외로움에게는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


그저 날씨가 살짝 더워진 것 뿐이었다.


그리고 날짜가 지나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식사시간은 찾아왔다.


그녀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식사에 대한 생각을 하던 도중에 

뜬금 없는 잡념이 떠올랐다.



독수리도 사냥을 할 것인데

독수리는 뭘 먹더라?


....어느날 점심.


그녀는 문득 사슴고기를 먹어보고 싶어졌다.








"주방장, 사슴 스테이크는 없나요?"


"죄송합니다 전하, 오늘 당장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가요....."




떠올려보니 책의 삽화 말고는 

한번도 사슴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서식지가 주변이 아닌게 이유였던가.




"뭐, 굳이 억지로 구하려 하진 마세요."




황녀의 신분으로 먹어보지 못한 것엔 다 이유가 있다.


평생 보지도 못한 새로운 음식이

갑자기 말 한마디 한다고 나타나는 법은 없었다.


물론 황녀의 신분으로 명령한다면 어떻게든 구해오겠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억척스러운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이런 사소한 것 따위는 포기할 줄 알았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먹어보겠지.


오랜만에 생긴 궁금증에 대한 미련을 남긴 채로

그렇게 사슴 스테이크는 한때의 해프닝으로 조용히 지나갔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이게 뭔가요."




돼지나 소와는 확연히 다른 형태의 고기.


먹고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마인드로 

살기위해 밥을 먹어온 그녀조차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만큼 특이한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생각한 그게 맞냐고.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자신의 반응에 오히려 만족스러워하는 주방장의 미소가 

그녀의 눈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낮에 말씀하셨던 사슴 스테이크입니다."


".....구하기 힘들다면서요?"


"아... 그게....."




점심부터 저녁까지.


채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만에

상에는 그녀가 원하던 메뉴가 올라왔다.


너무나도 이상했다.


평생 한번도 식단에 올라온적 없는 음식이

하필 오늘, 이 타이밍에 등장한다?


그녀의 직감이 어서 진실을 알아내라고 소리쳤다.




"말해보세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죄송합니다."




날선 눈빛으로 주방장을 추궁해보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어색함이 가득한 목례와 함께 

재빠르게 그녀의 방을 빠져나갔다.


대답을 망설이는 모습에 오히려 더 이상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물음에 허둥지둥하는 눈치를 보니 

적어도 주방장은 무언가 알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런데 굳이 숨길게 있나?


이제 방에 남아있는 건 그녀와 시녀 두 명 뿐.


혹시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옆에서 대기 중인 그녀를 바라보니. 


그럼 그렇지.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안달인 것처럼 열심히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혹시 아는거 있어?"


"아....이거 비밀인데..."


"빨리 말해."




그녀를 애태우는 듯 한참 망설이던 시녀는 

그녀가 쏘아붙이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그...기사님이..."




기사?




"아이고, 이거 절대 말하지 말랬는데."




말하지 말라고?




"오호호.....그럼 전 이만...."




기사?

무슨 기사?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자신에게 이런 선물을 할 기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던 사람도 쫓아내기 바쁜데.

과연 누가 그녀를 신경쓰겠는가.




"잠깐!...."




시녀에게 미처 해소되지 못한 질문을 던지려 목소리를 높혔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말을 모두 마친 시녀는 

자신은 모든 역할을 다 했다는 듯이 

능청스러운 웃음을 남긴 채 사라진 상태였다.


다른 황족이었다면 잡아서 경을 치렀을 일이었지만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사슴고기와 기사에 대한 것들로 가득차

다른 것들이 들어올 틈조차 없었다.




"설마 그 사람이 보냈다고?"




도대체 왜?

아니, 그 전에 사슴고기 먹고 싶었는지 어떻게 알고?

말하지 말라는건 또 뭐고?


궁금증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들은 아마 저들도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


제대로 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한명밖에 없었다.




"시녀!......호위기사를 불러줘."


"네~"




그녀를 놀리려는 까닭일까.


방금전 허공을 맴돌던 외침이 무색하게

이번엔 즉각적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흠.....”




호위기사 없이 지낸지 몇달이나 지났지만

누구를 의미하는지 되묻지 않는걸 보니 

역시 자신이 생각하던 그 사람임이 확실했다.


기사를 부르러 복도를 뛰어나가는 

쾌활하기 그지없는 시녀의 발걸음과는 반대로.


복잡하게 뒤얽히는 머릿속 실뭉치들은 

억지로 쥐어뜯어봤지만 풀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남자.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 전하."




늦은 저녁.


한참 집에서 쉬고 있을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사냥할 때나 입는 가벼운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신경써서 털어냈음에도 곳곳에 흙먼지가 묻어 있는 모습.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잡기위해 분투했다는 것을 

사냥에 조예가 없는 그녀라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




몇 개월 만에 보는 얼굴임에도 

그것 외에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기껏해봐야 표정 정도.


짐짓 차갑게 느껴지는 그의 무표정은 

마치 깨어진 가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너무도 어색했다.


그 사이, 무언가 빠진 듯 허전한 공간 속에서

숨기지 못한 반가움이 새어나왔다.


아무리 아닌 척 해도 타고난 연기자인 그녀를 속일 수는 없었다.




"왜 부르셨는지요."




그의 떨리는 목소리에 전염된 듯

그녀의 머릿속도 더욱 어지러워졌다.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자신을 미워해야 하는게 맞는데.


왜 그런 감정이 보이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은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

그녀가 반가워서 그도 반가워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고르고 골라서 겨우 선택한 질문.


그를 냉혹하게 쫓아낼 때와 똑같은 것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정 반대였다.




"고기는 왜 보낸거야?"


".....아니, 그 전에, 이야기는 어떻게 들은거야?"


"아니, 아니...."




그냥 갑자기 목이 막혀왔다.


왜 나를 이렇게 챙겨주는거야?

난 너를 그렇게 미워했는데?

설마 그 시간동안 늘 나를 생각했던 건 아니지?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쳤지만 

그 이상 단 한마디도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었지.


괜찮다고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감내했을 억울함들이 떠올라 

눈물이 방울방울 새어나왔다. 


후들거리던 다리에 결국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울고 있으니

그가 다가와 안아주었다.


바다처럼 한량없이 자비로운 그의 품 속.


수많은 감정들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처음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뭐라 한 단어로 정의 내리기 힘든,

생에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


그런 감정이 쏟아져내렸다


인간을 믿지 말라는 무의식의 외침은

더 이상 그녀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그를 믿어도 될까?


그냥 믿고 싶었다.

더 이상 혼자서 외롭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필요했다.

사람이 필요했다.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온기를 나눠줄 누군가를 원했다.


여태까지 손에 넣지 못해 외면해왔던 것들이 

처음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 그 본능이

자신도 타인의 따스함을 받을 자격이 있다며 속삭였다.


그녀는 빌었다.


이번만큼은 자신의 판단이 맞기를.


더 이상 배신당하는 일이 없기를.




"혹시.....기회가 남아있다면..."


"네."


"......다시 한번 내 호위기사가 되어줘."




떨리는 손등 위로




"기꺼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의 따듯한 목소리가 덮어왔다.



처음으로 인간의 따스한 온기를 느낀 날.



다 식은 사슴고기의 맛은 최고였다.































"전하, 식사시간입니다."


"싫어."




그와의 재회 후에도

눈에 띄는 변화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끼니는 챙기셔야지요."


"입맛 없다고."


"또 제가 떠나야 말을 들으실 겁니까?"


"야!!"


"농담입니다."




단지 달라진 점이라면

말로는 투닥대면서도 

정작 시키는 건 다 하는 그녀의 태도일까.




"하루종일 앉아만 계시면 병이 납니다."


"17년 동안 앉아만 있었어도 병 안났어."


"식사를 하실땐 꼭꼭 씹어 드셔야지요."


"이정도면 충분히 씹은거지, 뭘 그래."


"가끔씩은 파티에도 나가서 다른 귀족들과 교류하는걸 추천드립니다."


"너는 꼭 내가 꼽 당하는 꼴을 봐야겠어?"




아니면 말끝마다 틱틱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일까.


뭐가 맞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늘 얼음장 같던 그녀의 얼굴에도

그의 것처럼 은은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으니.


봄이 오면 눈이 녹듯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도 

남자의 따스함에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한번 녹아내린 감정의 곡류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여느 때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날들.


그런 날들 중에서도 또 어떤 날은 특별하기 마련이었고,

오늘이 바로 그 특별한 날이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대충 휘갈겨 쓴 쪽지를 내려놓고는

호위기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방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후덥지근한 공기가 느껴졌다.


여름과 점심시간.


두 단어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마성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근처엔 사람의 흔적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주위를 확인한 그녀는

짙은 갈색 망토를 뒤집어쓰고는 

조심스럽게 황궁의 뒷문으로 향했다.


성벽 사이 감춰진 통로는

뒷문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붙이기엔

시종들이나 지나다니는 작은 쪽문이었지만,


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손에 꼽히는 엘리트라는 걸 증명하듯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순식간에 취한 부동자세.


조막만한 덩치 때문일까.


깊게 눌러쓴 망토에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건만

이미 그녀의 정체를 눈치챈 듯 보였다.




"........."




그녀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익숙한 듯 별말 없이 쪽문를 열어주었다.


그 사이를 지나가는 꿇릴 것 없다는 당당한 발걸음.


그녀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천천히 열리는 철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눈부신 빛줄기에

감옥에서 출소하는 죄수들의 기분이 이해되는 듯 했다.




“읏차....!”




황녀는 한 발짝 크게 내디뎌 황궁을 벗어났다.


안과 밖.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지만

그 공간이 주는 분위기의 차이는 차원이 달랐다.


창공을 가르는 자유로움.


이것을 위해서 밖으로 나온 것이리라.


이 느낌은 매번 경험했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덥고 갑갑했던 망토를 벗어던졌다.




"어디 가십니까?"


"아이씨, 깜짝이야!"


"언행의 품위를 지키시라 말씀 드렸었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뜻밖의 목소리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녀는 겁이 없는 편이었지만

없어야 할 사람의 등장은 그녀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디 가시는지 비밀로 하실 작정이십니까?"


"아니, 왜 따라오냐고!"


"제가 안가면 누가 따라갑니까."




일년에 세네번.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황궁을 벗어나 거리로 향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여태까지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거라 생각해 몰래 궁을 빠져나왔으나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하나도 안 위험하니까, 돌아가."


"저 아직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전혀 위험한거 아니니까 돌아가라고."


"그렇게까지 말 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겪어본 상황.


하지만 더 이상 말뿐인 확언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팔짱을 끼고 한참을 째려봤다.


역시나 그는 돌아가지 않고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을뿐이었다.




".....왜 안가?"


"저도 오랜만에 바깥 구경이나 하렵니다."




말만 저렇게 하고 끝까지 뒤쫓아오겠지.


속셈이 너무도 뻔했다.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훈계질을 해댈지

상상만 해도 벌써부터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


"걱정 마십시오 전하. 보호자 역할 대신, 지인으로서 동행하겠습니다."




그거나 그거나 다를 바 없었지만

적어도 잔소리는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리라.


만약 그래도 잔소리를 해댄다면 그걸 핑계로 

어떻게 돌려보낼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있었다.




"그래....가자...."




반쯤 포기한 채 

그녀는 수도의 뒷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보호자 아니라며?"

 

"그럼 전하는 전하의 친우에게 이곳을 지나가라 할 수 있겠습니까?"




길가의 곳곳엔 쓰레기 더미들과 

그 사이를 뒤지는 거지들

그리고 죽은 듯 자고있는 노숙자들로 가득했다.


제국의 어두운 부분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장면에

이번엔 그녀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극하지만 않으면 돼."




정말로 그렇게 믿었던 건지

그녀의 발걸음은 보무도 당당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그들을 힐끗 쳐다보는 무수한 시선들.


하지만 스캔을 마친 그들은 이내 관심을 껐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


어떤 이유건, 이런 곳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엔 

잘못 건드렸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부류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도 생각이 있었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에겐 왠만하면 손을 대지 않았다.




남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은 그냥 보통 귀족이 아니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


곧 세계의 패권을 손에 쥘 존재.


자신의 자리를 자각하지 못하는 그녀의 행동에 

안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욱 아파왔다.


적국의 암살자 한 명 잘못 만났다가는 

그대로 인생을 하직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였지만

그녀 나름대로의 경험에서 편향된 결론을 내려버린 것 같았다.


이내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로 빠져나온 그들은 잠시 숨을 돌렸다.




"봐봐, 내가 안전하다고 했지?"


"......이 건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내젓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듣기 싫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그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넌 이런데 한번도 안 와봤지?"

"너희같은 귀족 샌님들은 이런 '스트릿'을 잘 모른다니까."




그녀는 갑갑한 그의 속도 모르는 듯

걱정어린 남자의 시선에 오히려 우습다는 눈초리를 보냈다.


평소엔 볼 수 없을 정도로 텐션이 오른 걸 보니 

이번 일탈은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것일 터.


쓴 웃음을 억지로 참아낸 그는

오늘만큼은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다짐했다.




"네, 다음번에 올 땐 지금보다 더 잘 알아오겠습니다."


"하, 이건 하루 이틀로 알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기사보다 잘 아는게 생겨서 신이 났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으쓱거렸다.




"기분이다, 내가 가이드 좀 해줄게."




물론 황녀의 홈그라운드인 제국 수도조차도

그녀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터였지만

굳이 오랜만에 신난 그녀의 기분을 다운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가이드는 

생각보다 별 볼일 없었다.


그저 이곳저곳 구경하며 쏘아다니는 것 뿐.


어찌보면 당연했다.


꼬맹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을 테니.


이대로라면 하루종일 걷기만 할 것 같은 예감에 

남자는 하는 수 없이 대책없이 돌아다니던 그녀를 대신해 바톤을 이어받았다.




"전하, 혹시 구름빵이라고 아십니까?"


"오, 샌님이 그걸 어떻게 알고있어?"


"저도 소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샌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듣는 샌님 불편합니다."




오랜만에 놀릴 건수를 찾았다는 표정.


안 그래도 요새 틱틱거리며 그의 속을 긁어대기 바쁜데

제대로 찔러댈 무기를 쥐어준 셈이었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예상되는 미래에

앞으로 당할 일들을 생각하니 또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그게 왜?"


"명물이라면 한번 먹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돈 없는데?"




어색한 태도와 표정을 보아하니 

여태까지 한 번도 돈을 들고 나와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말 만하면 모든게 대령되는 환경에서 

돈이 필요할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몰래 나오는데 돈을 달라고 하기도 그랬을 것이고,

외면받는 황녀에겐 금전적 지원을 요청할 마땅한 가족도 없었다.




".....돈은 제가 있습니다."


"오! 왠일이야!"


"쓸모있어서 놀랐다는 그 표정은 뭡니까."




이내 내밀어지는 손.




"뭐 필요한거 있으십니까?"


"아니! 돈 달라고!"




남자가 가만히 앙증맞은 손을 들여다보기만 하자

그녀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돈은 왜 필요하십니까?"


"아니, 샌님아.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지. 몰라?"


"......제가 내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뭔가 말 못할 그런게 있는 듯 했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그에겐 그녀가 뭘 생각하는지 다 보였다.


아마 지금 그에게서 돈을 받아내

다음에 이곳에 올 때 자유롭게 쓰겠다는 것이겠지.


열받아 죽겠다는 표정을 보니 뻔했다.




"혹시 돈이 필요하신 거라면, 원하시는 대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 진짜?!"


"다만 늘 제가 함께할 것이니 굳이 힘들게 가지고 다니실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




잔뜩 뿔이난 표정을 보니 정곡을 찔린 듯 했다.




"....혹시 구름빵 판매점 위치를 모르시는건 아니겠지요?"


"알아! 안다고!"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


그녀같은 아이들을 다루는 건 그의 전문분야였다.


경험상 조금만 더 있었으면 진심으로 삐졌을 테고

즐거웠을 하루를 자신 때문에 망치는 일은 

그 자신이 약속했던 일을 어기는 것이었다. 


보호자 대신 지인으로서 동행하겠다는 약속.


그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럼,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맘에 안 든다며 씩씩대며 걷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가이드 역할은 제대로 하겠다는 듯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렇게 앞서가는 그녀를 뒤쫓아 주변을 경계하며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점점 진해지는 달콤한 향기.


도착하기 한참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부터 풍겨오는 특유의 입맛 당기는 향은

이것을 왜 명물이라 칭하는지 알만했다.


그녀의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에 눈치를 보니

방금 전의 짜증은 어디갔냐는 듯 잔뜩 기대에 차 있었다. 


그 모습에 그는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생각보다 맛없었을 텐데.


실망하지 말라고 언질을 줄까 말까 고민하다 도착한 노점상.




"맛은 괜찮으십니까?"


"응! 맛있어!"




다행히 그녀의 취향엔 딱 들어맞았는지

달달한 구름빵 한 조각을 베어먹고 난 그녀는 

금새 기분이 풀린 듯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시금 올라온 텐션.


즐거운 하루의 첫단추로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때 멀리서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혹시 시장하시진 않으십니까?"


"아니, 또 밥 타령이야?"


"체력은 국력입니다. 끼니는 챙기셔야합니다."


"어우! 그 말 좀 그만하면 안돼?"


"막상 듣지 못하면 허전하실겁니다?"


"안 허전하다고! 제발!"




여태까지 꾹 참아두었던 잔소리들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다시한번 그녀와 했던 약속을 되뇌었다.


이번에 그의 역할은 잔소리꾼이 아니라 친구였다.


더 이상 했다간 정말로 이대로 돌려보낼지도 몰랐다.




"제가 맛집 한군데 알고 있습니다."


"니가? 어떻게 알아?"


“......옛날에 동료기사가 소개해주었습니다."




자신에 대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아마 친구도 없고, 이런 종류의 경험도 일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식의 오해는 익숙했다.


하지만 비밀은 지켜져야 하는법.


다시 말하지만, 그에게 동심을 깨트리는 취미 같은건 없었다.




"역시, 그럼 그렇지."


"......."


"어? 지금 화났어?"


"....화 안났습니다."


"에이~ 화났네!"


"......어서 출발하시죠."


"화났대요~ 화났대요~"




어쩔땐 동심이 깨져도 괜찮은 것 아닌가 싶어졌지만

겨우 머리를 내저으며 불손한 생각을 지워냈다.


대신 그는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곳의 지리에 집중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그 식당은 똑같은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었다.


최고의 맛은 아니지만 적당한 가성비에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도 많았으니.


그렇게 머릿속의 지도를 따라 걷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목적지가 나타났다.




"뭐야! 여기 술집이잖아!"


"식사도 팝니다."


"아니, 술집이면 그런거잖아!"

"막! 남자 여자 섞여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 

필사적으로 저항을 하는 황녀.




"그렇고 그런짓이 뭔지 모르겠지만, 여기선 주로 밥을 먹습니다."


"아니! 책에서....!"


"....책?"


"헙!"


"혹시 책에서 읽으신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아니. 저기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문책 당할거라고, 문책!"


 


귀족 샌님은 모르는 이야기라느니

하루 이틀 만에 되는게 아니라느니

그토록 자랑을 늘어놓았었는데.


자신의 것과는 일 만 광년쯤 떨어져 있는 이야기에

점점 그녀가 경험한 '스트릿' 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제가 언제 황녀님께 피해가 갈 일을 한 적이 있습니까?"


"......."


"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나오면 됩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




그녀 특유의 쓸데없는 똥고집이 발동했다.


한번 시작되면 좀처럼 멈추지 않는 말꼬리 잡기.

수도 없이 경험해봐서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점심시간이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하는 수 없었다.


이런식의 방법은 쓰지 않으려 했건만.




"혹시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저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뭐...?"


"제가 읽은 책들은 실제 세상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습니다."

"황녀님은 그 중 뭐가 맞고 뭐가 틀렸는지 알고 싶으시지 않으십니까?"




세계의 진실.

자신만 모르는 공공연한 비밀.


음모론자들이 환장할만한 키워드들로 

현란하게 세치혀를 놀렸다.


비록 그런것에 관심을 가지진 않았겠지만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그녀가 침을 꼴딱 삼켰다.



 

"저도 공범이 될 테니, 비밀유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




혹하고 구미가 당기는 표정

이때를 놓치면 안된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 어! 같이가!"




더 이상 망설일 틈도 주지 않고 

등 떠밀듯 식당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삐걱거리는 마루에 올라서자

과거로 돌아온 듯 익숙한 정취가 그를 반겼다.


그 시절과 같은 인테리어와 장식품들 

낡은 테이블까지 하나도 바뀐게 없었다.


하지만 추억에 흠뻑 젖어 감격스러워하는 그와는 반대로 

그녀는 다양한 음식냄새들과 소음들에 겁을 먹었는지

주변에서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작게 몸을 떨었다. 




"앉으시지요."




의자를 뒤로 빼 앉기 쉽게 만들어주었지만

그녀는 눈만 데룩데룩 굴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불안한 모양일까.


자신의 호위기사가 엉덩이를 붙이기 전까지 절대 앉지 않겠다는 태도에

매너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언제까지 고집을 부릴까 궁금해 빤히 쳐다보니 

멋쩍다는 듯 슬쩍 착석하는 황녀.




"뭘로 드실렵니까? 참고로 점심특선이 제일 유명합니다."


"그럼.....그걸로....."




북적거리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그녀는 개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여기 점특 둘!"


"네~!"




그의 주문에 곧바로 점원이 주방장에게 오더를 넣었다.


이내 시끄럽게 돌아가는 주방의 소리들.


그것들마저도 그에겐 추억이었다.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감내할 소중한 순간들.




"직접 들어와 보신 기분이 어떠신가요?"


"어....음,...."


"여긴 그저 밥과 술을 먹으러 오는 곳일 뿐입니다."


"응....."




아마 그녀가 생각한 '그런 짓'을 하는 술집은 따로 있을 것이었지만

밥 먹기 전에 할 이야기로는 많이 부적절했고

또 아직은 순수한 그녀가 알기엔 조금 이른 듯 했다.




".....그런데 왜 술집인데 술을 안마셔?"


"아, 원하신다면 시켜드리겠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안 먹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식사와 함께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무리 찾아봐도 포도주는 안보이는데?"




설마 맥주를 모르는건가?


아무리 궁에 갇혀지내는 황족이라고 하더라도 

그녀는 올해로 17살이었다.


알건 다 알 나이.


아무리 서민들만 마시는 주류라고는 해도

이 정도는 알고 있을 법 했다.


혹시 자신을 놀리는 것 아닌가 의심했지만

눈치를 보니 정말로 모르는 듯 보였다.




"여기서 주로 파는건 맥주 입니다."

"싼값에 백성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이지요."


"아, 알지! 맥주!"


"한번 드셔보시렵니까?"


"응...."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주문을 외치자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금방 맥주 두 잔이 나왔다.


종업원의 투박한 손길에 묵직한 유리잔이

테이블 위로 거칠게 놓여지며 보글보글 탄산이 빠져나왔다.


여름에도 서늘한 지하에 보관해 

딱 마시기 좋게 시원한 정도의 온도에

잔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신기한 듯 요리조리 살펴보던 그녀는 

두 손으로 맥주를 들어 살짝 입에 머금었다.




"으....이거 맛이 왜이래?"




황금빛 기포와 하얀색 크림의 절묘한 조화.


부족한 냉장보관 기술 때문에

제국의 수도인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좋은 품질의 맥주였지만.


고급 포도주만 마시던 그녀에겐 생소한 맛일 것이었다.




"많이 마시다 보면 적응됩니다."


"샌님, 술도 마실 줄 알아?"


"당연히 저도 술 마십니다."


"왜? 입에도 안댈 것처럼 생겼는데?"




그는 술을 사랑했다.


술자리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마시는 

술을 사랑했다.




"그런데 제가 왜 샌님입니까."


"음....샌님처럼 생겼으니까?"


"샌님처럼 생긴건 또 뭡니까."




그는 곱상한 귀공자 스타일.

그녀의 말대로 그의 외모는 음주가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기사사관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다.


잘생겼지만 딱 봐도 재미없을 것 같아 

아무도 가까워지려 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


그런 존재가 바로 그였다.


물론 정작 친해지면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다들 놀라지만.




"무슨 생각해?"


"아, 죄송합니다."




불현듯 떠오른 과거의 추억에 심취했는지

눈앞에 레이디를 놔두고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버렸다.


싫다는 걸 억지로 데려와놓고 제대로 신경 쓰지도 못하다니

결례도 이런 결례가 없었다.


오늘은 그녀를 위한 날이니 

최대한 쓸데없는 상념을 지워내야 했다.




"식사 나왔습니다~"




마침 주문했던 음식이 도착했다.


적절하게 구워진 소세지와 계란프라이,

그리고 부드러운 흰 빵과 따뜻한 옥수수 스프.


그에겐 특식이라기 보단 평범한 아침 식사였지만

주변에 앉아있는 평범한 서민 기준으로는 

이것도 충분히 특별한 식사가 맞았다.




"오....."


"신기하십니까?"


"내 식사랑 별 다를건 없네?"


"그건 황녀님이 제대로 안 챙겨드셔서 그런겁니다."




분명 황족인 그녀로서는 훨씬 좋은 음식들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만 보던 그녀는 

적은 운동량으로 인해 주어진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체격도 동년배의 소녀들보다 훨씬 작았다.


물려받은 아름다움이 빛바랠 정도의 영양부족.


아직 젊음의 힘으로 버티고 있긴 하나

20대로 넘어가 성장이 끝난다면 

온종일 잔병치레로 고생할게 눈에 뻔했다.




".....입맛은 맞으십니까?"




그렇기에 적어도 먹는 것만은 

원하는 걸 모두 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세심하게 챙겨도 습관은 바뀌지 않는지

그녀의 소식(小食)은 여전했다.


당장 지금도 깨작거리는 포크질을 보니

이게 고칠 수 있는게 맞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뭐, 나쁘지 않네."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나쁘지 않다고했지 괜찮다고는 안했거든?"




그가 책임지고 챙겨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무슨 말을 꺼낼때마다 틱틱대는게  

꼭 말 안듣는 조카나 사촌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런 존재가 실제로 있진 않았지만 

만약 태어난다면 이쯤 되겠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분위기는 좋네."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멋대로 떠드는 사람들.


자신이 황녀인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소녀인지

그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점점 차오르는 편안함.


늘 목을 옥죄던 굴레를 처음으로 벗어던진 느낌이었다.


궁에서는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없었어도 갑갑했는데

오히려 시끌벅적한 군중 속에 있는 지금이 더 자유로웠다.


느껴지는 이율배반적인 감각에서 

그녀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흠....."




고민에 대한 실마리는 잡혔지만

이보다 더욱 정답에 가까이 가려면 

몇 시간이고 더 걸릴 것이었다.


다만 오늘은 특별한 날.


고민을 해결하며 하루를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이미 손에 쥔 힌트는 사라지지 않지만

흐르는 시간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잠시 미뤄둔 고민 대신

두 손으로 잡아든 맥주잔.




"크~!"




목젖을 치는 탄산의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고통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금씩 맛볼 땐 몰랐는데

한 번에 들이마시니 생각보다 목이 따가웠다.


고민의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맥주는 아직도 기포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아마 그게 고통의 주 원인일 것이다.


반쯤 남은 맥주를 노려보며 잔뜩 찡그리고 있었더니 

기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왜 웃냐고 잔뜩 쪼아댔을 것이었다.


다만 지금의 그녀는 이 상황조차 즐거웠기에 

넓은 아량을 베풀어 아무말 없이 넘어가주었다.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사라진 식탁 위 음식들.


그들은 값을 치르고 술집을 빠져나왔다.




"휴...."


".....덥지 않으십니까?"




서늘했던 건물 내부를 벗어나자

그들의 위로 여름의 뜨거운 햇빛이 작렬했다.

 

현재 시간은 대충 1시.


하필 더워도 제일 더울 때였다.


황녀는 폭염에 대비해 얇은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연약한 그녀의 육체로는 이 날씨를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걸어다니다가 열사병이라도 걸리면

보호자인 자신만 피곤해진다.




"혹시 돌아가실 생각은...."


"없어."




딱 잘라 말하는 태도를 보니

이번에도 자신이 한 수 접어주어야 했다.


그녀의 잔뜩 기대에 찬 눈빛은 

어떻게든 즐거움을 찾겠다는 강렬한 의지이리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가 오늘 하루 즐겁게 해주지 못한다면

다음번에 그 핑계를 대며 따라오지 말라 주장할 것이 뻔했다. 


그는 다시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재미는 몰라도

최소한 기억에 남는 하루를 선물하기를.




"오늘은 시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조금 전에 지나가다 봤습니다."




이젠 변명을 생각해내기도 힘들었다.


이제 와서 10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면

절대로 믿어주지 않겠지.




"그럼 구경좀 해볼까?"


"시장 거리는 저쪽 건너편에 있습니다."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 매대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뒤덮고 있는 검은 천들과

검은 천들 아래 생긴 시원한 그늘.


그게 바로 그가 시장을 목적지로 정한 이유였다.




"어우, 이제 좀 살거같네."




태양을 피해 허겁지겁 그늘 속으로 뛰어들어간 걸 보니

역시나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많이 더웠던 듯 했다.


하지만 고작 3분도 안되는 시간동안 걸었다고

이정도의 반응이라니.


그는 머릿속에 정리해두었던 계획의 절반을

뭉텅이로 지워버렸다.




"뭐 관심가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이리저리 구경하는 걸 따라 천천히 걷자

익숙한 물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간단한 과일부터 싸구려 장신구까지.


이곳이 바로 제국의 수도라는 듯

전국에서 공수해온 갖가지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침착한 그와는 반대로 그녀는 신기함에 눈을 뗄 줄 몰랐다.




"이거 한번 써봐."


"......."




이리 저리 구경다니다 도착한 모자 매대.


황녀는 그의 기사에게 허리를 숙이라 명하고는

여러 가지 모자를 씌워 보았다.




"음....아니야...."

"이것도 아니고...."




관심가는 대로 착용시켜보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게 없었는지 실망한 눈치였다.


사실 그에게는 왠만한 것 아니면 다 어울렸다.


원체 본판이 좋았으니 뭘 씌워도 실패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거다!"


".......전하?"




하지만 그녀는 뭔가 불만이 있었는지

한참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더니

기어코 구석에서 강아지 인형 모자를 찾아내 그에게 씌웠다.




"봐봐! 잘 어울리지?"




착용 모습을 보라며 건네진 거울,


그곳에 비친 귀여운 자신의 모습에

그의 얼굴이 가차없이 찡그려졌다.




"푸훗! 표정이 왜그래!"


"시커먼 남정네가 이런거 쓰고 있는게 좋으십니까?"


"응, 너무 좋아~"




굉장히 보기 드문 그녀의 칭찬에도 

그는 방금 전에 먹은 점심이 올라오려 했는지

얼른 모자를 벗어버렸다.


그래, 한번 착용해보기만 하겠지. 

하는 그의 생각을 비웃듯


곧이어 들려오는 청천병력같은 소리.




"아저씨, 이거 얼마에요?"


"전 품목, 단돈 2실버에 드리고 있습니다!"




조금 전 두 명의 식비의 합인 1실버의 2배.


평민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물건 치고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대답을 들은 그녀는 뭐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아...."




지갑을 뒤져 내민 은빛 동전 두 개.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새기며

강아지 모자를 건네받았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그가 구두쇠는 아니었지만

모자의 눈동자 위치에 박힌 똘망한 검은 구슬을 바라보니 

지불한 돈이 너무도 아까워졌다.


하지만 그가 참아야 그녀가 즐거워진다.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내 쉰 그는

안주머니를 뒤져 곱게 접힌 간이 가죽가방을 꺼냈다.

 

이내 곱게 가방으로 들어간 강아지 모자.


꼴도 보기 싫은 그것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마음이 편안해졌지만 

그녀는 생각은 다른 듯 했다.




"빨리 써, 뭐해."


"싫습니다."


"돈 안아까워?"


"아까워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럼 쓰면 되잖아."


"그건 죽어도 싫습니다."




그의 격렬한 반응에 흥미롭다는 듯

그녀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흐음.....알았다."


".....혹시 뭘 아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일단 따라와 봐."




묘한 미소를 짓는게 불길하기 그지없었지만.


마음에 담아둔 곳이 있었는지

거침없는 나아가는 발걸음.


그로서는 조용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걷자 

그녀는 곧 어떤 가게 앞에 멈춰섰다.




"이게....뭡니까?"


"보면 몰라? 디저트 카페잖아."


"그걸 몰라서 여쭤보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도착한 곳은 핑크색으로 도배된 디저트 전문점.


주요 판매층이 여성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던 그곳은

기사인 그에겐 심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한평생 그런 것들과는 동떨어져 살아왔기 때문일까.


기사 이전에 인간로서도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반응을 노렸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엔 방금 전과 같은 묘한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자~ 드가자~"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그녀에게 붙잡히듯 끌려가고 나서야 

그 안으로 발을 옮길 수 있었다.


분홍분홍한 소품들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들.


자리에 앉은 그는 

자신이 그 곳에 있는게 수치스러웠는지

눈을 감고 부들거리는 주먹을 쥐고 있었다.




"저기 여자애들이 너 쳐다본다."


"윽......."


"이젠 수군거리기까지 하는데?"




화사한 기사의 등장에 그들에게 관심이 쏠렸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창피함에 붉어진 남자의 얼굴을 보며

키득거리던 황녀.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걸기 전까지

한동안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림이라도 남겨두고 싶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오....."




술집에서의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놀려대는 그녀에게

결국 남자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냥 싫습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왜 자신이 귀여운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가.


쉽게 말해 내성이 없어서였다.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기사단에서는

굉장히 마초스러운 훈련만 존재했다.


검술훈련, 육체단련 같은 것들.


그런 풍조 때문인지 함께했던 여성기사들 조차 

귀여운 동물을 봐도 잘 표현하지 못했다.


귀여움에 친근한 여자들도 그럴진대 

남자기사에게 귀여움을 가까이 하는 것은

여태까지 쌓아온 프라이드를 내다버리는 짓이었다.


그 사람들 중 하나로써 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 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낼 자신이 없어

간단하게 일축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잘 어울리는데 왜."


"저는 그런 아녀자스러운 취미는 없습니다...."




기사의 떫은 표정에

그녀는 왠지 그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늘 완벽해보이기만 하던 그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다니.


한참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후폭풍이 두려워 이제 그만 장난치기로 했다.


여기서 더 했다간 황궁으로 돌아갔을 때

얼마나 잔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수많은 메뉴들 중 그를 용서해주듯 

겨우 디저트 하나만 해치운 그녀는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진이 다 빠진 채 터덜대던 그의 걸음걸이를 보니

피로가 많이 쌓인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육체가 아닌 정신적인 피곤함.

 

눈앞의 꼬맹이 황녀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줄 알았다.




"이제 어디로 가시렵니까....."


"발길 가는데로 가야지."


"위험한 곳은 안됩니다."


"가고 싶다고 하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잔뜩 찡그려지는 남자의 인상

그녀는 그걸 볼 때마다 기분이 즐거워졌다.


유독 찰진 그의 반응 때문이었는지 

도저히 놀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이렇게도 재미있는 것이었나.


이런 샌님하고 함께하는데도 이정도면

진짜 친구를 사귀게 되면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을까.


부족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니

뭔가 씁쓸해지는 기분이었다.




".....구경이나 계속 하자."


 


그녀는 다운된 기분을 환기시키려 무작정 걸었다.


어느덧 훨씬 시원해진 날씨.


디저트를 먹는 동안 꽤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는 없었던 곳 까지 

매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벌써부터 야시장을 준비하는 듯 

거리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바글거렸고.


쾌활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우울했던 기분도 점점 옅어졌다.




"이건 어때?"




그녀는 이리저리 둘러보다 관심 가는 곳으로 향했다.


싸구려 치장품들과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들.


그녀도 황녀이기 이전에 여자라는 듯

17년의 삶이 무색하게 아이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어울려?"


"......"




초록색 옥석으로 된 팔찌를 착용한 황녀는

그의 눈앞에 팔목을 들이밀었다.




"어울리냐고!"


".....네"




분명 보고있긴 했는데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예쁘지 않은건지 그의 취향이 아닌건지.


그 짧막한 리액션으로는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무슨 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동그랗네요."


"감상이 왜 이래."




딴청을 피우며 어떻게든 넘어가보려 했지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질문과 불만족스러운 말투에

그는 할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세상 만물의 지배자이시자 고귀하신 황녀님께 세상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라도 비할 바가 있겠습니까."




황녀로서 수없이 들어온 진부한 이야기.


간신들의 입에서나 나올법한 말을 직접 들으니

왠지 모르게 속이 거북해졌다.




"그래서 예뻐?"

 

"제가 어떻게 감히 평가를 하겠습니까."


"내가 괜찮다니까?"


"제가 안괜찮습니다."


"그래서 예쁘냐고 안예쁘냐고!"




그녀의 닦달에서 벗어날 말을 찾는지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는지

 

꽤나 오랫동안 망설이던 그는

한참을 더 고민하다 툭 말을 던졌다.




"아름다우십니다."




팔찌가 아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강렬한 눈빛.


당황스러움에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




"어.....좋아."




그녀는 어색해진 상황을 타개하려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비록 그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그녀의 본심이 나온게 아닐까.




"전하, 왜 그리 타인의 평가에 집착하십니까."

"다른 사람의 말 따위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지금 상황에 그게 할 말이야?"




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심장 안쪽을 간질이던

오묘했던 무드는 완전히 박살났다.


순식간에 변해버린 분위기에 화딱지가 올라왔다.


잠시 설렘을 만끽할 시간을 주었어도 되었을 텐데.


눈치 없는 행동에 그를 원망했지만 

그 말을 한 기사의 뺨도 살짝 상기되어 있었음을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그녀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이정도 잔소리는 지인들끼리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넌 사회성부터 길러!"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화가 난 그녀는 씩씩대며 앞으로 걸어갔다.




"오른쪽을 추천드립니다."


"니가 뭘 안다고!"


"그쪽에 군것질거리를 팝니다."




반발심에 왼쪽으로 가려던 몸뚱이가

이어지는 말에 저절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너 지금 나 돼지같다고 생각했지."


"전 절대로 전하를 식탐만 많고 성깔있는 돼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야!!"

  

"화 푸십시오, 전하는 식탐만 많고 성깔있는 돼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진짜 너 죽을래?!"




실제로 식탐도 없고 돼지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양심이 찔렸다.


비록 그의 것이었지만 돈도 생기고,

호위 기사도 안전하게 곁을 지켜주자

심리적인 리미트가 풀렸는지

오늘따라 먹고 싶은 게 많았다.




"여긴 닭꼬치가 맛있다고 합니다."


"....또 그 동료 기사야?"


"이번엔 부하 기사입니다."


"다른 레파토리는 없어?"


"아쉽게도 1번 기사부터 8번 기사까지 남아있습니다."


"너 나 놀리는거지?"


"이제야 깨달으셨습니까?"


"아오....이걸 그냥...!"




한참 쌓여만 가던 그녀의 분노는

짭잘한 소스가 얹힌 닭꼬치 세 개와 

새콤달콤한 과일주스 한잔으로 깔끔히 사라졌다.


평소에 먹던 한 끼 식사 정도의 양.


비록 그의 기준에서는 영양이 부족한 불량식품들이었지만

이렇게 잘 먹어주기만 한다면

가끔씩은 밖으로 나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흐흥~"




티격대다 보니 한결 편안해진 공기.


누군가의 슈퍼 세이브에 

어색해질 뻔 했던 분위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속으로 안심의 한숨을 쉰 그는


두 손 가득 먹을 걸 들고

행복한 미소를 짓던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곧 해 질 시간입니다."


"응 안돌아가~"


"....노을 구경하기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올 타이밍이었는데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듯 뜻밖의 말이 나왔다.


좋은 의미의 뒷통수.


동그랗게 커진 동공으로 돌아보는 그녀에게 

기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번엔 몇 번 기사가 말해준건데."


"한 4번 쯤으로 하지요."


"진짜 있는거 맞아?"


"비밀입니다."


"역시.....샌님이 친구가 있을 리가."




아직까지 그에 대해서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 했지만

외로운 존재에겐 함께 걸어갈 동료가 필요한 법이었다.


먼 길 가는데 잠깐 제 한 몸 희생해 

의지할 지팡이 되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진실은 그녀가 정상적인 삶을 손에 쥐고 나서.


그때 밝혀도 늦지 않았다.




"어서 출발하시죠, 조금 걸립니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들뜬 그녀에겐

남자의 부드러운 미소가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야트막한 동산 위로 올라갔다.


평야 가득 지어진 건물들 사이

유일하게 초목을 볼 수 있는 곳.


그 사이 사람들이 걸어다닌 흔적을 따라 

자연스럽게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초저녁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얼마 걷지도 않았음에도 거친 숨을 내쉬던 그녀는 

어느새 소중하게 품고있던 음식들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땅만 보며 걸을 뿐이었다.




"헤엑....얼마나...헤엑...걸려...?"


"거의 다 왔습니다."


"그...말만.....헤엑...."




몇 번이나 한 말이지만 어쩌겠는가.

정말 거의 다 도착했는데.


다만 그 기준이 그녀가 아닐 뿐이었다.


왕년에 자주 등산을 할 때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매번 당했던 것이었는데

이걸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후들거리는 다리를 팔로 누르며

어떻게든 올라가려는 발버둥에 

힘내라며 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완봉을 축하드립니다."




30분간의 사투 끝에 도착한 언덕의 꼭대기.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이었지만

그녀는 풍경을 감상할 새도 없이

투박한 나무벤치에 쓰러지듯 앉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


"시녀에게 찜질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땀 때문에 너무 찝찝해...."


"돌아가면 샤워부터 하시지요."


"심장이 터질거같아....."


"이 정도 맥박은 괜찮습니다."




원체 저질체력인데다가 이미 하루종일 걸어다녔던 그녀에겐 

동산 정도의 높이밖에 안 되는 이 언덕조차 버거웠을텐데.


의지 하나만으로 기어코 끝까지 올라오는데 성공했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포기를 선언하면 

그제서야 도움의 손길을 내밀려고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자존심을 깨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가의 피는 속이지 못하는건지

황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쭉정이는 아니셨군요."




대견스러워 하는 그의 태도에서 묘하게 짜증이 올라왔지만

완전히 진이 빠진 그녀는 화낼 힘조차 남지 않았다.


이대로 내려갈 수는 있을까.


한번 푹 쉬어버리니 온몸에 긴장이 풀려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뭐 옆에 있는 기사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그가 눈치껏 건넨 물을 벌컥거리며 들이켰다.


한결 살 것 같은 느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던 그녀는 

물기 하나 없이 말끔한 그에게 눈길이 갔다.




"넌 안 힘들어?"


"이정도로 힘들면 기사 자격 박탈입니다."


"다른 기사들은 훈련 때 죽으려고 하던데."


"제국의 기사가 힘든 티를 내다니, 교육이 필요하겠군요."


 


본인도 분명 그 힘든 시절이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그 정도는 별거 아니었다는 건지 

말 만큼은 청산유수였다.


진위여부를 궁금해하는 그녀의 눈빛에 찔리는게 있는 듯


의심의 눈초리에 대꾸하는 대신

그는 자신의 품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그녀 옆, 벤치의 빈 공간에 내려놓았다.




"드시겠습니까?"


".....안먹어."


"필요하면 말씀해주십시오."




한 손에 들기 편하도록 천으로 싸둔 음식들.


언질만 준다면 바로 묶인 매듭을 풀려고 했지만.


고강도의 운동에 식욕이 감퇴했는지

그녀는 음식대신 풍경에만 시선을 두었다.




"......."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있던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노을만을 바라봤고 있었다.


하루종일 그들을 괴롭혔던 태양은

이제야 뉘엿뉘엿 산 능선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장소가 주는 신선함 때문인지

아니면 조용한 분위기 때문인지.


매일 보던 석양이었지만 느낌이 많이 달랐다.


거기다 따스한 햇살과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


그녀는 자연을 자장가 삼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황녀 전하."




한참동안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아

상태 확인 차 운을 띄워 보았지만

대답 대신 쌔근쌔근 숨소리만 들려왔다.


피곤했는지 어느새 등받이에 기대 잠든 황녀.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허공을 공허하게 맴도는 외침.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답을 해줄 존재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으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처음의 약속이 떠올랐다.


그녀에게 오늘 하루는 어떤 날이었을까.


과연 그가 다짐했던 것처럼

기억에 남는 하루가 되었을까.


부디 그랬길 바라며

그는 깨지 않게 조심히 그녀를 품에 안아들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전하."































"헉!"



주위를 둘러보니 방 안은 벌써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한 상황.


침대와 배개는 흘린 땀으로 축축했다.


온몸에 기운이 없었고

타들어가듯 목이 말랐다.


 

".....나 물 좀."



대답이 들려오길 기다렸지만

주위는 조용했다.



"아....."



늘 곁에 있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의 부재가 다시금 떠올랐다.


교단에서의 일 때문에 기사가 성산(聖山)으로 불려간지 벌써  2주째.


신경쓰는 이 하나 없는 조용한 인생으로 다시금 돌아오자

우울감이 온몸을 감쌌다.




"물....."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 한켠의 테이블에 다가갔다.


그녀는 그 위에 올려져있던 여러 다과들,

그 사이의 물통에 손을 뻗었다.


쪼르륵 물이 따라지는 소리와 함께 점점 차오르는 물컵.


물통 안의 내용물을 모조리 부어냈음에도

컵은 반도 채 차지 않았다.


대충 봐도 분명 메마른 목을 충분히 적시기엔 부족할 것이었다.


일단 컵에 따라낸 물을 모두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녀."




그에게 하던 것처럼 시녀들을 불렀지만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불편함을 이유로 근처에 있지 말라 명령했었으니.


그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 삶에 잘 적응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몇 달 간에 걸친 기사와의 생활에 그 능력을 잃어버린 듯 했다.




"음...."




침대 머리맡의 시녀 호출용 종.


말하지 않아도 귀신같은 눈치로

원하던 것을 척척 해결해주던 기사가 있어 

그 동안 한 번도 그걸 눌러본 적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호출벨을 누르기만 하면 

시녀들이 달려 올 터였지만

투박한 은빛 광택으로 빛나는 그것이 풍기는 분위기에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분명 평생 함께해온 익숙한 물건일 텐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낯설게 다가오는 건지. 


그 생경한 느낌을 버티지 못하고

그녀는 직접 몸을 일으켰다.




"메이드실이...."




그녀의 기억 상

복도 끝에 시녀들이 대기하는 방이 있었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 메이드실의 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나야."


"황녀님?"

 



문 너머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시녀들이 어색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분명 자고 있을 시간인데 뜬금없이 찾아온 것에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시녀들.


뻘쭘하게 서 있는 그녀들 사이로 내부를 쳐다보니 

어지럽게 정리되어있는 각종 도구들이 보였다.




"어쩐 일로..."


"물 좀 줘."


"......아! 죄송해요, 물통 채우는걸 깜빡했어요....."




평소라면 잠들어 있을 야심한 밤이었다.


고작 그런 일로 이곳까지 행차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시녀는 겨우 그녀의 말 뜻을 이해하고

이내 음식용 운반카트 위에서 물을 찾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건네받은 컵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끼며

머뭇거릴 것 없이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시원하게 목을 적시는 생명수.


갈증 날 때 마시는 물이라 그런지 달콤함마저 느껴졌다.


내용물을 다 비운 그녀는

빈 컵을 돌려주고 그대로 돌아나왔다.




"하...."


 


갈증은 해소되었지만

구름이 잔뜩 껴있는 날씨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몸은 무거웠다.


생각하던 일을 모두 마쳤으니 방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지만

목마름에 너무 뒤척거린 나머지 잠이 다 깬 상태였다.


지금 돌아가봤자 애매한 피곤함이 덮쳐와 책을 읽기도 불편할 것이다.


할 것 없는 무료함에 고통받기보단 

잠이 올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보는게 나을 터였다.


그녀는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 비를 쳐다보며

멍하니 창밖의 풍경은 내다봤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어두컴컴한 풍경에 마음의 우울감이 한층 더 쌓이는 것 같았다.




".....랐네..."




조용한 복도에 서 있자

메이드실 안에서 들려오는 조그마한 대화.


평소같았으면 대번에 무시했겠지만

왠지 신경쓰이는 느낌에

조심스럽게 문에 귀를 댔다.




"왜 여기까지 찾아와?"


"나도 몰라, 종 고장났나?"


"호출벨 고장났으면 그거부터 말했을텐데."


"맨날 기사님한테 해줘 해줘 하다가, 이젠 혼자 종 누르는 것도 못하나보지"




안에서 키득거리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맥락은 몰랐어도 틀림없이 자신에 대한 험담이었다.


일반적인 황족이라면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호통을 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차피 캐물어봤자 발뺌할 것이 틀림없었고

지금 그녀에겐 근거없이 임의로 자신의 시녀를 벌할 권한조차 없었다.


평생을 도피하며 살아온 결과,

이런식의 뒷담은 너무도 익숙했다.




"와, 완전 쓸모없다. 저딴게 황족이야?"


"진짜 1황녀님이 계셨더라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슬며시 문고리를 움켜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구도 감히 그녀의 앞에서 입밖으로 내지 않은 말이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싫어했다.




"돌아가신 2황녀님 말고 적어도 3황녀님이라도 궁에 남아계셨으면, 단칼에 배신자들 쳐죽이고 다시 제국을 일으켜 세우셨을텐데."


"그러게....하필 제일 쓸모없는 인간이 남아버려가지고...."




그녀는 시녀들의 말에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혐오에 대한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무엇 하나 타당하지 않은게 없었으니.


그 근거는 본인이 가장 처절하게 느껴왔을 것이었다.




"정말로 뭐가 있다니까, 그게 아니면 저럴 수가 없잖아."


"맞아, 황제가 미치긴 했지만, 그 상황에 4황녀를 지목한다고?"


"내가 말 했잖아, 무조건 대줬다니까?"


"하긴, 보지 달고 태어난 거 말고는 별다른 능력도 없긴 하지."




뒷담에 성희롱까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지만

그녀의 몸은 분노가 아니라 열등감으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생판 처음 본 사람도 아닌

아비와 어미에게까지 들어왔던 비교질.


그 상처들은 그들이 죽고 미쳐버린 지금까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쥐고 흔들고 있었다.




"욕심만 그득해서 제국 말아먹으면서까지 저 자리 꿰차고 있네."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하는데, 그런 사람들 속내가 더 검잖아."


"진짜 구역질 나오게 역하다."


"역시 성녀님의 말씀이 맞았어 우리가....."




시녀들의 말이 불러온 마음속 멀미에

구역질은 오히려 그녀가 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듣고 있는다면

바닥에 난장판을 칠 것 같아

그녀는 급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우웁.....!"




길고 긴 화원을 한참동안 달려

뒤뜰 분수대에 몸을 기댄채 숨을 골랐다.


구토감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이유가 

달리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조차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하아....하아...."




억울했다.


자신은 몸 팔아서 이 자리에 있는게 아니었다.


오히려 몸을 팔아서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시녀 따위조차 조소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도 허탈했다.


살아남으려 그렇게 발버둥쳤는데

그 결과가 이따위라는 말인가.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진짜 자신의 누이들이었으면 상황이 달랐을까?


일어나지 않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다르다.’




정말로 누가 되었든 각자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미친 황제를 몰아내고 배교자 성녀의 모가지를 쳤을 것이었다.


누가 왔어도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라도.


하다못해 방금전 자신을 까내리던 하녀들 중 하나를 데려왔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았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자신은 황가의 핏줄 중 가장 나약하고 못난 존재였다.


아쉽게도 그 사실이 슬프지는 않았다.

여태까지 살며 뼈져리게 체감 해왔으니까.


그저 떠나고 싶었다.


자신의 기사와 함께했던 거리에서의 그것처럼

이 엿같은 궁궐을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아무리 차기 황제로 지목되었다고는 해도

그녀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사라진다고 해도 그녀를 찾는 대신 성녀가 다른 인물을 지목하리라.


당장 떠나도 정말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


평생 어느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든 그것이 

보이지 않는 목줄처럼 자신을 황궁에 묶어두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굵어진 빗방울들이 몸을 강하게 내려쳤다.


옷과 머리는 빗물이 스며들어 완전히 젖어들었고

정신은 그에 비할 수도 없이 우울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꼬라지가 개같았다.


욕설에서의 접두사가 아니라

진짜 살아 움직이는 개.


하는 일부터 현재 위치까지.

그녀는 황궁을 지키는 경비견이나 다름없었다.


가끔 관심을 던져주면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


쫄딱 젖은 개새끼.




"감기 조심하십시오."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폭우 속에 그가 서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모습.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안 좋았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구경났어?"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약한 모습을 감추려 괜시리 짜증을 냈다.


역시나 돌아오는건 씁쓸해 보이는 반응 뿐.


안타까워하는 그의 미소에 스스로가 더욱 비참해졌다.




".......너도 내가 한심해 보이지?"




그녀는 자기객관화가 뛰어난 만큼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알고 있었다.


분명 좋게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잘 쳐줘봐야 처량한 황녀겠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쉽게 남을 험담하는 성격은 아니었으니

직접 드러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입발린 말은 필요없-”


"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어찌 타인에게 다른 걸 바라십니까.”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볼 것이라는 게 당연하다는 말.


마치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라는 냉정한 태도였다.


울화가 치밀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점철된 부서진 자존감은

늘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로서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그런데 경험해본 적도 없으면서 이런 식으로 함부로 말하다니.

 

그는 나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고는 

이미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챈 듯했다.




"도피 따위에 의미부여하지 마십시오."


“니가 뭘 안다고!”




황족으로서 기대에 미치지 못할때마다 들려오는 타인의 비난.


그 따가운 시선의 바늘은

어린 아이가 결코 견뎌낼 수 있는게 아니었다.


도피라기보다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그것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해결책이었지

'도피 따위'라고 불리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곱게 자란 너같은 족속들은 절대 모르겠지!”




평생의 한이 담긴 외침




“........”




그녀의 일갈에 작게 숨을 내쉰 그는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이내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부모 없이 길바닥에서 자랐습니다."




담담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내용은 그녀에겐 사뭇 충격적이었다.


처음부터 귀족이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걸 깨달았다.


기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날 좀도둑으로 몰려 린치당할 뻔한 순간, 한 기사가 저희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 장래희망은 기사가 되었습니다."

"가족을,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기사."

"그렇게 저는 기사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저가 되었습니다."




간단한 그의 이야기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오랫동안의 길바닥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잘 곳, 씻을 곳 마땅치 않은 그곳에서  저를 끄집어 내 준것은 

오로지 기사가 되겠다는 그 꿈 하나였습니다.”




"인생은 선택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누구도 선택을 피할수 없습니다."


"전하가 한심해보이냐 물으셨습니까?"


"한심해보입니다."


“다른 황족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 전하을 막아서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가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택해야할 것들을 외면한 채로 볼썽사납게 도망치는 꼴이 너무도 한심합니다."

“정말로 구원을 원하신다면 왜 먼저 스스로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


"건강한 인생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선택에 기준이 없다면 스스로 만드십시오."

"기준을 어디 두어야할지 모르겠다면 의미를 찾으십시오."


"의미조차 없다면."


"어두운 밤, 흐릿한 빛 하나 없이 헤메이고 계신다면,"


"제가 당신의 의미가 되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겨우 지탱하고있던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그가 팔을 뻗어 나를 그의 품에 끌어안았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비가 슬픔을 가려주었다.


더 이상의 추태는 보이지 않아도 되리라.


남아있는 조금의 프라이드가 속삭였다.

스스로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너의 다리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자존감이여

홀로 걷는 늑대여


그대도 겪어보면 알 것이다.


이 따스함을 거부하기는 쉽지않다.



"돌아가시지요."


".....응."










기사는 어디선가 붉은 담요를 꺼내어 

물에 젖어 초라해진 내 몸뚱이를 감쌌다.


온 몸을 둘러오는 따스함에 

오히려 그 안에 들어와서야 

손발이 덜덜떨리고 있었다는걸 눈치챘다.


너무 오래 비를 맞았나.


살짝 목이 잠겨오고 열이 오르는게 

이대로라면 감기에 걸릴게 확실했다.


추위에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봤자 뒷뜰이었으니 조금만 걸으면 된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순식간에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




"....!?"




기사는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그녀를 

가뿐하게 안아들었다.

 



"야!"




난생 처음으로 당해보는 공주님 안기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는 기사.


버둥거리며 몸부림쳐봤지만

기진맥진한 몸상태론 단단한 그의 품을 벗어나긴 요원해보였다.


자신이 어떻게 기사와 힘싸움을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안긴 채로 위를 올려다보니 얼굴이 잔뜩 굳어있는게 

말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현실적인 생각에 포기는 빨랐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긴장을 풀며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겼다.


그녀의 작은 체구와 딱 맞는 공간에

상자를 마주한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곧 남자의 포근한 냄새와 규칙적인 진동에 피곤이 몰려왔는지 

그녀는 이내 쌔근쌔근 잠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방으로 돌아온 그는

황녀를 욕실로 데려갔다.




"혼자서 씻겨드릴 수 있지?"


"네."




어느 순간부터 그의 뒤에서 대기하던 메이드 한 명.

 

그녀는 잠에서 반쯤 깬 황녀를 데리고 

따스한 증기가 피어오르는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다시 홀로 남게 된 기사.


그는 불쾌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흠...."




성산에서 복귀하자마자 보게 된 광경이 이런 거라니.


타이밍이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원인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너도 내가 한심해 보이냐는 말.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는가 생각해보면 

보나마나 시녀들 때문이리라.


평소에도 그녀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는데

아마 뒷담같은걸 들은 것이 분명했다.


오며가며 직접 들은 게 있었으니

거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래서였나…..?”




성녀가 메이드 한 명과 함께 돌아가라더니.

아마 이때를 위한 대비책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예언은 항상 기묘했다.


맞는 듯 아닌 듯, 늘 뜬금없는 일들을 시킨다.


의도도 과정도 알 수 없는 신탁의 내용에 

항상 그녀의 속셈에 말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뭐 그게 어쨌든, 지금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겐 합당한 처벌을."




황족의 눈물은 비쌌다.

그리고 그들은 값을 치뤄야 했다.


황녀의 방, 테라스에 선 그는 

작은 종이에 펜으로 대충 글자를 휘갈겨 쓰더니

곱게 접어 비가 쏟아지는 창밖으로 날렸다.


이내 종이가 사라진걸 확인하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 전하.”




생각이 예상보다 길어졌는지

샤워를 마친 황녀도 이미 돌아와 있었다.


다시 뽀송해진 모습.


기분도 많이 나아졌는지 표정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 메이드는 누구야?"


"오늘부터 전하의 전속 시녀가 될 아이입니다."

"믿을만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응.”




의자에 앉아서 따뜻한 홍차를 홀짝이던 황녀는

그의 말에 뭔가를 깨달았는지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이럴 거 알고 있었어?"




걱정시키지 않으려 최대한 티 안내보려고 했는데

그는 시녀들에 대해 진작부터 알고 있던 듯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주위에 관련된 것 만큼은 굉장히 예민했으니

그정도 적대감 쯤은 눈감고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안 일어나길 바랐지요."




참담한 그녀의 심경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는 자조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황녀의 기사이자 가신으로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위해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보호했어야 했다.


하지만 매일 얼굴을 보는 시녀의 뒷담을 알아차린 그녀가 상처받을까봐

괜한 일이 아닐까 주저하다 너무 늦어버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면 단박에 처리했을텐데.


크나큰 실수였다.


사죄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것마저도 늦어버렸다.


이미 다 끝난 마당에 다시 사과한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한껏 불편해진 마음을 애써 숨겼다.




"나 완전 꼴불견이지?"


".....아쉽게도 오늘의 잔소리 수치가 다 떨어져서 좋은 말밖에 못 해드리겠군요,"


"그거 무제한인줄 알았는데."




자신감이 잔뜩 떨어진 황녀의 모습에

그는 별 말 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만 지어보였다.


부족함이 많은 그녀이지만

멘탈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만했다.


그거라도 없었다면 

이 궁에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눈치와 함께 십수년간 단련되어온 그녀의 멘탈은

이정도 스트레스쯤로 받은 상처쯤은 금방 복구할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상처가 흉지지 않도록 제대로 아물게 도와주는 것 뿐.




"그것들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다행이네."


"곧 있으면 삼대가 전부 목이 잘려나가겠지요."


"그건좀 안 다행인데."


"흠....지금쯤 한창 고문당하고 있을겁니다."


".....벌써? 농담이지?"




그렇게 당했음에도 인정이 남아있었는지

그녀의 눈동자는 당황으로 물들었다.


진실을 바라는 눈빛에

그는 대답대신 미소만 보여주었다.




"잠시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직접 형을 내리겠습니다."


"절대 안돼! 손에 피 묻히지 마."



 

그의 간단한 진담 섞인 농담에도 그녀는 격하게 반응했다.


그녀의 심성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처벌받아 마땅한 사람도 쉽게 죽이지 못할 만큼.


그래서 궁에서 외톨이처럼 지냈고,

그래서 다른 황녀들이 쫓겨나갈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태양처럼 한없이 따스한 존재.


그녀에겐 성군의 자질이 있었다.


부족한 건 인복 뿐 이었고, 

그건 그의 힘으로 충분히 채워줄 수 있었다.




"옳은 선택이십니다, 차기 황제시여."


"....갑자기 왜이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건 아랫사람이 ‘알아서’ ‘몰래’ 처리해야 하는 법.


간단한 언질만으로도 거부감을 확 낮출 수 있었다.

나중에 물어온다면, 대충 둘러대면 되리라.




"그런데 시간이 늦었는데 안 주무십니까?"




어느덧 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목욕 때문에 오히려 완전히 잠이 깨버렸는지

두 눈 말똥말똥 깨어 있었다.




"잔소리 안한다며."


"작은 궁금증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방 한켠의 티 테이블에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시던 홍차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지 오래.


그녀는 남쪽의 야만인들이나 마시는

차가운 차를 즐기는 취미는 없었다.




"차나 마실까."


"나쁘지 않지요."




주전자에 불을 붙이자 곧 물이 끓었다.

가루로 된 찻잎를 적당량 컵에 덜고 물을 부었다.


마주앉아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진짜지?"


"뭘요?"


"그.......어준다는거..."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되어준다는거 말이야..."


"네?"


"아니! 의미가 되어준다는거 말이야!!"




본인 입으로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는게 부끄러웠는지

그녀의 두 볼에 홍조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의 입에서 직접 들을때는 감동적이었지만

그걸 지금와서 되뇌어보니 상당히 오글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네?"


"뭐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놓고"

"어떻게 할지는 생각 안한거야?"


"그건...."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줘."


"네."


"진짜다? 무르기 없어?"


"감히 황족과의 약속을 어길수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황족이 아니게 되면 약속 안지킨다는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


"푸훗....!"




어느새 자신의 기사를 골려주는게 그녀에겐 가장 큰 기쁨이 되었다.


그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었다.


물론 자신의 기사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요새는 무슨 짓을 해도 잘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난의 묘미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


이런 진중한 상황에서까지 장난친다는 걸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분위기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래서 언제 주무실 겁니까."


"그게 그렇게 궁금해?"


"저도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쉬면 되잖아."


"전하가 잠드셔야 제가 쉴 수 있습니다."


"그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런게 있습니다."




강요에 가까운 눈초리에 일단 침대에 눕긴 했는데

잠들라고 말 한마디 한다고 진짜로 잠이 오겠는가.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대신 궁금증만 생겨났다.


이렇게 끝까지 버티면 그는 어떻게 할까.


포기할까.

아니면 먼저 잠들어버릴까.


뜬금없는 호기심이 만들어낸 오기에

그녀는 정말 눕기만 한 채로

눈 앞의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감으시지요."


"감으면 뭐가 달라져?"


"적어도 뜬 것보다는 쉽게 잠드실겁니다."




이제보니 상당히 피곤해보이는 기사의 모습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상태를 보니 아마 교단에서의 일이 끝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달려온 것 같았다.


하지만 불쌍한건 불쌍한거고 궁금한건 궁금한 것이다.


정 못버티겠으면 방금 전 했던 말을 철회하고

먼저 자러 들어가면 되는것 아닌가.


그렇게 침대 옆에서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그와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


서로 아무말도 없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언제 주무실겁니까?"


"그거 벌써 세 번째인거 알아?"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그냥 가서 자라니까?"


"호위기사로서 그럴 수는 없지요."




그렇게 다시 유지된 정적에

그는 더 이상 눈꺼풀을 들고 있기도 힘들었는지

눈가를 꾹꾹 누르면서 마사지했다.


조금만 더 괴롭히면 진짜 잠든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사실 그를 졸게 만들려면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도록 만들면 되었다.


하지만 잠들수도 없고 그렇다고 깨지도 못하는

반쯤 잠에 든 저 묘한 언밸런스함을 구경하는게 재미있었다.


다시금 발동된 장난끼에 묘한 웃음을 대놓고 지었지만

서 있기도 힘든 그는 미처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하는 듯 했다.




"호위기사가 자장가 불러주면 더 빨리 잠들지도?"


"혹시 그게 소원이십니까?"


"아니!"




그는 어이없어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가볍게 노래를 불렀다. 


자꾸만 이어지는 그녀의 귀찮은 요구에

대충 빨리 끝내버리려는 것인지 

그의 노래엔 별 다른 기교도 없었고 감미롭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지

그녀가 요청했던 자장가가 아니라 일반적인 가요를 불렀다.




"자장가 불러달라니까?"


"아는게 없습니다."


"자장가를 모르는게 말이 돼?"


"안되진 않지요."


"엄마가 안불러줬어?"


"전 고아입니다."


"앗!....."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어지는 대화 사이

기습적으로 찔러온 말.


그에게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안 그래도 오지 않던 잠이 더 달아났다.




"미안....."


"괜찮습니다, 이젠 별 원망도 안듭니다."


"으...."




말을 붙여보려 할 때마다 뚝뚝 끊기는게

그가 제정신이 아닌것 만은 확실했다.


원래라면 가지고 있던 유려한 말솜씨로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끔 잘 이어 나갔을텐데.


이대로라면 그를 피곤하게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불편해져 버리리라.




".....그럼 이야기나 해줘."




대화가 성립이 안된다면 

그가 혼자서 말을 꺼내게 하면 된다.


이미 반쯤 무의식상태로 바뀐 듯 보였는데

그 상태의 그가 무엇을 보여줄지

곧 있을 일에 대한 기대감에 설렘의 미소를 띄웠다.




"음...."


"아는 이야기 없어?"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억지로 기억 속을 뒤져보던 그는 

이내 천천히 운을 띄웠다.




"이건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무릇 아군이란, 잘 벼려진 병장기와 함께 전장에서 유이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지요." 




처음으로 꺼낸 전쟁 이야기.


군대 이야기를 꺼내니 방금 전 까지와는 다르게 말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만큼은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건지.


신기함과 함께 그의 과거를 엿볼 수 있다는 생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때 저희 부대는 남부전선에서 야만인들과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를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

추억을 떠올리는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에겐 그 시절의 일이 바로 추억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정말로 하늘이 뚫린 것 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날씨였습니다."

"산 아래, 중요 길목에 진을 치고 있었던 저희는 얼마 가지 않아 홍수와 산사태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희가 그 지역의 기후에 대해 무지한 탓이었지요."




책에서 읽은 적 있다.


열대 소나기라고 했던가.


거기엔 뜬금없이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비의 요정이 장난치는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친다고 했었는데

산사태까지 일어났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조사관에게 물어보니 야만인들이 나무뿌리에 수작질을 해놨다고 하더군요."




아직 물어보기도 전이었지만 그녀의 의문에 답해주는 것처럼 뒤이어 풀이가 튀어나왔다.


시원하게 해결된 문제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운이 좋게도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다행이네."


"하지만 곧 척후병이 적의 기습을 알려왔습니다."




적이 가장 취약할 타이밍을 노려 공격을 감행하다니.


거기다 지형, 기후, 적의 심리까지 모두 꿰뚫고 있었다.


병법 서적에서나 나올법한 교과서적인 전술에

차기 황제로서 작전을 계획한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부끄럽지만 저희에게 남은 선택지는 후퇴밖에 없었습니다."

"기사에겐 전투에서의 명예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지요."

"그깟 싸구려 개죽음에 희생될 정도로 멍청한 이는 적어도 저희 부대엔 없었습니다." 




그의 말은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기보다는 

패주(敗走)에 부끄러워했을 그의 옛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 같았다.


그는 느껴지는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적의 수는 약 일천 명, 전원이 기사급으로 이루어진 정예병들이었습니다."

"말까지 숨겨가면서 몰래 접근해 온 터라,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도망치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을 벌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맥락을 봤을 때 아마 그가 '희생자'였을 것이다.


그간 겪어온 그의 이미지로 미루어 보아도 

그가 자원했을 것이 분명했고 말이다.




"물론 제가 그들을 막기로 했지요."

"저는 기묘하게 운이 좋아서 비슷한 상황에서도 여러번이나 살아서 돌아왔던 전적이 있어서 자신있었습니다."

"동료들은 미쳤나면서 당연히 절 말렸지만, 한시가 급박한 상황인지라 얼렁뚱땅 다독여서 돌려 보냈구요."




다시 말해 죽으러 간다는 이야기.


지금이야 저렇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그때 당시엔 엄청난 각오와 함께 내린 선택일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막아서려 간단하게 무구를 챙겨 길을 떠나는 찰나."

"누군가 후퇴 준비도 하지 않고 제 옆에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부하기사가 뻔뻔하게 절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닭꼬치 추천해줬다던 그 사람?”


“네, 맞습니다.”




이 뒤는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무 뻔했다.


혼자 보낼순 없다, 같이 가자.


뭐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겠지.




"대화는 없었어도 그 안에서 엿보이는 결연함에 뭐라고 할수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그 상태에선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테니 그냥 고개만 끄덕여 주었습니다."




아, 내심 울고불고 매달리는 신파를 기대했건만.


자신들이 기사도의 사나이들임을 증명하는 것 처럼 

흔한 소설에서의 질척거리는 스토리와는 깔끔함이 차원이 달랐다.




"각오 한 아름을 품고 도착한 전장에서."

"저는 처음으로 '남쪽의 대 기사'와 대면했습니다."




남쪽의 대 기사.


적국의 장군이었지만 그 압도적인 위용에 경의를 표하며 붙인 두려움 섞인 별칭이었다.


전승 무패라는, 자신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전공에 

직접 베어버린 '소드 마스터'만 일곱.


그의 앞에 선 순간 살아남기를 포기해야 할 

말 그대로 천외천의 경지라고 들었다.




"거기다 그의 옆으로 도열한 12명의 기사들."

"그들 모두 대 기사의 한수 두 아래 수준의 강함이었습니다."


"그래서......두명이서 이겼다고?"

 



대 기사와 그 비슷한 수준의 존재들만 십 수 명이 포함된 군대를 상대로

어떤 준비도 없이 평지에서 2 대 1000?




"버틴것 뿐이지요."


"에이씨..... 진짠줄 알았네."


"역시 못믿으시는 겁니까?"




군사학을 제대로 교육받은 적은 없었지만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봐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저건 아마 남자 특유의 허세이리라.


적당히 도망치며 시간을 끈 것을 

자극적인 조미료를 잔뜩 쳐가며 이야기 한 것이 분명했다.


설사 기사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적어도 그와 직접 칼을 맞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자는 자신에게 적의를 보인 상대방을 절대 살려두지 않기로 유명했으니.


한창 재미있는 순간이여서 왠만한 감칠맛은 덮어놓고 믿어주려 했건만, 

해도해도 너무한 이야기에 현실성이 확 떨어져 

그 전에 말했던 것들까지 다 거짓말 같이 느껴졌다.




"다른 건 없어?"


"후...."




피곤함도 잠시 지워둔 채로 한참 몰입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방해로 맥이 끊겨버렸다.

.

바로 여기서부터가 진짜 하이라이트인데.


해야 할 말을 다 마치지 못한 찝찝한 느낌에 

되려 아쉬움만 남았다.




"지금 한숨 쉰거야?"


"잘못들으셨습니다."




피로가 가득 담긴 한숨.


노인들의 회광반조처럼 잠시 온몸의 기운을 끌어다 쓴 것 같이 

이야기를 끝마치자 그 이전보다 배로 피곤해졌다.


지금이라면 그 어디든 머리를 누이기만 한다면 그 즉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누울 필요도 없이 그냥 눈만 감으면 바로 잠들리라.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지금 상태론 도저히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 마셔."




그런 그의 상태를 눈치 챘는지

그녀는 머리맡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이게 뭡니까?"


"피로회복제."




한 뼘 크기의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호박색 액체.


난생 처음보는 색의 포션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먹고 죽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 보다는 

맛이 쓰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어지간한 싸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굳이 이 타이밍에 독약을 주진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여태까지 보여준 것들이 모두 연기였대도

그 정성을 봐서 기꺼이 죽어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생각 해내보겠습니다.”




건네받은 유리병의 뚜껑을 비틀어 따자 

뽕 하고 열린 구멍 너머로 달큰한 냄새가 올라왔다.


싸구려 향수에서 쉽게 맡을 수 있을 인위적인 향에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들었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시간을 끌어봤자 자신의 머리만 더 피곤해 질 뿐이었고

눈을 빛내는 황녀를 보아하니 이 상황을 피할 방법은 없어보였다.


그래, 매는 먼저 맞는게 낫고

귀찮은 일은 한번에 처리하는게 편하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물약을 입에 모두 털어넣었다.




“재미있는 걸로.”


“네....”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은 기사는 

침대 옆,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그가 편하게 쉬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 이상 몰아치면 나던 생각도 도망갈 것이다.


시간을 좀 줄 필요가 있었다.


다시금 차분해진 무드를 느끼며

그녀도 상념에 잠겼다.




"흠......."




늘 말해왔던 것처럼 

밀림같은 황궁엔 믿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 인한 의심병 때문인지 

방금 전과 같이, 그녀는 스스로 납득 할 수 없다면

남들은 그냥 듣고 넘길 부분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황제의 약사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언제 성녀의 명령을 받고 내가 먹을 약에 독을 탈지 모른다.


유일하게 내 의지로 피할 수 없는 것은

매끼니마다 올라오는 주방장의 식사 뿐.


과거,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머릿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의심암귀가 곧바로 

성녀가 그 약을 밥에도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떠올려냈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는 부친은 성녀의 약을 넙죽 받아먹었겠지만

자신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멍청하지 않은건 성녀도 마찬가지니까.’




그년은 존나 똑똑하니 내가 그런 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것쯤 은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이미 한번 쓴 방식은 더 이상 쓰지 않을 테니 

가장 확률이 높은 방법은 식사에 약을 타는 것이리라.


식사는 피할 수 없고, 굶어도 눈치채기 쉽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엔 없어.’




나 역시 뚜렷한 해결책 없이 

적게 먹으면 만약 독이 들어있다고 해도 영향을 적게 받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밥도 최소한으로만 섭취했을 뿐이었다.


그런 연유로 억지로 밥을 먹이려는 호위기사를 의심했던 것이다.




“흠....”




나는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방비한 표정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잠시 의심을 하긴 했지만 꽤 오랜시간 곁에서 직접 겪어보니 

그는 나를 해할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거기다, 자신이 아는 그는 타인을 속일 수 있는 능력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 의심은 접어 두어도 괜찮았다.




"......."




상당히 먼 길로 샜지만,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당사자에게 굳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가 먹은 약조차도 내가 직접 제조한 것이었다.


굳이 명칭을 붙여보자면 '아로마 칵테일'쯤 되려나.


물론 비전문가가 만들었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각각 따로 먹어도 문제없는 것들만 집어넣었으니.


내용물은 바닐라, 꿀, 라벤더, 유자

그리고 그 외 십 수가지, 개인 취향이 듬뿍 담긴 재료들과


꽤나 높은 도수의 술.




"아...!"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피곤한 사람한테 술을 먹이면 골아떨어지는게 당연했다.


비록 기사들이 술에 강하다지만

저건 버틸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한컵에 한스푼.


물에 타서 마실 것을 상정하고 만든 진한 농도였는데

오랫동안 먹은 적 없어서 복용법을 알려주는걸 깜빡해버렸다.


동시에 몇 가지를 실수한 건지.


뒤늦게 기사의 상태를 확인해봤지만

그는 이미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기절해 있었다.




"일어나."




어깨를 세차게 흔들어봤지만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기사의 무방비한 모습이었지

이렇게 늘어지게 자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어나라고!"




팔뚝 안쪽을 꼬집어봤지만

살짝 움찔 할 뿐 잠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수면아래 깊이 잠들어버린 의식을 보아하니 

깨우는건 묘연해 보였다.




“저기, 기사님?”




그가 곤히 자는걸 보고 있으려니 

어느새 불쌍한 감정이 몰려왔다.


자신을 위해서 피곤함도 무릅쓰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일텐데.

이렇게 이기심을 부려도 되는 건지.




“.....미안.”




생각해보니 참으로 철없는 행동들이었다.


잠결에 어떤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이유로

쉬어야 하는게 눈에 보이는데도 억지로 깨우고

짜증난다고 하등 상관도 없는 그에게 화풀이하고 


그리고 또….




“휴….”




굳이 오래 생각해보지 않아도 그런 비슷한 일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어린 아이나 다름 없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니

수치심이 몰려왔다.




“미안해….”




그는 왜 이런 수모를 겪어가면서까지 자신의 곁에 남아있는걸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녀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고마워.”




평소같았으면 입 밖에도 못 낼 말들을

잠의 힘을 빌려 겨우 내뱉었다.


닿지 않는 곳에서야 비로소 말할수 있는 감사인사라니.


단지 자신에게 그 부끄러움을 이겨낼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




잠든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신체를 건드리는게 무례한 일임은 알고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를 이렇게 쓰다듬어보겠는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 다음은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괜찮지?”




물론 그라면 이정도는 가볍게 넘어가 줄 것이다.


만약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허락보다는 용서가 훨씬 쉽다.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즐겨야한다.




“넌, 내 기사.”




처음으로 가진 나만의 존재.


거저 얻은 인연이 아니라 훨씬 더 그 의미가 깊었다.




“내꺼니까.”




그러니까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지금은 자신 만의 기사이지만 언제 다시 잃어버릴 지 모른다.


아무도 모를 ‘신의 뜻’에 따르면

그게 당장 내일이 될 수도, 한시간 뒤가 될 수도 있었다.


그녀가 평생동안 인내해온 고통의 보상은

허무하게도 배교자 성녀의 말 한마디면 사라질 허상이었다.


하지만 빼앗기기만 하는 인생은 질렸다.


더 이상 누구도 자신의 것을 빼앗아 갈 수 없다.


설령 그게 여신의 뜻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끝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어야만 한다.


그가 잠시 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그에 대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어야 했다.




“......”




딱 깨지 않을 만큼만 최소한으로 조심하며

강박적으로 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훑는다.


내 말을 경청해주던 귀도

반짝이는 눈동자가 잠들어있을 눈가도 

술에 취해 살짝 붉어진 볼도


애정을 담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부드럽게 매만졌다.


처음 느껴보는 촉감.

처음 다가가는 거리.


처음, 처음, 처음.


그와 함께했던 매일이 모두 처음 겪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매일이 모두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자신의 기사가 된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그에 대해서 모르는게 너무 많다는걸 다시금 깨달았다.




“....시간이 없어.”




이 속도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다 알지 못하리라.


어느덧 마음속에 조급함이 찾아온다.


얼마 뒤 있을 성인식이 지나면

정말로 눈 코 뜰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황제의 정식 후계자이자 황제 대리로서 

지금처럼 기사와 둘만 있는 시간을 가지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늘 그랬듯 떨어지는 모래시계는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래가 얼마나 되는지 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태평하게 자고 있는 그가 너무도 얄미웠다.




“하아….하아….”




속이 터질듯 답답했다.


코르셋으로 심장을 옥죈 것 같은 느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읏!.….”




머리가 핑 돌아 기사에게 쓰러지듯 안겼다.


그가 일어날지 말지는 더 이상 관심 밖의 일이었다.


단지 쿵쿵거리는 고동소리만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왜?"




한참 그에게 기대어 호흡을 고르다가

문득 머릿속에서 든 의문.


확실히 이상했다.


소중한 인연이긴 하지만

이렇게 과도하게까지 마음 쓸 일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떠난다고 해도 지인으로 남아있으면 될 터였다.


몸이 멀어진다고 마음까지 변할 사람은 절대 아니었으니

완벽히 그 전과 같은 거리일 것은 확실했다.


그런데 왜.


그걸 알고 있는데도 왜.


마음이 이렇게 요동치고 있는거지?




"으으......"




이건 평소에 알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서’ 따위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뭔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평생 마음을 죽이고 살아서였는지 

이럴 때마다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뭐야."




그의 어깨에 기대어 되뇌었다.




"넌 나한테 뭐야."




답을 시원하게 제시해줄 누군가를 바라마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대답은 나 자신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순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만큼 간절했다.


답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용의가 있었다. 




"난 너한테….뭐야….."




빠르게 뛰는 맥박에 괜히 정신이 예민해졌다


벽에 걸린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음과

유체의 움직임에 따라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까지.


평소같았으면 느껴질리 없는 익숙한 것들이 하나하나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의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 큰 성인이 내는 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앙증맞은 호흡.


그렇게 오랫동안 가까이서 함께 있었는데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일부러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면 존재하는지도 모를

그것에 귀 기울이다 보니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한걸음만 더 가면 막혀있던 것들이 모두 시원하게 터져나올 것 같은 느낌.


딱 실마리를 잡기 직전의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늘 그렇듯 절대 닿지 않는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


금방이라도 놓쳐버릴 듯한 느낌에 안간힘을 다했더니

어느샌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후….하…."




침착함을 되찾으려 억지로 심호흡을 했지만

그를 보고 있으려니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과 어지러워지는 머리는 진정될 줄을 몰랐다.


한참을 노력해봐도 소용없는 게 마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았다.




"하…."




머리가 터져라 생각해봤지만

더 이상 고민해봤자 답이 나올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아직도 잠들어있는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과 똑같이 세상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


억울했다.


원인 제공자는 저렇게 편안한데 왜 자신만 고통스러워야 한단 말인가.




"일어나."




다시한번 어깨를 흔들어봤다.


마음같아선 의자 채로 넘어뜨리고 싶었지만

마음속의 마지막 양심이 그걸 막아섰다.


방금 전에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금 일어날 리는 없었다.




"그래, 한번 해보자 이거지?"




하지 말라 할 때는 그렇게 따라다니며 감시하더니

정작 관심이 절실할 때는 없었다.


본인의 장난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심술이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이제부터 내가 하고싶은대로 할거야."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그녀 방식의 아량이었지만 그가 대답할 리 없었다.


대신 그녀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그냥 하고싶은대로 하기.


안그래도 요새 그의 잔소리 때문에

스스로가 '범생이' 같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원래의 자신을 되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아….."




오늘따라 한숨이 잦았지만

이건 이전의 것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속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심호흡.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던 머릿속 실마리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자신은 생각의 바다에 홀로 남겨졌지만

마음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이 훨씬 가벼워졌다.


알았다.


이해를 놓아버리니 드디어 알겠다.

 

지금 품고있는 의문에 이해는 필요가 없었다.


감정이 이성으로 이해가 되겠는가.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자, 그럼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진짜 자신이 하고싶은게 무엇인가.




"생각한 대로 해."




마음속에 있던 걸림돌들을 전부 치워버리고

원하는 것, 하고싶은 것 그대로 행동하면 된다.


꽉 쥐고 있던 마음속 긴장을 놓아버리고

깊은 곳에 숨겨둔 본성을 완전히 드러내야 한다.


부끄러워할 필요도,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그녀를 머뭇거리게 만들던 기사는 이미 잠들어 있었고

이곳에 깨어있는 건 자신 하나 뿐이었다.




"괜찮지?"




그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 올백머리로 만들었다.


그녀의 손짓에 훤히 드러난 이마.


머리카락을 내렸을 때보다 훨씬 성숙해보였다.




".....아니야."




이러면 함께 있을 때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리라.


실제로 7살이나 차이 나긴 했지만

기사에 비해 너무 어려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런 쓸모없는 것들에 신경쓰고 있는 것일까.




"히…. 나 오늘따라 이상하지?"




이랬다 저랬다.


짜증을 냈다가도 다시 실실 웃고.

슬프다가도 다시 행복해지고.


마법의 그날이라고 해도 이정도로 심하진 않는데

누가 귀신 들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피로가 몰려왔다.


고개를 숙여 그와 이마를 맞대었다.




 "다 너 때문이야…."




들숨과 날숨.


그러자 기사의 잔잔한 숨결과 자신의 거친 호흡이 뒤섞이며 

입술 사이에서 휘몰아쳤다.


그녀는 멍하니 체온을 느꼈다.


다시금 간질간질해지는 마음.


그녀는 눈을 감았다.


-쪽


입술끼리 닿는 부드러운 감촉.




"읏...!"




무슨 짓을 한건가.


순간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스스로 한 행동에 납득가지 않았다.


누구도 보지 않는데도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졌다.




"설마, 이게….그거야?"




도서관의 책들 중에서 남녀사이의 사랑을 다룰 때 등장하는 그 행동.


나올때마다 어찌나 두근거림을 강조하는지 사실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었다.


애초에 사랑을 해본적도 또 누군가에게 받은 적도 없어서 

그 감정이 뭔지, 어떤 느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알 것 같다.


책 속에서 등장했던 그런 뜨거운 키스는 아닐지라도

그 터질것 같은 가슴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너가 찾아낸 그 이유가 맞다는 듯

조금 전의 그 심장의 두근거림의 느낌과 정확히 일치했다.




"아…."




문득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떠올렸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끌어안고 있는 한 쌍의 남녀.


드디어 알겠다.


누가 친구의 숨소리까지 집중해서 듣는가.

누가 가족의 마음을 탐내는가.


이건 우정이나 가족애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감정은 처음부터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내게 들으라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스스로의 마음을 인정하자 

머릿속의 뒤죽박죽 묶인 매듭뭉치가 단칼에 끊겨나갔다.


이렇게 쉬운 문제를 풀려고 끙끙댔다니

오히려 허탈감이 들 지경이었다.




"아, 진짜…."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니

방금 전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른채 잠들어있었다.




"잠은 잘자네."




괜히 말을 걸어 봤다.


이렇게 난리쳤는데도 미동조차 없다니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자꾸 그의 입술에 시선이 갔다.


다시금 '그걸' 느끼고 싶었다.


감질맛만 느껴질 정도로 짧은 입맞춤.


아예 몰랐으면 괜찮았으려만 한번 하고 나니 더욱 하고 싶어졌다.




"으...."




방금전엔 본능에 이끌려 움직였지만

도저히 지금의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부끄럽기도 했거니와 이성이 그걸 막아섰다.


혹시나 선을 넘는 건 아닐까.


도덕심이 경고했다.


지금 하면 안되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뭐 어때."




나름 호기롭게 말을 뱉어봤지만

목소리가 떨리는건 막을 수 없었다.


알고있다.


만약 잘못되면 다시는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이 하라고 등떠밀었다.


사실은 자신도 하고싶었다.


지금 당장 저 입술을 다시 한번 더 느끼고싶었다.


눈앞의 탐스런 먹잇감 앞에 걱정들은 눈녹듯 사라졌다.

한번 했는데 두번이라고 못하랴.


변명들만 생각났다.


한번 더 한다고 해서 그가 일어날 것 같진 않았다.


여태까지 그렇게 깨웠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고작 키스 한번 더 한다고 일어나겠는가.




"난....몰라."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에 팔 감고서 조금 긴, 두번째로 입을 맞추었다.


혀도 집어넣지 않은, 아이들이나 하는 수준의 키스.


처음 생각한 대로, 마음껏 그를 탐하며 

만족할 만큼 촉감을 느끼고 입술을 떼는 순간.




"!"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래서 그의 품에서 벗어났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이,이건....그러니까...."




당황하는 그의 눈빛을 보자마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분위기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뭐라도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머리가 새하얘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 실수야."




그의 시선을 참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지만

믿어주는 눈빛이 아니었다.


당혹감만이 가득한 얼굴.




“너가, 너가 나쁜거잖아....”




이렇게 만든 너가 잘못한거잖아


그런데 왜 날 그런 눈빛으로 쳐다봐? 응?


설마 내가 나쁜년이야? 아니지?


그의 눈빛에 속에서 온갖 감정들이 흘러넘친다.




“넌 내꺼잖아!!”


“.... 그렇지? 응? 넌 내 기사니까, 나만의 것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내껄 사랑할 수도 있는거잖아!!!”


"여태껏 그렇게 다정하게 행동해놓고 나보고-!"




남자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자

넘쳐흐르는 감정들 사이 분노가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억울했다.


화가 났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분노.


당당히 일어나 그와 시선을 맞추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머리가 핑 돌아 다시 바닥에 주저 앉았다.


한참동안 악을 써서 그런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팔 한짝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


하지만 정원에서와는 다르게 이번엔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같이 있는데도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느낌.




“내가... 잘못했어....”




몸에 힘이 쭉 빠지자 그 자리를 공포가 채웠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바람에 떠다니는 비눗방울처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날아갈 것처럼


조용히 앉아있던 그는 금방이라도 훌쩍 떠나버릴 것 같았다.




"제발 받아들여줘"




아니, 그게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눈앞이 깜깜하다.  


악마.


악마가 필요했다.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해줄 그 무엇이라도 좋았다.


시간을 되돌려준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주신님, 조상님, 남방의 괴물신님.

어떤 존재라도 괜찮았다.


그토록 증오하던 성녀에게조차 기도드렸다.


단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길.


눈을 뜨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그렇게 두 손을 부여잡고 한참을 기도했지만....


평소에 열심히 예배하지 않은 벌이었을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흐.”




내가 지금 귀신이 들린걸까?


이 갈무리되지 않는 감정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화를 냈다가 또 미안하다 빌었다가

스스로가 봐도 이건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자 

명치 깊은 곳에서 헛웃음이 올라왔다.




“흐...흐....”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과 그는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신과 인간이 이어질 수 없듯


운명이 닿지 않는 이상, 

황족과 기사는 이어질 수 없었다.


단지 내가 현실을 잊고 살았을 뿐이었다.

철없이 동화 속 왕자님을 찾아 헤메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황녀님”




후회했다.


너무도 성급했다.


감정에 몸을 맡기질 말 걸 그랬다.


그저 곁에 있는 걸로도 충분했는데.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했을지, 또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지금 떠오르는 건 

조금 더 고민하고 행동했어야 했다는 것.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봤자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




“황녀님.”




누군가가 말하길 첫사랑은 쓰다고 했다.


그건 틀렸다.


쓴 게 아니었다.


아렸다.


깨달아버린 첫사랑은 눈물이 날 정도로 

시리도록 아렸다.




“황녀님?”




아련했던 첫번째 경험이 떠오른다.


타인의 입술 촉감을 느껴본 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정말 보드랍고 말랑했다.

 

스스로 회고해보자면 사실 그건 입맞춤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부모자식간의 뽀뽀수준.


책에선 그건 진짜 키스가 아니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것은 황홀할 정도의 감각이랬다. 


다시 가슴이 아팠다.


진짜는 뭘까.


아마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




볼에 닿는 따스한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기사는 내 앞 무릎 꿇은 채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준 걸까

잠시 망상 해보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




그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긴장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결코 좋은 말은 아니리라.




"황녀님.”




아, 진짜로 최악이다.


나직하게 분위기를 잡는 말투.


이런 식의 대화는  

항상 내게 훈계할 때 나타났다.


이미 다 끝난 마당에 또 무슨 소리를 한다는 것인가.


듣기 싫었다.


지금만큼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다.




“황녀님.”


"왜!!"




내 반응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것일까.

 

그가 슬쩍 미소지었다.




“키스는 그렇게 하는거 아닙니다."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첫번째보다 훨씬 생동감 있는


두번째 입맞춤.


 

하지만 다시 한번 이어진 키스는 그 전과는 사뭇 달랐다.



부드럽게 혀를 섞는 프렌치 키스.




"하읍....흣..."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야릇한 분위기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아.....하아...."




어느새 침대위에 올라간 두 사람.


남자의 리드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이 포개어졌다.




"이게....그거야...?




대답대신 미소만 지은 남자는

얇은 잠옷 위로 천천히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흐읏....!"




그의 손길마다 피어나는 뜨거운 열락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었다.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각.




"이거....읏....뭐야?"


"아이 만들기입니다."


"....그건 나도 알, 흐윽!"




어느새 스르륵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실크잠옷 사이로

드러나는 속옷을 두 팔로 애써 감추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쓰지도 않는다는 듯

다시 시작된 키스.


부드럽고도 단단한 그의 품 속에서

행복감, 안도감, 기쁨과 살짝의 짜증,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의 뜨겁던 열락의 순간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계속 되었었다.




























눈물이 흐른다.


주워담을 틈도 없이 

책상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윽...."




펼쳐둔 서류에 물자국들이 생겨나고

그 자리 그대로 잉크가 번져나간다.


누군가를 사무치게 오래 그리워하면

아는 모든 이에게서 그 사람을 보게 된다고 했던가


그녀는 물방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속에서 그가 보이는 듯 했다.




"보고...싶어..."




몸을 감싸고 있는 빨간색 담요에선

그의 냄새가 거의 사라져간다.




"빨리 돌아와...."




길었던 회상을 끝마치고 차디찬 현실로 돌아온 순간.


잠에서 깬 아이처럼 그를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그리운 님은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조한지 어언 1년.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떠오르는 얼굴도 점차 희미해져 간다.


마치 모든게 꿈 속에서 일어난 일인 양.


나와 그의 사이엔 안개가 자욱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이젠 자신에게 남아있는 그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두 명이 함께 그려진 초상화 뿐.


아마 그가 돌아오면 많이 달라진 모습에 알아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빨리.....”




편지로나마 연락하던 것도 

업무가 바빠지자 그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온 답장은 벌써 3달 전.


괴로웠지만 그의 처지도 이해한다.


변방(邊方)의 장군이 된 그는 악마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지금쯤 눈 코 뜰새 없이 바쁠 것이다.




"큽....!”




콧물과 함께 억지로 슬픔을 삼켜넘겼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망가져 버릴 것만 같았지만

제 시간안에 해야 할 일을 마저 처리해야 했다.


업무 때문에 일정이 미뤄지는 참사는 무조건 피해야 했다.




“후우...후우....”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며 의지를 다잡았다.


이미 육체의 피로와 강박으로 인해 

정신의 마멸이 거의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 속에서도 내가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바로 한달 뒤에 있을 결혼식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그의 결혼식.


심지어 단순히 우리끼리 결정한 게 아니라.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성녀의 공인을 받은 것이었다. 




“우리는 운명인거야....”




운명인지 아닌지는 상관 없었다.


그때가 되면 다시는 보내주지 않으리라.


침공이건 뭐건 간에

그를 자신의 옆에 붙들고 있을 것이다.


설사 성녀가 방해하더라도.


이별은.


이정도로 족했다.




“한달....”




그녀는 달력을 바라봤다.


적혀있는 숫자는 D-30


그날만을 기다렸다.


누군가에겐 길고, 누군가에게 짧은 애매한 시간.


하지만 이정도 시간은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십 수년을 참아왔는데

거기에 고작 며칠을 더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 날이 오기만 한다면.




"으....."




그녀는 달력에서 눈을 떼고

어느새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뭉치들을 쳐다봤다.


정해진 기간이 주는 중압감 때문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럽다.


거기다 구토감과 함께 폐 안쪽이 가시가 돋친 것처럼 아프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지만

요새들어 특히 자주 그랬다.


그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쿨럭! 쿨럭....!"




한참을 객담을 내뱉던 그녀는

눈을 떠 이물감의 정체를 확인했다.




"어....?"




단순한 가래라기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건만.


기침에 섞여나온 검붉은 피가

책상 위 서류와 바닥에 벗어던졌던 하얀색 드레스는 물론 

빨간색 담요에까지 잔뜩 튀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비상식적인 혈액의 양.


생각치도 못했던 각혈에 머리가 멍해진다.




“이거...뭐야....?”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의 전조에 두려움이 앞섰던가.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던 정신을 대신해

몸이 본능적으로 흔적들을 지우려고 움직였다.


다만 아무리 닦아도 번지기만 할 뿐

사라지지 않는 혈흔.


평생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일이 눈앞에 닥치니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아니, 단 하나의 생각만 머리속에 맴돌았다.


기사.


내 사랑.


늘 생각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건만 

일부러 외면해왔던 불안감.




“내가 죽으면....”




기사는 누구의 차지가 될까.


어떤 여우 같은 년이 내 반려를 채갈까.


그를 의심하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마음씨를 가진 기사는 

결국엔 마녀의 현란한 혓바닥에 넘어가 버리고 말 것이다.

 



“안돼......”




누구인지에 대한 답은 모르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절대로 안된다.


나는 이렇게 애타게 기다렸는데

나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버티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없다.


때만 기다려 날름 쳐먹는 꼴은 눈 뜨고는 못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와야 한다.


어떤 경우라도 내 곁에 있어야 한다.


나만을 바라봐야 한다.


나만을 사랑해야 한다.




-으득...!




어금니를 부숴져라 깨물었다.


더이상 뺏기지 않는다.


내걸 뺏으려는 년은 찢어 죽여도 시원찮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도록 갈기갈기 토막내 들개들에게 뜯어먹히게 해야 한다.


일어난다는 생각조차 하면 안 되는 개소리였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꽉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 그만.....그만!”




밑도 끝도 없이 빠져들어가는 망상의 구렁텅이에서 겨우 정신을 빼냈다.


이래선 안된다.


흩어지던 감정들 속에서 한참을 헤메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말로 그 약 때문인 것인지 

방금 전 나의 사고방식을 돌이켜보니

‘진심’으로 한 생각들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너무나 섬뜩했다.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여태까지 했던 건 단순히 연기일 뿐이다.


잔혹한 척 하는 연기.


광대놀음에 역으로 잡아 먹혀선 안된다.




“그런데, 벌써...?!”




잠시 증오심을 내려놓고 몸 상태를 확인해보니 뭔가 이상했다.


성녀가 식사에 섞어 두었으리라 추정되는 그 약.


그것 때문에 식사양도 최대한 줄였는데 벌써 이정도의 효과가 나타난걸까.


게다가 같은 약을 먹었을 텐데 

황제와는 증상이 달랐다.

 

....왜 다른거지?


분명 황제 때는 이런 상황이 없었는데?


단순히 피폐해지고 정신병만 생겼었는데?


왜 나는 피까지 토하는거지?


설마 다른......




“황녀님!”




문이 벌컥 열리며 시녀가 급하게 뛰어들어왔다.


처음 보는 경악으로 물든 표정이었다.


노크도 없이 들어온 그녀에게 화낼만도 했지만

그것보단 오히려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그가 나를 위해 특별히 선별했었던 메이드.


이런 무례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화를 내는 대신 나는 오히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거칠어진 호흡을 고를 틈도 없이 시녀가 급하게 내뱉은 말.




"황녀님! 기사님이....!"







"기사님이 실종되셨어요!"

 










기사 이야기 2



기사 이야기 1(안읽어도 이해하는덴 문제없음)


장편이긴 하지만 매 화를 단편처럼 만들어서 

글머리는 단편으로 올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