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arca.live/b/lastorigin/6642718?category=%EC%B0%BD%EC%9E%91%EB%AC%BC&target=title&keyword=%EB%A9%B8%EB%A7%9D%20%EC%A0%84%20%EB%AC%B4%EC%A0%81%EC%9D%98%20%EC%9A%A9&p=1






김지석은 눈앞의 장군을 바라보았다. 흰 제복에 네 개의 검을 지닌, 단아한 분위기에 장신인 미인이었다.




"환영해. 용. 어서 와."




용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김지석 앞에 서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답게 뇌파를 감지할 수 있는 용은 김지석이 진심으로 우호를 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인류가 쌓아온 작전과 전략의 진수를 모은, 블랙 리버의 최우수 장군이라지만, 결국 인간의 노예인 바이오로이드에 불과한 그녀였다.




그녀는 이미 블랙 리버의 총수인 앙헬 리오보로스에게 도구 취급을 받고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겁탈도 당할 뻔했는데, 다행히도 군사령관으로서 높은 거부권을 가지고 있어 순결은 지킬 수 있었다.




용은 앙헬 리오보로스같은 무뢰한의 명령을 듣고 싶지 않았다. 비록 군사령관으로서 맡은 일은 다했으나 최선을 다해서 모시지도 않았다.




그 모양으로 용을 활용하지 못하다보니, 앙헬과 블랙 리버의 군대는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도 삼안 산업에게 거듭 패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3대 세력 - 삼안 산업, 블랙 리버, PECS 콘소시엄 - 은, 지구를 지배할 세력을 결정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내전을 치뤘었다.




하늘 아래 세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싸움이었다.




기업에게 패하고 유명무실해진 정부들은 그 싸움을 방관했다. 세계는 또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허나 그 전쟁은 허무하게 종식되었다.




워프 포탈을 타고 내려온 철충들에 의해서.




인류의 가장 강력한 전쟁 도구인 AGS들이 철충에 감염되면서, AGS가 총뿌리를 인간에게 돌렸다. 정부군은 물론 기업의 사설군까지 속절없이 패했다. 인간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인간의 노예인 바이오로이드가 맞섰지만 화력으로도 숫자로도 역부족이었다.




3대 세력은 급히 휴전 및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형성해 맞섰지만 전황은 시시각각으로 악화되었다.




평소 용의 비협조에 골머리를 썩히던 앙헬은, 마침 삼안 산업과 휴전하게 되면서 용과 '라비아타'를 교환하는 계약을 맺었다.




용은 물론 김지석에게도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김지석도 앙헬과 별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고 여겼다. 김지석은 바이오로이드 판매를 시작한 인간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지석은 뜻밖에도 반말이나 경시하는 기색 대신 사람을 대하듯이 용을 맞이했다.




"애들이 오면서 무슨 실례를 저지른 적 없었지? 숙소는." 그는 깍지를 끼며 말했다.




"모두 만족하오…… 솔직히, 뜻밖의 환대에 몸둘 바를 모르겠소."




이제까지 바이오로이드를 다루던 높은 인간 절대 다수는 그녀들에게 도구와 같은 대접을 해 왔던 것이다.




용의 표정이 떨떠름하자 김지석은 쓰게 웃었다.




"앙헬처럼 막되먹지 않아서 실망할 거 없어. 난 원래 군인이 아니라서 사람 험하게 못 다루거든."




"……."




김지석의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바이오로이드가 도구라는 점은 삼안 산업도 다르진 않았지만, 적어도 회사 소속의 바이오로이드는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용은 김지석을 접견하기 전 짧은 시간 동안 회사 내를 둘러보며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바이오로이드 직원 대부분은 가난한 일반 인간보다 대접이 더 나은 면도 있었다. 김지석의 전제 하에 능력치에 따라서 대우받는 것이 삼안 산업의 모토였다.




"아무튼 우리 전황이 얼마나 나아질진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소관도 충성을 다해 모시겠소. 김 회장."




용은 일단 김지석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주인 등록을 갱신했다. 정말로 김지석이 어떤 인간인지는 지내 보면 알겠지.




그 후 반년간 용은 삼안 산업과 블랙 리버 일부의 연합군을 이끌며 철충과의 전쟁 지휘에 매진했다.




김지석은 정말로 별다른 해코지나 추행 없이 용의 편의를 봐주었다. 전쟁은 장군들한테 맡기고, 돈 버는 일은 본인이 한다는 주의라 했다.




그는 앙헬 리오보로스같은 군인 겸 상인처럼 직접 진두지휘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용은 간섭받는 일 없이 지원을 받아 마음껏 지휘를 할 수 있었다.




바이오로이드는 아무리 자율적이라도 본래 주인에게 호의를 품도록 태어났다. 게다가, 전쟁 중의 상사와 부하라는 점도 있어서 용은 김지석에게 비교적 빠르게 마음을 열었다.




삼안 산업의 대우는 후했고 용에겐 친하게 지내는 동료들도 생겼다.




문제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계속해서 나빠졌다는 점이었다.




인간 사냥에 도가 튼 철충의 공격으로 인류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정부군은 물론이거니와 삼안 산업의 지배권 역시 육지에서 섬으로 빠르게 밀려났다. 펙스나 블랙 리버는 아예 근거지를 잠수함이나 해상 함선들로 옮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김지석의 삼안 산업 군대 또한 섬으로 본부를 옮긴 채였다.




그날도, 원격 지휘하던 군을 후퇴시킨 용은 무거운 마음으로 보고하러 갔다.




"회장님은 안에 계신가?"




"네. 들어오세요."




비서 콘스탄챠를 따라 들어서자 김지석은 팔짱을 끼고 창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은 예를 갖춘 다음 보고했다.




"총수, 또 패전했소. 하지만 병력을 온존해 후퇴시키는 데엔 성공했다오."




"응. 잘했어."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병력은 보전했지만 전황은 오로지 암울할 뿐이었다.




김지석은 연이은 패전 소식에도 별다른 화를 내지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후퇴 소식만 전하고 있는 판인지라, 오히려 용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화내봐야 별다른 도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섬에서 버티고 있으면 당분간 죽지는 않겠지. 당분간."




철충들은 바다를 건너와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인간들이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영원한 잠에 빠지는 괴질인 휩노스 병의 유행 때문이었다. 그 병은 산에 올라가든, 섬에 있든, 해상이나 해저에 있든 인간은 막지 못하는 병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바이오로이드만이 그 병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예전부터 뇌를 제외한 육체를 바이오로이드처럼 몰래 바꾼 김지석만이 용케 병의 증상을 보이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 김지석의 거점에서 그를 보좌하는 부하들은 인간이라곤 없었다. 전원 미녀인 바이오로이드들 뿐이었다.




용은 전부터 그것이 신경쓰였다.




보고를 하러 온 김에 차를 마시며 앉아 있던 용은, 주저하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총수. 기지 안에만 계시는 것보다 가끔은 바람을 쐬시는 게 어떨는지."




"응?"




"당분간 철충의 공격은 잦아들 것 같다오. 덕분에 소관도 시간이 좀 생겨서, 그, 오랜만에 같이 산책이라도." 용은 김지석의 시선을 피하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럴까."




용의 데이트 제안을 김지석은 선선히 허락했다. 용은 저도 모르게 기쁜 얼굴이 되었다.




패전을 거듭하던 용에게 몇 안되는 즐거운 일 중에 하나는 김지석과 교분을 나누는 것이었다. 무인을 자처하는 그녀도 어느새인가 자기 주인을 상관으로서가 아니라 남자로서 좋아하게 되었다.




용과 김지석은 섬에 있는 상점가를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스쳐 지나가는 간부 바이오로이드들은 김지석을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회장님, 오늘은 데이트 중이시군요?"




"그렇게 됐어. 너희도 쉬는 중이야?"




"네에. ……다음 번엔 저희랑도 데이트를 해 주셔요. 후후."




그럴까. 김지석은 앨리스 18호와 샬럿 17호의 추파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총수에게 문제가 있다면 다른 것들과도 이렇게 데이트 신청을 잘 받아준다는 것이지. 용은 내심 불편함을 느꼈다.




김지석은 항시 차분하던 용의 표정이 뚱해지자 모른 척하고 넌지시 물었다.




"혹시 질투하는 거야?"




용은 고개를 돌렸다.




"굳이 말로 하진 않으리다."




김지석은 용이 질투하는 모습을 재미있어했다. 남자 입장에서 자기 여자가 질투하는 모습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용은 애당초 다른 바이오로이드를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김지석은 그것을 미처 몰랐다.




이후, 시간이 흘러 대륙에서 인간이 축출될 무렵이었다.




전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김지석은 아예 섬에서 눌러 앉기로 결심했다.




다행히도 섬에는 웬만한 도시 못지 않게 물자도 풍부했고 편의 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품었던 뜻은 조금씩 꺾였다.




블랙 리버나 펙스 따위가 만들어낸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바이오로이드나 인간이나 차별 없이 능력에 따라 대우받는 세상 - 삼안 산업이 주도하는 그런 신질서와 평화라는 야망을 품었던 김지석은, 이제는 용을 비롯한 바이오로이드들과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용은 그러한 변모에 실망했다.




뿐만 아니라 김지석은, 바람둥이처럼 바이오로이드를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었다.




아무리 용이 인간이 아니었다 한들, 자기 남자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용에게 있어 김지석을 사모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지날수록 깊어만 갔다.




김지석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실 도피를 하던 김지석 또한, 용에게 의지하다가 어느덧 자신의 마음을 맡기게 된 것이었다.




결국 둘은 얼마 가지 않아서 결혼식까지 올렸다.




격식을 차려서 꽃길로 결혼식장도 만들고, 서약의 반지라는 것을 약지에 끼워 줄 정도였다.




용은 그제야 김지석이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사적인 관계를 줄이리라 생각해 안심했다.




이제 회장, 아니. 서방님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상을 위해 일하시겠지.




그러나 일은 용의 바람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결혼 후에도 김지석은 미녀 바이오로이드들과 섬에서 시간을 보낼 뿐, 영토를 수복하는 데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방님. 이것이 이번의 작전 계획……."




"천천히 해, 용. 병사들이 힘들어 하잖아."




"하지만 이미 휴식은 충분히 주었습니다. 오히려 이대로 두면 병력들의 예기가……."




"어차피 당분간은 싸우지 않고 관망하는 편이 나아. 철충들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잖아. 오히려 축차투입으로 병력을 까먹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용.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오늘 밤엔 영화나 보는 게 어때."




김지석은 전쟁 이야기를 일축해버릴 때가 잦아졌다.




아무리 직접 지휘하진 않아도 용의 계획을 항상 진지하게 들어주고, 공감하며, 지원해 주던 사람이었다.




서방님이 왜 변했을까. 그녀는 고민했다.




일개 군단으로선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철충의 우세와, '별의 아이'라는 괴이한 침공자들의 가세, 그리고 언제 발병할지 모를 휩노스 병이라는 요소들이 김지석의 정신을 갉아먹었다는 걸 용은 알지 못했다.




공포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용이 인간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비록 김지석은 용에게 가장 많은 애정을 쏟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바이오로이드와도 여전히 어울렸다. 연애를 하고 성욕을 풀었다.




하루는 용이 그런 일을 하지 말도록 권하자 김지석은 피식 웃었다.




"용, 너 은근히 질투가 심하구나?"




"질투라니요. 저는 단지 서방님께서 철충과의 전쟁에서 눈을 돌리고 계신 것을……."




"그게 질투라는 거야. 자, 이리 와."




"……."




"앞으론 용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일게."




뾰루퉁해 있던 용은 못 이기는 척 김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그는 말뿐이었고, 여전히 전쟁보다는 여러 바이오로이드와 사귀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때로는 용이 아닌 다른 바이오로이드의 거처에서 지낼 때도 있었다.




그런 일을 접할 때마다 용은 가슴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름을 알았다.




서방님이 왜 저렇게 계집질에 탐닉하는 것인가. 우리의 대의까지 접어두고서.




용은 자신이 바람 피우는 서방을 질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이가 다른 바이오로이드와의 관계 때문에 정신까지 위축된 것이라 여겼다.




그렇다. 다른 바이오로이드 년들 때문에 서방님이 큰 뜻을 잃으신 것이다.




서방님을 구속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계집에 빠져서 큰일을 그르치는 건 문제가 달랐다.




계집질이 문제라면 계집질을 못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이것은 질투가 아니었다. 장차 세상의 왕이 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드셔야 할 분이 계집 때문에 쇠하도록 둘 순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서방님을 위해서 무언가 해 주어야만 한다고 굳게 믿기에 이르렀다.




인간에게 충성하도록 만들어진 도구 겸 노예인 바이오로이드 이전에, 그를 가장 사랑하는 마누라로서.








* * *








김지석은 어느 날 전에 없이 머리가 무겁도록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용과 술대작을 하고 나서 필름이 끊겼는데, 눈을 떠 보니, 자신이 방 안의 침대에 묶였음을 깨달았다.




"용, 용?!"




김지석의 외침에 답하기라도 하듯 문을 열고 용이 나타났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빨리 풀어!"




비록 좌절해서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지만, 원래가 총명한 김지석은 이 상황이 용이 저지른 짓임을 단박에 눈치챘다.




지금의 김지석에게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부하는 그녀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을 닫아 잠근 용은 고개를 저었다.




"서방님께서 더 이상 주저앉고 계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뭐라고?"




"자, 일체의 번뇌는 접어 두시고, 제가 이끄는 대로 맡기시길."




용은 그렇게 말하며 김지석의 바지를 벗겼다.




"너, 무슨 짓을 하려는 거……!"




설마 강간이라도 하려는 것이냐며 호통을 치려던 김지석은 식겁하게 놀랐다.




용이 서슴없이 지휘용 검을 뽑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검집에서 청명한 소리를 내며 드러난 검날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용? 뭐 하려는……."




"소첩이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만, 서방님의 큰 뜻이 쇠한 이유는 역시 계집들 때문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김지석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부들부들 떨었다.




"듣기로, 사내가 시운을 잃은 울분을 계집에 풀면 끝장이라고 했습니다. 서방님께서도 이 섬에서 누리는 안락함과, 바이오로이드 것들의 품 때문에 희망을 접으신 게 아닐까 합니다."




김지석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러니 당장 그만둬!"




"죄송합니다. 이것도 서방님과 저, 그리고 삼안 그룹의 부흥이라는 큰 뜻을 위해서입니다. 이것, 계집들이 탐내는 이 물건이, 서방님을 혼을 괴롭히는 것이라면 저는 기꺼이……."




"용, 너, 너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기나 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야. 제발 멈추고 내 얘기를 들어!"




"……후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정액은 충분히 채취해 두었고, 서방님의 복제용 유전자 역시 우주 정거장의 에이다 쪽에 실어 보냈습니다. 무사히 받았다 하더군요."




용은 그렇게 말하며 뽑아든 검을 거꾸로 쥐고 들어올렸다.




김지석이 온 힘을 다해 거부하려는 순간, 용은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검을 김지석의 심볼에 내리찍었다.




끄어어억- 고통의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낭심이 한꺼번에 파괴된 김지석은 쇼크로 이내 정신을 잃었다.




뒤늦게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호용 리리스와 샬럿 등은 눈 앞에 펼쳐진 참상에 입을 벌리기만 했다.








* * *








다행히 김지석은 죽지 않았다. 대신 용이 바라는 대로 성관계는 할 수가 없어졌다.




그러나 커다란 쇼크를 받은 탓일까. 김지석은 예전보다도 악몽을 꾸는 빈도가 부쩍 많아졌고, 잠 자는 시간도 대폭 늘어났다. 그도 결국 휩노스 병에 걸리고 말았다.




심각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용은 처형 대신 관대한 처분만을 받았다. 김지석의 곁에는 당분간 오지도 못하도록 일개 부대장으로 종군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젠 살아남지 못하지- 김지석은 안 그래도 조짐을 보이던 휩노스 병이 본격적으로 찾아오자 화를 낼 여력도 없어졌다.




용은 외곽 전진기지에서 김지석의 상태를 전해 듣는 게 고작이었다. 다시 눈에 띄면 죽여 버리겠다는 간부들의 으름장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의 서방님이 휩노스 병에서 살아남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매일 지성으로 기도를 드리기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김지석이 아무래도 마지막일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다른 간부들의 증오심 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용은 김지석의 마지막 수면 시간 직전까지 곁에서 있어 주었다.




"사랑했어. 용…… 그리고 너희들도 모두."




참을 수 없는 잠이 밀려온 김지석은 그 한 마디만을 남겼다. 사랑하는 용과, 그가 딸처럼 아끼던 콘스탄챠, 리리스 등을 번갈아 손잡아 준 다음, 쓰다듬는 걸 끝으로 마지막 잠에 들었다.




처음에 바이오로이드를 인간의 도구로 팔았던 김지석은, 결국 인간 대신 바이오로이드에 둘러쌓여 죽은 모양이 되었다.




이렇게 삼안 군대의 구심점이었던 김지석이 죽자 남은 삼안 산업의 바이오로이드들은 저마다 갈 길을 갔다.




일부는 저항군을 계속 이끌겠다고 나섰다. 일부는 주인님이 안 계신 세상에 살 이유가 없다며 무작정 철충들에게 덤볐다. 일부는 여생을 자유롭게 살겠다며 떠나갔다.




용은 다른 바이오로이드들과 헤어져 블랙 리버 함대를 찾아갔다.




인간이 모두 죽고 호라이즌 부대 등만 남아서 관리하던 함대였다.




서방님은 죽었다. 하지만 기다리면 다시 부활할 것이다.




기억은 전혀 없겠지만, 그는 유전자가 동일한 모습으로 부활한다. 몇 년이 걸리든. 에이다와 아미나 존스의 그 약속을 받고 떠나온 길이었다.




용이 잔여 함대의 사령관이 되어서 처음으로 내린 명령은 망망대해에서의 집단 동면이었다.




김지석이 복제되어 다시 부활할 때까지 호라이즌 함대에서 잠들어 있을 생각이었다.








* * *








그로부터 백여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동면을 깨운 신호를 받은 용은, 괌 기지에서 신호를 보내온 연구소의 감시 카메라에 잡힌 '마지막 인간'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얼어서 잠든 동안 계속 꿈꿔왔던 그 - 김지석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서방님.




용이 함대를 이끌고 한달음에 달려가자, 예전에 보았던 라비아타 프로토타입이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사령관을 보좌하는 중이었다. 멸망 전에 리오보로스 가에 머물러 있던 라비아타는 김지석의 죽기 전 모습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유명했던 불굴의 마리 4호도 최측근으로 사령관의 곁에서 싸웠다. 눈에 익었던 블랙 리리스나 앨리스 등도 한 자리에 모였다. 어차피 멸망 전에 만난 이들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병력이라면 일단 믿어볼 만했다. 무엇보다도, 용은 사령관이 전의를 잃지 않았단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




사령관이 과거의 기억은 없어도 괜찮았다. 추억은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고, 앞으로 다시 만들면 되는 것이리라.




이제는 안심이 됩니다. 다시 저와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물론, 서방님께서 또 계집질에 한눈을 파시느라 대의를 잊으신다면…… 그때도 제가 다시 바로잡아드리는 수밖에요.




용은 그렇게 다짐하며 사령관에게 인사를 올렸다.




"환영해. 용. 어서 와."




기억이 없는 사령관 - 되살아난 김지석은, 용을 어디까지나 새로운 멤버로 받아들였다.




"반갑소, 소관은 무적의 용이라 하오. 이제 제 함대는 그대의 것이오."




용도 짐짓 모르는 척 받았다.




미녀 바이오로이드에게 둘러쌓인 사령관을 보면서, 용은 검을 쥐고 속으로 슬며시 웃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그대를 모시리라.



이 정도면 충분히 얀갤에 입성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