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그녀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믿고 있다.


사실 평범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게,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할 때나 쓰는 표현이지,

쉽게 예를 들면 신앙심이 깊은 광신도의 경우에는 신을 믿는다는 게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 의미로 그녀가 평범하다고 믿고 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그냥 이진은 자신이 평범하다고 단정 지었다.

그냥 평범한 여고생,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나 없는 그런 평범한 여고생


뭐 돌덩이도 애완동물로 쳐주는 시대인데, 인형도 아빠가 될 수 있지.


의사소통되고 살아있거나 말거나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감정,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쏟아낼 수만 있다면 살아있건, 죽어있건, 그런 건 별로 상관이 없다.

이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에 누군가 사랑에 대해 또 가족에 대해 철학적인 질문을 그녀에게 한다면 거리낌 없이 자신의 그런 생각을 쏟아내는 데에 한치의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행위, 그리고 자기 가족의 특수성에 대해서 아무런 생리적인 저항감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기 생각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이 사회는 너무나도 보수적이었다.


물론 그녀는 자기 생각과 아빠와 엄마에 대해서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에 그 문제가 있었다.


아직 인형을 자기 배우자로 그리고 아버지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은 당혹감, 공포감,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니까,

적당히 더불어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적당히 섞여 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위장이 필요했다.


천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의 색과 비슷한 색으로 자신의 몸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그녀는 완벽하게 주위 사람들에 섞여 녹아들어 갔다.


머리 좋은 우등생, 그리고 운동 신경 좋은 스포츠 소녀, 그림이면 그림, 노래면 노래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수준급의 실력과 예쁘장한 얼굴과 몸매, 그리고 늘씬한 키는 주위 사람들을 충분히 끌어모을 만한 요인이었다.


게다가 유복한 집 출신과는 달리 굉장히 겸손한 성격은 충분히 그녀의 여러 배경을 보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진을 공격할 수 없는 방패막이로 적용되었다.


책을 숨기고 싶으면 도서관에 숨기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이라는 나무를 군중이라는 거대한 숲 속에 숨겼다.


모함 주위를 떠돌아다니는 전투기, 그리고 이지스함처럼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진 체 하나의 공동체가 줄 수 있는 보호와 안락함을 받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과연 집에 박제인형을 모셔놓는 기괴한 특이 사항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게 분명하다.


잠시 운동장에서 공 하나를 가지고 종횡무진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는 이진.


보통의 소년들 보다 단단한 체구를 가진 소년이 발로 공을 드리블하면서 성난 황소처럼 상대편 골대로 달려가는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축구를 감상하던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진아 오늘 학교 끝나고 같이 놀러 갈래?"


"아니, 미안해 나 볼일이 좀 있어서…."


"그렇구나…."


조금 전에 같이 경기를 뛴 같은 편의 리베로가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살짝 서운한 색이 비쳤지만, 대충 그녀의 입장이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금방 넉살 좋게 오른쪽 윙에게 같이 놀자고 제안을 건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리베로와 윙의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도 아쉽다는 듯이 살짝 입가를 일그러트리는 이진.


지금, 이진이 보여주는건 아주 교묘한 연기였다. 아직 리베로와 윙은 그녀에게 쓸모가 많이 있었고, 이진은 그런 둘을 벌써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딱히 학교를 마치고 나면 바로 뭔가를 해야 할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뭐, 이것저것 입시를 준비한다고 공부나 개인적인 취미로 하는 운동을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 날마다 전념할 정도로 각박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지나치게 엮이는 것이 싫었다.


체리패킹. 그녀는 집단이 주는 아주 기본적인 이점만 받아먹고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별로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서 주목을 받지 않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여자아이가 되어야 자신의 특이 사항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을 이진은 알고 있었다. 

호적상으로는 아버지가 없는 그녀는 아주 예전부터 선생들의 주요 표시 대상이 되어 왔었다.


물론, 어떤 사춘기 고등학생이 선생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좋아하겠느냐마는 이 진에게 있어서 그런 문제는 더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사전에 예고도 없이 가정 방문이라던가, 학부모 면담은 그녀를 아주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진의 어머니도 사회에서는 남부럽지 않게 자수성가한 전문직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매일 밤 자기 남편을 빼닮은 인형과 몸을 뒤섞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길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이진의 어머니는 딸과 마찬가지로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색깔로 위장을 한 채로 숨어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집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상황을 대비해서 상시 대비는 갇혀 있는 상태지만, 막상 다른 사람이 그런 돌발 행동을 하면 아주 피곤한 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정체를 들키느냐, 들키지 않으냐의 문제를 떠나서 자신의 보금자리에 누군가가 발을 들여놓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너무나 열 받는 상황이었다. 


죽여버리고 싶다, 저 물이 찰랑거리는 도자기로 뒤통수를 후려치면 픽-하고 쓰러지지는 않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 머리가 반쯤 벗어진 담임이 자신의 집에 갑자기 가정방문을 왔을 때, 이진은 거실로 들어가는 담임의 뒤통수를 선반 위에 올려져 있는 도자기로 후려칠지, 아니면 유명 선수에게 선물 받은 야구 배트로 후려칠지 격렬한 고민을 했다.


교양도 없이 실내화도 신지 않은 체 더러운 양말 차림으로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집안을 여기저기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담임을 볼 때마다 늘어나는 살의의 충동을 억지로 참아냈으니까.


웃는 얼굴 사이로 이빨이 바득바득 갈려 나가는 것을 담임은 알았을까? 


아니 분명 몰랐을 게 분명하다. 만약 그러는 걸 눈치챘더라면 동아리 고문 선생을 맡으면서 이 진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

사실 그때 한 면담 내용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진이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실리콘과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아버지는 좁디좁은 침대 바닥 아래에 잔뜩 구겨진 체 숨겨져 있을게 분명 하니까.


아빠는 그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옆자리에 아버지를 앉혀놓고 싶었지만, 세간의 인식은 아직 모녀의 기묘한 취향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에 그랬다가는 생활기록부에 한부모 가정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주홍글씨가 잔뜩 새겨질 게 분명하고, 이것은 별로 좋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곡소리가 나올 것 같은 지루한 면담, 머릿속에서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별로 무가치한 시간이었지만 면담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학교에서 잘 적응하고 있니?


분명 1학년 학기 초에 순백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주홍글씨로 새겨진 자신의 그 줄이 담임의 심기를 건드린 게 분명했다.


그리고 벗어진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30대 초의 열혈한 혈기를 가진 선생은 좀처럼 자신의 진정한 참 스승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데 필요 이상의 행동을 한 게 분명했다.


뭐…. 사람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행동은 이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지만.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학교에서 적응을 한다는 것은 이 진에게 있어서 정말 큰일이었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왔을 때의 일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아무런 방비도 마련하지 않은 집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친구를 데리고 온 경우가 왕왕 있었다.

다행히 천운으로 그 아이에게 아빠를 보여주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의 기억은 그녀에게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되도록 우리 집에 다른 사람을 초대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를 만들지 않자.


성인이 되면 함부로 남의 집에 마음대로 찾아가는 게 실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만, 그녀를 제외한 몇몇 고등학생들은 그런 게 실례인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몰상식한 경우가 많았다.


좀만 가깝다고 생각하면 오늘은 너희 집에서 자고 가자,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그런 식의 의견에는 항상 이진, 그녀의 집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조금만 친해지면 남의 집을 무슨 여관방처럼 생각하지.


그녀는 딱 질색이었다. 일단 누군가가 집에 놀러 온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로 다가왔기에 또 그리고 그 정도의 관계로 발전하면 그만큼 그녀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여러 허점들이 약점처럼 드러나기 십상이기에 이진은 인간관계를 멀리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군중 속의 고독.


말 그대로 무리에 끼어있지만, 적당히 주위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그런 관계. 같은 반일 때만 친하게 지내고 다른 반이 되면 사이가 멀어지는 그런 일회성의 관계를 이진은 좋아했다.


적당히 다른 사람이 보기에 외로워 보이지 않을 정도만 한 수준. 담임선생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관계. 


지금껏 그녀는 다른 이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회성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어서 별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일단 우아하게 생긴 얼굴과 늘씬한 몸매는 충분히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충분했다.


만류의 영장 이전에 인간도 본능을 가진 짐승, 짐승이라 하면은 당연히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암컷, 혹은 수컷을 중심으로 무리를 형성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그 무리는 오히려 이진을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천천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듣기 좋다.


동아리 시간, 이진은 학교 내에서 별로 인기가 그렇게 좋지 못한 도서부를 선택했다.


실업팀을 목표로 하는 동아리 선배, 그리고 그녀의 무리 중 몇몇 인원들이 자신과 같은 동아리에 가자는 말을 하였지만, 이진은 그 제안들은 거절했다.


그녀는 지금의 적당히 헐렁한 관계가 좋았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 고리가 생겨나 가는 것을 이진은 원하지 않았다.


무리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 주위의 관심에서 잠시 묻어갈 수 있어서 좋지만, 그만큼 북적북적 꺼리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어떤 사람의 시선에 표시가 된 체 살아가는 것보다는 북적북적 거리는 사람들 속에 묻혀서 있는 듯 없는 듯 적당히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잠시 주위의 시끄러움 속에서 멀리 떨어져 정말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조금은 저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요.


그게 바로 그녀가 많은 동아리 중 도서부를 선택한 이유였다. 표면상으로는.

이진, 그녀가 정말로 도서부를 지원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어쩜 어떻게 저렇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냐.


이진 그녀는 잠시 책에서 눈을 뗀 체 맞은편의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은 학년임을 알리는 녹색 명찰에는 노란색 글씨로 강유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강유선, 이진은 그 이름을 부르지는 못하고 혼자서 입을 살짝 달싹거리며 속으로 되뇌어보았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열병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언제부터인가 꿈속에서 유선이 나타나고, 그를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몸이 들뜨는 것을 자제할 수 없었다.


아아- 만약에 인간의 엉덩이에 꼬리가 달렸더라면, 아마 자신의 꼬리는 유선이를 볼 때마다 좌우로 요동을 치듯 흔들릴 게 분명했다.


사랑, 그건 정말 사랑이었다.


지금껏 느끼지 못한 그런 감정, 그녀는 강유선이라는 남자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그를 처음 본 이번 새 학기였다.


그리고 첫 자리 배정을 할 때 정말 우연히 유선과 그녀는 짝꿍이 되었다.

창가가 비치는 자리에 앉은 유선을 본 순간 거듭 말하지만,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지금껏 느껴왔던 어떤 두근거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두근거림과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은 현기증에 잠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짚은 그녀는 어제 창문을 열어놓고 자서 생긴 가벼운 감기겠거니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생각이 바뀌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이진은 유선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사실 친하게 지내는 것은 부차적인 목표고 조금…. 상스러운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몸을 뒤섞고 싶었다.

사랑을 나누고 싶다. 유선이랑 자는 순간까지 하나가 되고 싶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진 그녀는 조금 전에 유선이 축구공을 드리블하며 상대편 골대로 달려가는 그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짧은 반바지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허벅지 근육, 그리고 그 근육이 보여주는 폭발적인 움직임.


햇볕에 그을려서 살짝 구릿빛이 도는 유선이의 피부색은 단단한 근육과 굉장히 매치가 잘 어울렸다.


사람을 동물로 비교하면 재규어나 퓨마 같은 고양이와의 동물이 유선과 잘 어울릴 게 분명했다.


얼굴도 흐리멍덩하게 생긴게 아니라 이목구비가 살짝 앙칼져 보이는 게 고양이과 동물과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매일 밤 네 생각을 하는 걸 너는 알고 있을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유선의 단단한 목덜미에 그녀는 자신의 것이라는 표시를 단단하게 새겨넣고 싶었고, 벌려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근육에 입술 자국을 그려놓고 싶었다.


몸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풍겨오는 조금 진한 남성용 향수의 냄새와 자신과 달리 씻지 못해서 나오는 땀 냄새가 어우러져 하나의 향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풍겨오는 그 향은 이진을 충분히 미치게 하는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