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적한 주말 아침의 카페.


아직 오픈시간 전이라 손님 하나 없이 조용해야 할 카페 안은 이상하게도 소란스러웠는데 그건 카페 내부에서 벌어진 일련의 대치 상황 때문이었다.


그 가녀린 몸 어디에서 저런 힘이 나오는 건지 거대한 낫을 든 소녀와, 그녀와 마주보고 있는 나.


"어딜 도망가려는건가요! 이 악당!"


"잠깐만 엘레나! 그 낫 휘두르기 전에 내 말 좀 들어봐!"


왜 저런 소녀가 날이 시퍼런 낫을 든 채 나한테 휘두르고 있냐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핑크머리 소녀의 이름은 엘레나.


따로 말할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녀는 히어로고 나는 악당 조직의 간부다.


그리고 난 지금 내 정체를 그녀에게 들켰고.


이정도면 그녀가 나를 향해 저 거대한 낫을 휘두르는 이유가 이해됐을까.


"그 더러운 입으로 제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방금전까지 내가 서 있던 바닥에 정통으로 꽂히는 거대한 낫.


빗나가긴 했지만 그녀는 나름 진심을 다해 휘두른 모양인지 낫의 궤적에서 터져나오는 풍압 만으로 이미 카페의 내부는 반쯤 폐허가 되어버렸다.


내 퇴직금… 정확히 말하자면 복지 하나만큼은 이상하게 좋은 조직에게 받은 휴가비지만 다신 조직으로 돌아가지 않을 내겐 퇴직금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도 그녀가 팔을 휘두르는걸 보자마자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 아수라장에 나뒹구는 의자다리처럼 내 다리 두짝정도는 이미 날아갔겠지.


뭐, 요즘같은 세상에 돈만 있다면 다리 두짝정도야 다시 붙일수 있다 해도 이건 너무 정 없는거 아닌가.


그래도 우리가 알아 온 시간이 있는데.


"진짜 전부 오해라니까! 난 처음에 네가 히어로인줄도 몰랐고 조직은 이미 반쯤 관뒀다고!"


지금 이 카페도 악당일 때려치우려고 만든 곳이란 말이다.


"그러면 저번에 저랑 싸운 건 누군데요?"


"..그건 내가 맞긴 한데. 그, 사정이 있었어… 총수님이 이번 전투엔 꼭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거짓말쟁이, 당신같이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악당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해요."


괜히 대화를 시도해본걸까.


그래도 방금까지는 말을 걸 여유는 있을정도로 낫을 휘둘렀지만, 지금에 와서는 피하는 것조차 간당간당할 정도로 엄청난 속력의 공격이 내게 쇄도해왔다.


"이러다가 팔다리 날아간다고! 요즘엔 다시 붙일순 있다 해도 잠깐만 진정해봐!"


눈에 띄게 빨라진 공격 속도에 나는 기겁하며 그녀에게 제발 진정해달라 부탁했지만


그녀는 발정기의 코뿔소마냥 눈 앞에 보이는 게 없는 듯 나를 향해 계속 돌진해왔다.


"괜찮아요. 당신같은 악당에게 팔다리가 붙어있다면 금방 도망가 버릴테니까요. 그렇지, 탈옥할지도 모르는 감옥보단 아예 치료도 못받게 저희 집 지하실에 묶어놓는게 더 좋겠네요!"


"그건 무슨 소리야! 그럴거면 차라리 감옥으로 보내달라고!"


"제 마음을 가지고 놀아놓고 그런 말이 나와요? 팔은 남겨서 밥 정도는 스스로 먹을 수 있게 해주려 했는데 반성하지 않으시겠다면 어쩔수 없네요."


그녀의 눈에 도는 붉은빛 안광을 본 순간, 나는 좆됐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저건 무조건 진심이다.


아 제발,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이 세계에 빙의한 걸까.


소설이 갑자기 ntr 드리프트를 치길래 5700자를 박은게 이런 협박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큰 죄냐는 말이다.


"이제 그만 단죄하세요!"


아, ㅆ..


날카로운 무언가가 내 연약한 살갗에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내 의식은 수면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




공산당 히어로, 제목부터 특이한 이 소설은 한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이었다.


멋진 초능력을 사용하는 다른 히어로와는 달리 몸집만한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악을 처단하는 핑크빛(적색 계통) 마법소녀의 이야기라…


게다가 후반부에 와서 능력을 각성하면 망치까지 휘두른다!


벌써 재밌을 것 같지 않나.


그런데 왜 과거형이냐고?


작가가 갑자기 최면어플을 개발한 악당을 내보내더니 주인공이 세뇌 NTR 당했다면서 이야기를 끝내버렸거든.


그래서 나는 분노를 5700자의 편지에 꾹꾹 눌러담아 작가에게 보냈고


이쯤되면 다들 예상이 갈거다.


당연하게도 나는 소설속에 빙의해버렸다.


그것도 주인공, 엘레나에게 가장 먼저 죽는 허접 악당 간부로.


물론 꼴에 악당 '간부'인 만큼 전투원들의 뒤에서 놀다가 작품의 중반즈음에 가야 등장해 최후를 맞이한다지만 죽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최대한 살아남으려 발악하기로 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히도 조직 탈퇴였다.


내가 주인공과 얽힐 일이라곤 악당과 히어로로서의 관계뿐.


그러니 내가 악당이 아니라면 주인공과 관계있는 일도 생기지 않을거란 단순한 생각 정도야 금치산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조직 하나 탈퇴 하겠다고 총수를 만나야 할 줄은 몰랐지.


이걸 원래살던 세상 기준으로 따지자면 완전 과장 하나가 사표를 냈더니 회장이랑 면담하는 상황인데.


그런 상황보다 더 최악인 점이 있다면 날 직접 죽이진 못하는 회장과는 달리 총수는 수틀리면 날 물리적으로 직접 없애버릴 수 있단거다.


"조직을 그만두겠다고?"


혹시나 앞에서 실수를 해 내 존재가 먼지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긴장하며, 조직 탈퇴를 위해 만난 총수는 소설에서 묘사했듯이 흑발의 엄청난 미녀였다.


외주는 돈 많이 깨진다고 그 흔한 일러 하나 안 뽑아 오던 작가였는데, 이렇게 실제로 볼 일이 생길 줄이야.


내가 상상했던 소설의 묘사 그대로 루비라도 박아넣은 듯 빛나는 붉은 빛의 눈동자와 우유보다 뽀얀 하얀 피부, 흑단처럼 검고 부드러운 머리칼, 날 바라보며 웃음 짓고있는 저 아름다운 얼굴.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악의 조직같은걸 만들지 않았어도 배우같은 일로 먹고 살법한 한점의 조각같은 외모였다.


그리고 이제 그만 조직에서 나가겠다는 내말을 듣자마자 그 아름답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네, 요즘 일을 많이 해서 그런가 너무 피곤해서 말입니다."


"피곤하다라…  그래, 내가 요즘 일감을 많이 몰아주긴 했지.


옥좌라도 되는지 거대한 흑빛 의자에 앉아있던 총수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 톡 건드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네 말의 뜻은 휴가를 달라는 거지? 그럼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예? 아니, 그게 아니라.."


"카일, 설마 우리가 어렸을 때 약속했던걸 까먹은건 아니지? 우리 같이 세상을 지배하자 했잖아."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아닌데요…


"총수님, 그건…"


"어렸을 적의 약속이라고 은근슬쩍 넘어갈 생각은 하지도 마. 그리고 둘이 있을 땐 헬렌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총ㅅ…"


어느샌가 저 높이 있던 옥좌에서 내려온 총수는 그 자그맣고 부드러운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천천히 훑었다.


"헬렌. 총수가 아니라."


가까이서 바라본 그녀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고, 코 밑을 지나간 손가락에선 달콤하면서도 아찔한 체향을 풍겼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건, 지금 날 압박하는 그녀의 행동은 이전까지만 해도 일개 소시민이던 내가 저항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것은 절대 아니었단 사실이다.


"아,알겠습니다. 헬렌님."


초원에서 사자를 마주한 얼룩말의 심정이 이랬을까.


살면서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수준의 위압감을 마주친 내 몸은 순식간에 내 제어에서 벗어나 그녀의 통제만을 따르는 인형이 되어버렸다.


"경어도 쓰지 말고."


"알겠어. 헬렌."


"그래, 이래야 너 답지. 우선, 사직서는 안돼. 이건 반려하도록 할게."


그녀는 내가 기껏 수기로 몇일간 정성들여 적은 사직서를 봉투에서 꺼내보지도 않고서 반으로 찢어 버렸다.


"그러면.."


"대신에 무기한 유급 휴가 정도는 줄 수 있어. 네 첫 휴가기도 하니까 휴가비도 조직에서 지원해 줄게. 물론 조건이 한가지 있어."


"조건?"


"그래, 조건. 무기한 휴가이긴 하지만 조직이 복귀를 요구할 경우 바로 돌아오는거야."


"..."


이거 완전 사기계약 아닌가?


알겠다고 답하고 이제 휴가를 즐기며 문 밖을 나서려는 그때, 나한테 복귀하라며 요구할 생각이겠지.


"그런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진 말아줄래? 이래뵈도 네가 그렇게 바라보면 상처 받는단 말이야."


터무니 없는 요구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쌀쌀맞게 바라본 모양이다.


이거야 말로 방금의 조건은 이런 명줄을 재촉하는 행동이 생존본능을 뚫고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란 증명아닐까.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거야. 애초에 우리 조직은 너 없이도 잘 굴러간다는건 네가 가장 잘 알고 거고."


부끄럽게도 그게 맞을거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이 몸뚱아리의 원래 주인은 하는 일마다 오히려 망치고 다니는 쓰레기 였으니까.


보면 볼수록 어떻게 이딴 녀석이 간부가 될수 있었는지 의문만 드는 그런 놈이었다.


"알겠어, 네 말대로 무기한 휴가로 할게. 대신 외진곳에 건물 하나만 구해줄수 있을까? 커피숍이나 하나 작게 해보고 싶은데."


"그래, 잘 생각했어. 네 통장은 칼렌한테 가서 받으면 될거야. 간부들 재산은 걔가 관리하고 있으니까. 건물도 그녀가 알아서 해 줄거고."


"그래."


"언제쯤 연락할지 모르니까 핸드폰은 꼭 켜두고 있어. 그리고 커피숍이라… 나중에 한번 마시러 가볼게."




조직과 간부의 자산을 관리하는 재정 담당 간부, 칼렌.


총수가 말한대로 통장을 받기 위해 찾아간 그녀는 거대한 서류의 산에 파묻힌 채 여러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아, 카일씨 오셨네요!"


턱밑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온 고개를 들며 내게 손을 흔드는 칼렌.


그녀의 푸석푸석한 금발이 그녀가 겪고있는 서류더미의 고통을 잘 알려주는 듯 했다.


그녀는 인사하려 팔을 들 힘도 없는지 팔을 연체동물처럼 좌우로 허공에 몇번 휘적거리고는 서랍을 열고 은행에서 볼법한 사각쟁반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무기한 휴가를 받으셨다고요?"


"네, 첫 휴가니까 제가 조직에 필요해질 때 까지 푹 쉬라던데요."


"흠, 다신 돌아오지 말라는 완곡어법 아니었을까요…"


"예?"


"아,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 이건 그동안 받으신 월급이랑 휴가비가 든 통장이고 이건 부탁하신 부동산 계약서에요. 계약은 이미 제가 처리 했으니 몸만 가셔도 된답니다."


내게 내밀어진 쟁반 위에 올려진 서류 뭉치와 통장, 인감이나 신분증 따위의 것들.


빌런의 신분으로는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을테니 위장 신분도 필요했는데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이야.


그나저나 이정도 능력은 있어야 간부를 하는 거구나 싶다.


그 짧은 시간에 내가 원하는 조건의 건물 하나와 위장 신분을 구해줄 정도의 능력이라니.


"감사합니다."


"뭘요. 이게 제 일인데요. 그리고 만약에 조직에서 쫓겨나셔도…"


"뭐라고요? 아까부터 뒷말이 잘 안들리는데."


"그,그냥 혼잣말이에요. 카페 차리신다 하셨죠? 나중에 시간 나면 한번 가볼게요."


"예, 수고하십쇼."


칼렌은 아마 원작 소설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 간부일거다.


내 기억에 칼렌이란 이름의 간부도 없고 소설에 나온 간부들은 전부 전투 담당이었으니 말이다.


이런게 소설과 진짜 세계의 차이점이겠지.


그나저나 아까 계속 조용하게 혼잣말을 하던데 무슨 내용이었을까.


뭐, 별 내용 아니였겠지. 신경 끄고 내 것이 된 건물이나 한번 구경하러 가보자.


현실에선 건물주는 커녕 내 집 마련도 못했었는데 전이하자마자 이런 행운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다니.


근데 생각해보니 건물을 계약한건 위장신분이니까 내 명의가 아닌가?


그렇게 조직을 나와 이제 내 소유가 된 건물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대감 탓인지 날개라도 돋친듯 가볍고 신속했다.




"여기가 내 돈으로 산 건물…?"


주요 상권과는 한참이나 떨어지고, 사람이 여길 지나다니긴 하나 궁금할 정도로 한산하고 더러운 거리.


노숙자나 비행 청소년들이 자주 들락날락 했는지 이미 따여져있는 정문의 자물쇠.


빛 하나 들지 않아 음산한 거리의 정경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깨져있는 유리창.


내 휴가비와 월급으로 구매한 건물은 정말이지..


"정말 완벽해!"


커피 장사할 생각 아니였냐고?


말도 안되는 소리. 그동안 간부로 일하면서 번 돈이 얼만데 그깟 열매 씨앗을 태운 뒤 우린 잿물을 뭐하러 파냐.


그럼 대체 건물은 왜 산거냐고?


현대사회에서 생필품처럼 싼건 몰라도 건물이나 차처럼 비싼걸 사면 세무조사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지금은 조직이 건재하니 칼렌같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여러 복잡한 일도 처리할 수 있지만 나중에 조직이 망하고 나면 어떡하나.


그때 내 돈은 전부 장사해서 번 돈이라고 거짓말하기 위한 위장 신분이지 절대 커피숍 따위를 열심히 할 생각은 아니다.


그런데 대체 왜…


"장사가 잘되는거냐고!!!"


대체 그놈의 인스타 감성이 뭐길래 손님이 끊이질 않냔 말이다.


커피가 좋은 것도 아니다.


막심, 그것도 골드가 아니라 빨간거다.


주문이 들어오면 내가 하는 일이라곤 전기 포트를 킨 뒤 끓는 물을 찻잔에 담고 커피 스틱을 하나 붓는 것 뿐.


근데 저 놈들은 그 싸구려 커피를 지들끼리 커피 맛이 뛰어나다, 산미가 훌륭하다, 분위기가 좋다 거리며 한껏 가득 띄워주고 있다.


대체 내가 꿈꾸던 놀고먹는 백수 한량의 삶은 어디로 가버렸단 말인가.


"이대로라면 안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알바를 뽑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 성실한 삶이 몸에 배어 돌이킬수 없게 되버렷…!


물론 내 아까운 돈을 알바에게 갖다 바칠 생각은 없기에 사람이 적게 오는 오전은 내가 맡고 알바에겐 피크 타임에만 최저시급으로 일을 시킬 생각이다.


이것이 진정한 악의 조직 간부의 면모 아닐까.




"알바 뽑으신다길래 왔는데요!"


알바 모집 공고를 붙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한 소녀가 밖에 붙여 둔 모집 공고를 들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넌 내 노예다.


"계약서는 이미 작성해 뒀는데 읽어보시겠어요?"


"네!"


호구를 낚으려면 준비가 철저해야 하는 법.


미리 계약서는 준비해 놨고 이제 저기에 서명만 한다면 6개월짜리 지옥 알바 계약이 완료된다.


"좋네요! 바로 서명하면 될까요?"


"그럼요."


종이 위에 자신의 이름과 서명을 남기는 그녀.


이걸로 이제 낙장불입이다.


"그러면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그나저나 이름도 안 물어봤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엘레나입니다!"


"예?"


"엘레나라고 합니다!"


너가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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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써보려니 잘 안되네..


얀데레들의 유혈 캣파 보고 싶은데 내 뇌내망상으론 이게 한계인가 싶다..


개인적으로 얀데레 하렘만큼 모순적인 단어가 없다 생각함..


남주의 사랑을 독차지 하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게 정석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