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출정이 잡혀 있어. 상황이 심상치 않아. 큰 싸움이 될 것 같아.”

 

남자의 말에 그 옆을 나란히 걷던 여자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남자의 복장은 결코 화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단정하게 갖춰 입은 하급 장교의 제복.

 

여자 쪽의 복장은 보다 더 화려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오래되었지만, 두 사람은 마치 서로를 동등한 친우처럼 대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지만, 두 사람 서로 잘 알고 있다. 제국군의 하급 장교와 백작가의 여식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의 인연 덕분에 서로 말을 놓고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여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뛰어난 재능을 알고 있었던 여자는, 그가 언젠가 전장에서 무공을 세워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비록 출신은 평범해도, 장군이 될 수만 있다면… 그가 그녀가 진정으로 나란히 서게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니까.

 

그래서 여자는 남자가 전쟁에 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도 걱정하기보단 기뻐하기부터 했다.

 

“그래? 그럼… 기회가 온 거야?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잖아? 다음번 큰 전쟁 말이야.”

 

“기회라. 하아…”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남자는 여느때처럼 자신만만하지도 않았고, 눈빛을 반짝이며 군도를 손에 쥐지도 않았다. 연신 한숨을 바닥에 퍼부으며 천천히 거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여자는 뭔가 안좋은 예감을 느꼈다.

 

“…어떻게 된 거야?”

 

“질 거야. 이 전쟁은.”

 

“…뭐?”

 

“너에게니까 말해주는 거야. 제국은 바보짓을 하고 있어. 너도 내가 어지간하면 이런 말 안 하는 거 잘 알잖아. 하지만 진심이야. 이대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나라는 이웃 왕국군을 상대로 결코 이길 수 없어.”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볼까?”

 

“그만둬. 누가 그렇게 말했다고 할 건데. 네가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할 건 아니잖아.”

 

“그렇지만 아버지는 내 말이라면…”

 

“게다가 백작 저하의 위치가 위태로워질거야. 황후 전하깨서 왕국에서 돌아오던 길에 산적들에게 살해 당했어. 내가 보기에는 왕국군이 저지른 짓이 아닌 것 같지만, 폐하께선 이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위신을 세우지 못해. 어쨌든 싸움은 벌어지겠지. 하지만 여전히 바보짓이야. 이 전쟁은 제국이 질 테니까. 엄청난 희생이 벌어지기 전까지, 우리 나라가 그걸 깨닫는 일은 없을 것이고.”

 

“괜찮…겠지?”

 

“뭐가?”

 

“너 말이야. 그래도 일선 하급 간부잖아. 설사 우리 나라가 진다고 해서 네가 책임을 묻거나 그렇게 될 일은…”

 

“목이나 붙은 채로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네.”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식 웃을 뿐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그의 말이 진심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부대는 왕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최전선에 서도록 되어있다. 만약 제국의 공격이 그토록이나 무모한 것이라면… 최전선 부대의 하급 지휘관인 남자가 가장 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

 

“…가지 않으면 안 돼?”

 

“핑계는?”

 

“내가 만들어줄게.”

 

“곤란하지.”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주변에는 다 말해놨어. 이 전쟁은 반드시 제국이 이길 거라고. 내가 선봉에 서서 적의 깃발을 꺾어와 황제 폐하의 발앞에 바칠 거라고. 그렇게 해서 크게 한 번 출세해 보겠다고, 크게 떵떵거려놨어.”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야?”

 

“남자들이잖아.”

 

남자가 말했다.

 

“남자들은 알아. 게다가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손에 쥐어 본 녀석들이다보니 떵떵거리던 녀석이 전쟁에선 제일 먼저 죽는 경우도 많다는 걸. 반드시 이기겠다고 큰소리친 녀석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는 경우도 많이 봤지. 그러니까 걔들은 그리 놀라지 않을 거야. 내가 돌아오지 못해도.”

 

“돌아오지 못한다니, 그런…”

 

“하지만 넌 여자고.”

 

그 말에 여자의 심장이 쿵쾅, 하고 뛰었다. 남자가 이 백작가의 아가씨를 ‘여성’으로 대놓고 칭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여자들은 다르지. 그 말을 믿어버리니까. 반드시 이겨서 돌아오겠다고 말하면, 정말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어버리니까. 너무 놀라잖아, 만약 하지 못하면.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주는 거야. 너무 놀라지 말라고.”

 

“네 동생은? 부모 하나 없이 너까지 사라져버리면 혼자 남겨질 그 애는 어떻게 하고? 정말로 그렇게 위험한 일이면 내가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줄게. 안가면… 안될까?”

 

“아까도 말했지만, 곤란해. 내 휘하에 배속된 부대가 이미 있어. 가족도 중요하지만, 직전에 와서 그런 식으로 내팽개칠 수 있는 게 아니야, 부하라는 건.”

 

그렇게 말한 남자는 정말로 전쟁터로 떠나버렸다.

 

백작가의 아가씨는 매일 같이 전쟁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며, 제국 황성 내의 수도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남자가 예상한 대로 제국은 크게 패했다.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황제가 여전히 전쟁을 몰아붙이고 있었기에 싸움이 끝나진 않았지만, 남자가 속한 선봉 부대는 이미 왕국군의 함정에 빠져 완전히 궤멸 당했다는 소식이 황성 전체에 파다했다.

 

여자는 서둘러 남자의 소식을 좇았다. 하지만 누군가 감추기라도 한 듯이. 누군가 남자를 숨기고 묻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여자의 정보력으로도 일선 하급 간부였던 남자의 소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남자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 달 뒤.

 

왕국 정벌전에서 제국이 패할 것이 더더욱 명백해진 그런 날이었다.

 

거지 꼴이 된 채로, 푹 눌러쓴 모자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백작가의 저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여자는 황급히 저택 밖으로 뛰쳐나가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자가 크게 당황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릎을 꿇으시면 안됩니다, 아가씨. 보는 눈이 많은 앞에서는 안됩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어,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돌아왔어? 나, 난 분명 네가 주, 죽은 줄로만 알고…”

 

“죽은 것이 맞습니다.”

 

남자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서야 여자는 후드 아래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치열한 전투를 겪었음을 말해주는 수많은 칼날 자국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흉터.

 

확실히 처참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어째서 이 남자는 지금 군대에 있지 않은 것일까. 사지를 움직일 수 없게 된 것도 아닐텐데.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패색이 짙어져 무슨 수라도 써야 하는 제국군에서 이 남자를 데리고 있지 않은 것일까. 이 우수한 장교를…

 

“제 명예가 죽었으니까요. 오늘 아가씨를 찾아 뵌 것은, 염치 불구하고서라도 도움을 하나 청하고자…”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자세히 이야기하자.”

 

여자는 쩔쩔매는 여자를 빠르게 자신의 저택 안으로 들였다. 남자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선봉 부대의 대파 이후, 제국군에겐 책임을 물을 희생양이 필요했다. 대체 누가 그런 함정으로 군대를 밀어넣었는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처참한 꼴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누가 그런 판단을 내렸는가.

 

일선 ‘장군’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해하던 그 때. 한 장군의 눈에 가장 먼저 앞장서서 함정에 빠진 부대를 찾아내야겠단 생각이 스쳤다.

 

그것이 바로 남자의 부대였다. 약 30명으로 이루어진 그의 부대가 가장 먼저 함정을 향해 진격했고, 다른 부대들은 그 뒤를 따르다가 모두 한꺼번에 큰 피해를 입고 만 것이다.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포위되었음을 알아챈 남자는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를 이끌고 서둘러 포위망 밖으로 빠져나왔다.

 

때문에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함정에 빠진 남자의 부대가, 다른 어떤 부대보다도 사상자의 수가 적었던 것이다. 장군은 이것을 남자의 실책으로 보고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가 ‘진짜’로 군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던 장군은, 이 일이 지나치게 커져 외부에서 조사나 감사관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남자에게 단단히 함구할 것을 명하며 그를 재판에 넘기거나 군법으로 처형하지 않았다.

 

불명예 전역. 그것이 남자에게 내려진 처분의 한계였다. 장군의 권한으로 황실을 거치지 않고 남자에게 내릴 수 있는 최대의 처벌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불명예스러운 전역이었기에 연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남자는, 황성으로 돌아온 이후 자신의 여동생이 백작가 아가씨로부터 지원을 받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오랜 소꿉친구인, 여자로부터.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오빠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언니가 도와주겠다고 했다’라고… 그래, 만일 남자가 아주 돌아오지 못한다면, 평생 그 아이를 명문가 아가씨에게 떠넘길 생각으로 맺은 약속이었다.

 

남자는 돌아왔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기만 하면 그 아이를 다시 책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남자의 예상이 깨진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아가씨.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바칠 테니, 그 계약을 연장해 주세요. 이 모자란 군인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모자란 가족을 둔 죄로 고통받게 될 내 동생만은 가엾게 여겨주세요’라고.

 

두어달 만에 남자를 보고서 훌쩍이던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차갑고 냉랭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것이 염치없는 부탁을 하며 백작가에 메달린, 긍지도 무엇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경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설사 경멸을 받는다 해도, 옛 정으로라도 명문가에 자신의 하나뿐인 피붙이를 맡길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수모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입신양명을 노리며 헌신하던 군대에서 내쳐진 것만으로도 이미 수모에는 충분히 적응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친구야.”

 

“예, 아가씨.”

 

“빈 방이 하나 있어. 거기서 묵어. 그리고, 음.”

 

“…저도, 말씀이십니까?”

 

“달리 갈 곳 있어? 있으면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정말로… 여길 떠나면 달리 갈 곳이 있어?”

 

‘떠나는 건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듯한 싸늘한 말투. 남자는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그저 ‘아닙니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아, 그리고. 너무 놀라지는 마.”

 

“…네?”

 

“남자들은 알지 못하니까. 여자의 복수라는 게 때로 얼마나 치졸하고 약아빠질 수 있는 것인지. 여자들끼리는 몰라도, 남자가 떠올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 뒤로 남자는 오랜 시간, 백작가의 저택에 갇히다시피 한 채로 지냈다. 남자를 향한 손가락질 같은 것은 없었다. 장군이 워낙 외부의 조사를 두려워해 사건을 강하게 은폐하여, 백작가 저택 내에서도 남자에 대한 소문이 제대로 퍼지지 못한 탓이었다. 사용인들은 그저 어떤 사정이 생겨버린 남자가 소꿉 친구의 인연 덕에 아가씨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 정도로 여겨졌다. 

 

저택 안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여동생과 함께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하지만 황후를 잃은 황제의 슬픔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여자가 새로운 황후로서 간택되어 곧 식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남자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그런가.

 

이것이 여자가 경고했던 그 ‘놀라지 말라’라는 사건인가.

 

이런 식으로라도 전쟁을 끝내겠다는, 그런 여자만이 쓸 수 있는 계책이 바로 이것이었나.

 

하지만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망은 없었던 것 아닌가. 두 사람의 신분 차이를 메울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조차 사라졌으니까.

 

남자는 덤덤히 여자의 황후 등극을 축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기에, 결혼식 당일. 저택에 들려온 충격적인 소문은 남자의 몸에 경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혼식장에서 벌어진 살인.

 

황제와 여자가 법적으로 맺어진 바로 그 순간에, 여자가 별안간 치마폭 아래에서 장검을 뽑아들어 황제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계단 아래로 집어던졌다.

 

여자가 외쳤다.

 

“이걸로 빌어먹을 전쟁은 끝났다. 말하라. 누가 나에게 반대하는가.”

 

황제는 몰랐다.

 

궁이 이미 황실에 반발하는 귀족들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결혼식장에서 대놓고 칼질로 황제를 처형해도 여자에게 반대할 만한 자가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현장에 있던 경비병들조차 대부분 여자에게 포섭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황제를 모시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하나하나 처형당하고, 여자는 ‘황후’이자 ‘황위 계승권자’로서 옥좌에 앉았다.

 

여제의 첫 어명은 아래와 같았다.

 

“그이를 내 눈앞에 데려와라. 짐이 불행히 남편을 잃었으니, 새 국서를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