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래. 잘 했어. 문, 문! 문 좀 빨리 닫으라고. 들키기 전에.

헤헤헤, 숨 좀 고르라고. 여기 있으면 '당분간' 안전할 거야.

쯧쯧, 팔 좀 깊게 베였구만 그래? 그러게 왜 굳이 고생을 사서 하려고 하시나.


워, 워, 진정해. 칼 집어넣어. 해칠 생각은 없다고. 내 다리를 봐. 이런 병신같은 몸뚱아리로 어떻게 널 해코지 하겠어?

불안하면 몸수색이라도 해 보라고. 저항은 안 할 테니.

믿어주는 건가? 좋아. 그럼 초면에 미안한데 말이야, 물 좀 먹여 주겠나? 보다시피 손도 다리만큼이나 병신이 돼서 말이야.


푸하, 고맙네. 보기보단 친절한 사람이군 그래?


아, 너, 여기 잠깐 앉아봐. 땀 좀 닦고.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구만 그래? 편히 앉으라고.

아마 당황스럽겠지. 넌 분명 공작 영애를 납치한 도적을 소탕하라고 보내졌을 텐데, 오히려 그 아가씨가 너한테 눈깔 뒤집고 칼을 휘젓고 있으니 말이야.


넌 속았어.

'공주'는 야. '도적'은 저 공주님이고.


뭐? 그럼 내가 사실 공작이냐고? 저 아가씨가 도적이냐고? 뭔… . 뭐 이런 빡대가리가 다 있어? 네 눈깔엔 내가 귀족처럼 보이냐?

아, 아, 미안해. 요새 좀 정신이 오락가락 해서 말이야. 이해 좀 해 줘. 몸뚱이가 이러니 머리도 맛이 가나 봐. 이해해 주는 건가? 고마워.

나가기 전에 말야, 네가 왜 속았는지 한 번 들어 볼텐가? 어디서부터 잘못 됐는지 말이야.

좋아. 나도 입이 좀 근질근질했거든. 저 여자 말고 사람을 본 게 얼마 만인지 .


뭐부터 말할까, 그래. 네가 들은 이야기 중 절반은 맞았어.

난 도적이야. 그리고 저 여자는 네가 찾던 그 영애고.

그런데 왜 널 죽이지 못해 안달이냐고?

진정해, 이 친구야. 지금부터 얘기해 줄 테니까.


나는 .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근육 돼지 병신들은 아니지. 난 대가리로 남을 털어먹고 사는 스타일이거든. 힘만 쓸 줄 아는 곰탱이 새끼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꾀 부리는 여우가 돼야 한단 말이야.

자랑은 아니지만, 내 짱구 덕분에 제법 큰 규모의 도적단에 들어갔어. 도적 치곤 크게 성공했지. 오로지 대가리만으로 부두목이 됐으니까 말이야.


뭐, 우리는 국경 근처에서 여행자들이랑 상인들 등을 쳐먹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

그게 어딜 봐서 평화로운 거냐고? 푸헤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무튼, 아무리 평화롭게 살아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 결국 우리 패거리 중 한 놈이 제법 직급 높은 귀족 나으리를 쳐죽여버렸어. 그 부인은 실컷 따먹고 죽여버리고.

난리가 났지. 당장 저 배은망덕한 도적 놈들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 얼마 안 가 믿을 만한 토벌대가 우리를 쓸어버리러 왔지.


맞아. 네가 찾던 저 아가씨 말이야. 저렇게 어린데도 칼질을 제법 잘 하더라고?


하지만 너무 방심했지. 저 아가씨에 호위 기사 달랑 둘만 붙여주고, 도적 떼를 쳐죽이라고 보낸 거야. 무슨 싸구려 음유시인 노래도 아니고 . 결국엔 기사 두 놈은 모가지가 날아갔고 저 아가씨는 잡혀 들어왔지. 보다시피 싱싱하잖아? 저 허연 피푸에, 하늘거리는 금발에,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


애들은 미치지. 이걸 어떻게 그냥 넘어가?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생각했어. 저 뇌근육 덩치새끼들하곤 다르게 세상 물정 돌아가는 걸 좀 알고 있었거든.

우리가 이 년을 따먹겠다고 또 시비를 털면? 그 땐 죽도 밥도 없는 거지. 그냥 싹 쓸리는 거야. 이 병신 같은 삼총사의 백 배는 되는 병사들이 우릴 단두대에 밀어 쳐넣겠지.


그 꼬라지를 생각하니 짱구가 저절로 굴려지더군. 일단 이 멍청한 새끼들을 손절하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일단 말단 졸병 놈들이 저 년한테 손 못 대게 제지를 했지. 대드는 새끼는 죽여버렸고. 저 아가씨도 처음에 경계하더니 계속 말 걸어주고 밥 좀 건네주더니 날 믿기 시작하더군.


바라던 바였지. 분명 높으신 분이 잡혀 들어왔으면 증원이 올 테니까 말이야. 그 난리통 속에 몰래 빠져나가고, 설상 잡히더라도 이 아가씨한테 좋은 인상을 남기면 빠져나갈 껀덕지가 생길 거 아냐? 그래서 최대한 '선은 지키는 도적단'을 최대한 연기했지. 저 아가씨 제법 쉬운 여자더라고? 나중 가서는 깔깔대며 나랑 수다도 떨더라고. 지 잡아온 도적 새끼랑 같이 말이야. 웃기지 않아?


결국 결전의 날이 왔지. 아니, 결전이라고 하기도 뭣하지. 사형 집행일이라는 표현이 맞겠어. 딱 내 예상대로 백에서 이백 정도 되는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더군. 아무리 우리가 규모 큰 산적단이라고 해도 말이야, 잘 훈련받은 정규군이랑 도적 나부랭이들이랑 상대가 될 리가 없잖아? 처음엔 어떻게 비빈다 싶었다가 확 밀렸지.


나는 그 년과 함께 산채 밖을 향해 달렸어. 배신자라고 욕지거리를 퍼붓는 동료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 내가 뒤질 것 같은데 남 목숨 따위 알 바야?

그렇게 뛰고, 뛰고, 또 뛰는 와중에 사고가 하나 터졌어. 놈들이 산채에 불을 지른 거야. 우릴 아예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아. 숲 하나를 통째로 태워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산채 망루 중 하나가 불타다가 우릴 향해 덮쳐오더구만. 그래서 몸을 날려서 그 아가씨를 구했어. 나도 깔리진 않았지만 다리가 좀 크게 그을렸지. 씨발, 그 때 내가 왜 그랬는지 .


왜 구했냐고? 저 년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던 것도 있고, 나머지는, 글쎄, 동정심이라도 들었나? 아직 어린 나이에 산적들한테 잡혀 뒤진다는 게 불쌍해서 그랬었는지도 모르지. 몰라, 썅. 이제 와선 알 바야?


그게 내 인생 최악의 실수였는데.


영애는 참으로 고맙게도 못 걷는 날 짊어지고 도망치더라고. 헤, 그냥 병사들한테 가면 병사들이 알아서 잘 해줬을 텐데 말이야. 아가씨는 살고, 난 죽고. 간단하잖아. 근데 그 아가씨는 눈물 펑펑 흘리면서 날 업고 가더라고. 솔직히 좀 감동이었어. 그 땐 찡해서 살아 나간다면 착하게 살아야겠다 다짐하기도 했지. 근데 지금 이 꼬라지를 보면 하느님은 날 평생 나쁜 새끼로 살게 하려나 봐.


우리는 낡은 폐성으로 들어갔어. 아주 오래 전에 감시탑으로 쓰다가 버려진 성이었지. 영애는 거기서 내 상처를 돌봤어. 직접 사냥해서 고기도 가져오고, 열매도 따 오고, 물도 길어오고, 아주 지극정성이었지. 누가 보면 지 가족 돌보는 줄 알 정도로 말이야. 산채에서의 생활의 연장이었지. 입장이 조금 바뀌었지만 말이야. 수다도 떨고, 어쩌다 한 번은 흥에 겨워서 저 아가씨가 뺨에 키스를 한 적도 있었지.


설렜냐고? 그럴 리 있냐, 등신아? 지금 내 꼬라지를 보면 모르겠어?


아, 왜 이 꼬라지가 됐냐고? 애초에 저 년을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아니, 버린다는 표현은 맞지 않지. 내가 저 년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그냥 갈라질 때가 돼서 서로 갈 길 가야 하는 때가 온 거야. 그래서 어느 으슥한 밤에, 마침 다리도 거의 다 나았겠다 야반도주를 하려 했지.


그런데 딱 걸렸어. 왜 걸렸을까? 아니, 애초에 그 때 왜 깨 있었을까? 모르겠어.


그 씨발년은 내 발목을 베었어. 씨발, 발목을 베었다고. 그래놓고 뭐라 중얼중얼 거리더라고. 솔직히 뭐라 그랬는진 모르겠어. 아파 뒤지겠는데 그딴 게 귀에 들어오냐? 어쨌든, 그러곤 내 종아리에 횃불을 지지는 거야. 이해가 돼? 지가 고쳐준 다리를 그 썅년은 또 분지르고 지져버린 거라고! 이해가 돼!?


후우 . 미안. 아무튼, 산채에서의 생활의 연장의 연장이 시작됐지. 전보다는 좀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말이야. 그 년은 웃으면서 최대한 예전처럼 날 대하려고 하더라고. 그런데, 솔직히 시발, 그딴 일을 겪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어!? 니미럴 씨발 어떻게!?


그래서 내가 얼굴 잔뜩 구기며 살고 있으니 그 년이 이번엔 내 쌍판에 주먹을 갈겨대더라고. 면상에 주먹이 박히자마자 딱 느꼈지. 아, 이건 내가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뒈지겠구나 하고 말이야. 최대한 연기를 했지. 이번엔 산채에서의 생활의 반전이 된 거야.

영애는 도적이 됐지. 난 붙잡힌 공주님이 됐고 말이야.


얼마쯤 지났을까? 나한테 수배령이 붙었더군. 공작 영애를 납치한 사악한 도적에게서 아가씨를 구해낼 용감한 전사를 구한다고 말이야. 뭔, 옘병,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처음엔 모험가들이 개떼처럼 달려들더군. 산적 무리도 아니고, 산적 한 놈한테 영애가 사로잡힌 거잖아? 게다가 보상은, 너도 알다시피, 금화랑 이 고성을 준다고 했고 말이야. 누가 이런 횡재를 놓치겠어?


근데 저 아가씨도 아주 영악해졌더군. 솔직히, 누가 알겠어? 사실 영애는 도적을 납치하고 낡은 감시탑에 칩거하고 있는 납치범 겸 도적이 됐다고 말이야. 그 년은 현상금 사냥꾼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칼빵을 밀어넣더군. 나머지 놈들은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도 못 하고 말이야. 설령 알았다고 해도 말이야, 누가 공작 영애 상대로 칼빵을 꽂아넣을 수 있겠어? 영애 배 한 번 쑤셔준 다음에 "사실 영애가 산적이었습니다" 라 보고하면, 공작이 믿을 것 같아?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그렇게 몇 놈 흘러넘기고, 싸울만한 상대는 베어넘기더군. 사실 방심했을 뿐이지 저 년 칼솜씨는 제법이니까 말이야. 또 그렇게 몇 놈 속여넘기고, 몇 놈 베어넘기고, 이번에 네가 굴러 들어왔단 말이지.


이제 알겠어? 넌 속은 거야.


뭐야, 나가려고?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데.


너도 알고 있지? 여기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정문 하나 뿐이야. 네가 하늘을 날 수 있으면 모를까 다른 곳으로 새는 것도 불가능하고.


오히려 내가 네 명줄을 늘려준 거라고.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알지?


저 소리 들려?


그래. 저 소리.


가까이 오고 있어.


누가? 뭐겠어. 그 년이지.


화내지 마. 내가 욕 먹을 이윤 없다고. 어차피 넌 여기 온 순간 뒈질 운명이었으니 말이야.


오, 이런.


"나가."



잘 가게, 젊은 친구.

하늘나라 천사님들한테 안부 좀 전해 달라고.



"당장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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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1권 분량 소설 써 볼까 하다가 단편으로 찍 싼 것

응애 나 아기 얀붕 돌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