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찰칵찰칵-


내게 쏟아지는 섬광도, 이젠 익숙해졌다.

아니, 이 자리도, 이 분위기도 익숙해졌다.


“웨이터! 이번 긴급 기자회견을 한-”


“아아, 이제부터 말할 거니까 진정하쇼.”


하여간 기자들이란, 성질만 더럽게 급하고 

머리에 든 거라곤 없는 똥멍청이들 같으니.


“피차 바쁜 사람들이니 본론만 말하지.

난 오늘부로 히어로를 은퇴한다. 이상.”


더 할 말 따윈 없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어마어마한

플래시 세례가 폭발하듯 일어났다.


“웨이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은퇴라뇨!”


“그렇게 멋대로 은퇴 선언을 해도 된다고-”


“이유라도 말씀해주시죠!”


이유? 이유라고?


그건 나보다 너희가 더 잘 알 텐데?


‘좆같은 위선자 새끼들.’


지겹다. 전부 지긋지긋하다.


더는 이딴 일로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도망쳐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기자의 말에, 내 발걸음이 멈췄다.


듣자듣자 하니까, 아주 뻥 뚫린 아가리라고

지 좆대로 지껄이는 게 가관이었다.


“내 15년을 히어로로 살았는데, 중학생-

대충 15살부터 지금까지 영웅 노릇 한다고

그 개고생을 했단 말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지금 와선 후회만

남는다. 


영웅? 지랄하네. 뭐가 히어로고 영웅이냐?


“15년 동안 난 휴가 한 번 제대로 써보질

못했고, 주말도 반납하고 출동했고, 심지어

엊그제 돌아가신 어머니 임종도 못 지켰어.

근데 뭐? 도망? 지금 도망친다고 했냐?”


“그, 그건...”


“...그래, 도망친다. 도망칠 거다. 너희 중

누가 날 비난할 수 있어? 친했던 동료의

유족한테 미안하다고 사과해본 적 있어? 

구해준 사람한테 왜 제때 안 와서 가족이 

죽게 내버려뒀냐고 욕먹은 적은 있냐고? 

너희가! 너희가 뭘 안다고!!”


꽈앙-!! 내가 테이블을 내려치자, 

철제 테이블이 쩍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좆까, 씨발, 안 해.”


그리고 난 회장을 빠져나갔다.


도망쳤다. 그래, 나는 거기서 달아났다.


“도망치는 거야, 웨이터?”


낯익은 여자 목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왜? 바짓가랑이 붙잡으러 오셨어?”


“아니. 딱히.”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금발 벽안, 포니테일, 항상 입고 다니는

파란색 보디슈트- 이 괴상한 모습도 이제는 

너무 자주 봐서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발키리, 너도 슬슬 은퇴하는 게 어때.”


“아직 생각 없어. 대출 갚아야 해서.”


“킁, 그러니까 머리도 나쁜 년이 왜 멍청한

코인 따위를 해선...으이그.”


“내 일이니까 신경 끄고...진짜 가는 거야?”


“그럼 가짜로 가겠냐?”


벌써 사직서는 내고 왔다.

뭐, 정확히는 두고 온 거지만.


“먹고 사는 건 문제 없을 테고, 이제는 내가

없어도 괜찮아. 후배들도 충분히 자랐고...”


“그래도 넌 이 나라 최고잖아. 

너를 대체할 사람 따윈 없어, 알아?”


“몰라, 씨발.”


최고고 최악이고 이젠 다 지겹다.


“적어도 연합 회의에는 나가지? 마지막-


”“뭐 그리 친했다고 인사까지 하러 가?

난 이제 민간인이니까 찾아오지도 말고.”


“...알겠어. 잘 가, 웨이터.”


“이젠 그 이름으로 부르지도 말고.”


그리고 난 미리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자유다. 15년만에...자유구나.’


내 인생의 절반을 바쳤고, 전부 불태웠다.


“엄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


“아뇨, 아무것도.”


남은 인생은, 이제 나를 위해 쓰겠다.


그게 내게 남은 마지막 소원이었다.






버릇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이제 출동할 일이 없는데도 새벽 5시에는

깨어나며, 아침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다.


“...그보다 앞으로 뭘 하나.”


돈이라면 썩어 남아돌 정도로 많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집도 내 소유였다.

정확히는, 이 빌딩 전체가 내 소유다.


임대료만으로도 어지간한 월급쟁이들은

평생 꿈도 못 꿀 돈이 들어오며, 관리도

내가 고용한 사람들이 맡아서 해준다.


즉, 내가 할 일은 전혀 없다.


“취미랄 것도 없고...참, 웃기지도 않네.”


어떻게 서른 살이 되도록 변변한 취미 하나

없이 살 수 있었던 걸까.


“소개팅이라도 나갈까...”


근데 이제 와서 여자를 만나려고 해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서른이 되도록 미팅조차 한 번 나가본 적이

없으니,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전혀

모르겠다.


“어렵구나, 백수 생활도.”


나는 프로틴바를 씹어먹으며 TV를 켰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연합 회의를 하나.’


히어로 연합 회의, 일 년에 두 번 온 세상

히어로들이 모이는 날이다.


회의장에 모인 영웅들은 범죄나 국제정세,

주목해야 할 정보를 공유하며 서로서로

지원해주거나 아예 동맹을 맺기도 한다.


「그럼 회의에 모인 여러분, 저는 진행을

맡게 된 연합의 사무총장, 헨더슨-」


참고로 저 자리는 더럽게 지루하고, 솔직히

영양가도 없다. 


나도 종종 의례상 갔다 오기는 했지만...


‘저딴 거 할 시간도 아까워.’


그런데도 왜 나는 이걸 보고 있는 것인가.


모르겠다. 이제와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그럼, 이번 안건은-」


그 순간, 화면이 일그러졌다.


아니...그게 아니다. 화면이...멈췄어?


“뭐야? 생방송 중에 이런 사고를 내?”

쯧, 방송국 놈들은 뭘 하는...아, 다시 켜-


「여기는 BSS의 제인 기자입니다! 조금 전

회의장이 공격받았습니다! 다시 알립니다!

연합 회의장이 공격당해 무너졌습니다!」


...뭐?


아니, 잠깐...이게 무슨 개소리야?


화면이 전환되며, 헬기에서 폐허가 돼버린

회의장을 보여주었다.


마치 핵폭탄에 맞은 듯...회의장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어마어마한 양의

연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올랐다.


“이게 무슨...?”


뭐지? 나 은퇴했다고 몰래카메라 찍나?


이게 현실일 리 없다. 불가능하다.

저기에...저기에 모인 히어로가 몇 명인데...


그 순간, 화면이 다시 지직거렸다.

이윽고 화면에 기괴한 가면을 쓴 인간이

나타나, 무어라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들리나? 드디어 됐군. 잘 들어라...

히어로들은 방금 그 공격으로 전멸당했다.

이제부터 이 세상은 우리 군단이 지배하여

다스리겠다. 이상, 전달 끝.」


뭐, 뭐야 방금 그건?


그때, 나는 창문 너머를 보았다.


미사일이다. 미사일이...온 사방에...


“이런 씨발.”


그리고 미사일 하나가 나를 향해-






“허억-”


하늘이 보였다. 무너진 잔해도 보였다.


나는 손으로 몸을 더듬어 내 몸이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했고- 거의 다치지 않았음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자본주의 만세올시다.”


그러고 보니 내 방에 비싼 돈을 들여서

벙커에 가까운 방어 설비를 설치해두었던

사실이 지금 떠올랐다.


아무리 나라도 미사일에 직격하면 그대로

뒈진다.


“그보다 씨발, 내 건물...”


내 연금을 다 꼴아박아서 산 건데.


내 15년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고작 좆같은 미사일 한 방에...


“...”


나는 일어나서 거리로 나아갔다.


도시는 폐허가 됐고, 시체가 사방팔방에

굴러다니고, 온 세상이 불타올랐다.


내 도시가, 내 고향이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자, 놈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군인처럼 보였다...전신에

최고급 군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고,

몇몇 놈들은 확 눈에 띄는 차림새였다.


“생존자 발견, 사격합니까?”


“잠깐, 나 저 얼굴 아는데.”


놈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말했다.

...꼭 좆같은 사마귀처럼 생긴 놈이었다.


“웨이터...그래, 웨이터다!”


거 이런 아저씨 얼굴도 기억해주고...


고맙진 않다, 전혀.


“어제 은퇴했다던 그 히어로 말입니까?”


“공격 준비! 절대 방심하지 마라!”


척척척- 놈들이 순식간에 나를 포위했다.


“...야, 좀 너무하지 않냐?”


“...?”


나는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15년 동안 그 개고생을 한 빌딩이 무슨

모래집처럼 무너졌어. 그거 우리 엄마랑

같이 살려고 산 집인데, 웃기지 않냐?

정작 같이 살 엄마는 좆같은 암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이지?


조금만 행복해지려고 하면, 모든 게 철저히

망가진다. 


내가 히어로를 그만둬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신이 나를 존나게 미워해서 내가

행복해지는 꼬라지를 두 눈 뜨고는 못 봐서

이렇게 된 건 아닐까?


모르겠다.


“사격 개시!”


무게를 「뺀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위로 솟구쳐올랐다.


“뭐, 뭐야!? 어디 갔어!”


“위다! 위로 날아갔다!”


이번엔 반대로, 무게를 「더한다.」


“뒈져!!”


쩌어엉-!!


내가 땅바닥에 낙하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충격파에 휘말린 병사들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뭐, 뭐야 방금!?”


“방심하지 말라고 했잖-”


“방심 안 하면, 이길 수나 있고?”

쩌억-!! 내 일격에 사마귀 닮은 놈의 턱이

으스러졌고, 다음 일격에 머리가 터졌다.


“히이익!?”


“거봐, 방심 안 해도 개털리잖아.”

하긴, 내 능력은 알고도 못 막는다.


무게 증감.


실로 단순무식한 능력이다.


내 몸이나 접촉한 물체의 무게를 조작한다.


그게 전부인 능력이고, 이거 하나로 나는

이 나라 최강의 히어로 중 하나가 됐다.


“지원 요청을 받고 왔더니...”


“거물이군요, 월척도 이 정도면 솔직히

부담스러울 정돕니다.”


또 다른 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전부 나 같은 초인...

흔히 말하는 ‘빌런’일 터였다.


“웨이터의 능력은 무게 증감, 그리고...

압도적인 신체 능력. 그게 전부입니다.”


뭔 영국 신사처럼 차려입은 놈이 말했다.


“저놈이 이 나라 최강이라고?”


이번엔 고릴라처럼 생긴 근육 돼지가 나를

흘겨보며 비웃었다.


“생각보다 약해 보이는데?”


“...온갖 거물들이 저 남자 한 명을 죽이지

못해서 형장의 이슬이 됐습니다, 알파 씨.

지금 저희 앞에 있는 건 최강의-”


“그럼, 죽이면 내가 최강이겠네!!”


이런 부류들이 어떻게 이리도 진부할까.


믿는 거라곤 힘뿐이요, 할 줄 아는 것도

힘자랑 하나뿐이니 이젠 지겨울 뿐이다.


“받아라!!”


후웅-! 


나는 놈의 주먹을 피한 뒤, 놈의 팔을 잡고

능력을 발동시켰다.


“어?”


쿵!


놈의 발이 땅에 쑤욱 처박혔다.


“어? 어랍쇼? 어어어!?”


지금 놈의 발은 트럭 다섯 대보다 무겁다.

즉, 떼어놓으려면 다리 하나로 그만큼의

무게를 들 수 있어야 한다.


“다, 다리가-”


쩌억! 첫 번째 일격에 배가 터졌고, 다음

일격에 내장이 터졌다.


“...방심하지 말라니까요.”


알파인지 알파카인지는 끝났다.


다음은 저 영국 신사놈이다.


“알파 씨를 정면에서 쓰러트리다니...솔직히

소문이 좀 과장됐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나야 좋지, 방심해주면 쉽게 잡으니까.”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또 다른 놈들이 슬금슬금 나타났다.


이번엔...다 합쳐서 일곱 명인가.


“알파랑 만티스가 2초도 못 버텼습니다.”


“미친, 그 괴물들이 2초도 못 버텼어?”


“카하하!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이번엔 아무리 나라도 좀 불리한데.


그리고 이건 내 감이지만, 아마도 여기에

모인 놈들은 제법 강할 것 같았다.


“...이젠 상관없겠지.”


히어로들은 그곳에서 전멸당했다.


생존자가 있더라도 몇 명 안 될 테고, 이런

개판을 수습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히어로들이 당했으니 군대도 아마 비슷한

상황일 터, 나 혼자서 국가 단위의 빌런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원도, 미래도, 답도 없다.


“한꺼번에 덤벼, 버러지들아.”


그러니 이제, 상관없다.


나는 놈들을 향해 돌진했다-






“-허어억...허어어어억....!!”


“쿨럭, 끄으으...”


이렇게까지 한계에 몰렸던 적이 있었던가?


눈앞이 흐리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뭐,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어...”


“내 팔, 끄아아아아...!”


일곱 중 다섯을 잡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셋은 죽었고, 하나는 팔을

뽑아버렸고, 다른 하나는 머리를 깨버렸다.


그래도 아직 꿈틀거리는 걸 보아하니 뭐,

아직까진 살아있는 걸로 쳐줬다.


“간부 일곱 명을 상대로...쿨럭, 쿨럭...!”


영국 신사놈, 다른 놈들은 젠틀러스라고

부른 놈이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내장을 터뜨릴 기세로 쳤는데, 생긴 것과

달리 제법 튼튼한 놈이다.


“당신을 여기서...제거해야...”


“해봐, 어디...허억...덤벼, 씨발...”


이렇게 말은 했지만, 나도 이젠 한계다.


내 능력은 쓸 때마다 체력을 소모한다.


그리고 방금 그 싸움에서 셀 수도 없이

능력을 썼으니, 내 체력이 방전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길동무로 삼아주마.’


최소한 너희까지는 죽이고 죽겠다.


그렇지 않으면, 속이 뒤집혀서 뒈져도 편히

눈을 감을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근데, 젠장, 힘이 안 들어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팔이 아무리 해도

올라가질 않았다.


“당신도 이미...한계겠죠...저희의 승리...

입니다...제레스! 당장 죽이십쇼!”


“크아아아아아...!!”


팔에 기괴한 장치가 달린 빌런이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 기계에 에너지가 모이며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죽어라, 이 망할 괴물 자식아!”


평소 같으면 그냥 피하는데, 지금은...


‘됐다, 그냥. 이제 피곤해.’


15년이나 열심히 싸웠잖아, 이제는 조금...


나도 조금 쉬게 해줘.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오빠, 그래도 괜찮은 거야?”


“...뭐?”


티잉-! 


레이저가 튕겨 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휘어졌다.’


“이건!?”


“저 여자는 또 뭐야?!”


어째서, 어떻게 이 녀석이 여기에...?


“아핫, 오빠~ 오랜만에 만난 건데 너덜너덜

걸레짝이네? 아하하하!”


-오랫동안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빌런이

몇 명 있었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내게 집착하던 놈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녀석이었다.


“라비...”


“은퇴했다고 들어서 얼굴 보러 갔는데 집이

없어졌더라? 그래서 찾으러 다녔어!”


지난번에 그렇게 박살이 났는데도, 심지어

난 은퇴까지 했는데도 찾아다닌 거냐...


“미친년.”


“응! 나는 오빠한테 미쳤지롱~”


라비 더 레빗.


나이 불명, 소속 없음. 토끼 수인이며 주요

범죄 전과는 살인, 테러, 절도, 협박 등등.


그런 흉악한 전과와 달리, 라비의 외모는

마치 인형처럼 아름답고 자그마했다.


눈처럼 흰 머리카락에 피처럼 붉은 눈동자.

항상 바니걸 차림새이며, 귀여운 외모로

민간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빌런이다.


...이런 미친년을 얼굴 하나만 보고 좋아라

할 수 있다는 게 코미디이긴 하지만.


“나 죽이러 왔냐...?”


“으음...그럴까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라비가 남은 두 놈을 노려보았다.


“우리 오빠를 너덜너덜하게 만든 게 너희

맞지? 누가 멋대로 내 물건에 손대도 된다

허락했어? 응? 누가 그랬는데? 누가?”


“...당신도 빌런이라는 거 압니다. 라비 양.

저희 조직은 당신 같은 유능한 인재를-”


퍽- 영국 신사의 머리가 날아갔다.


목이 뽑혔다. 그 찰나의 순간에.


“뭐, 뭘 어떻게-”


순간이동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속도.

나조차도 처음엔 이동계 능력자라고 착각할

정도로, 라비는 빠르다.


「탄성」


나처럼 단순한 능력이다.


신체의 탄성을 줄이거나 극대화하는 능력.


그러나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능력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너, 너...조직을 적대한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하며...!”


“뭐래?”


제레스라고 불린 빌런의 목이 뒤로 꺾였다.


이어서 라비의 무자비한 연타에, 놈의 몸이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몇 번을 봐도 무시무시한 능력이야.’


라비가 한 일은 그냥 자기 발과 다리에

탄성을 부여해, 그 반발력으로 돌진해서

공격한 것뿐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빌런 짬밥 좀

먹었을 법한 놈들이 당했다.


‘괜히 위험도 A급이 아닌가...’


빌런 중에서도 위험도 A를 받는 놈들은

드물다. 


그야 테러만 세 번을 터뜨렸으니...


“이제 내 차례냐...?”


“응?”


“덤벼, 어디 끝을 보자고...이번에야말로.”


나는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야말로...쳐죽여주마.”


“그 상태로 날 상대할 수 있겠어?”


“해보면 알겠지.”


그래도 웬 잡놈들 손에 죽는 것보다야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뭐, 이 망할 년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덤벼-”


“알겠어!”


대답과 동시에-


내 의식이, 그대로 끊어졌다.

 





...


난 천국도 지옥도 윤회도 안 믿는다.


사람을 죽으면 끝이고, 남은 몸뚱이는 결국

먼지가 된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는 것인가...


“커흡.”


“오빠, 자는 모습도 귀엽네~”


여기가...어디요...?


그보다 왜 라비가 내 위에 올라타 있는지

모르겠다.


“너 거기서 뭐해...”


“음...그냥 이러고 있으면 좋아서?”


“지랄 말고 빨리 내려가라...”


녀석이 뜻밖에 순순히 내려왔다.


“여긴 또 어디냐...”


“우리 집! 여긴 안전해, 걱정하지 마.”


“...날 구해준 거냐?”


매번 나 하나 죽이자고 덤비던 년이?


참고로 라비와 내가 싸운 횟수만 해도 무려

21회였으며, 모두 내 승리로 끝났다.

마지막 싸움에선 라비의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는데, 그때 끝장을 내진 못했다.


“네 손으로 직접 고문이라도 하고 싶어?”


“아니~ 내가 왜? 오빠는 내가 그렇게 어!

못돼먹은 여자로 보여!?”


“그보다 더한 년이라곤 생각하는데.”


이년이 죽인 사람만 해도 백 명이 넘는다.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다.

...내 동료 몇 명도 이년 손에 당했고.


“실은, 오빠한테 부탁이 있어서.”


라비가 내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죽여달라는 부탁이라면 들어줄게.”


“오빠는 또 왜 이렇게 뿔이 났어?”


“네 얼굴만 보면 화가 나거든.”


몸만 성했으면 당장 쥐어 패버리는 건데.


안타깝게도, 지금 내 몸은 만신창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이번에 히어로들을 몰살시킨 조직 알지?

나 말이야, 걔들이랑 사이가 나쁘거든!”


“왜?”


“합류하라고 한 놈들을 죽여버려서?”


자랑이다, 보나마나 지 마음에 안 든다고

주먹부터 나갔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것들이 나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어서

힘들거든~ 무슨 마음인지 알지?”


“아암, 잘 알지. 네 덕분에.”


“아이참, 우리 사이에 왜 이래~”


우리 사이가 뭔데?...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오빠랑 나, 둘이서 팀을

짜는 거야! 그리고 그 무슨 조직인지 뭔지

하는 놈들을 전부 죽여버리는 거지!”


“내가 너랑 동맹을 맺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냐? 못 본 사이에 머리까지 좀

나빠진 거 아니냐, 너?”


“그럼 반대로, 거절하면 어쩔 건데?”


그 순간- 라비의 주먹이 내 앞에 나타났다.


“지금 오빠는 내가 툭 치면 죽어. 알지?”


“...”


“그리고 히어로들은 그곳에서 다 죽었어.

살아있어도 별 도움은 안 될 테고, 지금

오빠는 철저하게 혼자야.”


다 아는 사실 말해줘서 고맙다, 쌍년아.


...하지만 이번에도 말하진 못했다.


“그런 오빠 혼자서, 조직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


“...대가가 뭔데,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아핫, 아하핫...!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오빠는 머리가 참 좋아~ 옳지 옳지~”


라비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빨리 용건이나 말해.”


“응! 대가는 두 가지야. 첫째, 오빠는 이제

나랑 동맹이니까 함께 생활하고 싸워야 해.

이거는 불만 없지?”


“오냐. 두 번째는?”


“두 번째느은...”


라비가 끈적한 눈빛으로 날 훑어보았다.


“나 말이야, 오빠의 애인이 되고 싶어.”


“...뭐?”


이년이 지금 사람 놀리나...?

하지만 눈빛을 보아하니, 진심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싸우면서 느꼈어...오빠야말로...

나를 완성시킨다는 걸...지금까지 본 누구도

오빠만큼 강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았어...

근데 내가 고백하려고 할 때마다 오빠가

날 두들겨 패서 기회가 없었단 말이야!”


아...그러고 보니 고백 비슷한 소리를 한 거 

같기도 하고...


나야 당연히 날 도발하려고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안 받아주면 오빠는 여기서 나한테

죽는 거야. 그 바보들한테 죽는 것보다야

사랑스러운 내 손에 죽는 게 낫잖아?”


“...내가 통수치면 어쩌려고?”


“오빠는 그런 짓 안 해. 내가 알아.”


거 뭘 믿고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건지...


뭐, 진짜로 배신할 생각이 없기는 하다.


이년이 예뻐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그게 히어로로서 비겁한 짓이라고...


‘...아니, 이제 히어로는 그만뒀잖아.’


그런데도 이젠 싸울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이제 다른 방법이 없다.


“...좋아, 제안을 받아들이지.”


“와! 두 번째는 그냥 질러본 건데 어떻게

받아줬네?! 오빠 진짜 사랑해, 쪽~”


라비가 내게 들러붙어 입술을 들이밀었다.


“저리 가, 징그러워!”


“왜~ 우리 이제 애인이잖아~ 응? 앞으로

뽀뽀도 하고, 손도 잡고, 데이트도 하고...

야한 짓도 잔뜩 하자...응?”


누가 이런 미친년하고 그딴 짓을 해...!


‘근데 젠장, 이년이 없으면 안 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잖아.’


나 혼자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둘이서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개죽음 당할 가능성이 낮아지기는 했다.


‘...히어로는 없어도...빌런은 남아있다.’


혹은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용병들이나

이미 은퇴한 히어로들도 있다.


그들이 살아있다면, 전력으로 끌어들여서

조직에 대항할 힘을 갖출 수 있을지도...


“빨리 쓰담쓰담 해줘! 안아줘! 뽀뽀도!”


“...니미.”


그런데 진짜 이런 년하고 붙어먹어야 하나.


진짜로, 그냥 그때 죽을 걸 그랬나 싶었다.













은퇴한 히어로가 살아남기 위해 얀데레 빌런들과 동맹을 맺는 하렘 히어로물이 쓰고 싶었다...

물론 2화를 이어 쓸 능력은 안 되니 또 단편이다...

언젠간 장편...써야지...언젠간...

근데 언제가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