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 02 / 03

 



"거짓말쟁이."



 그 통렬한 외침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오늘만큼은 일찍 돌아오겠다며 그렇게나 호언장담해놓고선, 해가 저물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털레털레 기어들어 오다니.


 아무리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는 한들, 그 죄질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었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툭. 툭. 툭.


 반쯤 열린 문틈으로부터 연달아 날아오는 인형 세례보다, 옅은 눈물기를 머금은 말의 화살이 훨씬 더 뼈아팠다.


 문을 살짝 열어놓은 만큼, 어느 정도는 교섭의 여지가 있으리라고 생각했건만, 설마 공격용으로 열어뒀던 걸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이번 건 오빠가 잘못했어. 전화해도 계속 안 받고. 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온 거야? 오늘 마리가 얼마나 애타게 오빠를 기다린 줄 알기나 해?"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든가.


 이는 틀린 말이다.


 거드는 시누이가 백배 천배 더 밉다.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무릎까지 꿇고 싹싹 빌고 있는 거잖아····."


"지금 자세가 중요해?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지! 오빠는 아빠가 돼서 그런 것도 몰라?"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좀 알려주던가.


 가뜩이나 머리 아파 죽겠는데. 도움을 주긴커녕, 옆에서 약을 올려대는 건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저게 가족인지 원수인지, 이젠 가끔 나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미안해. 마리야. 아빠가 잘못했어. 갑자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가 없이····. 지, 진짜 많이 반성하고 있으니까. 하다못해 얼굴이라도 좀 보여주면 안 될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문자 그대로 애걸복걸 애원했다.


 자세한 자초지종을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지금으로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왕자님한테 납치·감금·협박을 당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귀가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니.


 믿어 줄지 말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애초에 어린아이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 만일 용서해 주면 이다음에 마리가 가고 싶다던 놀이공원에 데려다줄게!"


"지난주에 학교에서 이미 갔다 왔어."


"그, 그럼 동물원은 어때? 우리 마리! 판다 좋아한다고 했지! 아빠랑 같이 보러 갈까?"


"판다 아니야. 얼룩말이야."


"····그랬니?"

 


 면도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대꾸에 쟁여놓았던 비책이 남김없이 토막 났다.



"아이고야···· ."



 옆에서 저렇게 꼽주지 않아도, 지금 내가 삽질을 했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일에 정신이 팔려, 그간 딸아이에게 소흘했던 업보가 이런 때 이런 식으로 터지게 될 줄이야.


 스륵.


 절반가량 열려 있던 문도, 생쥐 한 마리 못 지나갈 수준으로 닫혀버리고 말았다.


 낭패였다.


 혹여나 이대로 문이 완전히 닫혀버리기라도 했다간, 화가 풀릴 때까지 방 안에 계속 틀어박혀 것이 뻔할 뻔 자.


 더 볼 것도 없이 최악의 사태였다.



"저기, 마리야····."


"오지마. 오면 평생 말 안 할 거야."


"····."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해 보려 했지만, 울분 어린 거절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까마득한 절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손 놓고 있으면 상황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한데, 막상 어디를 어떻게 손대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신혼 때 들었던 육아 강의. 졸지 말고 제대로 들어놓을걸. 


 뒤늦게 후회가 막심했다.



"····."



 그렇게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며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별안간 옆자리에서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 원 참····. 비켜봐····."



 앞치마를 풀어헤치며, 내게 맡기라는 듯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뭐 이리도 듬직해 보이는 건지.


 표정만 놓고 보면, 어지간한 역전의 용사 저리가라였다.


 역시 아이를 낳은 주부는 뭐가 달라도 다르단 건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순도 높은 감탄이 우러나왔다.



"마리. 아빠한테 화 많이 났지? 그치?"


"웅····."


"마리가 오늘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약속도 안 지키는 아빠 참 못됐다. 그치?"


"우웅····."


"하지만 아빠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닐 거야. 아빠도 마리 못지않게 오늘 마리랑 노는 걸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걸?"


"우읏····."



 살짝 열린 문 앞에 쪼그려 앉은 뒷모습으로부터, 들릴락 말락한 이야기가 오고 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설렘에 가득 찬 딸아이의 목소리가 낭랑히 울려 퍼졌다.



"그, 그거 진짜야!?"


"그럼! 진짜고 말고! 그러니 이제 그만 화 풀고, 아빠랑 화해해 주지 않을래?"


"응! 마리! 아빠랑 화해할래!"



 벌컥!


 한때는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이 활짝 열렸고, 열린 문안에선 조금 전까지 울상이었던 딸아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뛰쳐나왔다.



"아빠!"


"마, 마리야!?"



 와락!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그렇게나 완강하게 굴던 딸아이를 이토록 완벽하게 설득해낸 걸까. 


 마법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상각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후훗."



 의기양양하게 이쪽을 내려다보는 얼굴이 오늘만큼은 밉살스럽긴커녕, 되려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구나. 이게 바로 격의 차이라는 거구나.


 부성과 모성. 그사이에 자리한 절대 매울 수 없는 거대한 간극을 오늘로써 절절히 실감했다.



"마리야····. 화는 다 풀렸니····?"


"응! 마리! 화 다 풀렸어!"


"하핫."



 환하게 미소 짓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뒤늦게 안도감이 몰려왔다.


 이번 주도 험난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던 터라, 이런 단란한 시간이 가져다주는 평온함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아빠! 그거 진짜야? 진짜의 진짜야!?"


"응····?"



 차오르는 흥분을 주체 못 한 딸아이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건넨 추궁에, 꼿꼿하던 고개가 천천히 사선으로 기울었다.


 마리가 이렇게까지 신이 난 모습을 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 건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길래?


 그런 의문이 뇌리를 스쳐 지나갈 무렵이었다.



"아빠! 왕자님이랑 친구라는 게 진짜야!? 정말로 마리랑 왕자님! 만나게 해줄 거야!?" 


"····뭐?"



 딸아이의 앞이라는 걸 잊고, 무심결에 험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던 그 사실을 마리가 대체 어떻게!?


 피어난 의구심은 잇따르는 이지적 사고에 빠르게 휩쓸려 갔고, 그러한 흐름은 곧 또 하나의 거대한 감정이 되어, 내 눈에 거센 불을 지폈다.


 찌릿!


 

"히익!"



 살의를 담은 눈빛으로 이 자리에서 슬금슬금 내빼려는 용의자를 황급히 붙잡았다.


 마리가 왕자의 열렬한 팬이라는 건, 우리 가족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학교의 친구들도 그 녀석의 팬이 아닌 아이를 찾기가 도리어 힘들 정도인 데다가.


 근래 들어선, 녀석의 유튜브 채널에 개재된 ASMR이 없으면 잠도 자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이따금 주위에서 딸아이를 그녀석과 만나게 해주는 건 어떠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만.


 경망스럽다는 말이 옷을 입고 걸어 다니고 있는 듯한 그 놈팽이와 소중한 딸아이를 직접 마주치게 한다는 건, 내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서. 사상. 품행. 어느 하나 영향받아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니 딸아이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도, 내가 녀석과 함께 일한다는 사실은 마리한테 철저히 비밀로 부쳐왔었다.


 그런데 그걸, 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홀라당 불어버리다니.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만행이었다.



"마리야. 잠깐 귀 좀····."


"응? 아빠? 갑자기 왜?"


"히잇!"



 앞으로 벌일 응징에 앞서, 두 손으로 딸아이의 귀를 살며시 틀어막았다.


 

"너 이리로 와····! 내가 마리한테 쓸데없는 소리 나불거리면, 친동생이고 나발이고 죽는다고 했지····!"


"그, 그치만! 마리도 기뻐하고 있고!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오빠는 왕자님이랑 우리 죽어도 못 만나게 할 거잖아! 남편이랑 아들도 오빠한테 왕자님 싸인 좀 받아와 달라고 매일 같이 졸라댄단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틈날 때마다 조카 돌봐주는 기특한 동생한테! 그 정도 서비스 좀 해주면 뭐 어떠냐!"


"그래서 매달 용돈 꽂아 주고 있잖아! 바로 어제도 추가로 뜯어가 놓고선! 그리고! 지 욕심 불리자고 순진한 조카 이용해 먹는 게 어딜 봐서 기특한 동생이야! 이걸 확 그냥!"


"히익! 마, 마리야! 눈 떠! 빨리! 고모 죽는다! 고모 죽어!"


"어, 뭐야? 술래잡기? 마리도 할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달아나는 원수의 등을 사냥개처럼 뒤쫓았다.


 달밤의 추격전을 짧게 끝났고, 비밀 누설에 대한 피의 응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미 딸의 귀에 들어가 버린 비밀을 도로 끄집어내는 건 불가능했던 터라, 나는 한동안 고뇌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



 생전 안 하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왕자님에게 건넬 편지를 열심히 끄적거리는 마리를 보고 있으니, 차마 만남을 취소해야겠다는 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만남을 원만하게 진행시키는 것 또한 역시 뭔가 아닌 것 같았다.


 불과 조금 전, 그 왕자 녀석과 거절할 수 없는 불쾌한 계약을 끝마치고 온 참이었으니까.


 둘이 만나는 건 고사하고, 그 불온한 시야에 순진한 내 딸이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달갑지 않았다.



"저기, 마리야····."


"아빠! 왕자님은 사탕 무슨 맛 좋아해!? 딸기 맛? 그게 아니면, 레몬 맛? 설마! 마리가 제일 좋아하는 박하 맛?"


"그····."


"헛! 커피 맛이면 어떡하지! 마리 커피 맛 사탕은 안 가지고 있는데····."


"그, 그건 걱정하지 마렴····. 사탕이라면 아빠가 종류별로 원하는 만큼 사다 줄 테니까····."


"진짜!? 우와! 신난다!"



 부뿐 희망으로 초롱초롱 빛나는 마리의 눈망울을 보니, 더더욱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리가 이렇게나 환하게 웃는 걸 본 게 과연 얼마 만인 걸까.


 인고의 시간 끝에 겨우 되찾은 이 미소가 또 한 번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걸 지켜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은 강인한가.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었디.


 지금 이 자리에 아내가 있었더라면, 내게 뭐라고 말했을까.

 

 그런 잡념이 물결치는 덧없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