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늘 불현듯 찾아온다. 

본인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간에 결국 세상이 멋대로 정해버리는 불문율에 인간따위가 이를 바꿔버리려는 노력은 전부 부질없이 흘러지나가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






참 웃기는 일이다. 

뭐가 아쉽다고 이딴 헛짓거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쓸대없는 노력에 상대가 보답을 해줄지도 미지수였다. 

대학에 널리고 널린 나 좋다는 여자들을 가볍게 흘려 넘기고 이름도 모를 여성에게 구애하는 꼴이라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나를 아는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본다면 금새 나쁜 소문이 돌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정도로 어이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지금 당사자인 내가 생각해도 알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 … 헤이즐넛 하나 맞죠? " 


" 네, 그래서… . " 


내 말을 뚝 끊어버리기라도 하듯 등을 돌려버린 그녀 탓에 나는 허탈히 웃으며 카운터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진동 벨을 들고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죽기 전 궤변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단순한 내 오기?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오래 살지 못한다. 그깟 심장병 때문에.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하고 있다는 짓이 고작 여자 꼬시기라니, 심지어 그것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우스울 뿐이었다. 

남들이 이런 내 사정을 안다면 분명 값싼 동정이나,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겠지. 


연애라면 셀 수도 없이 해봤다. 아니, 정확히는 연애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무언가였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도 없었으며, 남의 사랑을 받아먹다 설탕이 다 녹아버리면 그대로 멀어지는, 참으로 애매한 만남이 수도 없이 지속되었다. 

원인 정도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남들보다 훨씬 느린 박자로 뛰고 있는 내 심장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라면 정말 가슴 설레는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다던가. 


멋대로 흘러가는 내 머릿속 생각을 멈추듯 테이블 위에서 내 심장보다 몇 백배는 빠르게 진동하던 벨을 들고 카운터로 걸어갔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 것이 느껴질 정도로 숨이 가파오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트레이 위에 놓여져 있는 커피잔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 그녀에게 맞닿아 있던 시선은 가림막 없이 그대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던 탓에 옅은 한숨과 함께 자리로 돌아와 버렸지만 말이다. 


뭘까 도대체, 알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끌릴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일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랑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경험해 본 적도 없을 뿐더러 고작 이렇게 가슴이 뛴다는 것을 사랑이라는 감정이라 지칭하기엔 나에겐 너무 생소한 감각이었으니까. 


사실 이정도로 나빠질 관계는 아니었다. 지금 내 핸드폰엔 그녀의 연락처도 멀쩡히 찍혀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악의 없이 튀어나온 내 말 한마디 때문이리라. 


' … 근데 번호는 왜요? '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 


몇 번의 방문 끝에 얻어낸 번호, 그리고 그녀가 건네던 질문 하나에 나는 미칠듯이 요동치는 심장 탓에 머리가 아득했었고, 접두로 꺼냈던 말이, 고통에 파묻혀 뒷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채 뒤로 돌아버렸기에 충분히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비추었던 미소는 아무래도 그 날이 마지막이었으리라. 

분명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을테지. 어디 종교 권유라던가, 도를 아냐고 묻는다던가… . 원래 그런 역할은 대부분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잘하니 말이다. 


하여튼 그날 없느니만 못한 행동 탓에 묘한 경계심을 띄우고 있는 그녀였다. 

뭐, 언제든 다시 말하기만 하면 끝날 냉전이었다지만, 유감스럽게도 3일째 이러고 있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그저 미친놈으로 보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카운터를 바라보고 있으면, 다른 손님들에게 옅게 미소를 띄며 주문을 받는 모습에 짙은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도 처음엔 저 중 한명이었는데 이젠 무뚝뚝하게 날 대해버리니 참 어찌 할 방도도 없고, 원인도 나고… . 


뭐, 그래도 나름 예기치 못한 상황에 기회가 생겼으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






" 어, " 


" …… . "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가듯 나를 지나쳤지만, 그렇게 해도 여기서 도망칠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 봐야 강의실 안이고, 뒷자리에서 저 앞으로 간 것 뿐이니 말이다. 

같은 학교인 것도 방금 처음 알았고, 같은 강의를 듣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기야, 내가 그렇게 출석을 안했으니 알 턱이 있나. 

틈만 나면 병원에 조용히 틀어박혀 어디 사이버펑크에 나올 법한 모습으로 며칠을 꼬박 지낼 일도 자주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꼭 그럴 때마다 소문은 나를 괴롭히더라, 어디 또 어떤 여자랑 여행을 갔느니… 육아때문에 바쁘다던가… .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병원에 입원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은 내 지분도 어느정도 있기는 하겠다만, 그걸 굳이 알려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주었던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 여자들이란 그런 법이다. 


… 이렇게 보면 내가 쓰레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원인은 어찌하던 나에게 있을 것이다. 캠퍼스 내에서 이미지가 안좋게 흘러가는 것도 뭐 어느정도 자업자득일테니까.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모를 강의가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한번에 우르르 빠져나가는 인파들 사이로 내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그녀에게 몇 몇 남자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어색히 웃으며 회피하던 그녀는, 내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눈길 한번 주지않고 곧장 강의실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곧 점심시간이겠다. 아무래도 멀쩡하게 돌아올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 싶어 나는 나에게 다가오던 여자 한 명을 애써 시선을 회피해가며 강의실 바깥으로 따라나갔다.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고, 나는 보폭만 조금 늘려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걸음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 싶어 한 번 흘겨보던 그녀의 눈빛은 곧장 나와 맞닿았고, 불쾌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리던 탓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 밥이나 한 끼 할래요? 난 그쪽하고 대화 한번 해보고 싶은데. " 


" …… . "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말 없이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걸음이 묘하게 빨라진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말을 꺼내니 진짜 도를 믿냐고 물을 것 같기도 하고. 와, 진짜 어렵네 이거. 


" 있잖아요. 저 그렇게 이상한 사람 아닌데, 저 그쪽한테 관심있어요. " 


" …… . " 


나름 용기내어 꺼낸 말도 묵살되는 듯 했다. 나름 내 생에 첫 고백 비스므리한 무언가가 되었는데, 이렇게 단 칼에 짤려버리니 기분이 상당히 심오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빨라졌던 걸음이 대뜸 멈춰 서더니, 몇 걸음 앞서나가버린 나는 가만히 뒤를 돌아 그 광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 진짜 소문대로네요. 여자라면 한 번씩은 건드려본다더니, 이번엔 제 차례에요? " 


" …… 네? 아니 그게 무슨… . " 


" 좋아요, 밥 한끼 해요. 대신 다음부터 말 걸지 마요. " 


" …… . " 


살면서 이렇게 당황해 본 적이 얼마나 될까. 멍청하게도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이 우습기만 했다. 화때문인지, 이 이름 모를 감정 때문인지 옅게 웃음이 나와버린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그녀는 멈춰 서있는 나를 앞질러 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툭 내뱉었다. 


" 빨리 가요, 그쪽하고 같이 있는 모습 보이기 싫으니까. " 


상당히 기분 나빠할 법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상황이 즐거웠다. 타인이 내게 메달리는 연애가 아닌, 내가 메달리는 연애라. 신선하다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냥 미친놈이 되어버린 걸까. 


어쨌든, 내게 처음이 될 수도, 그게 아니라면 끝이 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






" 그거 알아요? 대부분의 소문은 살이 덧씌워지고 불려난 눈덩이같다는 걸. " 


" 그런 것 치고 제 앞에서 소문과 다른 모습은 없었는걸요. " 


" 뭐 그런거죠. 나쁘게 생각한 사람은 나쁜 것만 보인다고. 아마도. " 


" … 푸흡,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거 아녜요? " 


비웃음인지, 단순한 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띄운 그녀를 테이블 너머로 바라보고 있자니 시답잖은 대화조차 설레게 느껴질 정도였다.

의외로 심장은 무식한 존재다. 분명히. 


" 어쩔 수 없잖아요? 원래 사람은 죽기 전에 여러가지 경험과 시도를 하고 싶은 법이니까요. " 


" 곧 죽을 사람처럼 얘기하시네요. 단순한 핑계가 아니고? " 


" 그러게요. 근데 지금은 진심인데. 저 그쪽하고 남은 시간 함께하고 싶어요. " 


" … 자꾸 그쪽 그쪽 하시는데, 되게 무드없는 거 알아요? " 


" 이름을 알려 주셔야죠.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 " 


사실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갈 때마다 명찰을 몇 번이나 확인하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단지 그런 것이다. 어떤 이름도 모를 놈이 대뜸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그냥 본인이 먼저 마음을 열어주면 했으니까. 


" 됐네요. 나는 그쪽하고 깊어질 생각 없으니까. " 


" 허어, 무슨 얘긴줄 알겠네요. 그쪽이라고 부르니까 되게 정없어보인다. 제 이름 알려줄까요? " 


" 됐어요. 밥 한 번 먹고 헤어질 사이 뭐하러요? " 


얼핏 보기엔 날이 잔뜩 서있는 대화지만, 어째서인지 서로의 눈매엔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그녀가 내게 비추는 저 미소가 그저 거짓으로 포장된 것인지, 아니면 날 하찮게 대하는 것인지 나로써는 알 방도가 없었지만 묘하게 요동치는 심장 탓에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던 것 같다. 


" 이상하네. 그렇게 나오시면 본인만 힘들어질텐데. " 


" 그거 되게 위험한 발언인거 아세요? 누가보면 범죄자인 줄 알겠는데. " 


" 그리고 전 범죄자가 될 자신도 있고요. " 


" … 허. " 


나름 진심이었다. 어차피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생에 한번 미칠듯이 뛰는 심장을 움켜쥐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으니까. 


죽게 된다면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죽자. 

언젠가부터 내게 생긴 버킷리스트와 같은 일이었다. 






*






" 또 만났네요. 이정도면 운명이니 뭐니, 그런거 운운해도 되나요? " 


" 일부러 따라온 거 다 아는데, 당장 경찰에라도 연락할까요? " 


" 그럼 경찰 오기 전까지 납치해버릴텐데. 괜찮으신가봐요? " 


" … 어째 사람이… . " 


나름 그 후에도 자주 마주칠 수 있던 것은, 그녀의 강의 시간을 파악한 내가 부단한 노력을 한 것에 있었다. 

병원 일정도 최대한 맞춰 두었고, 뭐 아무리 그래도 갑작스레 쓰러지게 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죽기 전에 이정도 욕심은 신도 봐주지 않을까. 


" 아까 그 남자애 잘생기지 않았어요? 진짜 칼같이 거절하시던데. " 


" 하, 그걸 봤어요? 그거 범죄인거 알아요? " 


" 뭐, 우연찮게 봤으니 어쩔 수 없는거죠. " 


" 그리고 거절 아니에요. 저 사귈거에요. " 


" …… 네?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심장은 대뜸 요동쳤고, 그것이 어디에서 나오는 고통인지도 또렷이 알 수가 없었다. 분명 내가 본 것은 그녀와 몇마디 대화하던 남자. 그리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영문 모를 표정을 하고 뒤돌아 갈 길을 가는 남자의 모습이 전부인데. 

그 사이에 고백을 받아주고… 아니, 모르겠다. 진짜. 


" 뭘 그렇게 놀라요? 저하고 본지 얼마나 되셨다고. " 


" …… . "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심장이 옥죄어 오는 느낌은 사라지질 않았다. 

맞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며 나에게 마음을 튼 사이도 아니다. 그녀 입장에선 나를 친구 이하라고 칭해도 내가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이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왜일까. 왜 이렇게 아플까.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날 고통스럽게 만들었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묘하게 맞추어 걷고 있던 걸음의 박자를 흐트렸다.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 가쁘게 올라오는 호흡을 최대한 조절하며 멀리 떨어졌고, 한 동안 들리지 않던 발걸음 소리를 돌아볼 틈도 없이 이 장소에서 멀어졌다. 


하찮은 존재다. 고작 한다는 것이 도망이라니. 자신을 나무라기 전에, 이 망할 심장이 문제였다. 늘 1번에 저장되어있던 119를 부르고, 아무래도 그 이후의 기억은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가 맞는 말일까. 






*






나름 이제는 내게 익숙해진 천장이었다. 

몸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호스들을 보아하니 이유모를 씁쓸함에 몸서리치고 싶었다. 

그런 내 의지마저 부정하는 것인지 똑바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곁눈질로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직 겨울인데. 땀을 뻘뻘 흘리며 들어온 부모님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보였다. 

울지 말라고, 늘 있는 일이라며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목소리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아니 뭐 늘 그랬으니까. 이제는 익숙해 질 법도 한데.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니었나보다. 


부모님의 만류에도 병원에서 퇴원한 것은, 고작 1주일 뒤였다. 






*






가만보면, 좋지 않은 습관이 하나 생긴 것 같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항상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느려터진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해 줄수 있는 사람을 말이다. 

뭐, 대상은 뻔하겠지만. 어쩌면 이제 설레서 뛰는 것이 아니라, 화나서 뛰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근데, 역시 아니었나보다. 


저 멀리서 평소와 같이 걸음을 걸어가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날 왜 내가 그렇게 됐는지, 이제서야 잊고 있던 기억이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이, 불쾌하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단순히 보면 자업자득이며, 업보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납득이 되지 않을까. 부정하고 싶은 걸까. 


다가갈까. 다가갈 수 있을까. 다가가도 될까. 다시 말을 걸어도 될까.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 심장이 더 뛰어도 될까. 그정도 시간적 여유를 주기는 할까. 도대체 왜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점점 줄어드는 걸까. 


그렇게 무기력하게 앉아 있으니, 문득 시선 사이로 한 인영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눈이 차츰 시야를 좁혀가고, 그 시야 가운데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보기 싫었던 그녀가 서 있었다. 


" … 날도 추운데 뭐해요? 그날부터 보이지도 않더니. " 


" …… . "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뭘까 도대체 이 여자는. 자기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조금은 흐리멍텅한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 보니, 인상을 팍 구기며 한숨을 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이제는 잘 모르겠다. 지금도 병신같이 뛰고 있는 이 심장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내 앞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그리고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곧, 죽겠구나. 


" … 밥 먹었어요? " 


내 입에서 힘 없이 툭 내뱉어진 한 마디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긍정의 의미이며, 조금 더 과대해석 한다면 같이 먹어도 괜찮겠다는 말이겠지. 

생각이라는 쓸모없는 것은 이미 망가진 것 같았다. 


말 없이 그녀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뭐하냐고, 갑작스런 걸음에 맞추어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를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냥, 이렇게라도 느끼고 싶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내 손이, 그녀의 살갗에 맞닿아 따뜻해 질 수 있기를 바라며. 






*






정작 음식집에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와볼까 하는 레스토랑에서, 나는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그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자리 앞에 내어준 나는 허탈함에 옅은 미소를 그린 채 그녀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뭘 하는 건지,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이고 있는 건지 당연히 그녀도 알 턱이 없겠지. 

중요한 만남이 있었는지, 꽤 꾸미고 있던 그녀의 의상은 이 레스토랑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후드에 숏패딩 하나. 그저 체온을 높이기 위한 제일 간편한 옷. 그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주변의 시선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타인 모두의 시선을 합해도, 내 앞 그녀가 흘긋거리는 시선의 무게를 이길 수 없었으니까. 


" … 뭐하자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 


" 저도 그래요. 근데 이렇게라도 하고싶어서. " 


" …… 주어가 뭔데요? 계속 이러실거면 저 그냥 갈게요. " 


" 좋아하는 사람한테 뭐 하나 해준 것 없이 보내기 싫어서. " 


" …… . " 


침묵. 허공을 맴도는 시선. 어디 한 켠에서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과, 조곤조곤 들려오는 타인의 대화소리까지. 

이토록 조용할 수 있나 싶은 둘 사이의 기류에서, 먼저 요동친 것은 내 쪽이었다. 


" 미안해요. 제멋대로죠? 근데 어쩌겠어요. 이런 것 말고 같이 있을 방법도 못찾는 병신인데. " 


차마 그녀의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차츰 낮아지는 내 심장박동은 어쩌면 계속 낮아져, 조만간 멈춰버릴 것 같이 식어 있었다. 

참 바보같았다. 죽기전에 한다는 짓이 고작 이딴거라니. 

뭐든 막무가내였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죽기 직전 이렇게까지 판단력이 흐트러질 줄 몰랐다. 그녀 입장에서는 날 뭘로 생각할까. 진짜 뭐 이딴 놈이 다있어. 참으로 우스운 기억으로 남겨질게 뻔하다. 


" 하아… 소문이 가짜인 것도 알고 있었는데, 이정도로 둔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내가 미안해요. " 


" …… . " 


말 뜻의 의미를 헤아리려 연신 머리를 굴려봤지만, 착잡하기 그지없던 내 머릿속을 더 헤집었다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연갈색의 눈동자.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내 모습. 


" 거짓말이었어요. 근데 그렇게까지 화내며 가시면 제가 사과할 틈도 없잖아요. " 


그냥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짓말이라고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알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멋대로 상상하고, 거짓이라며 부정하고. 내심 내 생각이 사실이라며 믿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이미 미쳐버린 것 같다. 



" 좋아해요. 마지막 고백이 될 텐데. 받아 주실래요? " 




요동칠대로 요동친 감정 사이 옅게나마 꽃피우던 사랑이라는 무언가는, 





" …… 아니요. " 





무참히 짓밟힐 뿐이었다. 






*






차라리 다행일까? 

아니, 이런걸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은 복잡했고, 천장은 계속 파도치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제 뭐가 중요한가 싶기도 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싶기도 했다. 아니,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전부 사라질 텐데. 


' 잠깐만요, 잠깐만! ' 


마지막으로 날 붙잡으려던 그 외침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슨 말을 하려고 날 붙잡으려던 걸까.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다. 

부질없다. 어제 그토록 쓸대없이 뛰던 심장 탓에 나는 병실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고, 저 바깥 너머 창문엔 내 속도 모르는지 쨍한 태양이 병실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커튼을 쳐버렸다. 


저 태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니까. 






*






얼마나 지났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심장 기증자도 생겼고, 수술 일정도 잡혔지만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일이 없었다.

심장은 요 근래 다시 살만해진 것 같았다만, 머릿속은 전혀 아니었다. 


바깥을 멍하니 걸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으며, 걸음은 정처없이 길을 떠돌 뿐이었다. 


그냥 왠지 끝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성공 확률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고, 심지어 확률이 그렇게 높다는 눈치도 아니었으니, 내심 가족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 앞에선 웃었지만, 의사와 함께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듯이 조용해졌으니까. 


마지막 오기라도 부려볼까. 

심장이 느리게 뛰는 것이 원인이라면, 늘 빠르게 뛰고 있으면 괜찮아 지는게 아닌가 하는 멍청하고도 바보같은 생각. 


이제, 내 심장을 뛰게 할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는데. 


아니. 


없었는데. 가 맞을까. 






*






요 근래 급격히 몸이 피로해진 느낌이 강렬했다. 

묘하게 호흡이 느려졌고, 하루에 18시간 이상 잠만 잘 정도로 몸에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왜 스러저가는 불꽃 속으로 나는 장작을 더 집어 넣고 싶어 하는 걸까. 

이제서야 죽음이 두려운 건지. 요새 기복이 너무 심해졌다.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의미겠지. 


느릿이 병실 한 켠에 종이가방 안에 있던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지, 의출이 아예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였다.


나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마지막이 될 지라도 한번 더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었다. 

목적지야 뻔했다. 물론 가는 길에 금은방에 한 번 들리긴 했지만, 아마 이 행동은 조만간 후회할 지도 모르겠다. 






*






" 어서오세… . " 


" … 헤이즐넛, 따뜻하게요. " 


" …… 왜 이제 왔어요? " 


"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 또, 또 그 말투. 제가 대신 답해드릴까요? " 


희미한 웃음이 절로 띄워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난 변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변했구나. 


" 이끌린거에요. 그리고, 이건 제 대답이기도 해요. " 


말의 의미를 헤아리려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연갈색의 눈동자를 난 수도없이 마주했구나. 익숙했다. 무언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나와 대화할 때 늘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하염없이 후회하기 시작했다. 

왜그랬을까. 

도대체 왜, 알면서 왜 그랬을까. 


이제와서,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결코 이 만남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결국 난 그녀에게 상처만 주고 떠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홀로 남은 네 모습을 상상하기 싫어서. 


우리가 더 깊어지는게 너무나 무서워서. 

이후 밀려올 슬픔이라는 것이 두려워서. 


" … 어쩌죠. 전 이제 그쪽한테 관심이 없는데. " 


심장이 요동친다. 

알고 있다. 내가 하는 짓이 얼마나 병신같은 짓인지. 

깨닫기엔 너무나도 늦어버린 것이다. 희박한 확률을 두고, 그녀에게 나라는 존재를 각인 시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단 사실을. 

곧 없어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해 온 행동들은 전부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릴테니까.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토록 나를 마주하고있던 눈이 요동쳤고, 나는 바라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 … 왜 그때 안멈췄어요? 그때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왜 다 듣지도 않고 바로 가버린거에요? 처음엔 그런 이미지 아니었잖아요. 뭐든 장난스럽고, 다 받아줄 것처럼 하더니, 왜 하필 그런 날에만 그렇게 진지하고 감성적인 건데요? 그렇게 아니라는 이미지 다 만들어놓고, 왜. 왜… . " 


엇갈려도 너무나도 엇갈린 사이였다. 

늦은건 나 뿐만이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이미 늦어버렸고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을 뿐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길 원하던 과거의 나를 원망했다

오지 말걸. 그러지 말걸.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 걸. 


" … 잠깐 나와봐요. " 


카운터에서 나와 앞치마를 벗어던지던 그녀는 동료의 당황스런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잡아 이끌었다. 

옷깃 너머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체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상당히 몸이 약해진 나는 그녀의 팔을 뿌리칠 수 없었고, 그대로 끌려 나가듯 카페를 나오니,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감싸왔다. 


그리고 떨어지는 새하얀 결정. 


" 장난치는거에요? 그렇게까지 해놓고 이제와서 뭐? "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정당한 분노. 원인은 내게 있었으며, 대상은 당연히 나. 


" … 당신한테는 그렇게 사랑이 우습구나. 한 번 쓰고 버릴 만큼. 아니, 쓰지도 않았겠네요? " 


그 한마디에, 터질 듯 요동치던 심장은 결국 끝을 맺은 것 같았다.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강가에 계속해서 빠지는 느낌이었다. 

더 깊게, 끝도 없이 깊게. 


다만,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면 위로 길게 늘어뜨려오는 미약한 빛줄기를 잡으려 허우적댔다. 

의미 없는 것을 알면서도. 





*






강가에 물이 한번에 빠지는 것마냥, 나는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익숙해지기 싫은 이 감각이 이제는 끝났으면 했다.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하는 이 심장따위 처음부터 없었으면 좋았을텐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익숙한 천장… 이 아니다. 


무언가 그렁그렁 맺히는 것이, 뚝 하고 내 볼기짝에 떨어졌고, 이는 곧 턱선을 타고 마치 내 눈물인 것 마냥 흘리기 시작했다. 


참, 울기는 왜 울까. 내 앞에서 전혀 울지 않을 것 같은 이가 하염없이 눈물샘을 터뜨리고 있었다. 


" … 누가보면 죽는 줄 알겠네요. " 


" …… . "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을 가리려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본인의 얼굴을 가리고 싶은 것인지 소매로 연신 얼굴을 비벼대던 그녀는 아직 눈물샘의 여파로 먹먹해진 목소리로 조용히 내뱉었다. 


" 평소로 돌아왔네… . " 


웃고 싶지만,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대충 짐작은 간다. 갑자기 쓰러진 날 보고 119에 전화하고, 아무래도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내 작은 희망에 불과하겠지. 


" 궤변이네요. 그렇게 날 싫어하는 사람이 나때문에 슬퍼하는게. " 


" 난 단 한번도 싫어한다고 한 적 없어요. " 


" …… . " 


심장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은, 나 혼자 알고 있던 비밀이었건만, 저 옆에서 작은 산들을 그리며 내 심장박동이 빨라졌다는 것을 알리는 기계 탓에 아무래도 비밀은 여기까지 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최대한 상처받길 바라며. 


" 제가 말했죠. 이제 그쪽한테 제가 관심이 없다고. " 


" …… . " 


" 슬슬 나가주실래요? 외부인이 이러는거, 제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일이 커질텐데요. " 


당황을 감추지 못한 그녀의 눈동자는 또 한번 요동쳤다. 또 이렇게 되버렸구나. 그렇게 웃는 모습이 좋았고, 보고싶었는데. 

당황은 금세 분노로 변한 것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쓰레기새끼. 사람의 감정을 그저 소모품 취급하는.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 결코 완성될 수 없이 사라질 뿐인 소모품이니까.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결국 상처로 막을 내릴 뿐인. 


그럼에도 이런 선택지밖에 떠오르지 않는 나를 원망하지 않길 바랬다. 아니, 원망하길 바랬다. 

내가 사랑해 마지못한 그녀가 아파하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으니까. 


참, 우습기 짝이없는 감정이다. 필요할 때 꺼내어 쓰고, 이제는 억지로 버려야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둘을 감싸고 있던 적막 사이로 삐- 거리며 빠르게 울려대는 저 기계음이 원망스럽기만했다. 

알아채지 못하길 빌며, 한 시라도 빨리 그녀가 나가주었으면 하는 바램은, 조금 다른 의미로 변질되어 이루어졌다.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다시 어두운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깊고, 다시는 들어가기 싫을 정도로 공허함과 무력감이 드는 이 공간은 언제 느껴도 이질적이기만 했다. 


내일이, 오지를 않기를 빌며. 






***






의도를 모르겠다. 

나는 그를 알고 있지만, 그는 나는 알지 못한다는 눈치였다. 아니, 모르는 것이 당연할까? 


소문이 어떻든, 그저 남일거라고 생각했던 그이가 최근 내 눈에 자주 비친다는 것에 처음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또 한개의 장난감을 몰색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학과 내에 그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과 소문이 맴돌았다. 늘 좋지 않은 쪽이 주된 관심사였지만, 아무렴 나는 그의 본질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게의치 않았다.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대상의 관심이 나에게 쏠린다는 것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를 제대로 알고 대한 여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봤다. 외모만 보고 판단하던 다른 동기들은 이미 한차례 치여 뒷담을 하기 바빴고 나는 그 대열에 차마 올라탈 수 없었다. 


매일같이 카페 앞 고양이에게 간식을 던져주며 해맑게 웃던 모습이나, 무신경해보이지만 간혹 보이던 그의 모습은 늘 누군가에게 무엇을 앗아간다기 보단 챙겨주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가다 간혹 시선이 마주치려 할 때면 일부러 고개를 틀었다. 아직 그이는 내가 같은 대학을 다닌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를 알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매번 병문안으로 가는 병원 입구측엔 늘 기부명단을 대문짝하게 걸어놨고, 항상 그 위에 있던 이름은 보기 싫어도 눈에 띄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명단의 제일 위, 세 글자는 그의 이름과 똑같았다. 


딱히 알아보려 한 적은 없었지만, 어느샌가 내 기억속에 박히던 그의 모습은 차츰 크기를 불려 나갔다. 

카페 앞 투명 유리창 너머로 간혹 보이던 그는, 언제는 폐지를 줍고 카트를 끌던 할머니의 카트를 대신 끌고 지나가기도 했으며 간혹 카페에서 커피 여러잔을 시켜 누군가에게 주는 모습도 여러번 봐 왔었다. 

단순한 이미지 관리라기엔, 어렴풋이 진심이 느껴졌기에 소문이라는 거짓된 프레임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문득,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 번호좀 줄래요? " 


" …… 네? " 


말 없이 옅은 미소를 띄우며 핸드폰을 무작정 건네는 그에게 나는 빨려들어가듯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물었다. 


" 번호는 왜요… ? "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오기 전부터 고대하던 순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거짓이었다. 

보통 번호를 따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나. 상대가 내게 관심이 있었기에.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는 그런 눈치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보였다. 본인의 의지임은 확실해 보였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조금 애매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그의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문득 소문이라는 것이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꼭 자신이 불리한 상황일때는 꺼내져 오는 걸까. 


또 한 명의 장난감을 몰색하려는 건가? 


헛된 희망은 버리기로 했다. 그저 그에게 놀아나지 않기 위한 방어태세를 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이고 그는 나에게 다가왔지만, 정직하게 건네어준 내 번호로 연락이 오는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 거라고. 





*





평소 강의실에 있던 인원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출석을 부르며 그날따라 유난히 이질적인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병원 한켠에 있던 익숙한 이름과, 영원히 들리지 않았던 그 대답이 한 날 한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 강의를 들었던 사람인지, 아니면 이번에 새로 수강신청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괜한 추측으로 괜스레 볼이 붉어졌다. 


혹여 나를 보러 온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습기 짝이 없는 망상이겠지만. 


하지만 그런 내 희망이 짓밟인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부정당한 것인지 그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참 알 수 없는 남자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밥을 먹으며 느낀 점이지만, 사소한 배려가 몸에 묻어나왔다.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한 행동임이 느껴질 정도였으며, 내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그의 연갈색 눈동자엔 항상 내가 비춰지고 있었다. 

빠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때 즈음, 한 번씩 퉁명스럽게 대답해주었다. 마냥 좋다고 웃으며 대답해주는 그의 모습에 묘한 감정이 나를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어쩌면 진작에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날 진심으로 대하려 하고있고, 나는 그 모습에 설레여 되려 틱틱거리는 거라고. 


또 괜스레 나를 '그 쪽' 이라 칭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으로 불러줘도 좋지 않을까? 아니, 그렇다면 내가 금방 넘어가버릴까. 이름따위는 아마 진작에 알고 있을텐데. 같은 강의실 출석을 부르거나, 늘 카페에서 내 명찰을 뚫어져라 바라봤으면서. 

알려줄 때까지 부르지 않겠다는 것인지, 묘하게 귀여운 구석도 있는 남자다. 


너무 깊이 빠져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나는 그를 다시 한번 밀어냈다. 

적어도 그이가 얼마나 진심인지는 알고 싶었던 나의 욕심 때문에. 






*






그 후 강의실에서 그는 날 볼때마다 따스한 캔커피 하나씩 건네주며 조용히 멀어졌다. 


조금은 말을 걸어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미간이 구겨지고 말았다. 


' 빨리 가요, 그쪽하고 같이 있는 모습 보이기 싫으니까. '


언젠가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그에겐 상처가 되어 이렇게 된 게 아닐까?

본인의 소문을 알고 있는 이에게 그런 험담까지 내뱉고 그 이상을 바라는 내가 잘못됐다는 것을 왜 알고도 멋대로 바라는 걸까. 

세심한 배려와 같은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리니 되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젠간 꼭 사과하리라. 아니,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가도 될까? 

나를 너무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 모르겠어. 잘. 





*





" 아… 미안.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 


" …… 그래? 왠지 그럴 것 같긴했는데. 근데 조심해. 걔. " 


" … 뭐? " 


" 아냐, 다음에 또봐. " 


어이가 없었다. 저새끼가 뭔데 그이를 소문만 듣고 판단하는지도 모르겠고, 자기는 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란건가 뭔가? 

괜스레 어이가 없어져 돌아가려 하니, 내가 떠올리고 있던 그 사람이 내 시야에 비친다. 

내심 반가워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꾸욱 참았다. 혹여 내 마음이 들킬까봐. 내가 너에게 빠져버렸단 것을 네가 알아버릴까봐. 


" 하, 그걸 봤어요? 그거 범죄인거 알아요? " 


" 뭐, 우연찮게 봤으니 어쩔 수 없는거죠. " 


우연은 무슨, 일부러 날 찾아다는 것도 이젠 다 알고 있는데. 

괜스레 그를 놀려주고 싶었다. 장난기 가득 담아 말하고 싶었지만, 어째서인지 표정이 잘 움직여지질 않더라.


" 그리고 거절 아니에요. 저 사귈거에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 마음은 지금 너에게 향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무 흥분해 버린 내 심장 탓에 아무래도 뇌는 일시적으로 기능을 멈춰버린 것 같았다. 주어가 빠져버린 탓에 그는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 …… 네? "


왜지, 왜일까? 평소에 그렇게 퉁명스레 대해도 웃음을 지우지 못하던 그가 심히 당황해 있었다. 

어째서지. 이상하다. 내가 알던 그가 이정도에 휘둘릴 사람이 아닌데. 


이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장난스레 내뱉으려 했던 말은, 


" 뭘 그렇게 놀라요? 저하고 본지 얼마나 되셨다고. " 


그의 당황한 모습에 놀라 굳어버린 내 표정 탓에 쐐기를 박는 꼴이 되어버렸다. 

어쩌지? 어떡하지. 왜그랬지? 지금이라도 장난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마음을 뺏겨버린 내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굳어버린 그의 모습 탓에 되려 나도 당황해버렸고, 말 없이 멀어지는 그를 잡으려 움직이지도 못했다. 

점점 빠르게 멀어지는 그에게, 나는 끝을 선고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보같아. 


왜 네 앞에 있으면 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건지. 


미안하다고 말 할 것이 하나 더 늘어버렸다. 


그래도 내일이면, 다시 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






힘들다. 

너무 힘들다.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굳이 머릿속에서 다시 끄집어 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떠올리면 다시 아파져서, 내 마음이 갈가리 찢긴 채 다시 합쳐지지 않는 것 같아서. 


벌써 3일째 같은 거리를 서성이고 있다. 

늘 그가 찾아오던 카페엔 소음과도 같은 인파소리만 가득할 뿐이었고, 그의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저 창문 너머로 해맑게 웃으며 걸어오던 그의 모습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날도 추운데. 들어와서 나와 얘기좀 하지. 그렇게 좋아하던 거였잖아. 




6일째. 

불안하다. 이대로 끝나버린 건 아닐지. 이런 나에게 상처받고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이게 더러운 질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인은 내게 있고, 그 모든 책임도 내가 져야만 했으니까. 

주머니 속에서 따스하게 내 손을 감싸고 있는 것은 결코 그의 체온이 아니었다. 

그저 인위적인, 열을 내기위해 존재할 뿐인 사랑도 없는 소모품에 불과했으니까. 






*






1주일째. 드디어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허망하게 내리 깔린 시선에, 묘하게 초췌해진 것 같은 몰골에 그만 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나때문일까? 내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일까? 혹여 건강이 안좋은 것은 아닐까.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하지? 

이미 내 발걸음은 제자리를 찾아가듯 그에게 향하고 있었고, 가까이서 마주한 그이가 너무나도 반가워서, 너무나도 보고싶어서. 


" … 날도 추운데 뭐해요? 그날부터 보이지도 않더니. " 


내가 이토록 널 찾고 있었는데. 

왜 이제서야 널 만났을까. 허망함과 안도의 한숨. 그리고 다시는 놓치기 싫다는 그 감정 어딘가. 도대체 내 심장은 어떻게 되먹은 쓰레기인걸까. 


" 밥 먹었어요? " 


그 한마디에, 의미모를 안도감이 한 번에 물밀듯 밀려왔다. 

아직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구나. 다시 가까워 질 수 있구나.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깨우듯, 그는 내 손목을 잡아 이끌어갔고, 핫팩에 닿아있던 손이 바깥으로 삐져나와 찬바람에 섞여들기 시작했지만, 그이가 내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따스하게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차갑던 그의 손. 널 위해 따뜻하게 데워둔 내 손의 온도를 네가 느낄 수 있도록 꼬옥 잡았다는 것을 그는 알까.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가던, 무슨 상황인지 중요치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과해야할까. 

이 순간까지도 자신보다 먼저 내 테이블을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기분좋은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왜일까. 그의 눈은 모든걸 잃은 듯이 허탈하게 날 바라보고 있었고, 그 눈동자에 색채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메말라 있었다.

괜한 불안감에, 툭 내뱉은 한마디. 


왜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는 걸까. 


" 뭐하자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 


" … 저도 그래요. 근데 이렇게라도 하고싶어서. " 


" 주어가 뭔데요? 계속 이러실거면 저 그냥 갈게요. " 


" …… 좋아하는 사람한테 뭐 하나 해준 것 없이 보내기 싫어서. " 


좋아한다. 

그 한마디에 심장이 요동친다. 


그러다 또 한번 요동친다. 보내기 싫어서. 

보낸다. 보낸다… . 


아니, 보내기는. 

이제 다시 그런 실수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 하아… 소문이 가짜인 것도 알고 있었는데, 이정도로 둔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내가 미안해요. " 


바보같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는 네가. 


" …… . " 


" 거짓말이었어요. 근데 그렇게까지 화내며 가시면 제가 사과할 틈도 없잖아요. " 


더 이상 나때문에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 좋아해요. 마지막 고백이 될 텐데. 받아 주실래요? " 



그런 그이의 고백에, 나는 숨이 멎는 것과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간질거리던 심장은 터질 것 같았고, 이제는, 그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묘한 전율마저 느껴지는 듯 했다. 


마지막 고백. 아니, 아니. 

그럴 순 없다. 연애로 끝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다. 

어쩌면 더 이상 널 놓치고 싶지 않다는 내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어서였을까. 


연인 이상의 관계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 내 입장에서 고백해도 괜찮을거라 생각했다. 


" 아니요. 제가… . " 


뒷 말을 미처 이어나가지 못했다. 

무언가 뚝 끊겨버린 인형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힘 없이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붙잡으려 일어났지만 그는 결코 멈춰서지 않았다. 

애처롭게 그를 불러봐도, 그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다. 왜, 왜 끝까지 얘기를 듣지 않는거야. 왜 마지막 고백이라는 단어를 쓴거야. 

왜 제멋대로 전부 끝내버리려 하는 거냐고. 





*





저번엔 1주일이었다. 

1주일… 도대체 난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딘걸까. 



며칠이 더 지나고, 나는 깨닫기 싫었던 것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1주일이라는 시간은, 놀랍게도 짧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30, 30번이었다. 


그를 만나지 못한 채 저무던 태양의 횟수가. 





*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자리에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혹여 그가 올까봐. 아직도 그의 체온이 내 손에 닿아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그가 해맑게 웃으며 내 앞에 서있는 것 같은데. 

환영이 보이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너무나도 그가 그리웠던 건지. 

내 앞에 보이던, 그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초췌해진 그의 모습이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꿈일까. 아니, 꿈이지 않길 바랬다. 


" …… 왜 이제 왔어요? " 


너무나 반가워서. 


" …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 또, 또 그 말투. 제가 대신 답해드릴까요? " 


이제는 난 알 것 같은데. 


" 이끌린거에요. 그리고, 이건 제 대답이기도 해요. " 



드디어, 내 진심을 말할 수 있어서, 좋았어야 했는데. 그래야만 하는데. 



" … 어쩌죠. 전 이제 그쪽한테 관심이 없는데. " 


무언가 내 머리를 쌔게 내리친 느낌이었다. 

꿈이 아니길 바랬던 현실이 다시 꿈이었으면 하는 바램에 뒤섞여버린 머릿속은 그저 자신에대한 혐오와, 그에 대한 원망으로 커질 뿐이었다. 


내가, 내가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더 예전부터 내가 그렇게 그를 대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나는, 왜. 


" … 왜 그때 안멈췄어요? 그때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왜 다 듣지도 않고 바로 가버린거에요? 처음엔 그런 이미지 아니었잖아요. 뭐든 장난스럽고, 다 받아줄 것처럼 하더니, 왜 하필 그런 날에만 그렇게 진지하고 감성적인 건데요? 그렇게 아니라는 이미지 다 만들어놓고, 왜. 왜… . "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장난이라며 좋아한다고 말해주길 빌었다. 

그리고 알기 싫어도 알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바꾸기 힘든 것은, 사람 마음이 아닐까 하고. 


어느날 그가 했던 것처럼 그의 손목을 잡아 바깥으로 향했다. 

차가웠다. 마치 얼어버린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차가웠다. 

얼마나 추웠을까. 

내 손으로 널 녹여줄 수만 있다면 난 얼마든지 너와 붙어있을 수 있는데. 


그런데 왜. 


" 장난치는거에요? 그렇게까지 해놓고 이제와서 뭐? " 


제발, 뭐라도 대답해주길 바랬다. 어떤 변명이든 좋으니, 아니 거짓말이어도 좋으니까 제발. 

내게서 멀어지려는 모든 말을 부정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에게선 아무런 답변도 들을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한 겨울의 우리는,


" … 당신한테는 그렇게 사랑이 우습구나. 한 번 쓰고 버릴 만큼. 아니, 쓰지도 않았겠네요? " 


어쩌면 계절이 끝나가듯, 똑같이 끝나는게 아닐까. 


손목을 잡고있던 손에서 무언가 스르르 빠져나간다. 


어, 어… 안되는데. 


이게 아닌데. 






*






" … 그러니까, 심장병 때문에…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인지. 무엇하나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았다… . 


잘 모르겠다.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부정도 여러번 해보았다. 

그럼에도 내 앞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움찔거리던 그의 눈꺼풀이 열림과 동시에, 내 눈물샘도 터져버렸나보다. 


" … 누가보면 죽는 줄 알겠네요. " 


바보같은 사람. 


" 평소로 돌아왔네… . " 


그래도 그런 그의 모습이 좋았다. 늘 밝고, 장난스레 웃으며 세심하게 남을 배려하는 그런 성격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 궤변이네요. 그렇게 날 싫어하는 사람이 나때문에 슬퍼하는게. " 


" 난 단 한번도 싫어한다고 한 적 없어요. "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할까. 이런 너를 어떻게 싫어할까. 

오히려 점점 커지고 있는데. 


" 제가 말했죠. 이제 그쪽한테 제가 관심이 없다고. " 


또, 또 같은 얘기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그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이다. 


" …… . " 


" 슬슬 나가주실래요? 외부인이 이러는거, 제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일이 커질텐데요. "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네 심장은 그토록 빠르게 뛰고있는데. 

왜 그렇게 아픈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뱉는걸까. 


" …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거야. " 


다 알아. 그러니까, 이젠 대답해줄 차례잖아.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마. 끝을 마주하기엔 난 너무 너에게 가까이 있고, 그 끝이 절벽이라해도 난 따라 들어갈 것 같으니까. 


삐── 하고 길게 울리는 소리는. 


그의 대답을 듣지 못할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를 불안감.


그리고 내 온전한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전부 집어 삼키는 것 같았다. 








***








입술이 말라있다. 

호흡기가 달려있는지 의식하며 숨을 내쉴 때마다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고 온몸은 피곤하다는 듯이 침대에 달라붙어 있었다. 


살아있다. 가슴이 요동치는 것이 워낙 느낌이 새로웠다. 

느리게, 천천히 뛰던 심장이 아니었다. 


곁눈질로 내부를 이리저리 훑어보니, 간호사가 황급히 내게 달려온다. 

곧장 의사를 호출하는 것인지 내부는 금새 소리없이 소란스러운 느낌이 되었고, 이것저것 체크하던 의사는 안도의 눈빛으로 자리에서 나갔다. 


아무래도 전부 잘 끝난 모양이다. 

아직 익숙치 않은 것인지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어쩌면 본래 이것이 정상적인 심박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결국, 스러져가는 불빛은 다시 커지고 말았나보다. 





*






어째서인지 그녀가 찾아올 것 같았지만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당연한가. 마지막 수술일로부터 2달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눈을 뜨지 못한 탓에 포기했을지도 모르니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뭐, 모든 심장 수술이 그렇듯 말이다. 

나중엔 꼭 심장 주인분의 가족분들을 뵈어 사례해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거의 1달가까이 병원에서 지내듯이 했다는 부모님의 말에 가슴이 아려왔다. 

다시 그녀를 봐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모진말을 했었다.

자기위로일지는 몰라도 심장 이식수술을 마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당장에 10년만 하더라도 50%까지 줄어든다니, 고작 절반의 확률에… . 


어지러웠다. 그녀의 생각을 할 때마다 적응할 틈도 없이 쿵쿵대는 심장 탓에 커피를 연달아 3잔정도 마신 느낌이었다. 


며칠을 고민했다. 물론 그녀에게 연락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는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사랑은 이젠 내게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언제 떠나버릴지 모르는 몸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그저 미안하고 두렵기만 했다. 


잘못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아직 그녀가 날 사랑하기 전에 끝내버린다면, 차라리 슬픔이 덜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저 나 혼자만의 판단이며, 이게 잘못됐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방법으로도 행복할 수 없다면 불행을 가장 크게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낫지 않겠나. 


여전히 심장은 뛰고있다. 

누굴 향해 뛰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왜 뛰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






눈물 샘이 마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알았다. 


누군가를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보지 못한다면 사람이 미쳐버린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어쩌면 그에게 사랑을 주고싶어 안달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조만간이다. 얼마 남지않았으니까. 


그는 반드시 눈을 뜰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자. 


제일 먼저 나에게 전화해줄 테니까. 


너에게 준 번호로 처음 네가 전화해주는 순간을 기다릴 테니까. 


네가 깨어날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사랑한다고. 다시 한번 제대로 속삭일 수 있도록. 


















" …… 근데, 너 지금 나한테 말도 안하고 어디가는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