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로운 주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해가 뜰 무렵, 얀붕이가 당황한 이유는 눈앞의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딜 어떻게 보나, 메뉴가 전부 의도가 다분했다. 정력에 그렇게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부추볶음, 돼지고기 김치찜, 장어 꼬리, 굴 무침 등이 식탁 위에 곱상하게 놓여 있었다.


무슨 의도가 있는 걸까. 의심에 사로잡혀 웃을 수 없는 얀붕이와는 달리, 얀순이의 표정은 봄날에 꽃이 활짝 핀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곧 수저를 쉽사리 들지 못하는 얀붕이를 바라보고서 말을 걸었다.


"저기, 얀붕아? ...안 먹어? 자기 힘내라고 모처럼 열심히 만든 건데."


"으, 응... 먹어야지."


퇴로가 없다고밖에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이 메뉴로 보건대, 그녀가 이걸 만든 목적은 암묵적으로 오늘 밤에 잠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자,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까. 뱀에게 둘러싸인 개구리가 된 심정으로 그저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녀와의 잠자리가 싫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문제는 무엇보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즈음엔 온몸이 피로에 지쳐 당장에라도 눕고 싶어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퇴근 후의 달콤한 휴식은 회사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나 마찬가지다.


"그, 그러고 보니 나 입맛이 별로 없는 거 같아...! 다, 당연히 네 요리가 싫어서는 절~대 아니고! 뭐랄까... 오늘은 밥보다는 빵이 먹고 싶은 기분이랄까...? 하하..."


"어제 자기가 새벽에 일어나서 사다놓은 빵 몰래 먹는 거 내가 봤는데... 그건 역시 내 눈이 이상한 거려나?"


"...먹겠습니다."


더 이상의 추궁은 신세를 비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불리해질 뿐이었다. 애초에 껀덕지를 잡을 거리를 주면 안 된다고 자신을 자책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그렇지만 하나같이 요리사가 따로 없을 만큼 맛있었기에 접시를 비우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침 치곤 조금 과한 식사를 한 뒤에는, 전동 면도기로 간단하게 수염을 민 후, 헤어 스프레이로 머리를 고정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얀붕이가 출근하러 밖으로 나가려는데, 얀순이가 부르는 바람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출근 전 키스... 매일 했잖아? 오늘도... 응..."


그러자 그녀는 얼른 입을 맞춰달라는 듯 상체를 살며시 내밀었다. 평소 같았다면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이었겠으나,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직 이것만으로는 성에 안 차니 밤을 기대하고 있을게」라는 노골적인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얀붕이는 신발을 신다 말고 살짝 뺨을 붉히더니 그녀에게 돌아와 입술을 포개주었다. 


"에헤헤, 잘 다녀와 자기~. 그리고... 오늘 밤, 기대하고 있을게?"


"으, 응...! 당연하지! 나도 무척 기대되는걸?! 하하하...!"



* * *



결국 시간은 원망스럽게도 쏜살같이 흘러갔다. 신도 무심하시지, 무신론자인 얀붕이였지만 이때만큼은 속으로 살짝 원망스러웠다.


게다가 평소에는 그토록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부장도 이상하리만큼 오늘은 일거리를 주지 않았고, 되려 실적이 많이 개선됐다며 그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온 세상이 얀순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한없이 무거울 뿐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얀붕이가 도어락을 해제하고 현관문을 열자 무슨 영문인지 집안은 온통 불이 꺼져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마침내 침실로 향했을 때 속이 훤히 다 비치는 네글리제 차림으로 가슴골이 요염하게 드러난 속옷만 입은 채 침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얀순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실은 발견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라면 지금 그녀가 누워있는 저 자리는 하루 종일 격무에 치여 지친 몸을 회복시켜줄 자신만의 침대였을 것이다.


"...후후, 다녀왔어 자기? 오늘은 평소보다 정확히 11분 37초 늦었네...? 설마 다른 여자라도 만나고 온 건... 아니지?"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얀붕이는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 이 상황을 타개할 변명을 되는대로 내뱉었다.


"그, 그럴 리가!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 거, 너도 알잖아?! 다른 여자들 따윈 그저 돌로밖에 안 보인다고!"


"응, 역시 우리 자기가 바람 같은 걸 필 리가 없지... 그런데 실은 나, 다 알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얀붕이가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얀순이는 서늘할 만큼 입꼬리를 더 끌어올리며 말했다.


"뭐, 우리 자기도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저번에 함께 장 보러 갔을 때 말야. 옆에 예쁜 년이 지나가는데, 거기에 대고 좋다고 히죽히죽 쳐웃고 있었잖아?"


"...어? 내, 내가 언제...? 그런 적 없는데..."


얀붕이의 얼굴에 그제야 긴박감에 차오른 동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기억엔 없었지만, 무서우리만큼 집착하는 그녀의 습성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닥쳐, 내 눈이 항상 너한테 가 있었는데, 자꾸 거짓말할래? 몰래 보고 있으면 눈치 못 챌 줄 알았어?"


설령 자신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면 어째선지 그건 전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그걸 본능적으로 뇌에 각인시켰다.


"빨리 대답해 봐, 이 창놈 새끼야. 왜, 또 머릿속에 그 년 생각 떠오르니 말문이라도 막혔어?"


하지만 왜일까. 이때만큼은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격정이, 얀붕이의 용기를 조금만 더 북돋아준 모양이었다. 얀붕이는 얀순이의 기세에 눌린 자신의 모습도 잊고서 그간의 억울했던 감정들을 모조리 쏟아내기 시작했다.


"뭐만 하면... 뭐만 하면 맨날 바람 폈다 추궁하고! 그만...! 그만 좀 하라고 제발! 이러는 거 지겹지도 않아?!"   


그러나 그는 나오는대로 내뱉은 나머지 자신이 꺼낼 말의 의미조차 되새길 틈이 없었다.


"어, 그래! 솔직히 그 여자, 존나 예뻤다, 왜?! 대체 예쁜 거랑 사람 자체한테 끌리는 건 다른 걸 왜 이해를 못하는 건데?! 그 사람을 좋아하는 데엔 굳이 외모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어차피 내가 안 쳐다봤어도, 방금 그 여자가 예쁘냐 내가 예쁘냐고 나한테 물어봤을...!"



짜악!


얀붕이가 무어라 말을 더 잇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뭔가가 세차게 때리는 동시에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름아닌 얀순이의 손이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 봐, 다시 말해 봐... 다시 말해보라고!"


"아, 아니... 그게..." 


자신의 말에 그녀가 충격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예상보다 심각해진 상황에 얀붕이는 어깨를 파르르 떨면서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네." 


"아, 으..."


"그냥 애초에 다른 년은 쳐다도 못 보도록 철저히 내 걸로 교육시켜줄게. 방금 자기 말 듣고 확신했어."


공포와 혼란이 뒤섞여 행동할 의지도 잃은 얀붕이를 향해 얀순이의 손이 물고기에 그물을 치듯 그를 천천히 가두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감이 얀붕이의 그림자를 너무나도 쉽게 덮어버리고 말았다.


"...어디 좀 있다 그 말, 또 입밖으로 꺼낼 수 있는지 볼까, 얀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