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환상향, 그곳에서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인생살이 쉽지 않으리란 건 알았지만 내 경우엔 그게 더욱 심했다.


아버지는 진작에 요괴에게 명을 달리하고, 어머니도 날 낳으시고 머지 않아 심신이 아파서 돌아가시니 말문도 트지 못한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내 딱한 사정을 알아주고 거두어준 서당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난 세상에 피어난지도 모르고 졌으리라.


반인반요 서당 선생에게 양자처럼 거두어져 길러진 탓인지, 딱한 처지에 비해 그닥 못 살지는 않았다. 매일 밥 한 끼 굶지 않고 지냈고, 케이네 선생의 학구열 덕에 배우는 것은 도리어 또래보다 훨씬 빨랐다. 다만 천애고아라는 출신 탓인지, 또래 애들과는 좀처럼 나눌 얘기가 없어 친해지기 쉽지 않았다.



"넌 왜 볼 때마다 항상 혼자 있어?"


그런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언제는 한 여자애가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시비라도 거는 것인가 싶었지만, 소녀는 그저 별처럼 순수한 눈망울을 깜빡거리며 날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 애, 잘 알고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것은 나랑 비슷하지만, 아버지가 마을 내에서 제법 큰 상회를 운영하는 것으로 안다. 그것이 아니어도 병아리 털처럼 샛노란 저 머리카락 덕분에 서당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비가 운영하는 상회의 이름이 '키리사메 상회'였으니, 아마 성씨는 '키리사메' 이리라.


"그러는 너도 항상 혼자 다니지 않냐?"


"난 내가 좋아서 혼자 다니는 건데!"


"그럼 나도 그런 걸로 하지, 뭐." 


초창기에는 부유한 뒷배경 덕분인지 저 녀석과 친해지려 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지만, 태생이 워낙 천방지축이고 수업 중에도 케이네 선생님을 골탕 먹이는 장난도 여러 번 쳐서, 이제는 좀처럼 저 녀석과 친해지려는 아이가 없다. 요컨대 나보다 더한 외톨이인 것이다.


"저기, 저기이. 넌 수업 다 끝났는데 집에 안 가?"


"난 집 없어. 서당이 집이야."


"뭐야, 그게 말이 돼? 그럼 하루종일 저 지루한 선생님이랑 같이 있는 거야?"


이 년, 말하는 꼴을 보니 나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없는 듯 했다. 대체 무슨 변덕이 들어서 나에게 들이대는지 알 수 없지만, 난 빨리 내쫓아낼 요령으로 손을 휘저었다.


"정신 사나우니까 빨리 돌아가. 나 이제 여기 청소해야 되거든."


"왜애, 어차피 집 일찍 들어가봐야 잔소리만 듣는걸. 여기 더 있을래."


소녀는 아예 대 자로 툇마루에 누워 뻗댔다. 미친 년, 지금껏 안 이러다가 왜 오늘 갑자기 이러는가. 아버지한테 혼날 일이라도 한 건가. 나는 소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가. 가라고. 너만 이러면 괜히 나만 귀찮아져."


"싫어, 싫어! 오늘 가면 밤새 머리 아픈 돈 공부나 해야 한단 말야. 절대 안 가!"


이리저리 발을 걷어차던 중, 소녀의 발뒤꿈치가 내 콧잔등을 걷어찼다. 

잠시 시야가 하얀색으로 팍 튀고, 미지근한 게 코 아래로 흘러나왔다. 정작 걷어찬 쪽도 깜짝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난 순간 정신을 잃고 소녀의 노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이 미친 년이!"


"으아앗, 아파! 어딜 잡는 거야! 놔!"


그 이후는 난장판이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온몸을 걷어차고, 서로 바닥을 뒹굴거리며 먼지를 뒤집어썼다. 어찌나 당돌하고 기가 센지 남자에게 머릴 잡히고도 조금도 밀리질 않았다.


결국 케이네 선생님이 소란을 듣고 온 후에야 겨우 싸움이 그쳤다. 선생님은 평소답지 않게 큰소리를 치며 우리들을 엄격하게 혼냈다. 나야 뭐, 혼나는 게 일상일 만큼 익숙하다지만, 이 년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훌쩍거리며 치맛자락을 꼭 쥔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꼴 좋다. 그러니 덤비지나 말지. 난 몰래 히죽히죽거리며 소녀를 골려주었다. 그러자 녀석의 멍 든 얼굴이 볼만하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숨을 거칠게 고르더니, 녀석은 끝내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불쌍해서, 끅, 놀아주려고 했던 건데, 나는 몰라!"


울음소리에 섞여 불분명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내지른 말이 또렷히 들려왔다. 불쌍하긴 누가 불쌍하단 말인가. 누가 놀아달라고 부탁이나 했던가.


난 저 멀리 달려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하지만 조금, 석연찮은 무게가 가슴을 짓눌렀다.


뭐, 상관 없겠지. 어차피 이제 말도 안 걸어올 터다. 괜히 신경 써봐야 머리만 아프겠지.

나는 비릿한 맛이 나는 콧잔등을 팔로 문질러 닦았다. 


참,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었다.



***



"흥, 그런 개죽을 밥이라고 먹고 있어?"


점심을 대충 때울 요령으로 쌀죽을 떠먹고 있으니, 어디선가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일전의 재수없는 여자애가 팔짱을 낀 채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덜 맞았냐, 왜 또 참견이야."


"그, 그냥 꼴이 워낙 한심해서 한 말이야! 넌 맨날 그렇게 먹어? 저 선생이 밥 안 해줘?"


"내 건 내가 해먹어야지. 매일 수업으로도 바쁘신데 어떻게 매일 밥해달라고 투정해?"


할 말을 잃었는지, 녀석은 입술만 삐죽 내민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쉬었던 숟가락을 계속 놀렸다.


"...그거 맛있어?"


"맛있을 리가, 배부르려고 먹는 거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다가오던 소녀는 어느새 내 곁에 앉았다. 마치 원숭이 떡 집어먹는 것이라도 구경하는 것 마냥, 녀석은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굴을 벌겋게 붉히고 도망간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왜 아직도 이러고 있는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단념했다. 괜스레 더 귀찮게 굴 것만 같아서.


"배고파? 왜 남 밥 먹는 걸 그렇게 봐."


"으, 아냐! 난 이렇게 맛없는 거 절대 안 먹어!"


"그럼 뭐 때문에, 또 싸움이라도 걸려는 거야?"


한참이나 입술을 다문 채 우물우물 거리던 녀석은, 결국 한참 후에야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 미안해..."


"...뭐?"


"그, 미안하다구! 그때, 먼저 걷어차서..."


잠시, 밥을 씹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괜히 신경이나 긁으려 온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대뜸 사과를 건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푸훗, 지금까지 긴장했던 것이 괜히 바보같아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웃음을 이상하게 받아들인 건지, 다시 소녀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이익, 이 자식이, 먼저 와서 사과까지 했는데...!"


"미안했다. 나도."


한 번 들으니 말하는 건 쉬웠다. 내가 손쉽게 사과를 돌려주자, 소녀는 멀뚱멀뚱 바보처럼 눈을 깜빡였다. 잠시 후, 내가 사과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흥, 당연히 미안해야지...이렇게 가녀린 소녀를 그렇게 마구 때렸으면서...바보가..."


"소녀는 무슨, 한 대 맞아보니까 태생이 장사더구만. 나중엔 웬만한 남정네들도 다 패고 다니겠던데?"


"야!"


조금 골려주자 시끄럽게 빼액 소리를 질러댔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지 실실거리는 웃음이 가득했다. 참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기이하게도 미워지지 않는 녀석이었다.


"바보야. 그런 거 먹지 말고, 우리 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나 돈 없어. 너나 가서 많이 먹어."


"괜찮아, 내가 사줄게! 히힛, 아직 용돈 받은 거 남아 있으니까."


소녀는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처음엔 영 내키지 않아 주저했지만, 워낙 끈질긴 투정 탓에 결국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요근래에 시장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먹지 못한지도 제법 되어서, 마음이 흔들린 탓도 있었다.


"넌 원래 이렇게 아무한테나 다 사주냐? 그렇게 돈 많아?"


"아무한테나 안 사줘! 내가 인정한, 그...부하한테만 사주는 거야!"


하다못해 친구라는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다만, 부하라니.

소녀는 내 팔을 잡아끌며 달렸다. 금색을 닮은 노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태양의 광채랑 헷갈릴 만큼 눈부신, 아름다운 빛이었다.


키리사메 마리사. 키리사메 상회주의 천방지축인 외동딸.

이날은,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날이었다.



***



많은 시간이 지났다. 서당에서 글을 읽던 코찔찔이 아이들은 더 이상 서당에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부모를 따라 일찍이 가업을 잇기 시작했고, 철없는 장난꾸러기들도 더 이상 마음을 놓고 하루하루를 놀며 지낼 수 없게 되었다.


의외로, 나의 일상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케이네 선생님을 도와 서당의 전반적인 일들을 도왔고, 어떨 땐 수업을 대신하기도 했다. 의외로 학문에 뜻이 통했던 것인지 배움이 귀찮지 않았고, 모르는 것을 깨우치는 것은 제법 재미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가 있는 곳은 변하지 않았다.



"야, 너 지금 안에 있지? 들어간다!"


쿵, 문이 시끄럽게 젖혀지며 익숙한 소녀가 들어온다. 젖살이 빠지고 몸이 성장해 여성스럽게 변한 후에도, 여전히 막무가내인 성질은 변하지 않았다. 


"뭐야아, 안에 있었으면서 왜 대답도 안 해? 서운하게."


"시끄러워. 집중해야 되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마리사는 내 어깨 위에 턱을 괸 채 꾹꾹 눌러댔다. 꼭 주인의 관심을 끌려고 장난치는 고양이 같았다. 그 탓에 붓을 잡고있는 손이 자꾸만 흔들려, 머리를 가볍게 부딪쳐서 쫒아냈다. 


"으으, 재미없긴. 오랜만에 찾아왔는데 이렇게 푸대접하기야?"


"그저께도 왔잖아. 뭘 새삼스레. 그래서, 오늘은 뭘 뺏어가려고 찾아온 거야?"


키리사메 마리사, 그녀는 나와 달리, 요근래 몇 년동안 정말 많은 변화를 겪었다. 키리사메 상회의 후계자 자리를 내팽개치고, 대뜸 마법이 배우고 싶다면서 아버지의 재물을 멋대로 빼돌려 판 다음, 그 돈으로 마을 밖에 자기만의 집을 세워 독립했다.


당연히 마을을 발칵 뒤집어졌다. 워낙에 자유분방한 성격에 예측할 수 없는 녀석이니, 답답한 상회 후계자 자리를 맡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나조차도 마리사가 갑자기 마법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인간에게 마법은 이해할 수 없는 해괴망측한 것. 지금껏 요괴의 사특한 전유물로만 알려진 마법을 갑자기 배우겠다고 하니, 키리사메 집안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다. 키리사메 상회주는 뒷목을 잡고 쓰러져 열흘을 내리 기절해 있었고, 그 날을 기점으로 마리사는 인간 마을에서 떳떳이 걸어다닐 수 없는 후레자식이 되었다.


안 그래도 좁았던 그녀의 인간관계는 이제 완전히 무너져, 친구라고 할만한 것도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네 아버진 뵙고 왔어?" 


"아니, 보나마나 마주치면 콩이나 뿌리면서 쫓아낼텐데. 그런 대머리 아저씨따위 알 게 뭐람."


"그래도 한 번 찾아가. 걱정하고 계실거야. 언제까지고 내가 대신 소식을 전해드릴 수는 없잖아."


그녀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다. 표현하는 방식은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순 있어도,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내게 마리사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만 봐도 그 애정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집안이었다면 진작에 의절을 했어도 모자랐을 일이다.


"...그래도."


"알겠지?"


"....치이, 알았다구우..."


어찌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철부지 같을까.

난 책을 쓰던 붓을 이만 내려놓았다. 지금은 이 말괄량이가 삐지지 않도록 같이 시간을 보내주기로 했다. 마리사는 붓을 내려놓기 무섭게 업히듯이 등 뒤로 뛰어올랐다.


"에헤헤..."


 방금까지 제 집에서 연구를 하다 온 건지, 여러 약재가 매캐하게 뒤섞인 미묘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하지만 맡기에 불쾌한 냄새는 아니었기에 가만히 두었다. 항상 홀로 다니는 주제에 쓸데 없이 정은 많아서, 마리사는 심심하면 내게 찾아와 이렇게 엉겨붙곤 했다.


"외간남자한테 그렇게 들러붙으면 좋은 소리 못 들어."


"어차피 뭘 하든 좋은 소리는 못 듣는 걸. 방금 오다가도 "아비 잡아먹은 요괴 자식아, 썩 꺼져!" 라는 말도 들었고."


아비를 잡아먹었다니. 아직 정정하신 키리사메 아저씨 꼴만 우습게 됐다. 마리사가 가출했던 당일에는 정말 화병으로 죽는게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 마법이라는 거 꼭 해야겠냐? 너, 멍청해보이긴 해도 은근히 머리는 좋더만, 아버지 가업을 이으면 팔자도 훤할텐데."


"그런 건 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그리고 난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로 못한다구. 짧고 고되게 살더라도 재밌는 걸 하는 게 최고지!"


어차피 설득이 될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당장 몇 년 전에도 그렇게 끈질기게 설득과 협박을 했는데도 조금도 들어먹질 않았으니, 오히려 이제 와서 바꾼다면 이상하겠지.

마리사는 "누가 멍청해 보인다는 거얏!"이라고 삐죽대며 귓불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또 우리는 소란스럽게 바닥을 뒹굴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미친 성격을 곁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벌써 이런 짓도 10년이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뭐하다 왔어?"


한바탕 난장판이 끝난 후, 난 탁상 위의 책과 먹을 치우고 대신 찻잔을 올렸다. 마리사는 방석을 베개 삼아 바닥에 드러누운 채, 나를 바라보며 발을 허공에 휘적였다.


"흐흥, 놀라지 마. 오늘은 무려 마스터 스파크의 비거리를 더더 늘렸단 말씀! 코우린한테 부탁해서 팔괘로도 새로 만들어냈고, 이젠 레이무한테도 절대 안 질 거야!"


하여간 또 이상한 이야기들.

난 적당히 경청해주며 선번에서 찻잎을 꺼내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위험한 요괴들과 어울려다니는 마리사가 가끔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녀가 무용담이랍시고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오히려 요괴들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레이무? 하쿠레이의 무녀? 어째 요즘 자주 만나고 다니는 것 같네?"


하쿠레이 레이무. 이런저런 경로로 들을 일이 많은 이름이었다. 환상향의 역사와 함께 해온 유서 깊은 무녀, 그 당대 무녀의 이름이 바로 레이무였다.

요근래 어쩐지 마리사의 입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분이다. 어쩌다 이 녀석이 그런 인연을 트게 된 걸까. 듣기로는 우리와 비슷한 또래라던데, 나 말고도 이 녀석을 감당할 수 있는 녀석이 있었던 건가.


"레이무, 그 녀석은 진짜 대단해! 매일같이 도전하고 있는데, 으으...아직 한 번도 못 이겼어. 그래도 오늘이라면 분명 다를 거야!"


하쿠레이의 무녀에 대해 언급하자 마리사의 별빛같은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이상한 곳에서 승부욕이 발동하더니만, 이번엔 그 불쌍한 무녀가 마리사의 희생양이 된 것 같았다.


"...하쿠레이의 무녀는 어떤 사람이야?"


"응? 그건 왜?"


"그냥, 매일 네 입에서 듣다 보니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


케이네 선생님께 들은 적이 있다. 환상향의 가장 고고하고, 외로운 중재자. 단지 무녀로 선택받았다는 이유로 평생을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

외로운 처지에 대한 동질감인가. 어쩌면 마리사 또한 그 점에 이끌렸던 걸지도 모른다.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소녀에게, 나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같이 만나러 갈래?"


"...뭐?"


"그야, 어차피 난 이 다음에 레이무한테 가려고 했는걸. 궁금하면 같이 가보면 되잖아?"


마리사는 불안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금껏 그녀와 지겹도록 긴 세월을 지내온 나는, 저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냥 네가 데려가고 싶은 게 아니고?"


"히힛, 역시 넌 내 말을 잘 알아들어서 좋아."


"아니, 진짜 안돼. 아직 케이네 선생님이 맡긴 필사도 한참 남았는데."


"에잇, 그런 건 빨리 다녀와서 하면 되잖아!"


 어느새 하늘은 달과 별이 차지하고 있을 만큼 어두웠지만, 마리사는 개의치 않고 내 팔을 끌어 밖으로 나갔다. 아직 다 비지도 않은 찻잔을 남겨두고, 마리사는 허공에 떠오른 빗자루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빨리 가자, 엄청 빠르게 갈 거니까 꽉 붙잡으라구."


거부할 틈은 없었다. 빗자루가 더 높이 두둥실 떠오르자, 난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마리사는 악동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핫, 자, 출발한다!"


빗자루가 화살같은 속도로 앞으로 쏘아지고, 나는 내가 저녁을 아직 먹지 않았다는 것에 신께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



하쿠레이 무녀는 참 신비한 소녀였다. 

만사에 무신경한 듯이 느긋하지만, 그것이 무기력하게 보이진 않는다. 행동 하나하나엔 절제된 성숙함이 어른거렸고, 나태를 가장한 꾸물거림엔 날카로운 직감이 서려 있었다.


'뭐야, 마리사 손님? 어지럽히지 말고 대충 머물다 가.'

 

나도 케이네 선생님께 애늙은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저 소녀는 그 정도가 더했다. 우리와 같은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만큼, 그녀에겐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실용적인 노련함이 가득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하쿠레이의 무녀. 이건 비록 약소하지만 선물로...'


'...너, 엄청 좋은 사람이었구나? 전병이랑 차만 축내는 저 식충이라는 다르네.'


그래도 역시 애라는 걸까. 찻잎이 가득 담긴 도자기를 선물로 건네줬을 때, 무녀는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가를 씰룩거렸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막연히 멀어보였던 무녀가 제법 친근하게 느껴졌다.




"어때? 레이무, 저래 봬도 재밌는 구석이 있다니까."


돌아가는 길, 마리사는 빗자루 너머로 힐긋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난 방금 전의 상념에 빠져있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병기일 거라고만 생각했건만, 정말로 같은 나이의 소녀구나.

게다가 저렇게 하얀 피부, 단아하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와, 묘하게 색정적인 홍백의 무녀복은...솔직히 말해 제법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야, 야, 왜 말을 안 해. 어이~!"


휘청,

순간 빗자루가 기울어지고, 난 철렁하는 마음에 마리사의 허리를 꽉 틀어안았다. 마리사는 히익, 하는 신음을 내고는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으으, 야, 그렇게 갑자기 안으면 어떡해?!"


"야, 씨. 너야말로 운전 똑바로 안해? 죽을 뻔했잖아!"


"그, 그러게 왜 진작에 대답을 안 하고..."


마리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자기가 위험한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는 걸까. 그녀는 입술만 삐죽 내민 채 삐졌다는 의사를 보일 뿐이었다.


"...흥, 뭔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정신을 놓고 다녀? 레이무 생각이라도 하고 있던 거야?"


"...그렇다고 하면, 뭐 어쩔건데."


"엑, 진짜로?"


괜스레 쪽팔린 기분에 퉁명스런 목소리가 나왔다. 그게 뭐가 그렇게 놀라운지, 마리사는 경악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하지만 이내 놀려먹기 좋은 소재를 찾았다 생각했는지, 그녀는 음흉하게 히죽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흐흥, 뭐야. 지금까지 여자라고는 관심 하나 없던 목석인 줄 알았는데, 레이무한테 한 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뭐어...그 녀석, 잘 꾸미지도 않는 주제에 제법 예쁘장하긴 하지."

 

"..."


반했다고?

아마, 아닐 것이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품어본 적은 없었지만, 아마도 이것이 그 사랑이란 감정은 아닐 것이다. 물론...만약 내게 이상형이 있다면, 하쿠레이 레이무가 제법 가까운 모습이긴 하겠지만.


"....그럴지도 모르지."


난 괜히 골려줄 심정으로 조용히 수근거렸다. 이 말괄량이가 유일한 친구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 반응이 궁금해서 벌인 사소한 장난이었다.


"...뭐?"


"그야, 우리 또래 중에 레이무 씨처럼 예쁜 사람은 없잖아. 당장 우리 마을 안에서만 봐도 말야. 그리고 견식도 제법 넓으신 것 같던데, 나랑 좋은 대화상대가 될 것 같지 않ㅡ"


또 다시, 빗자루가 크게 휘청였다. 다행히 허리를 꽉 안고 있었기에 방금처럼 위험하진 않았지만, 정말이지 심장 건강에 좋지 않았다.


"야, 너 정신을 어디다 팔고...!"


"...푸, 흣."


작은 어깨가 들썩인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고자 어깨 너머를 힐긋거렸다. 하지만 챙이 넓은 모자 탓에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풋, 푸흐, 프하하하!"


이윽고, 마리사는 대뜸 시끄럽게 폭소를 터뜨렸다. 얼마나 크게 웃는지 밤하늘이 울릴 정도였다. 눈가에 물기까지 어른거릴 만큼 잔뜩 웃어댄 후에야, 마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야, 이 바보야! 레이무랑 네가 정말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예쁘고 강한 애가, 너처럼 책만 읽을 줄 아는 지루한 샌님한테 관심이나 있을 것 같아?"


그래. 뭔가 했더니 그냥 놀려주고 싶었던 건가.

괘씸한 마음에,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더욱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너도 알잖아? 나, 서당에서 은근히 사람들한테 인기 많은 거."


"하, 웃기시네! 그런 거짓말 해봤자 더 추해질 뿐이라구. 그러니까 가망 없는 감정은 품지도 말고 일찌감찌 포기해. 이 일은 레이무한테 비밀로 해줄 테니까."


"..."


이 녀석, 원래 이렇게 독설을 퍼붓는 성격이던가?

난 할 말을 잃어 그냥 입을 닫았다. 애초에 농담으로 건넸을 뿐인 말이기도 했고, 하쿠레이 무녀에게 정인이라니, 그녀의 말대로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였다.


"...정인을 찾고 싶으면 네 주변이나 잘 둘러보라구. 혹시 모르잖아, 너같은 얼간이라도...좋아해주는 여자가 있을지도."


"그것 참 감사한 조언이네."


난 그녀의 놀림을 대충 흘려듣고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달과 별이, 느릿한 속도로 점점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우린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지, 가끔 장난스레 말을 걸어도 마리사는 묵묵히 앞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나 하고 있는 걸까.

고민해봐도, 내가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서당으로 돌아왔다.



***



그날 밤 이후, 우리 사이에 딱히 변한 것은 없었다. 


마리사는 여전히 일주일에 두세번 서당으로 찾아와서 차와 전병을 축냈고, 하루종일 자신의 무용담을 시끄럽게 조잘거렸다. 


그리고 가끔씩, 나는 마리사와 함께 레이무에게 방문하곤 했다. 그녀와 만나 대화하는 것은 솔직히 즐거운 경험이었고, 넉넉한 새전과 선물만 준비해간다면 레이무 역시 깍듯하게 나를 손님으로서 대우해줬다. 그녀와 같이 대화를 나누며 찻잔을 기울이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가, 밤늦게 서당으로 돌아오는 일도 은근히 잦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직접 레이무에게 데려다 달라고 마리사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가 더욱 많았다. 

너무 많이 부탁을 해서 귀찮았던 건지, 아니면 내가 레이무에게 치근덕거린다고 착각한 건지, 마리사는 내 부탁에 영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까진 생각하지 못했는지, 그녀는 내가 말을 꺼낼 때마다 묵묵히 날 하쿠레이 신사에 내려 주었다.


그런 나날을 지내기를, 일 년 정도.





"야."


어느 순간, 마리사가 대뜸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난 레이무와 같이 찍었던 빛바랜 사진을 내려놓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뭐야, 이런 아침부터 서당엔 웬 일이야? 아버지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 너, 저번에 레이무한테 갔을 때 무슨 선물 줬었어?"


선물? 지금껏 하쿠레이 신사에 방문할 때마다, 작든 크든 선물은 하나씩 챙겨갔기에 저번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왜 새삼스레?


"그랬지. 근데 왜?"


"너, 하아, 왜 하필 그런 선물을 준 거야? 너, 그때 말했던 거 장난이 아니라 진짜였던 거야?"


묘하게 날선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이해가 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내가 저번에 줬던 선물은 아마...외래인 아저씨가 마을에서 판매하는 초콜릿이라는 다과였을 터다.


"이해할 수 있게 말을 해봐.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 그 다과점 아저씨가 말한 거 못 들었어? 네가 그 때 사갔던 과자...이성 간에 주고받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몰라?"


난 초조한 듯이 추궁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어봤다. 외래인들은 여러 의미를 담아서 그 초콜릿이라는 과자를 전해주는 걸로 알고 있긴 하다. 어차피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기에, 아무거나 달라고 하긴 했었다만.


"...하."


내 침묵을 무슨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마리사는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웃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낯선 웃음이었다.


"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진짜 레이무 좋아하냐?"


"아니, 왜 또 갑자기 그 소리가 나오는데?"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네가 지금까지 한 짓들 좀 생각해봐. 요즘 맨날 나만 보면 '레이무 씨', '레이무 씨' 타령만 하잖아."


난 입을 다물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쿠레이의 무녀와 나누는 사소한 담소가, 그녀를 통해 얻는 새로운 지식들이 흥미로웠기에, 최근 들어 마리사에게 자주 부탁했던 것은 사실이다.


"...너, 내가 말했던 거 전부 잊어버렸어?"


마리사는 계속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몰아붙혔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반박했다간, 정말 무너져내려버릴 만큼 약하고 불안정해보였으니까.


"너 같은 건, 레이무랑 전혀 안 어울린다고. 네 주제를 알고 살라고. 네가 무슨 노력을 하든...레이무한테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그 당연한 걸 정말 몰라?"


착각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평소처럼 당당하게 응수해주고 싶었다.


"네 분수에 맞는 짝을 찾아. 그, 있잖아. 꼭 레이무가 아니어도...그만큼 예쁘고, 성격 좋고, 활발한 여자도 있는데, 왜 그렇게 구차하게 굴어대는 건데?"


"..."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정말, 그 감정이 착각일까?


하쿠레이 레이무, 모두에게 차갑지만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핀 외로운 꽃.

정말로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연모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나?


평소였다면, 나는 이쯤에서 어물쩡 화제를 돌리며 그녀의 기분을 풀어줬을 테지만.


"...왜 그런 걸 네가 정해, 마리사?"


어쩐지 가슴 속에서 욱하는 감정에, 나는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기어이 뱉어버렸다.


"너, 뭐...라구?"


"레이무 씨한테 어울리는지 아닌지, 그건 네가 정할 게 아니잖아. 왜 예전부터 내 주제를 계속 네가 정하려 들어?"


한 번도 마리사에게 향한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계속 혀끝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런 반응을 예상도 못했는지, 마리사는 말하는 법을 잊은 백치처럼 입을 뻐끔거릴 뿐이었다.


"내가 레이무 씨를 좋아하면 어쩔 건데? 그게 너랑 뭔 상관이야? 가망이 없어도, 한 번쯤 시도하고 포기하는 거지. 왜 계속 네가 그걸 참견하려 드는 거냐고."


그래. 한 번 정도는 세게 말해줘야 마리사도 더 이상 투덜대지 않으리라. 훗날 한 남자의 정인이 될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와 필요 이상으로 깊게 얽히는 건 자제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더 이상 내 생활에 너무 참견하지 마. 앞으로는 수고스럽게 태워다줄 필요도 없어. 하쿠레이 신사까지 가는 길이 쉽진 않지만...음양사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 가지 못할 것도 없으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갈게."


"...왜?"


넋이 나간듯한 멍한 목소리가, 그녀의 창백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공허하게 비어버린 그녀의 눈동자엔, 평소처럼 반짝이는 별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왜...하필, 레이무야...? 넌, 넌...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너...레이무가 어떤 여자인지, 알기나 해?"


자꾸만 입술을 짓씹는 탓에 그녀의 발음이 어눌하게 뭉개졌다. 마리사는 검은 치마폭을 꽉 움켜쥔 채, 자꾸만 손톱을 안으로 박아넣었다.

 

"걔, 평소엔 잘 씻지도 않아. 워낙 가난해서...끼니를 굶는 것도 허다하다구. 옷도 대충 빠는 데다가, 매일 같은 무녀복만 입어서, 엄청 냄새도 나고..."


"...마리사?"


"그런데, 왜. 레이무야? 예뻐서...? 차분하고, 조용해서? 정말 그게 다야?"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마리사에게 다가갔다. 지금 그녀를 잡아야 한다고,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모를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난 조심스레 그녀의 팔을 쥐었다.


타악ㅡ!


마리사는 내 팔을 힘껏 내쳤다. 어찌나 세게 휘둘렀는지, 어깨가 전부 저릿할 지경이었다.


"...꺼져."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경멸 어린 욕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년한테, 꺼져버려."


가슴 깊이 비수처럼 파고 드는 그 욕설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야, 야! 마리사!"


그녀는 홀연히 빗자루와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하, 씨...갑자기 이게 뭐야...?"


머리가 욱신거렸다. 잡아야 했는데, 내가 먼저 사과했어야 했는데.

안 그래도 토라지면 좀처럼 풀리지 않는 녀석을, 저렇게 보내버리면 또 어떻게 다시 만난단 말인가.


"...하여간, 어린애처럼 뭐하는 짓이냐."


나는 스스로 조소하며 욱신거리는 손목을 쥐었다. 마리사가 사라진 하늘 너머, 이젠 그녀의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기다리는 수 밖에.

분명 저 바보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그때 확실히 마음을 풀어주자.


난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서당으로 돌아갔다.



***



한 달.

키리사메 마리사가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주일 동안 만나지 못해도 강아지처럼 달라붙어서 온종일 뺨을 부벼대던 녀석이, 무려 한 달을 족히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함은 이미 가슴을 가득 메워 턱끝까지 차올랐다.



"..."


늦은 밤, 내가 서당 일을 쉬고 마법의 숲까지 찾아온 것도 그 불안함으로 인한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마법의 숲, 버섯 포자가 연기처럼 자욱하게 깔린 몽환적인 숲. 특유의 탁한 공기와 여러 기형적인 버섯들 때문에 인요를 막론하고 이 숲은 매우 위험한 곳으로 유명했다. 나는 케이네 선생님께 간청해서 얻은 여러 장의 부적은 손에 꼭 쥔 채, 달빛을 이정표 삼아 마리사의 집으로 나아갔다.


왜 하필 이런 위험한 곳에 집을 지은 걸까. 괴짜 기질이 이런 곳에도 발동해버린 걸까. 마리사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한 번도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다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확한 위치는 이렇게 직접 돌아다니며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마리사~!"


혹시나 싶어 하쿠레이 신사에도 찾아갔지만, 마리사는 요 한 달 간 그곳에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쿠레이 신사도, 서당도 방문하지 않은 녀석이 어디에 있겠는가. 보나마나 지금껏 방구석에 틀어박혀 훌쩍거리고만 있었을 것이다.


"...사과해야겠지."


자기 나름대로 나를 걱정해서 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괜한 감정에 그토록 날카롭게 반응했으니, 분명 크게 상처를 입었을 터.


당분간은 그 녀석이 좋아하는 음식이나 잔뜩 해주면서 화를 풀어줘야겠다. 이렇게까지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은, 첫만남 당시 싸움 이후로 처음이지만...그래도, 내가 아는 녀석이라면 금방 평소처럼 앙금을 풀고 실없이 웃어주리라.


그 날, 마리사가 먼저 내게 사과를 전해주었듯, 이번엔 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줄 차례였다.


바스락, 바스락.


자욱한 버섯 포자 너머, 한참이나 말라 비틀어진 낙엽을 밟고 나아간 뒤, 나는 겨우 자그마한 오두막집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외관은 신경쓰지 않고 제 좋을대로 지은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저곳이 마리사의 집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똑, 똑, 똑.


"...마리사, 안에 있지?"


 내부는 고요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안에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끼이익, 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촛불 하나 없이 어두운 방은 섬찟한 분위기까지 들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을 의지해, 나는 겨우 집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는 여러 고서들이 지저분하게 널부러져 있었고, 벽을 가득 채운 보따리 안에는 무슨 용도에 쓰이는지 모를 다양한 버섯들과 약초들이 있었다. 평소에도 청소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녀석이긴 했지만, 집안 상태는 생각보다 더 심했다.


"마리사!"


설마, 없는 건가?


마지막 하나 남은 방, 난 기대를 담아 그 문고리를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방 너머에서 은은한 촛불의 빛이 흘러나왔다.

방금까지 막 타오르고 있었다는 걸 알리듯, 촛대는 얼마 닳아있지 않았다. 나는 주위를 살피며 촛대 앞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


그곳에 있는 건, 텐구의 사진기로 찍어 인화한 우리의 사진과, 외래인의 다과점에서 팔던 초콜릿.


난 사진을 들어올려 촛불에 비춰보았다. 제법 관리를 잘했는지 아직까지 해진 부분없이 사진은 말끔했다. 사진 속에선, 마리사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내 목에 팔을 두른 채 환히 웃고 있었다.


"이런 건 또 언제..."


보아하니 제법 예전에 찍었던 사진 같은데, 아직도 이렇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건가.

그 정성에 괜히 입가가 썼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사진을 조심히 내려두었다. 그 다음, 나는 고급스런 장식으로 싸인 초콜릿을 들어올렸다.


이 다과는, 주는 날짜와 모양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전한다고 들었다. 내겐 아무래도 좋은 속설이었지만, 문득, 그 내용이 궁금해졌다.

만약 마리사가 이 다과를 나에게 전해주려고 했던 것이라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난 포장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풀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와줬구나."


ㅡ!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그와 함께 머리에 덮쳐온, 끔찍한 고통.


자각도 없이, 어느새 나는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어디서 쏟아졌는지 모를 뜨거운 액체가 머리에서부터 자꾸만 쏟아졌다.


"...마, 리사...?"


"분명 찾아올 줄 알았어. 응,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유일하게 날 걱정해줬던 건 너뿐이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좀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현기증이 치밀어 눈 앞이 캄캄했다. 겨우 부릅 떠서 확인한 마리사의 오른손엔, 붉은색 액체가 뚝뚝 흘러떨어지는 몽둥이가 잡혀 있었다. 


방금 전의 충격, 설마 저거였던가.

도저히 믿기 싫은 사실이었지만, 지금으로썬 그 가능성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마리사, 너...대체, 끅, 왜..."


알고 싶었다.

이런 일을 벌일 녀석이 아닌데, 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대답만큼은 반드시 듣고 싶어, 나는 멍청하게 같은 질문을 입에서 되뇌였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푸흐흣, 마리사는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달그락, 그녀의 손을 떠난 몽둥이가 바닥에 고인 붉은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레이무 말야. 너랑 알고 지낸지 고작 일 년 남짓도 안 됐어. 그런데...넌 고작 그 짧은 시간만에 레이무한테 마음을 전부 내줬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천근처럼 몸이 무거웠다. 혹시 얼굴에 가득한 이 축축함이 전부 나의 피일까. 자꾸만 불안한 망상이 마음을 파고 들었다.


"...우리가 몇 년을 알고 지냈는지 알아?"


어찌 모르겠는가. 서당을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우린 서로 인생의 절반을 훌쩍 넘는 시간동안 서로를 알아왔다.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친구로서.


"...십 년이야. 그 시간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우린 계속 서로의 곁을 지켜줬잖아. 그리고 분명, 앞으로도 계속 그랬을 테고."


기척이 가까워진다. 마리사는 내게 가까이 쪼그려 앉아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었다. 몽둥이에 맞아 찢어진 상처가 시큰하게 아려왔다.


"그 긴 시간동안, 계속, 내 마음은 너한테밖에 없었는데...왜 넌 그렇지 않아? 왜, 그런 년한테, 그렇게 허무할 만큼 쉽게 마음을 허락하는 거야?"


고사리처럼 작은 손이 내 머리칼을 움켜쥔다. 마리사는 머리카락을 당겨 내 고개를 올렸다.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미 총명한 별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탐욕만이 붉게 반들거리는 더러운 눈빛.


"...그러니까, 불평하지 마."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건, 내가 잃어버린 네 마음을 다시 가져오려는 것 뿐이니까.

 

마리사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영원정의 토끼 주소가 쓰던 커다란 주사기, 한 번 맞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던 그 주사바늘이, 목덜미에 그대로 꽂혔다.


"내가 널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해줘."


 반항은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를 미래에 막연한 희망이나마 품으며, 조용히 피로한 눈을 감는 것 뿐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녀가 내게 먼저 손을 뻗어 우리가 친구가 되었듯, 이번엔 내가 다시 손을 뻗어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더 이상 이런 염증나는 관계에 만족하기 싫었던 걸까.


찬란하게 빛나는 별의 소녀, 천진하게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소녀는, 이제 한 남자만을 보기 위해 추악하게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사랑해."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그 한 마디 사랑의 고백은,

잘못 만든 초콜릿처럼, 그저 씁쓸한 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