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얀붕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내 방에 돌아오고 나서도, 침대에 누워 잠에 들기 직전이 되어서도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끝없이 맴돌았다. 굉장히 행복한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선배,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깨닫고 보니 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도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상태로,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얀진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까, 깜짝이야!”

 “뭐예요, 그 못 볼 걸 봤다는 얼굴은.”

 얀진이가 불만에 찬 얼굴로 살짝 볼을 부풀렸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는 나와 같이 등교하고 있었다. 향수를 갓 뿌린 듯 은은한 여자아이의 냄새가 풍겨왔다. 문득 나는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를 자각했다.

 “아니, 네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니까 그렇지.”

 “왜요, 두근거렸어요?”

 “……전혀?”

 “앗, 조금 망설였다.”

 “착각이야. 절대 아니니까 걱정 마.”

 일부러 그녀에게 무심한 태도를 취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지만, 가끔씩 그녀의 이런 공격은 이성으로서 참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근데, 너도 이 근처에 살아? 등굣길에 다 만나네.”

 “네. 선배는요?”

 “나도 근처에 살아. 작년에 이사 왔어.”

 “우연이네요. 지금까진 계속 혼자서 등교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매일 같이 등교할걸.”

 “꿈 깨셔.”

 말은 이렇게 해도, 나 역시 그녀와 함께하는 등굣길이 나쁘진 않았다. 알게 모르게 집착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그녀도 그녀 나름의 선은 지켰다. 물론 귀여운 여후배가 아니었다면 용서할 수 없었겠지만.

 “선배, 오늘도 얀순 선배한테 가시나요?”

 “굳이 네가 알 필요는 없잖아.”

 “왜 그렇게 저를 경계하세요. 자, 이거 받으세요.”

 그녀가 내게 건넨 것은 무언가가 담긴 쇼핑백이었다.

 “이게 뭔데?”

 “곰인형이요. 얀순 선배한테 전해줘요.”

 뭔가 이상한 게 들어있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평범한 곰인형이었다. 적당하게 소녀스러우면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디자인이 아닌 고급스러운 느낌을 풍겨, 마치 얀진이를 인형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직접 전해주면 되잖아?”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기 싫어서요. 선배, 얀순 선배 좋아하죠?”

 “……저, 전혀? 무슨 소리야?”

 “부정하지 마세요. 선배의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알 거라구요. 그럼 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얀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미소로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그 이후로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평범했지만, 더없이 소중한 일상이었다.

 나는 매일 하교 이후 얀순이가 있는 병실에 찾아갔다. 우리는 내가 사 온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옛 추억을, 전하지 못했던 근황을, 그리고 간지러운 사랑의 말을 나누었다. 병원이라는 제한된 환경은 오히려 우리가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었다.

 시간이 흘렀다. 비록 얀순이의 기억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점점 나아졌다.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남들이 다 하는 데이트조차 우리는 할 수 없었지만, 단지 그녀의 존재만으로 나는 행복했다.


 “얀붕아.”

 “응?”

 그것은 얀순이가 입원한 지 열흘 정도 이후의 일이었다.

 “……나, 이번 주말에 퇴원해.”

 “버, 벌써?”

 “응. 몸은 이제 다 나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 예전 기억이 더 잘 떠오를지도 모른대.”

 그녀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그러면, 다시 아이돌 일도 시작하는 거야?”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씩은. 매니저…라는 분도 더 공백기가 길어지면 곤란하다고 하셨어.”

 “그렇…구나.”

 그녀에게는 그녀의 인생이 있었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앞으로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니까, 저기.”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얀순이였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빨개진 사랑스러운 소녀가 앉아 있었다.

 “괜찮으면 오늘…….”

 그녀는 손가락을 맞대고 우물쭈물하며, 새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가, 같이 잘래?”

 순간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사고가 빠르게 회전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 아니면 설마……?

 “옷! 갈아입을 옷 가져올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 나는 도망치듯 병실을 뛰쳐나왔다.


 ‘진정하자, 진정.’

 심장 박동이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을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그냥 같이 잠만 자는 것뿐이야. 절대 별일 없을 거야.’

 스스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지만 잡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나는 무심코 얀순이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옷을 벗는 모습을 상상…….

 “선배!”

 “으아아아아아악!!!”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나는 휘청거리면서도 갈아입을 옷이 담긴 가방 단단히 붙잡았다.

 “자꾸 절 보고 그렇게 놀라면, 저 상처받는다구요?”

 “아, 미, 미안. 얀진이 너였구나.”

 눈앞에는 사복 차림의 얀진이가, 커피가 담긴 종이백을 들고 서 있었다. 한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아서,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그……병문안.”

 괜히 어설픈 거짓말을 해봤자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나는 솔직하게 실토했다.

 “이런 저녁까지요? 열심히 시네요.”

 “하하……뭐 그렇지.”

 “마침 잘 됐다. 친구랑 카페에서 보기로 했는데, 약속이 파토났거든요. 커피 한잔하실래요?”

 그녀가 내게 커피잔을 건넸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금방 내린 것처럼 따뜻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뭘요. 그럼 수고하세요.”

 얀진이는 더 이상 용건은 없다는 듯 쿨하게 나를 떠나갔다. 어쩐지 얀순이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왔어.”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VIP실의 문을 열었다. 화장실에서는 물소리와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씻고 있구나…….’

 진정되었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발칙한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이성을……이성의 끈을 붙잡아야 해…….’

 나는 얀진이가 준 커피를 순식간에 전부 들이켰다. 카페인 때문에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조금 지나자 안정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왜……이렇게……졸리지……?’

 긴장이 조금 풀려서인지, 아니면 빨리 그녀를 만나기 위해 뛰어서였는지, 눈꺼풀이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피곤……해…….’

 흐름에 맡겨 편하게 눈을 감았다. 나는 금세 의식을 잃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