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터 같은 동내 초, 중,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모든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김정욱 빨리 안와?!!"



저기 소리지르는 지수와



"빨리 안오면 두고 간다?"



지수의 옆에서 작게 말하고 있는 민호와 친한 사이다.



"어, 가!"



대학교 까지 같은 곳을 온 우리, 하지만 난 늘 그랬던 것 처럼 3명이서 다닐 수 없다.



"뭘 멍때리고 있어? 우리 기다리게 했으니까 오늘 저녁은 정욱이 니가 쏴라"



지수는 가까이 다가온 나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지수의 손이 팔에 닿자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난 급히 핸드폰을 쳐다보며 교수님께 들린다는 핑계로 도망쳤다.



"다음에 꼭 사라!"



"나중에 연락해"



지수와 민호의 인사를 뒤로하고 난 몰래 숨어 그 둘을 쳐다봤고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얼굴을 붉힌채 학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욱신!



이러면 안되는데...언제부터 였더라? 내가 지수를 좋아하게 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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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까진 분명 그냥 친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수능시험을 보던 날 실수로 챙기지 않았던 도시락 때문에 힘들어 하던 내 앞에 나타난 지수는 자기가 싼 도시락을 나눠주었고 그때부터 난 지수를 친구가 아닌 여자로 보게 된 것같다.



계속해서 지수를 눈으로 쫓게 되고 지수가 장난치는 모습이 귀여워 보이고... 그냥 지수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난 이 마음을 고등학교 졸업식날 지수에게 전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정욱아, 나 사실 지수 좋아한다? 넌 나 도와 줄꺼지?"



"야 김정욱! 나 사실 민호 좋아하는데, 눈치껏 그.. 알겠지?"



따로 나를 불러낸 둘은 서로의 마음을 내게 고백했다.



애써 웃으며 둘에게 알겠다 말한뒤 먼저 집으로 온 나는 찌찔하게 눈물을 흘렸다. 한 참을 숨죽여 울던 나는 지수가 행복할 수 있고 민호와의 우정도 지키기 위해 나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을 품었고 대학에서 둘 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자주 자리에서 빠져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야, 나 오늘 고백하려고! 이따 저녁먹을때 적당히 빠져줘, 나머지는 내가 할께!'



지수가 고백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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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걸까? 어차피 지수 성격상 저녁먹고 과감하게 고백할테고 소심한 민호는 우물쭈물 고백을 받아주고 사귀게 될텐데...


스스로에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난 유리벽 너머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 둘을 바라보며 추위에 몸을 떨었다.


아까 자취방에서 옷을 갈아입은 지수는 이쁘게 보이려 옷을 얇게 입고 있어서 겨울에 감기 걸리지 않을까 괜시리 걱정이 되었다.


그때 레스토랑의 옆으로 손난로 무료나눔 이벤트를 하는 걸 본 나는 급히 알바생에게 부탁해 산타로 위장을 하고 레스토랑 앞을 서성였다.


"여기 맛있다 그치?"


"그러게? 너무 잘 먹었어"


드디어 나온 둘의 모습에 난 할아버지 목소리를 내며 지수에게 손난로를 건내며 말했다.


"호호! 이벤트 중입니다 난로 받아가세요!"


다행히 들키지 않고 지수는 나에게 다가와 난로를 받아갔지만 하나로는 부족한지 계속 난로를 여기 대다, 저기 대다, 하는 모습에 난 민호에게 말했다.


"남자친구분! 여자친구가 이쁘게 보이려고 이렇게 얇게입고 나왔는데 눈치껏 하나 받고 여자친구 줘요!"


"ㄴ..네?! 저 남자친구 아니..."


난 우물쭈물 하는 민호의 손에 난로를 쥐어준채  지수가 대고 있는 얼굴의 반대편에 난로와 민호의 손을 대버렸다.


"아.. 그... 고마워... 저기.. 김민호 나...."


지수는 내 발언과 민호의 손난로 공격에 정신을 못차리고 고개를 숙인채 민호의 손길을 느끼다 힘겹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뒤에 지수가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아서 난 산타 복장을 돌려주러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아니야... 아무것도..."


...뭐지? 약간의 안도감과 함께 나는 뒤를 바라봤다. 지수는 내가 준 난로 두개를 들고 얼굴에 댄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민호가 급히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막상하려니 부끄러워서 그런건가?


약간 들었던 그 안도감은 점점더 커져 가다 민호가 앞서가던 지수의 손을 잡아 세우는 모습을 보고는 죄책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민호가 잡은 손을 보더니 지수가 짓는 행복한 미소와 빨개진 얼굴... 난 절대 만들어 줄 수 없는 그 모습에 뺨을 두드리며 산타분장을 반납하고 둘을 계속 따랐다.


아마 둘은 분명 서로를 좋아한다는 확신이 생겼겠지? 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용기가 부족해서 저러고 있는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난 예전 지수가 했던 말이 떠올라 급하게 이벤트 용품점에 들러 눈 스프레이를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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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방향을 보아하니 지수의 자취방으로 가고 있다는걸 알아챈 나는 먼저 건물에 도착해 옥상으로 올라가 둘을 기다렸다.


아까 난로좀 챙겨올껄... 손이 너무 시리다!


몇 분이 지나자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 보니 입구에서 손을 잡고 서로 머뭇 거리고 있는 두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지수가 고등학생때 나에게 했던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나 고백할때 눈 오면 좋겠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 친구가 긴장해서 말도 못하고 있다가 내리는 눈을 딱 보니까 용기가 생겨서 고백해서 사귀게 됐다는데 너무 낭만 적이지 않냐?'


'응~~ 니 고백 받아줄 남자 없... 엌'


그땐 그랬는데 하하...


나는 옥상에서 혼자 웃으며 챙겨온 눈 스프레이를 뿌리기 시작했다.


우물쭈물 하던 지수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하얀 눈의 모습에 위를 올려다 봤고 난 급히 몸을 숨긴채 스프레이를 계속해서 뿌려댔다.


이제 용기가 좀 생기냐 지수야?


시간이 조금 지났다 싶어 아래를 다시 쳐다보니 지수와 민호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난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흐르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옥상위에서 한 참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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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정식으로 사귀게 되어 저 둘에게 이제 나의 자리는 없었다.


나는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과 다니며 둘을 피했고 가끔 오는 연락에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일방적으로 둘과의 연락을 끊었다.


지수와 민호의 앞에서 친구로 있을 자신이 없던 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둘에게 알리지 않고 급하게 입대를 하게 되었고 부모님께 내 자대의 주소를 알아낸 지수는 한 번씩 편지를 써주었다.


[야 김정욱! 너 우리한테 말도 없이 군대가냐? 실망이다 진짜... 넌 휴가 나오면 죽을줄 알아, 아 그래도 고맙다는 말을 안하면 안되겠네, 덕분에 나 민호랑 사귀고 있어 그리고 민호가 나랑 사귀더니 자기 소심한 성격 고친다면서 운동도하고 말도 많이 하고, 요즘 더 멋있어 졌다니까? ......]


지수의 편지를 읽던 나는 편지에서 지수가 기뻐하는 모습이 보이는 기분이들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직까지 마음이 조금 아프긴 하지만 이제 조금 견딜만 해진것 같네...


"뭐야 신병, 여자친구 편지냐?"


"아닙니다!"


하지만 지수고 뭐고 일단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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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고 흘러, 자대배치를 받고 6개월 동안 휴가를 나가지 못했지만 지수가 보내주는 편지 덕에 난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지수가 보내오는 편지의 내용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야, 넌 뭔데 휴가도 안나오냐? 나 심심하다고, 민호가 성격도 바뀌고 꾸미고 다니더니 다른애들이랑 논다고 요즘 나랑 잘 안놀아줘...]




[김민호 이새끼... 요즘 연락도 씹고 데이트도 안해줘서 몰래 따라가 봤거든? 근데 커플링 매장에 들어가는거야, 내가 따라 들어갔더니 엄청 당황하더라구, 얼마나 당황했는지 반지에 새기는 내 이니셜도 틀렸다니까?.....]



[정욱아 요즘 민호가 다른여자 생긴거 같아, 아니겠지? 내 착각이겠지? 미안해 너 군생활 때문에 힘들텐데... 힘들때 정욱이 너랑 이야기 하면 풀렸던 생각이나서 편지로 라도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마지막 편지가 눈물에 젖어 약간 쭈글해진채 나에게 도착한 것을 본 나는 드디어 휴가를 나가게 되었고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사복으로 갈아입은채 급하게 핸드폰을 켜보았다.


[정욱아 미안해 너 말고는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민호가 요즘 이상해... 나 힘들어...]


[나 힘들때 니가 많이 위로해 줬었는데... 왜 그땐 몰랐을까?]


[정욱아 제발.... 연락좀 해줘....편지 받아보고 있는거지?]


[남자친구도 있는 애가 이러는거 싫지? 미안해, 근데 나 정말 너무 힘들어...]


이럴수가... 힘들긴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친구긴 하지만 스스로 불편한 마음에 지수에게 답장 편지를 쓴적이 없었는데 그것 때문에 더 힘들었구나...


마지막 카톡을 확인하는 그때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정욱아?]


옆에 있던 1이 사라지는 걸 보고 지수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고 잠시 망설이던 나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김정욱....?"


예전 자신감 넘치고 밝은 목소리가 아닌 다 갈라지고 생기없는 지수의 목소리에 마음이 아파왔다. 이지경이 되도록 김민호 그 자식은....


"어... 나야, 말해 지수야"


"흑흑... 정욱아.... 김정욱... 흐읍"


지수는 눈물을 흘리며 민호가 바람을 피고 있는것 같다는 사실과 어디 말할 곳이 없어서 너무 서러웠다, 편지는 봤냐, 등등 담아뒀던 수많은 말을 쏟아냈다.


"흐읍... 미안해, 정말 너무 서러워서..."


".... 일단 민호가 바람피고 있는것 같다고 했지? 만약 바람피고 있으면 어쩔꺼야?"


"...헤어져야지 그리고 다신 얼굴도 안볼꺼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지수와 약속을 잡고 시내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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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지수야..."


민호는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웃으며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나와 지수는 그런 민호의 앞에 섰다.


"너... 진짜 바람피고 있었구나? 왜그랬어...? 왜?!! 왜?!!"


지수가 울부짖는 모습을 보던 민호는 한숨을 쉬더니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정말 나 사랑하긴 한거야?!! 만날때 마다 정욱이랑 밥 한 번 같이먹자, 정욱이는 내 말 잘 들어줬는데, 정욱이는... 정욱이는...!!! 그렇게 찾던 정욱이 여기 있네! 둘이 한 번 잘해봐!!"


뭐야...? 사귀고 있으면서 지수가 내이야기를 그렇게 했단 말이야??


"친구이야기 하는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야 김민호!! 김민호!!"


뭐가 됐든간에 헤어진것도 아니고 다른 여자를 만난 민호 녀석에게 화가나는 건 나도 지수도 마찬가지 니까...


난 소리치는 지수의 어깨를 잡아 뒤로 가게 하고 뒤돌아 가고 있던 민호를 잡아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킄... 이 새끼가...!"


"뭐가 됐든간에, 바람핀건 맞으니까 이 정도는 맞아라 그리고 지수가 널 사랑했냐고? 야 사랑하니까 눈 내리는 겨울날 얇은 옷 입고 너 한테 고백한거 아니냐?! 앞으로 다시는 지수 앞에 나타나지마라"


화가나서 쓸데없는 말을 좀 하긴 했지만 이정고면 됐다.


난 고개를 돌리는 민호를 뒤로하고 지수와 함께  지수의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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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야 그럼 나 가볼께, 힘들면 연락하고 편지 답장도 해줄테니까"


집앞에 도착할때 까지 아무 말도 없던 지수에게 작별인사를 건내고 몇 걸음 걸어가던 그때


"... 어떻게 알았어?"


지수의 물음이 들려왔다.


"응? 뭘?"


"내가 고백하던 날 전국 어디에도 눈은 안왔어, 누가 눈 스프레이를 뿌려주긴 했었지... 너 아까 분명 눈내리는 겨울날이라 그랬어"


"그...그게..."


"그날 집에서 옷 갈아입고 나왔는데 얇은 옷 입은건 어떻게 안거야?"


"...."


하여튼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내가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우물쭈물 하고 있자 지수는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날 손난로 준 산타... 너지?"


한 걸음


"그날 옥상에서 눈 스프레이 뿌려 준 것도 너구..."


한 걸음


"고등학교때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한걸음


"나, 어릴때 부터 오늘 까지 너 한테 도움받고 상처 주기만 했네..."


한 걸음


"민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맞아... 나 사귀고 나서 계속 니 생각 밖에 안났어"


한 걸음


"이럴때 정욱이라면 내 말을 들어줬을텐데... 정욱이라면 내 맘을 알텐데... 정욱이라면... 정욱이라면..."


한 걸음


"이제야 깨달은것 같아...."


어느세 그녀는 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사랑해 정욱아.... "


"흐읍!"


지수와의 키스는 내가 상상한것 보다도 훨씬더 달콤했다.


"하아...하아...지수야 너..."


"너무 늦게 알아채서 미안해... 미안해... 정욱이는 바람 안피울꺼지? 정욱이는 나 사랑하는거지? 대답해줘.... 대답해줘..."


예전의 밝고 강하던 지수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민호 때문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상태에서 기댈사람이 나 뿐이라 그런가?


지수는 내 손을 잡고 끊임 없이 나의 대답과 사랑을 요구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 모습에 난 꼭 안아주며 지수에게 확답을 주었다.


"사랑해 지수야, 걱정하지마 난 바람안펴"


초점을 잃고 떨리던 지수의 눈동자는 내 답을 듣고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아아... 정욱아.. 흐윽...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계속해서 사랑을 외치는 지수를 안아주다 진정이 된것 같은 모습에 팔을 풀려하자


"싫어!! 조금만... 조금만 더 안아줘..."


결국 그 자리에서 무려 30분이나 더 지수를 안아주었고 그럼에도 아쉬워 하는 지수를 겨우 보내주었다.


이후 휴가 내내 지수와 데이트를 하고 시간을 보내다 휴가복귀날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지수 때문에 탈영처리 될뻔한 일은... 정말 아찔했다.


지수는 그날 이후로 매일매일 부대에 편지를 보내오고 있고 난 지수에게 매일매일 전화와 답장을 보내고 있다.


만약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정욱아? 왜 어제 전화 안한거야? 나 사랑하지 않는거야? 설마 다른 여자 생긴거야? 제발 나 버리지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 미안해... 미안해...]


이런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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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전역날이 다가왔고 난 부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수에게 달려가 품에 안아주었다.


"고생했어 정욱아, 이제 매일 같이 있을 수 있겠네? 사랑해..."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지수는 여전히 내 사랑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 하고있다. 하지만 상관 없어 왜냐하면


"나도 사랑해 지수야"


나는 지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