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렌카)는 질투하지 않는다.


쫘악! 쫙! 종이가 찢기며 시끄러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남학생 기숙사에 출입하는 것은 학생회의 특권이다. 불순한 편지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지.


환영회가 모레로 다가오자 점점 더 불순한 편지가 늘고 있었다. 꾸준한 단속 결과 지난 해보다는 훨씬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남성에게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드르륵,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렌카? 여기서 뭐하니?” 행정위원이신 마르코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아! 남학생들끼리 불온한 쪽지를 주고받는 걸 발견해서요.” 렌카는 조각난 편지를 들어보였다. 저 거리에서 이렇게 찢어진 글을 읽을 수는 없겠지.


“그래, 선도 활동도 좋지만 아이들을 너무 죄이지는 마렴. 저번에 2학년들이 보낸 편지가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다던데, 이상하게 범인으로 몰릴 수도 있고 말이야.” 마르코 선생님은 서재를 뒤적이시더니 장부 세 권을 챙겨 방을 나가셨다.


“맞다, 혹시 파트너는 정했니? 올해도 너한테 보내려는 남학생들이 많은 것 같던데.”

“음, 아뇨! 아직 정하진 않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렌카가 웃어보였다.


그래, 그 애는 반드시 나한테 보내줄 테니까.


다른 년들이 매료를 건다거나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풋풋하구나, 누군진 모르겠지만 응원할게?”

“안녕히 가세요, 선생님.”

선생님이 나가시자마자 렌카는 나머지 편지들을 북북 뜯어버렸다.


첫눈에 반했다거나, 묘한 분위기에 빠져버렸다거나 하는 건 전부 거짓말이다.


잘생긴 얼굴에 안기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더러운 년들이 하는 뻔한 거짓말.


남을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하는 년들을 옆에 그 애 가게 둘 수는 없지.


그래, 그 애를 진짜 사랑해줄 수 있는 것은 나 한 명 뿐이니까.


코토하 그 아이는 그나마 다른 년들보단 낫지만 너무 어리광을 받아주는 경향이 강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상대가 바뀌도록 노력해줘야 하는 거잖아? 행동이 잘못됐다면 올바르게, 만약 날 사랑하는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면 다시 그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게.


“후-” 마지막 편지를 찢어 내용을 확인하곤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털어넣었다.


“작년에 다 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렇게나 남아있을 줄은 몰랐네.” 렌카는 피곤한 몸을 의자에 푹 기댔다.


작년은 정말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해였다. 그애가 신청받은 결투를 귀찮다며 대충대충 했던 모습이 강력한 마법을 끊임없이 난사하는 최강의 마법사라고 비춰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압도적인 일격에 끝냈다면 다른 년들이 달라붙을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이지 그 애는 뭐가 진짜 귀찮은 일인지 모르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어리숙한 점마저 마법을 쓸 때의 모습과는 다른 갭에 더 설레게 되지만.


정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그 아이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어제 날아다니는 배게 위에 늘어져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귀여워 하마터면 볼에 입을 맞출 뻔 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을 짜증날 정도로 귀찮게 하는 일은 질색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짐을 덜어주는 것도 연인의 의무겠지.


물론 도시락을 건네긴 했지만, 약을 조금 먹이는 일이 귀찮게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푹 잠들게 해줄 수 있으니 오히려 좋은 일일수도 있고 말이야.


“하- 우리 자기 너무 좋아...” 괜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애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달아오른다.


정말이지, 코토하나 다른 년들보다도 내가 훨씬 기분 좋게 해줄 수 있는데...


정말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 여친은 없었고, 밤 늦게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었으니 분명 경험은 없겠지.


그 애의 소중한 첫경험을 가져갈 수 있다니... 진짜 최고야...


내가 이것 때문에 무슨 짓을 했었는데... 절대 아무한테도 못 주지...


하, 지금 저 문 열고 들어와주면 좋을텐데...


드르륵! 다시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설마! 감았던 눈이 탁 뜨였다.


“여기 계셨네요, 선배?” 문에 서 있는 것은 그 아이가 아니라 코토하였다.


“응, 뭐 이런저런 할 일들이 좀 있어서. 여긴 무슨 일이야?” 코토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 전 읽을 책이 조금 있어서요. 조용히 할 테니 편하게 일하셔도 돼요.”

“책은 다들 도서관이나 벤치에서 읽지 않아?”

“그러기엔 조금 위험한 책이어서요.” 코토하가 차갑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어제 봤던 검은 커버로 덮힌 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도서관에서 빌리려 했지만 이미 누군가 빌려갔던 위험자료. 대출 허가를 받는 것만 해도 그렇게 힘들었었는데, 그걸 먼저 채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어제 선배 주무시는 모습이 참 귀여우시던데, 못 봐서 아쉬우시겠어요?” 뿌드득, 나도 모르게 어금니가 갈렸다.


“그런 걸 두고 천박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아마? 내가 아는 그 애는 그런 여자보단 밝고 활기찬 여자를 더 좋아하는데, 안 그래?” 최대한 미소를 지으려 애를 썼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미간에 잡히는 주름을 펼 수가 없었다.


“글쎄요? 어제 선배는 좋아 죽으시려고 하던데,” 코토하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이게 효과가 괜찮더라구요, 은근히 환술에는 약한 타입이셔서 그런가봐요?” 코토하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몽마학개론’이라 쓰인 책의 표지가 벗겨진 커버 아래로 드러나 있었다.


“어머, 하긴, 마법엔 재능이 없어서 모자란 점수를 약학으로 채우신 선배한테는 무리일까요?” 주먹을 꽉 쥔 손이 덜덜 떨려왔다.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베네눔」.” 책상 위로 흘러내린 피에서 축축한 녹색 가스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디스펠」. 말씀드렸잖아요, 선배 옆에는 제가 더 어울린다고. 마법도 제대로 못 쓰시는 분이 선배의 여자친구 자리를 노리신다니, 꿈이 크시네요.”

“닥쳐...” 단단하게 악문 이빨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런 건 인정 못해...


그 애한테 가장 맞는 사람은 나야... 내가 그 애 옆에서 지켜봐온 시간이 얼마인데... 너 같은 애가 어디서...


“어머, 그리고 방금 쓴 마법, 사람에게 사용하는 건 금지되지 않았나요? 이 소식을 그 선배가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귀찮다고 하겠지, 너 같은 애를 신경이나 쓰겠어?”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할 일 아닌가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죽여버리고 싶어, 찢어죽여버리고 싶다고! 약에 절여 가장 추한 모습으로 만들어 그 애가 스쳐 지나가듯 보게 할 거야. 다시는 이 년에 대한 생각도 하지 못 하도록.


아니면... 아니면 물고기 같은 걸로 만들어버릴까? 징그러운 모습으로 바꿔버린 다음 깜짝 놀란 그 애를 내가 안아주는 거지... 수조에 넣어서 침실에 놔둘 거야... 나랑 그 애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저 년이 했던 꿈 속 가짜랑은 다른... 진짜를 보여줄 거라고...


“후우 - ”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려면 우선은 침착함을 되찾아야겠지. 모든 계획은 그 다음이야.


“그 얘기 하려고 왔어? 어제 일 자랑하려고?” 나는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코토하를 바라보았다.


“책을 읽으러 온 거였는데, 마침 생각이 나서요. 혹시 화나셨다면 죄송해요.” 가증스러운 미소를 칼로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눌렀다.


“괜찮아, 어제 서로 새치기 하지 않기로 약속도 했으니 더 이상 이런 일도 없을 거고 말이야, 그렇지?”

“네, 당연하죠, 선배.”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책 열심히 읽어, 난 이만 가봐야겠다.”

“안녕히 가세요, 몸 조심하시구요.”

으아아아아악!!!!!!

죽여버리고 싶어!!!!!

찢어 발기고 싶어!!!!!!

그때 그년처럼 사지를 찢어서 몸만 산채로 남겨놓고 매일매일 그 아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문 앞에서 뭐해, 렌카.” 그 순간,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내 머릿속의 잡념을 전부 날려버렸다.


“응? 아, 그냥 잠깐 생각할게 있어서! 넌? 학생회 쪽으론 별로 잘 안 오잖아?”

“아, 코토하가 이쪽으로 갔다고 들어서.”

이 말을 들은 순간 무언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토하, 코토하, 시발 코토하!!!!!!!

쓸데없이 접근하는 년들을 떨어뜨려주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그런데 왜....?

왜 그 년 이름이 네 입에서 나와...?

코토하, 이 년이 이 애한테 무언가 마법을 건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으면 네가 날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코토하는... 아마... 지하 시약 비품실 쪽으로 갔을 거야... 같이 가줄까?” 나도 모르게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우고 밝은 얼굴로 내 사랑을 바라보았다.


“아냐, 괜찮아. 혼자 갈게.”

“맞다! 비품실에 뭐 두고 온 거 있는데! 같이 가자!”

“어... 그래...” 내 사랑은 늘 그렇듯 무심한 표정으로 함께 걸었다.


머릿속에서 재빨리 비품실의 지도를 그렸다. 말린 쐐기풀이 거기, 뱀 독이 그 반대쪽, 맥각이 그 왼쪽 찬장 두 번째 칸에.


“뭐해? 안 오고?” 내 사랑이 나를 돌아보았다. 저 애정 섞인 눈빛, 역시 날 가장 좋아하는게 틀림없어.


“아, 잠깐 멍 때렸네! 빨리 가자!”

“... 괜찮아?”

“응? 왜?”

“오늘따라 이상해.”

“으음... 글쎄...?” 걱정까지 해주는 거야...? 하... 너무 사랑스러워...


“너, 학생회 일로 무리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 표정에 그림자가 가득한데.”

“어, 어?”

“그냥, 살살 하라고.”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가는 이 아이의 뒤를 차분히 따라갔다.


이 애를 걱정시키다니... 다 코토하 그년이 어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괜찮아, 오늘 이 아이가 날 확실히 사랑하게 만들...


“맞다. 렌카, 너 무도회 같이 갈 사람 있어?” 내 사랑은 발걸음을 늦추고 내쪽을 돌아보았다.


“음... 글쎄? 일단은 생각 중인 사람은 있는데, 그 사람이 먼저 보내기만 기다리고 있어! 먼저 안 보내면 확 잡아먹어버려야지 하면서~” 만약 다른 년에게 보내거나 한다면... 그땐 그년을 찢ㅇ...


“그럼 나랑 갈래?”

순간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지, 지금... 뭐, 뭐라고 마, 마, 말한...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쪽에서 안 보내면 나랑 안 갈래?”

이, 이, 아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그 어떤 년도 아닌 나를... 렌카 나가노를...


“맘에 안 들면 말ㄱ...”

“아니! 좋아! 완전 좋아!”

“너 무도회 가자는 편지들 때문에 시달리기라도 했냐? 왜 그렇게 들떠...?” 앗, 너무 기뻐 보였나?

“아니, 너 1학년때도 그렇고, 2학년때도 그렇고, 다 다른 사람 줬잖아...!” 그래, 그날 다른 여자의 옆에 있는 널 보며 내가 진짜 널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었어.


그리고 다시는... 널 다른 여자 손에 놀아나게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나를... 나를...


드디어 나를...


“뭐,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둘이 엮으려는 사람도 너무 많았고,” 세상에, 부회장으로서 표창장 후보에 추천해봐야겠는걸?

“다른 사람이랑 가봤자 재미도 없고, 편하기는 네가 제일 편하니까.”

“진짜? 그거 진심이야?”

“...? 렌카, 너 팬클럽 때문에 많이 힘들었구나...” 그 아이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커다랗고 부드러운 손이 어깨에 닿는 것만으로 몸에 힘이 쭉 풀려버렸다.


다른 년에게는 해주지 않는 이런 스킨십...


참아, 렌카. 참아. 너무 기뻐도 과하게 반응하면 불편해 할 거야. 그런 여친 실격인 짓을 할 수는 없잖아?

“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옷 색깔 맞춰야 하지? 넌 무슨 색 입을 거야? 또 올 블랙?”

“음... 아마도?”

“같이 색 맞춰입는 입장도 좀 생각해줘, 까만 정장이야 괜찮지만 까만 드레스는 무슨 장례식 복장 같단 말이야.”

“그건 생각 못했는데.” 내 사랑의 새까만 눈이 생각에 잠겼다.


“안 되겠다. 조금 이따가 넥타이 사러 가자! 보라색 드레스 사 둔 거 이번엔 무조건 입어야겠어.”

“보라색?”

“응! 네가 예전에 보라색 잘 어울리는 여자가 취향이라ㄱ...”

실수했다.


“그렇게 말해도 내가 그랬는지 기억 안 나.” 눈치가 없는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도 이런 건 그냥 확 눈치 채버렸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저녁 먹고 나와! 너 또 자다가 늦으면 죽어?”

“오늘은 안 졸려.”

“그래놓고 늘 잠들잖아!”

“그래, 알았어.” 내게 지어보이는 진심어린 미소.


아까부터 심장이 멎으려는 것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이 아이가 내 거라는 걸 확인했으니, 약 같은 건 더 이상 필요없어.


머릿속에 빛이 환하게 비추는 느낌이었다. 다른 년들을 쳐내는 것은 아직 필요하겠지만, 내게 빠져들게 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아, 맞다! 아까 코토하 비품실에서 나왔지? 지하 복도로 갔을테니 지금쯤이면 학생회실에 있지 않을까?”

코토하든 누구든 상관 없어.


그래, 이 아이는 내 것이니까.


질투할 필요도, 약을 쓸 필요도 없어.


이 아이는, 나만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