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짐꾼입니다. 그것도 마왕을 제거하기 위한 용사파티의 짐꾼. 그렇다면 최소한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알지 않습니까?”

 

그와 동시에 수녀복을 입은 여성으로부터 뜨거운 스프가 담겨진 스푼이 나의 가슴팍으로 날라와 옷을 적셨다.

 

“마지막 사천왕까지 죽인 저희가, 짐꾼의 일들까지 하나하나 말해줘야 되나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욕하는 수녀는 바로 성녀 아리스. 성(聖)과 순결을 상징하는 수녀복이라기엔 온몸에 달라붙어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어 남성을 유혹하는 서큐버스같지만 아무튼 성녀다.

 

“죄송합니다. 아리스님. 하지만 앞서 전투 상항도 있었고 바로 휴식을 준비하기에는...”

 

“어차피 넌 비전투 인원이지 않았어? 우리가 전투하고 있을 동안 뒤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다음 계획까지 준비를 해놨으면 됐잖아.”

 

변명아닌 진담을 말하기도 전에 성녀의 옆에 있는 여성이 말을 끊었다.

 

“피곤한 전투 외의 잡일들을 처리해야하는 필요성은 알겠어. 근데 그럼 최소한 그런 일들만큼은 미리 해야되는 거 아닌가?”

 

아름다움과 명사수를 상징하는 종족인 엘프. 그런 종족 내에서도 최고의 레인저이자 하이엘프인 고귀한 엘프 엘렌.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모욕하고 있다. 아마 말속에 담겨진 건 훈계가 아닌 비웃음이겠지

 

“이제 그만하지 않을레? 전투도 끝났고 조금만 여유롭게 쉬면서 이동하면 되잖아.”

 

성녀와 엘프를 제지하면서 사악한 웃음을 짓는 남성은 용사..... 아니 이 용사파티의 짐꾼이었던 남자로 이름은 스케이프. 며칠 전까지 짐꾼이었던 주제에 용사 행세를 하며 옆구리에 마법사를 꼈다고 헤벌쭉한 표정이 아주 그냥 죽이고 싶네.

 

“그래.... 우리는 용사파티니까 그 정도 무쓸모쯤은 용서해줘도 되지 않을까?”

 

스케이프의 허리에 바짝 달라붙은 마법사인 오즈는 얼굴에 홍조까지 띄우며 자신은 지금에 만족한다는 듯이 자비로운 판결을 내렸다. 덕분에 성녀와 엘프의 어그로는 나에게서 마법사에게로 옮겨졌다.

 

“뭐야.... 스케이프랑 둘이서 어디로 갔었던 거야...?

 

이건 엘렌

 

“전투가 끝나면 빨리 뭉쳐서 모두가 다음을 준비하는거 아니었나요....?”

 

이건 아리스. 파티원간의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활에 정령에 힘이 깃들기 시작하는 엘렌. 뒤에 있는 메이스를 붙잡는 아니스. 마나를 끌어올려 대기를 달구는 오즈. 그러나

 

“난 싸우느라 지쳤는데 그냥 천막에 들어가면 안될까?”

 

이런 팽팽한 긴장감도 자칭 용사인 스케이프의 말 한마디면 무산되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에 흔들리는 스케이프의 동공이

 

세상은 모두가 녀석을 용사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나는 다르다. 

 

왜냐고? 내가 진짜 용사였으니까

 

약 한달 전, 나는 용사파티원들과 함께 백성들에게 최면을 걸어 타락자로 만드는 이단자들을 급습하여 괴멸시켰다.

 

그 안에서 발견된 것은 교주로 추정되는 인물이 기를 쓰고 만들려고 했던 ‘무언가’

 

파티원들은 타락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그 물건을 평소와같이 짐꾼에게 넘겼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상의 진실을 개변할 수 있는 가공할 고대유물이었고

 

“그래. 그래. 모두 싸우지 말고 안에서 쉬자고.”

 

보다시피 스케이프는 우연의 일치로 유물의 사용법을 알아내어 이 세상에 자신을 용사라고 각인시켰다. 자연스럽게 세상에서 없어진 스케이프의 위치는 내가 들어가게 되었고

 

“흐...흥! 스케이프가 말하는 거니깐!”

 

“........좋습니다. 안에서 쉬도록 하죠.”

 

먼저 천막에 들어간 스케이프와 오즈의 뒤로, 엘렌과 아니스가 뒤따랐다. 홀로 남은 내가 할 일은 짐꾼으로서 스프를 완성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것.

 

“흐흐...”

 

하지만 내 입에선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내 예상대로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비참한 용사인 나. 카일의 상황과 달리 현대인의 정신을 가진 ‘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래. 나는 <<용사파티에게서 도망칠 수 없어!>>라는 초하드 얀데레 게임에 빙의한 현대인

 

“잘못하면 저 미친년들에게 분해당할뻔 했잖아...!”

 

본레 이 게임의 엔딩은 마왕을 쓰러뜨리고 난 후. 용사인 카일이 엘렌, 아니스, 오즈 3명의 히로인 중 한명에게 고백을 하여 결혼하는 것. 그리고 당연하다시피 버려진 히로인 2명은 선택된 히로인을 죽이고

 

‘카/일’로 만들어 버린다. CG집까지도 넣어서 친절하게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면 어떨까? 나는 게임의 이스터에그인 속칭 ‘최면어플’을 사용하여 히로인들의 집착대상을 카일에게서 미스터 희생양씨에게 옮겨 주었다. 

 

그 말은 즉, 마왕을 죽이더라도 오체분시가 되는건 내가아니라 스케이프라는 것이다.

 

“이제 나 혼자만 몰레 벗어나서 마왕을 죽인다! 그리고 모든 공은 용사파티에게로 돌린다!”

 

이미 용사로서의 나의 기량은 단독으로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나 혼자서 활동하지 않은 것은 사천왕까지 죽이고 마왕을 참살할 여력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 

 

히로인들과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 생활을 보내길 바랄게! 스케이프!

 

다행스럽게도 품안의 성검은 아직까지 나를 주인으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오늘 마왕을 죽이고 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그렇게 마왕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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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죽인 난. 용사파티원들에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마왕성에서 사라졌다.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정착한 나에게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건 이제 손안에 신문뿐

 

“냐아~”

 

“어이구 우리 나비 배고팠어요?”

 

마계에서 주운 마계고양이와 함께하며 커피를 마시는 전원주택 생활. 이 게임 세상에서 나만큼 힐링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옆집에 사는 마을 사람 A, B, C..... 아무튼 별로 없을 거다.

 

“잠시만 이 신문만 보고 밥줄게~”

 

마왕을 토벌한 용사파티는 어떻게 됐을까? 신문을 보면 된다. 이 중세시대식 정보통신망은 나를 비웃었던 스케이프씨의 처참한 최후를 실었을 것이다.

 

마왕을 죽인 용사. 살해당한 상태로 발견?!

 

음, 완벽한 신문 제목이야. 오늘 아침은 이세계 역사상 최고로 상쾌한 아침이.....

 

-마왕을 죽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위대한 용사 스케이프는 제국력 255년 12.7에 제국 황궁의 꼭대기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시체는 여러 고문의 흔적과 절단, 파괴흔등의 제국의 위신을.....(중략)-

 

쨍그랑!

 

나는 손안에 커피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밥을 달라 다리에 얼굴을 비비던 나비가 놀라 시야에 사라졌다. 왜냐고?

 

“시신은 두 명의 히로인이 각각 보관해야 하는데...?”

 

우리의 용사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선택받지 못한 비련의 히로인 두 명은 시체로나마 용사님을 사랑하는 걸 선택한다. 근데 시체를 황궁에 걸어놓는다...?

 

“아니, 애초에 선택된 히로인 시체는 왜 발견 안돼? 뭐야? 히로인한테 받아낼 거라도 있나?”

 

머릿속에 얀데레 회로를 돌려가며 죽어야 할 히로인의 행방과 스케이프씨의 시체. 게임 속 여러 요소들을 생각해보았다.

 

“설마.....?!”

 

히로인 3명이 모두 살아있고, 가짜 용사는 죽었다. 그렇다면?

 

“나비야! 얼른 도망가자!”

 

나는 공포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