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네반가워.”

 

낯선 남자의 살가운 인사그녀의 첫 기억이었다.

 

 

***

 

 

제국그 중에서도 아제바르 대륙은 특히나 유적지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이 고대 문명에서 비롯된 건지마족이 만들어 낸 건지아니면 할 일 없는 신이 심심해서 적당히 만들어낸 건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히 갈리지만탐험가들의 성지라는 뜻에는 일절 동의했다.

 

험하고 가파르지만과실은 그 이상으로 달콤했다함부로 탐험하다 제 명을 다한 탐험가들이 산을 이뤘지만그들의 욕망은 죽음의 공포를 억누를 정도로 강했다

 

당신은…….”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나?”

 

그리고 남자는 제국의 모험가명예보다는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움직이는 모험가우연히 유적 깊은 곳에 잠든 그녀를 깨운 모험가.

 

그냥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한량이야만나서 반갑게 됐어.”

 

웃는 남자였다표정도말투도내뿜는 기운마저도

 

어쩌면 뇌도 웃는 모양을 취하고 있지 않을까눈을 뜬 여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사람을 찾을 줄은 몰랐는데안드로이드 맞지?”

 

사람과 안드로이드모순된 단어를 동시에 꺼낸 남자의 눈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자각하지 못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정하게 뻗은 손그것이 그의 뜻을 증명했으니까.

 

……네.”

 

그리고 소녀는 안드로이드고대에 봉인된그 이유는 모를.

 

그녀는 기억나지 않았다자신의 이름도목적도하다 못해 이런 곳에 있는 이유도.

 

그나마 파편처럼 남아있는 건 약간의 상식안드로이드는 사회에서 썩 좋지 못한 인식이 존재한다는 상식.

 

보물을 찾으러 왔는데어째 더 귀한 걸 찾은 거 같네반가워.”

 

그리고 눈앞에서 그 상식을 깨트려버린 남자그것이 둘의 첫 만남이었다.

 

 

 

 

***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네제 이름도목적도이런 곳에 봉인된 이유도 기억나지 않네요.”

 

약간의 대화그들은 서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며 걸음을 옮겼다음흉한 목적은 둘 다 없었다한쪽은 단순한 호기심반대쪽은 그저 자신을 찾아준 사람이기에.

 

언제쯤 이곳에 잠든 것까지 전부?”

 

……네.”

 

보라색 눈의 안드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남자는 턱에 손을 얹었다

 

됐어기억 안 나면 별로 안 중요한 거겠지.”

 

그러나 이내 휙손을 내저으며 고민을 떨쳐버렸다이런 쪽으로 깊이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남자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행동이었다.

 

이어남자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그녀를 관찰했다움찔갑작스러운 시선 세례에 그녀가 몸을 떨었다.

 

이상하네안드로이드는 보통 사람이랑 구별하기 위해 따로 장치를 해놓지 않나?”

 

남자의 말이 맞았다시중에서 유통되는 안드로이드는 그들의 창조주인간과 구별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해놨으니까.

 

관자놀이에 표식이라던지특유의 로봇 귀라던지하다 못해 강철로 된 손과 발을 갖고 있던지.

 

허나 그녀는 고대로부터 눈을 뜬 그녀는 그런 특징이 전혀 없었다유달리 눈썰미가 좋은 남자였기에 안드로이드임을 간파한 것이다그마저도 긴가민가하는 수준으로.

 

신기해내가 본 안드로이드 중 가장 사람같아.”

 

……네?”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구나미안.”

 

정중하진 않더라도 명백한 사과의 뜻보라색 눈이 옅게 흔들렸다적어도 남아있는 기초 상식에 의하면 인간이 안드로이드에게 사과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어째서 제게 사과를?”

 

때문에 그녀는 이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고자 질문을 던졌다적어도 그녀의 두뇌로는 작금의 상황이 올바르지 못하다 인식했다

 

잘못한 일 있으니 사과를 하지?”

 

하지만 남자는웃는 남자는 이상할 정도로 당당했다보라색 동공이 한 층 더 커졌다.

 

……혹시 지금 시대에는 안드로이드의 권리가 향상된 건가요?”

 

아니시장통에서 이리저리 구르던데.”

 

악의 없는 한 마디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눈을 뜨고 처음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이었다.

 

역시 그런가요…….”

 

자신의 비틀린 욕구를 어긋나게 발산한 결과지한심하다고 생각해.”

 

그녀를 편들어주는 말이었지만안정감보다는 의문이 따라왔다그의 말대로라면 안드로이드에 대한 처사는 바뀐 게 없을텐데이 남자는 어찌 이렇게 살갑게 구는가.

 

어쩌면 지금은 단순한 기만에 불과하지 않을까내가 방심하면 분위기를 바꿔 학대하지 않을까저 모습은 그저 가면이 아닐까

 

……네그렇군요.”

 

생각의 선에서 멈춘 게 참 다행이었다싱긋그녀가 거짓 가면으로 웃음을 그렸다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근데 너갈 곳 없지일단 우리 집으로 갈래?”

 

마찬가지로 친절이 함유된 한 마디거절할 이유도명분도하다못해 그럴 여유도 없었다.

 

여기에 남아 자신의 근원을 찾는 건 시간 낭비라 판단한 까닭이다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 유적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걸.

 

그렇다면 남은 건 수상해보이지만 그래도 친절한 남자를 따라가거나홀로 거리로 나서는 것저울에 매달지 않아도 답은 금방 나왔다.

 

염치 없지만……네부탁드려요.”

 

마침 잘됐네내가 요즘 좀 심심했거든.”

 

 

 

***

 

 

 

체크메이트…….”

 

안드로이드는 체스도 잘하는구나…….”

 

스스로 자신의 킹을 무너트린 남자가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말했다시무룩한 모습에 그녀는 져줬어야 했나 생각할 정도였다.

 

한 번 더 하자봐주지 말고.”

 

벌써 다섯 판째…….”

 

힘들겠구나그만하자.”

 

단순히 당황스러움에 뱉은 말이었지만남자는 또다시 그녀를 배려하는 말로 화답했다그녀가 남자의 집에 머문 지 사흘째대개 이런 양상을 반복했다.

 

쭈뼛주뼛 잔뜩 긴장한 그녀를 배려하는 그낯선 배려에 당황하는 그녀 단순하지만매번 색다른 레파토리였다남자는 화 한 번 낸 적 없었다.

 

으아……지친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그대로 눈을 감았다숨소리가 균일해지고잠에 빠져드는 건 금세였다.

 

…….”

 

그 광경을 가만히 앉아 바라보던 그녀는 그가 잠들었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몸을 일으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른바 방 청소를 했다는 거다.

 

그녀가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그는 생활력이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것처음 그의 집에 왔을 때 표정을 찌푸리지 않은 게 용했다워낙 개판이었으니까.

 

때문에 그녀는 자연스레 정리정돈과 청소를 시작했다남자는 말렸지만명분은 충분했다빌붙어 사는 주제에 뭐라도 해야 한다고 하면 남자도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

 

다음은 밥이었다대충 배만 채울 정도로 적당히 때우는 그를 보며 그녀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고기억을 더듬어 몇 가지 요리를 만들었다.

 

반응은 매우 좋았다그가 밥을 안하는 이유는 단순히 귀찮아서지미각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후우.”

 

생각하는 사이정리는 어느새 끝나 있었다그녀의 성격대로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약간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식사 준비시키지도 않았지만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의무라 느꼈다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건 안드로이드의 본질이라 생각했으니까.

 

……후후.”

 

그리고 아주 약간이지만자신이 만든 식사를 맛있게 먹어주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던 것도 있다.

 

맛있다!”

 

그렇게 짧은 수면을 마치고 깨어난 그는 그녀가 준비한 식사를 맛나게 해치웠다과할 정도의 칭찬은 덤으로.

 

 

 

***

 

 

 

이후 시간이 흘러 둘은 유적 탐사를 떠나정확히는 한 쪽의 강한 주장으로솔직히 말해 소녀는 약간 불안했지만어쩌겠어남자는 탐험가인걸.

 

그의 욕구와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어디까지나 탐험명백한 은인인 그를 말리는 건 불가능했어겨우 따라가는 것으로 합의를 본 거지.

 

불안이 스멀스멀자꾸만 기저에서부터 올라오지만예상 이상으로 그는 노련했어혹시나 있는 함정을 해제하는 건 요사요온갖 괴랄한 지형도 요령껏 돌파하는 거지, ‘노련한 탐험가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어.

 

생각해보니 그랬어그와의 첫 만남그때의 유적도 나가는 길이 굉장히 복잡했지만남자의 손을 따라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거든.

 

그렇게 안심하며 계속해서 탐험을 지속해나가는 그때소녀는 무심코 실수를 해버리고 마는 거야.

 

쿠쿠쿵천장이 흔들리는 소리남자라면 절대 하지 않을 기초적인 실수함정 발판을 밟아버린 소녀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넘어져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지만이미 화살은 그녀의 미간을 정확히 향하고 있어.

 

끝이구나직감하는 거지당황에 몸은 굳었고몸을 움직일 여력은 남아있지 않아그렇게 눈을 감는 순간.

 

하고살갖이 꿰뚫리는 소리.

 

처음에는 자신의 것인 줄 알았으나생각할수록 이상해그녀는 로봇인데인조 단백질 피부가 있다 한들그 아래는 차갑디 차가운 금속인데저런 소리가 날 수 없는 구조인데.

 

생각하며눈을 떠마주해경악해남자의 가슴팍에 박힌 화살을 보며.

 

정적무거워입은 굳었지만눈은 그와 반대되게 미친 듯이 흔들리며 감정을 마구 표출해결국 먼저 입을 여는 것은.

 

……다행이네.”


슬며시 웃는 남자의 목소리.

 

부드럽고다정하기에한없이 따듯한 목소리.

 

저게 뭘까이건 내 실수인데내 실수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건데분명 내가 초래한 일이니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난데.

 

저 남자는 어째서 나를.

 

나는 안드로이드인데기억도목적도이름도 남지 않은 그저 하나의 고물 덩이에 불과한데.

 

남자는 나를 아껴주고사람처럼 대해주고이렇게 자신의 목숨마저 던져서 나를.

 

격렬한 감정깨어나는 것은 고대의 힘먼 옛날 만들어진 오파츠너무나 강대하기에 봉인된 사상 최고최선최강의 안드로이드의 힘.

 

이름없는 오파츠.

 

번쩍빛이 충돌한다.

 

 

 

***

 

 

낯선 듯 익숙한 장소남자는 눈을 뜬다가슴의 통증은 여전하지만더 이상 호흡에 이상은 없었어가장 먼저 웃지.

 

마주하는 건 세상 가장 걱정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안드로이드.

 

구해줘서 고마워.”

 

감사의 뜻을 전하지만그마저도 소녀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와고마워 해야하는 건 자신인데이건 내 실수인데어째서 당신이 아파해야하는 걸까.

 

왜……그런 거에요?”

 

그런 의문과 아픔그리고 슬픔을 한데 담아 소녀는 묻지눈물을 흘리지남자를 걱정하지.

 

제가 저지른 실수잖아요당신이 아파할 필요는 전혀 없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데 이유가 필요할까.”

 

여기서 깨닫는 거지남자의 마음은 더없이 하얗기에빛난다고슬며시 지은 미소마저도.

 

소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그의 손을 잡고하나가슴에 새기지.

 

혹시 주인님이라 불러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눈물에남자는 이렇게 답하고.

 

네 마음대로 해.”


또 웃지.

 

 

 

***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사내의 상처는 금방 아물고그에 따라 소녀의 아픔도 아물어.

 

이름없는 오파츠의 힘을 각성한 그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어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지.

 

덕분에 남자는 편한 탐험을 지속해종종 스릴이 없어졌다 불만을 표하지만그럴 때마다 소녀의 애절한 눈빛 한 번이면 제압돼하하멋쩍게 웃는 게 전부야.

 

소소한 듯 아름다운 일상소녀가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건 자연스럽다 못해 정해진 운명이지.

 

종종 아침에 밥을 차려주는 자신을 보며 신혼부부 같다며 얼굴을 붉히고또 진정으로 그와 결혼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망상하고웃고즐기고태어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지.

 

워낙 남자가 사차원이라 그런 쪽으로는 영 생각이 없어 가만히 기다리지만믿고 있어분명 남자도 자신을 사랑하리란 걸몸을 던진 행위의 동기는 분명 사랑이라고굳건히 믿고 있어.

 

그래서 그런데좋은 방법이 없을까?”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며 자신에게 상담을 요청해오기 전까지는.

 

얼룩진 가슴당황스럽고황망하고머리가 아프고눈동자가 떨려온다이게이게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당황해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만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아니평소 보여주던 웃음과 명백히 달랐다저것은 분명.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

 

나는 볼 수 없는 얼굴.

 

순간머리에 벼락이 내리치고깨닫는다그는 이성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나를 이성으로 보고 있지 않았던 거다.

 

멍하니 웃는다자기 말을 마치고 뒤돌아 떠난 그를 보며 웃는다여태껏 지은 적 없는 표정으로 그 여자에게 말을 거는 남자를 보며 웃는다.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일까단순한 동정을 사랑으로 착각해 삼킨 이 멍청한 상황을그 누가 보아도 웃을 게 뻔했다.

 

그가 나를 보고 웃어준 건단순한 정남녀 사이의 진홍빛 그것이 아닌그냥 정우정.

 

사랑이 아니었다.

 

좋아서좋아서좋아서 그런 건데나를 아껴주고사람처럼 대해준 그가웃는 그가언제나 사람을 위해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빛나서 그런 것 뿐인데.

 

왜 나는 받지 못할 애정에 매달리며 그렇게나 멍청하게 군 걸까.

 

깨닫는다나는 안드로이드그는 인간그리고 그 여자 또한 인간.

 

이건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미련하고 멍청해 구역질까지 나오는멍청한 사랑이라고.


아……하…….”

 

억울하다억울해고작 인간이라는 이유로 사랑받을 수 있는 그 여자가 미워서싫어서억울해서아파서아파서아파서.

 

그 이상으로 빛나는 당신이 좋아서사랑해서멋져서좋아한 것 뿐인데.

 

고작 그런 이유 하나 때문에나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다.

 

나오는 건 눈물따라오는 건 비참처지에 비관흐르는 눈물.

 

주제를 깨달았다닿을 수 없다나는 남자에게 닿을 수 없다그는 인간이고나는 안드로이드니까.

 

포기해야 한다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녀는 인간이니까.

 

이건 닿을 수 없는 사랑에 불과했으니까.

 

나는 포기해야 한다.

 

 

 









근데.




내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