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 맞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곳곳을 난무하는 귀를 찢을 듯한 비명. 

그 모든 것이 일 순간. 단 한마디의 목소리에 의해 전부 멈추었다. 


황녀를 붙잡았다. 


짧았지만, 모두가 그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하나 둘, 교차하던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하늘 위로 뻗어나가는 피로 얼룩진 은빛. 


시체와 피로 웅덩이진 전장의 곳곳은 함성소리, 그리고 좌절의 소리로 가득 메워졌고, 그 중심에서 목에 칼날들을 수 놓인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은빛 갑주의 여인. 


제대로 된 명분도 없이 일어난 제국의 기습 침략은, 이토록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누구라도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구성이었던 제국군은, 전부 포로로 전락. 


그렇게, 의문만 남긴 채 사건은 일단락 되는 듯 했다. 






***






" … 허. " 


어이가 없었다.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지하 감옥에, 마치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 꽃이 한 송이 피어있는 것 같았다. 

그 꽃이 가시 돋친 검은 장미라는 것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했기에, 혹여 그 상대도 나를 익숙하게 바라보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애썼다. 


" 이런 일을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희가 맡을 수 있는 수준이… . "


" 알고 있습니다. " 


그가 꺼낼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말을 끊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제 아무리 사지가 결박된 상태라고 한들, 현 시점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라고 불리던 이가 놓여있는데. 


그렇기에 이 전쟁의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째서 제국과 거리가 가장 먼 변방의 왕국에 전쟁을 걸었는가? 

심지어 사이 사이의 왕국조차 전부 건너뛰고, 지형적 이점도 없는 곳에 별동대라고 칭해도 좋을 정도의 소수의 군사를 몰고 말이다. 


그리고 어째서, 이토록 쉽게 붙잡혔는가. 


제국과의 거리는 말을 타고 밤낮을 이동한다고 한들 보름 이상이 걸릴지언데. 

선두에 있던 황녀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으며, 휘하 병사들 모두 침묵을 유지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왕은 제국으로 급히 서신을 보냈지만, 답장을 받기 까지엔 아마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마, 여러 복잡한 일이 얽혀 더 늦을 테지만 말이다. 


하나 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수감되어 있던 다른 포로들을 후송시키고 있었다. 

아마 조만간 저 황녀의 수감처도 바뀌게 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황녀를 이런 곳에 가둬 둔다는 것도 말이 안되니 말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를 피해 도망간 곳에서, 이런 모양의 재회를 할 줄은 몰랐는데. 








*****








" … 그래도 남자아이라 기대했는데, 제 누이의 발밑에도 못 미치는군요. " 


" …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게. "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아무리 몇 백, 몇 천 번의 검을 휘둘러도 늘어나는 것은 굳은 살밖에 없었다. 

비교 당하는 아이. 결코 바깥에 알릴 수 없던 사생아. 왕족 특유의 새빨간 붉은 머리칼이 아닌 검은 빛이 자욱한 적발. 


어미라는 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손가락질만 당하며 살아야만 했던 유년기. 

그럼에도 인정받고 싶었던 내가 아무리 노력해봐야, 이 곳에선 걸림돌일 뿐이었다. 


" … 있잖아. 손에 힘을 조금 풀고… . " 


검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던 내 손등에 다가오던 새하얀 손은, 무참히 튕겨날 뿐이었다. 

당황한 것인지, 튕겨난 자신의 손을 아련히 바라보던 여성은 결코 모를 것이다. 


애초에 시작점이 다르다는 것을.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싸구려 철제 검을 내팽개친 채로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그럼에도 들리던 수많은 비난의 목소리. 


황녀님께 저게 무슨 버릇이냐니,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쫓아내는 편이 낫지 않겠냐던가.

그래도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으려면 왕궁 안에 가두는 편이 어쩌느니. 


지긋지긋했다. 나라고 좋아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럼에도 제일 버티기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그 이야기에 중심이던 황녀 때문이었다. 



" 있잖아. 오늘도 연습하러- " 


" 제발, 제발 좀 나가주세요. " 


" …… 나는… . " 



이른 아침. 

햇빛이 창가 사이로 들어올 때 즈음엔 빛에 비쳐 반짝이던 먼지들이 가득한 공간. 

방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창고와도 비슷한 방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이가 매일같이 찾아왔다. 


아무리 밀어내도, 거절해도 우월감에 찌들어 약자를 내려다 보는 동정심과 같은 색을 비추며 말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얘기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있었다… . 그게 문제였다. 


그 누구도, 아무리 왕의 피가 섞여있다고 한들 사생아와 황녀가 가까이 붙어 다니는 것을 좋게 보는 이가 없었다. 

오죽하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유 만으로 맞은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제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뭐가 그토록 원망스러웠을까. 자신의 무책임으로 인해 생겨난 실수를, 어찌 그리 바라보기 싫었던 걸까. 

이토록 멍청한 자가 왕좌에 앉아있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제국마저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조잡한 식탁엔 먼지와 함께, 고급진 그릇이 올려져 있었다. 

아마도 황녀의 짓이겠지. 평범히 바라본다면 그저 남에게 베풀 줄 아는 호의로 받아들이겠지만, 관계라는 것에 있어서 그 모든 것은 정 반대의 색을 띄기 마련이었다. 

이 모든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가, 전부 화살이 되어 내게 날아왔으니까. 


누굴 위한 행동일까. 나? 그게 아니라면 자신? 


하지만 이것 하나 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든, 타인을 위해서든 결코 곁에 있다는 것 하나 만으로도 내게는 독이 된 다는 점. 


결국 이곳의 주인인 그녀가 있는 한, 사라져야 하는 것은 나라는 것까지.


빛이라고는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전부. 뒤돌아서 본 그녀는 쓰디 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고 있던 내 모습에 뭐가 그리 기쁜지 해맑게 웃어 보이던 그녀. 

같이, 라는 말이 나오길 바랬던 걸까? 


" 웃는 거, 드디어 보… . " 


결국 그녀의 얼굴은 해맑은 채로 남아있지 못했다. 


" 실은 귀찮으시잖아요. 이제 그만 해도 괜찮아요. " 


새하얗던 캔버스에 검은 물감을 엎지르듯, 그녀의 표정은 빠르게 어두워졌다. 


알고 있다. 내가 갖고 있던 혐오감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주변에 비롯된 감정이라고. 

그럼에도 말해야만 했다. 이제 끝내고 싶었으니까. 


더 이상, 불행하고 싶지도, 불행을 주기도 싫었으니까. 


" 매일 몰래 찾아 오시는 거 말이죠. 늘 따돌렸다 생각하시지만 호위가 붙어 계셨고, 저는 그러실 때마다 밤마다 매를 맞았죠.

… 아마 모르셨겠죠. 당신이 저에게 호의를 베풀 때마다, 되려 제가 힘들었다는 걸. " 


" … 무슨 소리야 그게… ? "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 손가락 끝을 파르르 떨던 그녀의 눈동자는, 혼란에 젖은 것 같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정말 몰랐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걸까? 


" … 늘 비교 당하는 걸 알면서도, 구태여 자신을 보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훈련장까지 따라와 항상 제게 모욕을 주시고는 했죠. " 


" 아니, 아니야… 난 그런 의도가, " 


" 그렇겠죠. 태생이 다른데. 이해할 리가 없겠죠.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고,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 늘 따스한 눈빛만 받으면서 사시는 분인데. " 


" … 그만, 그만해줘…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응? 거짓말이잖아. 지금 여기 아무도… " 


" 미안하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꺼내면 되나요. 황녀께서. " 



애써 꾹꾹 참아왔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터졌을 때, 알 수 없는 해방감과 현실을 다시 한번 와 닿게 하는 좌절감. 

그리고 애꿎은 이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죄책감.


알고 있다. 잘못한 것은 그녀가 아닌 이 세상인 것을. 


알고 있다. 그 모든 원흉이 나 하나라는 것도. 


이제 끝임을 짐작해서 였을까? 

지금껏 쌓아와 응어리진 마음이, 결국은 애 먼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 있잖아요, 난 당신이 정말 싫어. " 


뭐든 가질 수 있는 당신이, 자꾸만 내게 희망이라는 껍데기의 고통을 가져다주는 당신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녀의 탓으로 돌리려던 내가.


천천히 맺히던 눈물은, 한 순간에 터져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내게는 들리지 않을 눈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늪에 빠져버리듯 나까지 끌어들이려는 것만 같았다. 


흐느끼던 그녀를 뒤로 하고, 이 지긋지긋한 공간에서 나왔다.

아니, 도망쳤다. 


끝까지, 좋은 기억 하나 남기지 못한 채로 멀어진다. 

아니, 어쩌면 하나 정도는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불행한 기억으로 덮어졌기 때문이겠지. 


나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게 아니라고. 가지 말아 달라고.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마치 현실을 부정하듯이.


다 무슨 소용일까. 

이미 부숴진 마음은 산산조각 나 찾을 수도 없게 되었는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멀어졌다. 

이대로 영원히 멀어지면 좋을텐데. 






*****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세상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느리게 흘러갔지만, 천천히. 그렇지만 어떻게든 잊어가던 기억은 단 한순간에 상기되어 버리고 만다. 


애써 로브 후드를 푸욱 눌러 내렸다.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하는 마음에. 


꽤 어두운 공간 탓에, 앞머리 정도는 흑발로 보일 것이다. 

제국과는 달리, 왕국에는 흔한 머리 색이니, 10년이 지난 내 모습을 아마 들킬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좋은 기억… 따위는 아무래도 없겠지. 

아니, 어쩌면 나에 대한 기억조차 없을 수도 있다. 

그야, 그녀에게 나는 그저 잊혀진 기억의 파편일 뿐일 테니까. 


여전히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그녀를 그제서야 유심히 쳐다보았다. 


예뻐졌구나. 원래도 아름다웠지만, 성숙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러 감정이 오갔다. 굳이 무언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말을 섞고 싶지도, 그렇다고 저 상태에서 깨우고 싶지도 않았으니. 


허나, 그러한 내 바램은 무참히 깨지는 듯 했다. 


두 팔이 메달려 구속되어 있던 손의 방향이, 거의 수평을 향하고 있었다. 

맥아리 없이 늘어져 있어야 할 손이 말이다. 


" … 굳이 쓰러진 척을 할 이유가 있나요. " 


" …… .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혹여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싶어 다시 한번 바라보니, 분명 어둠 속임에도 선명히 나를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 … 대접이 너무하네요. 나름 황녀인데. " 


" 멋대로 전쟁을 벌인 건 괜찮고요? " 


" 글쎄요.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 


" …… . " 


참으로 제국에 어울리는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미약하게 나마 남아있던 그녀와의 기억들에서, 그녀의 모습은 이런 모양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구나 싶었다. 다행히 그 기억에 나는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니까. 


" 뭐, 조금만 참아요. 당신이 죽인 이들의 장례식이 끝나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편한 곳으로 옮겨질 테니까. " 


" … 모르죠 그건. " 


" ……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그 쓰레기같은 제국도, 그 정도 대접은 합니다. " 


" 그거 말고요. " 


" …… .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떠한 점에서 태클을 걸어오는 건지도,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인 건지도. 


굳이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철창을 등진 채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건, 그녀 뿐만 아니라 나도 바라는 점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무거운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침묵. 그리고 정적. 

차라리 이대로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바램이 무색하게도 그녀가 침묵을 깨고 말을 걸어왔다. 


"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이것만 어떻게 해주시지 그래요? " 


짤그랑-

금속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대신 제 목이 날아가던지 하겠죠. " 


" 맹세하죠. " 


" …… 그렇게 간단히 그런 단어를 꺼내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 


" …… . " 


의미 모를 불쾌감이 심장을 옥죄는 것 같았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해서는 안될 말을 하는 것처럼.


… 이유는 모르겠다. 이래도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철창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의 손목과 발목을 억제하고 있던 구속구를 풀어냈다. 

시선 틈으로 들어오던 그녀의 손바닥엔 굳은살이 가득 박혀있었다. 


자신의 새빨간 손목을 멀뚱히 응시하던 그녀는, 천천히 나를 올려다 보았다. 

1초. 단 1초의 시간. 

그 마주친 시선 사이로, 어떠한 감정이 오갔는지 나는 모른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 


그저 황급히 등을 돌려 다시금 철창 밖으로 나가던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얘기라도 해요. 아무도 없잖아요. " 


무료함을 달래려 별 의미 없이 내뱉은 그 한 문장일 지라도, 내게는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다… .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그녀라는 사람 자체에 불안감을 느끼는 건지. 

잊으려 애쓰던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한 순간에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 혼자 떠드시던지요. " 


" …… 나쁜 사람. " 


오고 갈리 없을 대화 하나 하나가 파편이 되어 날아오는 것만 같다. 

고작 얘기 하는 게 뭐라고, 살아가면 누구나 하는 대화가 도대체 뭐라고. 


" 있잖아요. 내 얘기 해줄까요? " 


" …… . " 


" 뭐, 안 들으셔도 할 거지만. " 


시간은 여러가지를 변하게 한다. 

환경이라던지, 사람의 모습이라던지. 

그리고 생각마저도. 


변해버린 걸까. 그녀라는 사람도. 


어째선지 나는 말 없이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머릿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 황녀라는 자리는요, 뭘 하던지 간에 남들이 지켜보는 느낌이에요.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홀로 있고 싶을 때도.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을 때도. " 


차분했다.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과는 정 반대로, 차분하고도 따스한 목소리였다. 

마치 언젠가 들었었던 것만 같이. 


" 갖기 싫었던 건 전부 갖고 있어야 하고, 정말 갖고 싶은 건 결국 갖지 못해요. 마음 편히 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남들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고 한들, 그것 마저 제 의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죠. 항상 누군가 방해하니까. " 


사랑하는 사람. 

아마 그렇겠지. 

부모가 멋대로 정해버린 자신의 동반자를, 그 당사자들이 마음에 들어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인형. 꼭두각시. 결국 정치의 도구 중 하나. 


시간이 지나니 알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당시엔 질투로 가득했던 그녀의 자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점이 부각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서로의 고통을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 약혼이라니, 웃기지 않아요? 그 사람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 지도 모르는데. 정작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고작 자신의 입지를 늘리기 위해 자식을 내다 파는 게 말이 될까요. " 


" 귀족들은 대부분 그렇죠. 자식은 그저 부의 일부라고. " 


그렇기에 돈이 아닌 나는 그저 버려졌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늦게 알아차리지 않은 것에. 


" 결국 원하던 것은 얻을 수 없으니, 저는 결심했어요. 차라리 잃지는 말자고. 그래서 매일, 매일 연습했어요. 내 힘으로 얻을 수 있을 때까지. … 이게 벌써 10년 전 이야기네요. " 


" …… 그래서 고작 변방 왕국의 기사에게 붙잡혔고요? " 


10년. 10년…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을 그 단어 하나 하나가 내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단어였다. 

그래서일까. 퉁명스레 말이 튀어나온 것은. 


" 글쎄요. 제가 여기서 잃은 것이 있을까요? " 


" 돌아가실 때가 기대되네요. " 


" 차라리 얻었다고 하는 말이 맞을 지도 모르죠. " 


잘 모르겠다. 

의미 하나 하나를 헤아리려 해도, 도통 무슨 속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가장 정답에 가까운 결론은 약혼으로부터 도망쳤다. 정도일까. 


등 뒤에서, 인기척이 가깝게 느껴졌기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내 반응과는 정 반대로, 내가 있던 바로 뒤 철창까지 다가와 등을 기대어 앉는 그녀의 모습에 되려 허탈감이 느껴졌다. 


" 저는 무기도 없는데요. 오히려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여긴 저와 당신 뿐이고, 저는 무력한 상태죠. " 


" 퍽이나요. 헛소리 하지 마세요. " 


" … 멀어지는 건 싫은데 말이죠. "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 결국 혀를 차고 조금 거리를 두어 간수용 의자에 걸터앉았다. 

누군가 이런 상황을 본다면 분명 두 눈을 의심하겠지. 그 황녀가 저런 성격일 줄은 몰랐다며. 


" 잘 들어요. 어차피 서신이 도착하는 즉시 당신은 풀려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겠죠. 그때까지 가만히 있어요. " 


" 두 달은 걸릴 텐데요. " 


" … 그건 모르는 일이죠. 황녀가 관여된 일인데 그렇게 느긋이 진행될까요. " 


" …… 그 망할 황녀니 뭐니, 다 필요 없는데. "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다.

그 무게가 어떻든 관에, 이제는 나와 관련 없으니 알 필요도 없겠지만,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저렇게 만들어 버린 걸까. 


그리고 타이밍 좋게 들려오던 발소리. 

아무래도 이 지긋지긋한 시간도 이제 끝인 것 같다. 


" … 누가 오네요. " 


" 여긴 당신이 머물 곳이 아니니까요. " 


" 난 여기 있고 싶은데. " 


" …… . " 


애써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발소리의 수로 보아, 아무래도 꽤 많은 인원이 온 것 같았다. 

그렇다면 목적은 하나겠지. 


" 다행히 준비가 빨리 되었습니다. 별 일… . " 


내게 다가오던 기사는 구속구가 풀려있는 그녀를 한 차례 흘기고, 내게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왔다. 


" 별 일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무기도 없는 이를 상대로 과도한 처분이 아닌가 싶은데. " 


차가운 시선이 서로를 교차했지만, 이는 금방 깨졌다. 


" 수고하셨습니다. " 


시간이 아까웠던 건지, 고개를 돌리며 대화를 끝내버리던 남성.

그 짧은 말과 함께 가죽 주머니를 내게 건네던 그는, 검을 손에 쥔 기사들을 등진 채 철창 문을 열었다. 


10년만의 쓰디 쓴 재회는, 이렇게 끝나는 듯 했다. 






***






시끌벅적한 술집. 대부분은 용병이 아닌 기사단의 인원들이었다. 

구석 한 켠에서 술을 들이키던 나는, 문득 들려오던 말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 사상자가 한 명도 없다니, 기적이지. " 


" 크하하, 제국 놈들도 별 거 없구만? " 


" 멍청한 놈. 애초에 규모도 300명을 채 넘기지 않았다고. 만 명이나 끌고 간 우리가 부끄러울 지경이야. " 


" 그래도 상대는 제국이잖아. " 


" … 제국, 제국이라… 황녀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아니… 강한 게 맞긴 한가? " 


… 사상자가 없다고? 

아무리 소규모였다고 한들, 그런 전투 결과가 말이 될 리가 없다. 

수적으로 우위라고 해도 황녀의 명성이 과연 헛되진 않을 터인데.


그러다 문득,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 그거 말고요. ' 


…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니, 애초에 전쟁을 벌인 것이 맞는가? 

분명 어떠한 언질도 없이 전쟁을 뜻하는 빨간 깃발을 세우며 왕국을 향해 돌진한 것은 맞지만, 전쟁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본인의 군사에 사상자를 내면서 까지 강행했던 이유란 무엇인가.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일개 용병인 내가, 주워 들은 얘기로만 판단하자니 여간 퍼즐이 맞춰지지 않았다.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포기하듯 도출해낸 결론은 단지 하나. 


신경 쓰지 말자. 


굳이 내가 관여할 일도, 개입할 일도, 그렇다고 신경 쓸 일도 아닐 테니. 


그렇게 결심한 것도 잠시, 갑작스레 주점 문을 박차고 들어와 거친 숨을 내쉬던 기사 한 명은, 곧장 내 이름을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 당장 와주셔야겠습니다. 정식 의뢰입니다. " 


고급진 양피지에 적힌 글귀들과, 아래에 박혀있는 새빨간 도장. 



… 왕실의 도장이었다. 






***






" … 조금,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 


" 이번엔 제가 들을 차례인가 보네요? " 


" 듣지만 말고, 답하란 얘깁니다. " 


왕궁 귀빈실. 평생 내가 올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건 현실과는 거리가 먼 꿈인 것 같았다. 

부정하려 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독한 꿈. 


분명 이 왕국에선 내가 제국에서 온 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을 터인데. 


단순히 랭크가 높은 나를 재고용했다? 그렇다기엔 나 말고도 다른 용병이 있을 터인데. 

혹여 그녀가 내 정체를 알고 나를 찾았을 확률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를 알아 봤다면 저런 말투로 나를 대하지 않을 터이니. 이유도 없고 말이다. 


" 의외로 사교성이 없으시다던가. " 


" 황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으시네요. " 


" 아까는 황녀는 싫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만. " 


" 기억력은 좋으시네요. 맞아요. 싫어요. " 


" 하… . " 


주변에 서있던 기사 중 일부는 이러한 광경에 당황이라도 한 것인지, 표정을 구긴 채로 이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읽었던 것인지,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을 터뜨리고 말았다. 


" 아, 이제 다 나가주세요. " 


" …… . "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발언에 제국도 아닌, 왕국의 기사들이 순순히 물러났다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포로 신분인 그녀가 어떻게 이런 광경을 자아내는 것인가? 


" 할 말이 많아 보이시는데. 일단 앉으시지 그래요? 그 칙칙한 로브도 벗으시고. " 


" … 후자는 됐습니다. " 


" 궁금하신 건 그거죠? 제가 포로가 맞기는 한 건지. " 


" 그렇겠죠. " 


" 바보 같긴, 누가 전쟁을 하는데 군사를 이것밖에 안 몰고 와요? 애꿎은 제 기사들만 죽었네요. " 


" … 그야, 빨간 깃발을 들고 오셨다고. " 



" 정확히는 주홍색이죠. " 



" …… 몬스터 토벌. " 



표정이 일순간에 일그러졌다. 

애초에 성벽에서 관측한 보초병의 실수로 이러한 사단이 났다는 말인가? 

아니, 그 정도로 허술할 리가 없을 터인데.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제국 측에서의 대응도 의문점이 한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전투 의사가 없음을 알리지 않았는가? 


" 아, 그러고 보니 변방으로 갈 수록 제국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더군요. 얘기를 들을 이유도, 듣기도 싫었나 보죠? "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명 주워들은 이야기엔 어딘가 빠진 점이 있겠지만

이토록 퍼즐의 빈칸이 가득한 게 말이 되는가? 

분명 제국과 거리가 멀단 이유 만으로 지원도 뭣도 소홀한 곳은 맞지만, 그렇게 증오가 쌓인 편도 아닐 터인데. 


" 이번 과실은 왕국에 있는 걸로 끝났어요.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무차별한 학살로 남겠죠. " 


" … . " 


" 아 궁금한 건 그것 뿐 만은 아니겠죠.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아니에요? " 


" … 하아… 혹시 제가 당신께 격식을 차리지 않아서, 뭐 그런 이유입니까? " 


" 푸흐, 그럴 리가요. 그냥 심심해서 불렀어요. " 


" …… 허. " 


막무가내다. 도대체 세상 어디에 이토록 제멋대로인 황녀가 있을까. 


" 사람을 물건 취급하시네요. 전 장난감이 아닌데 말이죠. " 


" 당신, 되게 무례하네요. 오히려 기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 


" 다른 나라인데, 굳이 제가 그래야 하나 싶은데. " 


" …… 다른 나라… 라. " 


무언가 켕기는 점이 있는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시선을 아래로 내려 놓기 시작했다. 


찻잔을 손에 쥔 채 잠시 주변을 둘러본 후,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차가운 분위기로 내뱉던 한 마디. 


" 아까는 고마웠어요. 손목이 어찌나 아프던지. " 


조금 흘러내린 옷깃 사이로 보이던 그녀의 손목은, 이제는 회복 된 것인지 다시금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그 정도로 아파할 사람은 아닐 텐데요. " 


" 아프죠. 물론 정신적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 


" … 아 예. " 


괜스레 화가 났다. 

물론 누구나 자기만의 사정은 있겠지만서도, 과연 그녀가 내 고통을 헤아릴 수 있을까. 

모든 걸 갖고 태어난 이가, 그 아랫것들이라 불리우는 서민의 고통을 알 수 있을까.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황녀라는 존재가 짊어지는 무게의 대한 고통은. 

그럼에도, 그럼에도… 지금 이 상황마저도 불쾌한 내 마음을 알기나 할까. 

이토록 어딜 가던 대접 받는 위치의 사람이 말이다. 


" … 제가 그렇게 싫어요? " 


그러한 내 모습에 카운터라도 날리듯 훅 들어오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싫다. 다시는 만나기 싫을 만큼 싫다. 

모든 과거를 통틀어서, 싫어서 도망쳤을 만큼 혐오하던 배경을 지닌 그녀에게 나는 도대체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과거는 전부 잊고, 없었던 일로 한 채 초면인 것처럼 그녀를 대해야만 할까? 


" 오늘 처음 본 분에게 좋다, 싫다가 쉽게 나올리가요. " 


" … 그런가요. " 


별 다른 대답 없이 찻잔을 홀짝이던 그녀는, 천천히 잔을 내려 놓고 내 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흘러나온 말 한 마디에,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 처음이 아닐텐데. " 




한 차례 숨이 멎은 것만 같았다. 

호흡이 가빠오고, 동공이 연신 흔들렸다. 


그런 내 모습은 개의치 않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이내 내 옆자리에 앉아 내 턱을 검지와 엄지로 고정 시켰다. 마치, 내게서 도망치지 말라는 것 마냥. 


" 거봐. 아니잖아. 왜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모르겠네. … 다시 한번 물을게요. 지금도… 내가 싫어? " 


이유를 모르겠다. 

차갑디 차가운 저 눈동자가 도대체 무얼 원하고 있는지도, 어떻게 해야만 이 시선을 녹일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을 기억의 편린인 내게, 왜 이토록 가혹한 현실을 부딪히려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다. 


" … 아, 겁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 다시 보니 너무 반가워서 그랬나. 아, 화났을지도. " 


방금 전의 눈빛은 어디로 숨긴 것인지, 다시금 배시시 웃는 모습이 되려 공포스러웠다. 

원하는 게 뭐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나를 시험하려 드는 것인가. 


" 근데… 조금 서운하네. 나는 되게 반가운데. 너는 아닌가 봐. " 


" …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 


" … 있잖아. 나 그때 되게 슬펐다? 알아? " 


내 말은 듣고 있지도 않듯, 자기 의사를 한 차례 더 부딪히는 그녀. 

어디까지 막무가내로 나가는 건지, 금방이라도 페이스에 휘말릴 것만 같았다. 


" 그러니까, 이제 와서 도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요. 내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 



" 누나가, 얘기하고 있잖아. " 



싸늘한 목소리와 동시에 내 의사는 산산조각 나듯 부숴진 것만 같았다. 


좌절, 두려움. 다시 한번 꺼내기 싫었던 감정들이 타인에 의해 억지로 꺼내어져 역겨움마저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라는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러나, 차갑디 차가운 그녀의 눈빛이 내 몸 마저 굳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 아, 그래… . 나 때문에 힘들다고 했었지. 내가 붙어 있으면, 항상 비교된다고, 힘들다고. … 근데 어떡해. 내가 너랑 있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너랑 함께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아니, 좋다고 생각했어. 욕은 내가 먹으면 되고, 혼나는 것도 나만 혼나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아니었어. 나는 네가 왜 나한테서 멀어지려 하는지 몰랐어. 매일 아버지께 말했지. 왜 너는 나랑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하냐고, 왜 같이 밥을 먹지 않냐고, 왜 나랑 다른 취급을 하냐고. 내 동생인데. 왜 다르냐고… . " 


" 그야, 난 동생이… " 


" 동생이 아니니까. 맞아. 근데 그거 알아? 난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내게 미안해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어릴 적,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 본인이 원치 않았던 일들이 그저 내게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싫었던 건, 정확히는 그녀가 아니라 내게 놓인 환경이었으니까. 

단순히 모든 원흉이기도 했던 그녀가 내 화풀이의 대상이 된 것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나보다. 

동생이 아니었기에 죄책감을 덜어내는, 결국 아버지의 피를 이은 쓰레기일 뿐인 걸까. 



" 동생이 아니라면,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풀어내도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 


" …… 뭐? "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도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사고가 따라가지 못해 제자리를 맴도는 사이에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 너와 함께 있으면 즐겁고, 네 웃는 모습만 보면 행복하고, 네가 힘들어 할 때마다 나도 아프고. 무슨 감정인지 몰랐어. 근데, 근데… 시간이 지날 수록 알게 되더라. 점점 네가 멀어져만 가고, 나를 밀어내려 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어. 

날 말리려는 주변 사람들이 전부 다 미웠어. 그럴 때마다 네가 생각나더라. 그제서야 알았지. 널 좋아한다고. 

그리고 네가 나를 밀어내는 것도 전부 나를 위해서라는 것도 뒤늦게 알았어. 

너도 날 사랑하니까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날 배려하는 거라고. 

그렇기에 매일 네 곁에 있었고, 기다렸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네가 그때처럼 웃어줄까 봐.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날 맞이할 거라 믿었으니까. "


차츰 커져 가는 동공.

마치 기쁘다는 듯이 움직이던 그녀의 표정 하나 하나. 


" 그래서 매일 아침만 되길 기다렸어. 이른 아침이면 단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무도 없다면 너도 내게 속마음을 털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어. 

웃었는데. 분명 웃었는데.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게 떠나 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좋아한다고 말해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네가 떠나고 나서 한참을 울었어. 눈물이 마르지를 않더라. 계속 흘러내리더라. 

한참을 우니까, 분명 아무도 몰랐어야 할 여기에 나를 찾으러 사람들이 왔어. 그리고 그제서야 알겠더라. 

네가 했던 말처럼, 누군가 있었기에 분명 내게 그런 말을 했던 거라고. 아무도 없으면 네 진심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 



쌓여있던 댐이 터지는 것처럼, 멈추지 않던 그녀의 목소리가 그제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갈망하듯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시선은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내 동공에 닿아 있었다. 

한번 와전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각색되어 있었고, 그 모든 일들의 원흉이 이토록 커진 것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까? 아니, 어떻게 말해야만 할까? 

그 모든 것들이 잘못된 감정이라고,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고 한 들 그녀가 받아들일 수는 있을까? 



" 어떻게 하면 너와 단 둘이 있을지 생각했어. 네가 사라진 날로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생각했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성인이 되고, 가까운 마을부터 사람을 보내 너라는 사람을 찾고… 그게 이렇게 오래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한참이 지나, 너를 찾았다는 말에 미치도록 기뻤어. 드디어 네 진심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네가 어디 있는지 들었을 때, 나는 확신했어. 일부러 네가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너에게 향한 나를 찾으려 오는 사람이 늦어질 수록,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만큼 길어진다는 얘기니까.

그래도 정식적으로 행차한다면 너와 단 둘이 있지 못할 걸 아니까, 핑계를 댔지. 몬스터 토벌을 목적으로 소수의 인원만 추렸고, 

미리 왕국의 사람에게 말해 사전 작업을 해 달라고 했어. 전쟁을 하는 척 하며 붙잡힐 테니, 용병으로 너를 구해 달라고. 

너에게 가는 길엔 매일 밤마다 너를 생각하며 자위하면서 버티고, 또 버텨서 드디어 도착했어. 나중에는 네 생각만 해도 젖어버릴 정도여서 큰일 날 뻔 했지만, 아무렴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조금만 더 있으면 널 볼 수 있는데. 내가 너에게 가는 시간 만큼, 너를 더 볼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일부러 빨간 깃발을 올리고, 성문을 열고 왕국군이 나올 때 혼잡한 틈을 타서 주홍색 깃발로 바꿨어. 명분은 이걸로 충분하니까. 

감옥에서 일찍 나와버린 건 예상 외였지만, 상관 없어. 지금 이렇게 둘만 남아있잖아.


그러니까, 어서. 빨리 말해줘. " 



환희와 같은 감정에 젖어 짙은 눈동자가 무서우리만치 빛을 내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떠한 말조차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지금 내가 들은 얘기가 전부 거짓말 같아서. 

이 모든 일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지금, 그녀가 원하고 있을 대답이 내 심정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촛불의 불씨가 꺼지듯 스러져가는 의식. 

뒷덜미에서 느껴진 강한 충격은, 아마 그녀가 한 짓이겠지.






" … 아, 여기도 누가 있구나. " 






차츰 닫혀가는 시야는, 그녀가 검집에서 칼을 뽑아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의식과 함께 닫혀버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반딧불이 우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 일어났어? " 










" 이제 말해줘. " 
















" 지금은, 아무도 없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