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다니던 직장 선배님의 아버지 썰인데, 듣고보니까 의외로 흥미로워서 썰풀어본다.

참고로 필자는 예전부터 사진업종에 종사해서 (그때는 캐논 한국지사에 다니다가 지금은 후지필름으로 이적) 의도치 않은 TMI가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림.


그분이 옛날 박대통령 시절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라고 하셨으니까 아무리 늦어도 69년 이전인듯)에 농사짓는게 w같아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셨음. 무작정 올라오시다보니 온갖 고생을 하셔서 집에서 받은 돈+서울서 일해서 얻은 돈 해가지고 나이 스물여섯에 사대문 안의 작은 카메라집을 하나 인수하셨다고 함.

다른 카메라집과는 다르게 미군 PX에서 유출되거나 보따리상을 통해서 입수한 즉석카메라를 주로 취급했었는데, 이때는 즉석카메라=폴라로이드였던 시대라 장사가 꽤 쏠쏠하게 되었다 함. 그당시에 폴라로이드에서 판매한 웬만한 종류의 카메라와 필름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파셨는데, 주로 신문기자나 비즈니스맨, 상류층 사람들이 사갔다고 함.

그러다가 하루는 근처 신문사의 여비서가 카메라를 하나 사러 왔는데, 그시절의 즉석카메라는 지금의 물건들과는 다르게 필름을 장전하고 사용하는게 의외로 복잡한지라 과정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다보면 10분 넘게 걸린다고 함. 그러니까 설명해주려면 일단 커피랑 간단한 간식거리 꺼내서 이런저런 얘기하는것도 겸하게 되는거지.
게다가 카메라랑 필름값도 꽤 비싸다보니 하루에 5세트정도 팔면 진짜 장사 잘된날이라고 봐도 무방함.

그러다보니 설명해주다가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는데, 보니까 직장 상사가 당시 기준으로는 일반적이였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투당해도 할 말 없을정도의 수준이였음. 뭐어..성희롱은 기본에 못된짓도 시도하려고 하는데 이걸 신고하자니 당시 사회 분위기상 어렵기도 해서 속으로 끙끙 앓고있었다고 함.

그런데 일단은 그분이랑 여비서는 엄연히 다른곳의 사람이고, 이분은 카메라랑 필름만 팔면 장땡이니까 할 수 있는 말이 \'아이고..\' \'그럴수가..\'이런 탄식뿐이였고, 어차피 해가 슬슬 지려고 하는 시간이니까 이야기나 들어주고 가게 문닫고 가자는 심정이여서 최대한 귀기울여 들어줬다고 함.

얘기를 듣다보니, 그 여비서도 농촌서 자라다가 집안살림이 기울어져서 서울로 상경을 했는데, 막노동조차 할 수 없으니까 처음에는 버스 안내양을 하다가 험한꼴 당하는 동료들을 보다못해 탈주하고, 겨우 잡은 직장에서 비서로 일하는데 거기서 자기 옛 동료들이 당하던 일을 당하다보니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심해지고, 고향 친구들이나 가족도 없다보니 하소연 할 곳이 없어서 매일같이 힘들게 살았다고 함.

그러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이렇게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는 그분께서 위안을 얻게 된거지.

근데 이게 고난의 시작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냐...

그후로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 필름을 사러 가게에 여비서가 자주 다녀갔다고 하는데, 올때마다 더욱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고, 대놓고 좋아한다는 티도 팍팍 냈다고 함.

아, 이걸 까먹었네. 그 카메라집 아저씨는 고향에 이미 애인이 있어서 날마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락을 하는 사이였음.

그러니까 애인이 있는 남자한테 백날천날 대시하고 좋아한다는 티를 내봤자 뭔 성과가 있겠어. 없지. 당연히.

근데 그걸 그 여비서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냥 무작정 좋다고 하는데 무시당하니까 얘는 얘대로 또 불안해지게 된거지.

한 몇달 지났나..? 그 여비서가 돈이 어느정도 생겼는지 그 가게에서 팔고있던 제일 저렴한 카메라와 필름을 사가더래. 앞서 설명한 카메라와는 또 다른 방식의 카메라라서 여기서 설명하는데 또 시간 잡아먹는데, 이 여비서가 대놓고 고백을 한거야. 좋아한다. 사귀어달라면서.

그래서 그분이 고향에 결혼까지 약속한 애인이 있어서 어려울것 같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그 여비서가 좀 맛이 간것같다고 하더라고.

그 카메라집은 사대문 안쪽에 있었지만, 그분 댁은 사대문 밖에 있다보니 전차를 타던 버스를 타던 해서 출퇴근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웬지 모르게 뒤에서 누가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더래.

근데 그때당시에는 중앙정보부에서 대놓고 사람을 미행하던 시절이니까 \'중정 직원인가보다. 몸좀 사려야겠다.\'라면서 그냥 버텼는데, 그래도 기분이 좀 쎄~한거래. 딱히 잘못한것도 없는데 왜 중정에서 사람이 미행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거래.

그리고 매일 출퇴근하는 길을 걷다보면 항상 폴라로이드 필름 포장지나 잡다구리한 쓰레기가 길가에 버려져있으니 더더욱 쎄한 느낌이 들던거래. (잊지말자. 이당시의 폴라로이드 필름은 종이 띠를 쭉 땡겨서 필름을 뽑아내고 그 뽑아낸 필름의 한쪽면을 벗겨내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쓰레기가 생길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좀 더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기로 하고 그렇게 했는데, 하루는 집앞에 낯익은 정장 차림의 여자가 서있던거래. 비몽사몽해서 잘 안보였는데, 정신을 차리고보니 항상 필름을 사가던 그 여비서가 서있던거래.

그래서 뭔일이냐고 물어보니 최근에 잘 안보여서 물어물어서 찾아욌다고 하는거래.

이거 대놓고 스토킹한거 아니야.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 미행한거냐고 되물어봤더니 그렇다는거래. 미행하면서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기기도 했던거래.

그래서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도대체 왜 이런짓을 하냐고 물어보니까, 좋아하니까 이런건 당연한건 아니냐고 오히려 따지듯이 말하더래.

그러고는 하는말이
자기는 항상 그분만 바라봤는데, 그분은 고향에 있는 애인 핑계를 대고 자기를 밀쳐내니까 너무 슬프고 서럽다는거래. 이세상에 자기만 남겨지게 되는거냐고 그러는거래.

글이 너무 길어진데다가, 지금 또 급히 회의잡혀서 사무실 다녀옴. 이따가 기력이 남으면 이어서 쓰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