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막상 줄려고하니, 너무 떨리는데..."


화이트데이. 남자가 여자에게 무언가를 주며 마음을 고백하는 날. 이 날을 기회삼아, 나도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그녀에게 고백을 해볼까 한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늘 그렇듯, 전날에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막상 당일이 되어 행동에 옮기게 되면, 누구나 떨리게 되기 마련이다.


"근데 왜 이렇게 안오지... 내가 너무 일찍 온 건가...?"


평소랑 다르게 아침도 거르고 일찍 학교를 출발해서 교문에 서 있는데, 그녀의 모습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던 교문엔 등교를 하는 아이들로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고, 그 아이들은 교문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는 나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아이들의 시선을, 아무렇지않게 무시했다. 평소 나를 향해 그림자처럼 따라오던 시선이었기에, 익숙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처사였다.


"앗."


그러다 마침내. 아이들 사이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녀. 수많은 아이들 틈에 섞여 있어도, 그녀의 외모는 여전히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밝아졌던 내 표정은, 얼마 안 가 빠르게 어두워졌는데.


"...이런."


얀순. 예상은 했었지만 그녀의 곁엔, 나에겐 불편한, 그녀에겐 든든한 존재가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너 여기서 뭐하냐?"


그러다 내가 잠깐 넋을 놓은 사이, 내 코 앞에 다가온 그녀와 얀순.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으며, 얀순은 늘 그렇듯, 차가운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어... 그게... 어..."


이미 그녀에게 초콜릿을 주며 마음을 고백한다는 걸 잊어버린 채 그저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나.


그런 나를 말 없이 한참 쳐다보던 그녀는, 무언가 생각 난 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너 누군지 알아. 그... 3반에, 얀붕이었나? 맞지?"


"어... 어? 마, 맞아..."


그녀가 말을 꺼내자 난 반사적으로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너무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그녀가 날 알아봐준다는 것이. 하지만 그런 기쁨도 느낄 겨를도 없이, 얀순이의 차가운 목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묻는 말에 대답해. 여기서 뭐하고 있었냐니까?"


또 다시 얼어붙은 분위기. 늘 이랬다. 어째서인지 얀순이는 내가 그녀와 말을 섞거나, 만나는 걸 싫어했고, 쳐다보는 것조차 철저하게 막을 정도로 나와 그녀의 사이에 간섭을 했다.


"아, 아니... 그게... 그냥..."


내가 말을 더듬으며 얼버무리려 하던 중, 얀순이의 옆에 있던 그녀가 팔꿈치로 얀순이의 팔을 살짝 치며 말했다.


"그만해~ 여기 서서 친구라도 기다리고 있었나보지~ 그치? 얀붕아?"


"어어... 응..."


결국 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없는 친구를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짓말을 한 뒤에야, 얀순이의 강압적인 압박은 그치는 듯 했다.


"우리도 얼른 들어가자. 얀순아. 이러다 늦겠다. 그럼, 다음에 보자~ 얀붕아~"


결국, 해맑게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 그렇게 아무런 소득 없이 그녀를 보내나 싶었지만.


"너 먼저 들어가. 난 얘랑 할 얘기가 있어서."


갑작스러운 얀순이의 발언. 이에 나는 물론, 그녀까지 깜짝 놀라며 얀순이를 쳐다봤다.


"그래애... 뭐어... 그래도 너무 늦게 들어 오진 마. 알겠지?"


"알았어."


그렇게 허무하게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른 아이들 마저 학교로 들어가버려 텅 빈 교문. 그곳엔 나와, 얀순이만이 남아있었다.


"지금 뭐하자는거야?"


"어...?"


본론으로 들어가려는듯 강하게 들어오는 얀순의 압박적인 질문. 이에 난 이해를 못한 듯 멍청하게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분명히 나랑 얀진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텐데. 그래도 지금까진 얀진이 눈엔 안 띄어서 봐줬었는데 말이야... 이젠 아예 막나가자는거지?"


"아, 아냐! 그게 아니라..."


강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해보지만, 이미 얀순이의 두 눈엔 독기 어린 살기가 품어진 채, 서서히 날 조여오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이얀붕. 백날 네가 얀진이 눈에 띈다고 한들, 얀진이가 너한테 티끌 만큼이라도 관심을 줄 것 같아?"


"......"


"주제를 알아야지. 너처럼 보잘것없고 하찮은 녀석이, 얀진이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만..."


"차라리 다른 사람이라도 찾아보는게 어때? 아, 널 받아줄 여자가 있을까? 아니, 너랑 이렇게 오래 대화를 해주는 여자도 없을..."


"그만하라고!"


참다 못한 내 외침에, 얀순이는 말을 끊은 채, 충격 받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너..."


믿을 수 없는지, 나를 향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얀순.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까지 속에 담아뒀던 말을 내뱉었다.


"넌 왜 나를 항상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왜 계속 내 앞에 나타나서 날 괴롭히냐고! 내가 언제 너랑 얀진이한테 피해라도 준 적이 있어?!"


"......"


"난... 난 그저 순수하게,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얀진이를 좋아하고 있었을 뿐이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난 너한테도, 얀진이한테도 절대 악감정이 없었다고..."


"......"


"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 얀진이한테... 순수하게... 딱 한 번만... 고백 해 볼 수 있게 해줘... 만약 얀진이가 거절하면... 두 번 다시 눈에 안띌테니까..."


"하하하하하... 하하하..."


내 울분을 들은 얀순이는 한참 동안 가만히 서서 내 얘기를 듣더니, 곧 미친듯이 웃던 그녀는, 얼마 안 가 웃음을 끊고 정색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만약 네가 얀진이한테 고백해서 얀진이가 받아준다면, 나도 더 이상 널 건들지 않을게."


그 뒤, 얀순이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만약에, 거절당하면?"


그녀의 말에, 난 약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 다시 눈에 안띈..."


"아니. 그거 말고. 그건 당연한거고."


잠시 후 이어진 정적. 얼마 안 가 얀순이가 그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한테 이렇게 까지 하고 거절을 당했는데, 고작 눈에 안띈다고만 하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뭐...?"


"보다시피, 나도 여자라서 남자한테 이런 대접을 받는게 너무 가슴아프거든. 그러니까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아야겠어."


저벅- 저벅-


말이 끝내고 천천히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얀순.


나보다 키가 약간 컸던 얀순이었기에, 나에게 가까이 온 얀순은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만약 얀진이한테 고백을 거절당하면, 내 소원을 하나 들어줘."


"소원...?"


"응. 소원. 그리고, 그 어떤 소원이라도 거부하지않고 달게 받겠다고 맹세해."


소름 돋는 얀순이의 말에 난 한걸음 물러서며 얀순이를 경계했고, 그런 날 본 얀순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널 때린다거나 그런건 아니니까 너무 쫄진 말아줄래? 그리고 만약 이걸 네가 거절한다면, 나도 너에게 얀진이한테 고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이유가 없지."


"네, 네가 뭔데..."


"얀진이의 친구니까. 혹시나 너한테 고백을 받고 충격 받을 얀진이의 모습이 벌써 눈에 아른거려서 말이야."


친구. 그 단어에 난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알았어."


결국 고민 끝에 도박을 하기로 한 나는, 얀순이의 제안에 승낙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얀순이와의 내기. 그 후, 난 조금이나마 있는 희망을 가지고, 교실에 있는 내 자리에 앉아,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얀진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생겨왔던 나의 감정, 그리고 그녀를 보며 커져가던 그녀에 대한 사랑. 내 모든것을 그녀에게 바칠 수 있다는 의지. 마지막으로 내 고백에 대한 답은, 학교가 끝난 뒤 옥상에서 듣겠다고 적은 난, 이 모든걸 몇 차례의 수업 시간이 지나서야 꾹꾹 눌러담아 완성 시켰고, 점심 시간이 되자 곧장 얀진이가 있을 5반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지...?'


몰래 점심을 걸러서 그런지 텅텅 비어있는 5반. 난 조심스럽게, 얀진이의 책상에 다가갔다.


그 뒤, 초콜릿 포장에 포스트잇을 붙여, 얀진이의 책상 속에 넣어 놓은 난, 누군가에게 들킬새라 황급하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이후 시간은, 마치 1초가 1년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초조하게 그녀의 답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수업을 당연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숨죽여 기다리던, 하교 시간이 되었다.


하교 시간이 되자 부리나케 옥상문을 열고 올라온 난, 아직 텅 비어있는 옥상을 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보단 일찍 도착해 다행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직 그녀의 답을 듣지는 않아 여전히 초조한 이 상황. 그렇게 난간에 몸을 걸친 채 그녀를 기다리기를 몇십 분.


끼익-


드디어. 굳게 닫혀있던 옥상문이 열림과 동시에, 난 밝은 표정을 지으며 내 고백에 대한 답을 해줄 얀진이를 맞이하려고 했으나.


"...얀순?"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얀진이는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엔 기분 나쁘게 웃으며 뒷짐을 진 얀순이가 날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왜..."


"글쎄, 내가 여기 왜 왔을까?"


쿵-


그 뒤 옥상문을 닫은 얀순이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더니, 뒷짐을 지고 있던 두 손을 나에게 펼쳐보여주며 말했다.


"자, 이게 얀진이의 대답이야."


그런 얀순이의 손엔, 갈기갈기 찢어진 채,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포스트잇 조각들이 있었고, 이를 본 난 경악하며 얀순이의 손을 쳐다봤다.


"자, 네가 졌네? 이제 내 소원을..."


"아니야..."


이후 싱글벙글 웃으며 얘기하던 얀순이는, 내 말을 듣곤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아니야?"


"얀진이가 이렇게 찢어놨을리가 없어."


"무슨 근거로?"


"아침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으면서 나한테 인사하던 얀진이가, 내 고백을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놓는다고?"


"글쎄, 이성으로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지."


"얀진이를 직접 만나봐야겠어."


터업-


하지만 얀진이에게 가려던 내 발걸음은, 얼마 안 가 얀순이의 억센 손길에 붙잡히고 말았다.


"누구 마음대로?"


"네 말만 믿고 얀진이가 내 고백을 거절했다고 믿을 수 없어. 그러니까 얀진이를 만나야..."


퍼억-!


"크헉...!"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복부에 들어온 얀순이의 빠른 주먹. 그것을 맞은 난, 두 손으로 복부를 감싼 채, 주저 앉으며 몸을 숙여 부들부들 떨었다.


"얀진이를 만난다고? 내가 그렇게 둘 거 같아?"


"으윽... 으..."


"내가 너한테 너무 호의를 베풀어줬나 보네. 이렇게 기어오르려고 하는 걸 보니."


콰악-!


그 뒤, 쪼그려 앉은 얀순이는 몸을 웅크린 내 머리카락을 잡아, 내 얼굴을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 맞추며 말을 이어갔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건데, 넌 얀진이 같은 년의 어디가 좋아서 이 난리를 치는거야?"


"뭐...?"


"대체 얀진이 같은 년의 어디가 좋길래, 날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면서 까지 이 난리를 치는거냐고."


"그게 무슨 소..."


짜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뺨에 날아오는 얀순이의 손찌검. 


"흐아아..."


"눈치가 없는건지, 아니면 정말 그 년 하나만 볼 정도로 멍청한건지... 내가 지금까지 널 얀진이랑 거리를 두게 한 게, 무슨 이유에선지 정말 모르겠어?"


"어...?"


그 뒤 얀순이는, 내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 너 좋아한다고."


그녀의 폭탄 같은 발언. 이에 경악하며 충격에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때, 그녀는 마저 말을 이어갔다.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내가 먼저 다가가기엔 좀 그래서, 그래도 얀진이랑 멀게 하면 너 스스로 얀진이를 포기하고 나한테 좀 더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이게 오히려 역효과가 날 줄은 몰랐어."


"......"


"뭐! 그래도 이제 얀진이는 잊고 나만 볼 수 밖에 없을테니, 전의 일은 깔끔하게 잊어줄게!"


"그게 무슨..."


내 말에 한 손에 쥐고 있던 찢어진 포스트잇 조각들을 바람을 불어 날려보낸 얀순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네가 나만 보게 하기 위해선, 방법은 하나뿐이라는걸. 그리고, 그게 내 소원이라는걸."


"내가 왜...!"


짜악-!


내가 저항하자 곧장 반대쪽 뺨에 날아온 손찌검. 너무 고통스러워 할 말 조차 잊어버리고 있을 때, 얀순이는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어떤 소원이든 거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받아들여. 얀붕아. 얀진이는 널 버렸어. 네 곁엔, 나 뿐이라고."


사형 선고나 같은 얀순이의 말에, 난 울먹이며, 얀순이를 노려봤다.


"미친년...!"


"이때까지 일부러 차가운 척하면서 널 밀어낼 때,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 줄 알아? 너도 내가 여전히 널 차갑게 대하는 여자로 생각하겠지만, 이제부턴 그런 생각 싹 접게 만들어줄게."


투둑- 툭-


그 뒤 자신의 교복 단추를 풀며, 입맛을 다시는 얀순.


"어디, 도망칠테면 도망쳐봐. 그 약하고 작은 몸으로 얼마 가지도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