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가 되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그렇지만 아주 쌀쌀한 날씨의 비가 오는 밤이었으면 좋겠다.


이제 독서실에서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가려는데, 우산을 챙겨오지 못해 어쩔수 없이 맞고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독서실 건물 앞으로 나갔더니 옆집에 사는 얀순이 누나가 왜인지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얀순이 누나랑은 어렸을때부터 친했는데, 최근 몇년간 누나에게 안 좋은 일이 많이 겹치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여러번 도와주었더니 요즘 부쩍 나에 대한 의존과 집착이 심해진 누나를 보고 싶다.


예쁘고 상냥하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하며 어디 하나 부족할 점 없는 누나지만, 어렸을때부터 과했던 나에 대한 애정표현이 요즘 더 심해지자 의도적으로 문자도 드문드문 답장하고 일부러 길도 피하던 상황에 비가 오는 이런 쌀쌀한 밤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누나를 만났으면 좋겠다.


누나는 추운 날씨 때문에 빨개진 본인의 하얀 손과 하얀 귀를 뒤로 하고, 독서실에서 나온 내게 달려오더니 흐릿한 눈빛으로 나를 보면서 미소를 짓는걸 보고 싶다.


"공부 요즘 열심히 하네, 우리 얀붕이? 누나가 얀붕이 기다리고 있었어. 우산도 안 챙겨왔지? 춥다. 빨리 집에 가자. 가는 길에 같이 붕어빵도 사먹자."


이때 내가 우산을 두고 온 건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누나는 생긋 웃으며 답변해주었으면 좋겠다.


"음... 왠지 그럴것 같았어.. 헤헤, 얀붕이는 칠칠 맞잖아? 그래서... 누나가 없으면 안되잖아? 누나도 얀붕이가 없으면 살수가 없구.. 그래서 본능적으로 안거야! 얀붕이가 우산이 없어서 분명 곤란한 상황이 오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계속해서 기다렸어!"


언제부터 기다렸냐고 묻자, 오후 8시부터 기다렸다는 얀순이 누나의 말을 듣고 경악하고 싶다.


지금이 새벽 1시이기 때문에, 누나는 내가 언제 나올지 모르고 계속해서 5시간 동안 기다렸다는 걸 안 나는 결국 누나를 위해서라도 불편하게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말을 하고 싶다.


"누나. 나 요즘 누나가 이러는거 솔직히 불편해."


"웅..?"


"아니, 이건 누나를 위해서도 하는 말이야. 솔직히 나 다 알고 있어. 누나가 나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는거.. 누나가 나랑 연락하던 얀진이 찾아간 것도 알아."


"그 애 이야기가 왜 지금 나오는거야...?"


순간  싸늘해지면서도 덜덜 떨리는 누나의 목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아 누나를 쳐다보니 빛을 잃은 안광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누나를 보고 싶다.


"...그, 그건 걔는 내 친구인데... 누나가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걔랑 연락이 안돼. 학교에서 만나도 아는 척을 일절 안한다고.. 누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한거야..?"


"...궁금해? 단순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궁금한거야? 아님, 그 년이랑 다시 연락하고 싶어서 물어보는거야?"


"그년이라니... 누나..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내가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본인의 긴팔을 걷어올리고는 하얀 손목을 보여주는 누나를 보고 싶다.


누나의 손목에는 선명하게 무언가로 그은 상처들이 있었고, 그걸 보고 경악한 나를 보며 슬픈 눈웃음을 짓는 누나를 보고 싶다.


"내가, 걔한테 물어봤었어. 혹시, 너를... 얀붕이를 좋아하냐고.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웃기는 일이지,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그래서 포기해달라고 말했어. 그런데 그 애가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고... 자기가 왜 그래야 하냐고, 선택은 얀붕이 몫이라고 말하더라..? 그런데 그년은 아무것도 몰라. 선택이고 뭐고 그런건 아무 의미도 없는데... 나랑 얀붕이는 운명인데, 우리 둘은 평생 부부로 이어질 운명인데, 그런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 그래도, 있잖아.. 얀붕이 아는 사람이라서 최대한 참고 한번 더 설명했는데... 내 말을 무시하는 거 있지..? 그래서 바로 내 손목을 그어버렸어.. 헤헤, 내 피가 그 애 눈으로 들어갔는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지, 그 애의 벙찐 표정이 볼만 하더라구.."


"......지금, 무슨... 무슨 말을 하는거야. 누나.."


"그래서 한 번 더 물어봤어. 얀붕이한테 더 이상 연락하지도, 말 걸지도 않을거냐구.. 그랬는데 대답은 안하구.. 눈만 끔뻑이는거 있지..? 그래서 한번 더 그었어. 그러고는 이번에도 대답 안하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했어. 내 목 쪽에다가 커터칼 대고 말이야. 그러니까, 걔가 엉엉 울면서 그만해달라고, 알았다고 하더라구.. 많이 놀랐었나봐.. 헤헤.. 그래서 연락이 안되었던 거야. 어때...? 내 사랑이, 이제는 전보다 더 잘 느껴져? 이제, 거부하지 않을거지? 전부터 나를 피해다녔던거는 얀진이 같은 년들처럼 너를 가짜로 좋아할까봐 두려웠던거잖아.. 이제는 내가 다 보여줬고 증명했으니까, 내가 너를 얼만큼 사랑했는지 보여줬으니까... 더 이상 나 외면하지 않을거지..??"


나는 아무말도 못하다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누나의 가방에서 빛이 번뜩이는 무언가, ..... 날붙이를 보고는 더 이상 할말을 잇지 못하자 누나는 이를 긍정의 뜻으로 알아듣고는 내게 우산을 든채로 포옥 안기면서 속삭여주었으면 좋겠다.


"고마워.. 얀붕아, 기회가 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나 정말 정말 너 좋아해. 사랑해.. 나 힘들때, 가족들마저도 나한테서 등 돌렸을때 오직 너만이, 너만이 나를 봐줬어. 너만이 나를 신경써줬어. 그 이후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어. 너만 있으면 되는 사람, 너가 없으면 살수 없는 사람, 너가 나를 봐주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수가 없는 사람... 누나가, 얀붕이가 원하는거 다 해줄게.. 누나 주식도 성공했고, 최근에 누나 직장도 구해서 얀붕이 충분히 책임져줄수 있어. 물론 부족하지. 하지만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온몸이 뜯겨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얀붕아. 누나는 오직 너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어. 너가 해달라는건 무엇이든 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나를 바라봐줘. 나를 사랑해줘. 나는 너만을 평생 바라보고, 너 외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테니까... 얀붕이도 누나한테 그렇게 해줘..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응?"


광애로 질척거리는 어지러운 누나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푹 쉬던 나는 결국 누나의 포옹에서 어떤 벗어나려는 시도도 하지 않은채 무기력한 목소리로 의존증 얀데레 누나의 물음에 응.. 이라고 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