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얀붕. 오늘 청소 당번이었던 나는 대걸레를 빨아서 반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왁자지껄.


방과후였지만 반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나는 곧바로 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대걸레를 든 채로 뒷문 앞에서 심호흡을 하고있었다.


반 안이 시끄러운 이유는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녀석들이 아직도 집에 가지 않고 노닥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심지어 여자 일진 무리들.


찐따인 나는 그녀들만이 있는 반 안에 감히 혼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시선 집중 되면 어떡하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 안에서 갑자기 떠드는 소리가 끊기더니 누군가의 탄식이 들렸다.


"하~~ 짜증나."


그것은 일진들 중에서도 상위 티어에 군림하는 얀순의 목소리였다.


외모도 전교급인데 심지어 성적까지 전교급.


일진중에서도 특출나게 잘난 그녀.


그녀의 탄식 후엔, 다시 시끄러워졌다.


"자 그럼~ 꼴등인 얀순이는 약속대로 벌게임~!"


"개못해~~"


"낄낄. 지가 하자 해놓고 지가 당했누."


그녀와 놀던 다른 여자애들이 얀순을 놀려댄다.


"하.. 알았어. 하면 될거아냐 하면. 그새끼 오면 바로 할게."


얀순은 벌게임을 받아들인 듯 하다.


뭘 한다는걸까? 그새끼는 또 누구일까.


'그새끼 오면... 온다고?'


지금 저 반에 돌아올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에게 뭔가를 할 생각이다.


더욱더 들어가기가 무서워졌다.


나는 그렇게 병신처럼 교실 문앞에서 5분을 더 고민했다.


"야, 근데 이새끼 왜이렇게 안 오냐? 도망간거 아냐?"


"내가 찾아보고 올게~~"


나는 반 안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음? 뭐야. 뭐하다 이제 왔냐? 빨리 들어와. 얀순이가 니한테 할말있대~"


일진들중 하나. 김얀진이 대담하게 내 손을 잡아 끈다.


'찐따인 내 손이라도 기분 나쁘지 않은걸까.'


여자 일진들은 은근히 찐따남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하는 면이 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어떤 눈초리를 느꼈다.


'살기?'


살기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불길한 시선.


그 진원지로 눈을 돌렸지만, 살기는 씻은듯이 사라졌다.


'뭐였지?'


내 손을 잡아 끌던 얀진도 그걸 느낀걸까. 얼굴이 파래져있었다.


"야 김얀진 갑자기 왜그래? 괜찮냐?"


일진 무리중 다른 여자애가 얀진에게 묻는다.


"응? 응... 괘, 괜찮아."


그리고 나는 얀순의 앞으로 등을 떠밀린다.


다른 일진들이 보고있는 상황에서 얀순은 입을 연다.


"김얀붕. 나 너 좋아한다. 사귀자."


'아... 이게 벌이었구나.'


벌일만도 하다. 얀순같은 카스트 최상위 일진녀가 나같은 찐따새끼한테 고백을 해야하다니.


나는 찰나의 시간동안 고민했다.


순간, 거절이라는 선택지도 머리에 떠올랐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


오히려 이게 벌 게임이라는걸 몰랐다면 나는 거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나 따위가 어울리지 않는다는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하지만 벌 게임이라는걸 아는 상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무조건 받아줘야 한다.'


그러는 편이 나에게도 더 평화로운 선택지임에 틀림없다.


얀순에게 쪽을 주면 앞으로 내 학교생활에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니까.


'내가 쪽 당하고 끝나는게 낫다.'


"응. 알았어. 사귀자."


"......"


"휘익~~ 새끼, 멋있네~?"


"사겨라!사겨라!"


"잘 생겼다~~"


뒤에서 다른 일진들이 야유를 던진다.


하지만 정작 벌게임임을 밝히며 고백을 취소해야할 얀순은 말 없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으음,,,?'


"지...."


드디어 열리는 얀순의 입술.


"진짜지? 무르기 없기다?"


얀순이 치켜뜨기로 수줍게 나를 올려다 본다.


'뭐ㅡ, 뭐야 이거........아...'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이해했다.


'좀 가지고 놀다가 차버릴 생각이구나.'


오히려 뒤에 있던 다른 일진들이 의외라는듯이 말을 잃는 모습.


그녀들도 얀순이 이렇게까지 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한거겠지.


하지만 나도 찐따 생활을 하루이틀 해온게 아니다.


'오냐. 원한다면 끝까지 어울려주마.'


이제와서 망신당하는 기간이 뒤로 조금 밀린다 한들 큰 차이는 없을 터.


그렇게 얀순과 나는 사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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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주 후.


여전히 우리는 사귀고 있다.


'왜지...?'


"얀붕아 아앙~"


점심시간에 얀순은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밥을 먹는다.


자신의 식판에 있는 고기반찬을 전가락으로 집어 내 입에 내미는 얀순.


"아, 아앙..."


나는 감히 거절 할 생각은 못하고 순순히 입을 벌려 그녀의 젓가락을 받아들인다.


'도대체 왜지?'


그녀는 이런 꽁냥대는 느낌을 벌써 2주째 유지중이다.


지치지도 않고.


길어봤자 1주도 안되서 차일거라고 생각 했다.


스스로도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라고 여겼지만, 한번 정도 같이 놀아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하긴 했다.


사실 그것도 내 기대일 뿐이고, 실상 예상한건 평소처럼 말도 섞지 않다가 며칠 내로 차이면서,


"찐따새끼. 진짠줄 알았냐? 벌게임이야 병신아~~"


이렇게 바보취급 당하면서 끝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2주간, 그녀는 내게 쉴새 없이 들러붙어왔다.


카스트 상위인점을 이용해 내 옆자리로 자리까지 바꾸면서.


수업시간에는 일부러 교과서를 안 가져와서 책상 붙이고 내껄 같이 본다던가,


쉬는 시간에는 내 의자 옆에 자기 의자를 딱 붙이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고,


이동 수업때도 내 옆에 딱 붙어서 팔짱을 끼고 이동.


점심시간에는 지금처럼 자신의 맛있는 반찬을 어미 새처럼 내 입에 넣어주고,


하필이면 집도 같은 방향이라 팔짱을 끼고 같이 집에 간다.


그리고 두번의 주말을 거치며 두번의 데이트도 했다.


'이대론 위험해...'


나는 점점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혹시 이것이 그녀의 진정한 노림수일지도 모른다.


내 태도가 건조하니까 자신에게 진심으로 반하게 만든 다음 그 후에 쪽을 주려고...


'그건 너무 하잖아...'


그냥 가볍게 놀림 당하는 정도면 나도 받아들이려 했지만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래서 결심을 했다.


그녀가 집어준 고기반찬을 꿀꺽 넘긴 후, 입을 열었다.


"얀순아 오늘 할 말 있으니까 방과 후에 잠깐 남아줘."


"응? 응. 알았어."


얀순이 생긋 웃으며 대답한다.


방과 후.


나는 그녀를 앞에 세워놓고 고백한다.


"얀순아. 사실 그때 고백 벌게임인거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진심도 아니면서 이제 이런건 그만 하자. 이쯤 하면 너도 만족 했을거 아냐."


"뭐?"


순간 얀순의 동공에 하이라이트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내게로 향한다.


'이 느낌 언젠가...'


언젠가 어디선가 느껴본 시선.


하지만 지금은 그런건 생각할 때가 아니다.


"아, 아무튼. 오늘로 끝내자. 그럼."


나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하지만 얀순이 뒤에서 내 팔의 옷깃을 잡았다.


"잠깐."


나는 뒤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얀순이 닭똥같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것이다.


"야, 얀순아 왜..."


왜 우는걸까.


"미, 미안해... 으흑흑...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집에서 놀자.. 한번만... 응?"


얀순은 나에게 사죄하며 이상한 요청을 했다.


또래 여자애를 울려본 적이 한번도 없어서 당황해버린 나.


"으, 응..."


그래서 수락해버렸다.


30분 후.


나는 여자애 방에 처음으로 들어와 있었다.


'시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야...'


그녀가 내준 아이스 커피를 원샷하면서 갈증을 삭인다.


그녀는 지금 과일을 깎아온다고 잠시 나간 상태.


나는 얀순의 방안을 둘러보았다.


'묘한 포스터가 많네...'


방의 벽을 크게 메우고 있는 전지 크기의 포스터들.


포스터인지 그림 작품인지, 일관성 없는 커다란 종이들.


문득 호기심이 고개를 쳐 든다.


'너무 어색해... 뒤에 뭐가 있는거 아냐?'


나는 일어나서 한쪽 벽면에 붙은 커다란 포스터의 아래쪽을 잡고 슬쩍 들어본다.


"뭐, 뭐야 이거..."


나는 포스터를 들어올린 상태로 굳어버렸다.


포스터의 뒤엔 수많은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그건 하나같이 나의 사진들이었다.


그것도 불시에 몰래 찍은 사진들.


책상에 엎드려 자고있는 내 얼굴.


체육 시간에 공에 얻어맞는 순간의 내 얼굴.


밥을 한껏 머금어 볼을 부풀린 내 얼굴.


등등.


"이건..."


게다가 사진중에는 중학생 시절의 나의 모습까지 있다.


이건 아직 얀순을 만나기도 전인데 어떻게...


나는 소름이 돋는 와중에도 다른 쪽 벽면으로 이동해서 그쪽의 포스터를 들어올렸다.


"으악 씨발!"


나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곳에는 우리집으로 보이는 배경의 사진이 가득 붙어있었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가장 압권인것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눈을 감고 입을 벌린 나의 사진...


그래, 그건 분명 내가 자위로 절정 할때의 순간이다.


"봤구나?"


그때, 뒤에서 얀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을까.


"설명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얀순이 이상한 소릴 지껄이며 내게 다가온다.


이상하게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맹수를 앞에 둔 토끼마냥.


"무, 무슨 설명을..."


공포에 질린 나머지 되는대로 지껄여 본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는 황홀한 표정으로 벽에 붙은 내 사진들을 바라본다.


"충분히 알았지?"


"미, 미친..."


나는 주저앉은채로 뒷걸음을 치려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단지 내가 공포에 질려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커피 맛있었어?"


내가 원샷으로 비운 커피잔을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녀.


나는 이제 말도 잘 나오지 않는 입을 움직여 그녀에게 물었다.


"커, 커피에 뭘 탄거야?"


"잠깐 자고 일어나면 다 알게 될거야."


"씨발..."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