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일을 마치고 회사 밖으로 나오니 밖은 이미 어두컴컴하다. 

뭐, 겨울이라 당연한 것 아니겠냐만은 사실 여름에도 날이 어두워져서야 퇴근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에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블랙 기업'에 다니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일상에는 이미 한참 전에 이골이 났지만, 딱히 바꿀 수 있는 건 없기에 그저 순응할 뿐이다. 


나는 지친 발걸음을 끌고 지하철에 탄다. 

꽤 늦은 시간이라 지하철에는 그다지 사람이 없다. 


나의 집은 회사와 지하철로 몇 정거장 떨어져 있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다. 

이 회사의 유일무이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한 지하철에서 내려, 다시 집을 향한 발걸음을 옮긴다. 

역에서 집까지는 조금 걸린다. 월세가 싼 집을 찾다보니 어쩔 수 없다. 


집에 거의 다 왔다. 나의 집은 단촐한 원룸이다. 

층계참을 올라가던 도중, 집에서 따뜻하게 맞아주는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급작스레 상경하여 회사에 다니며 가족들을 못 본지도 벌써 꽤 되었다.

아무래도 나는 삭막한 도시에 지쳐버린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니 벌써 문 앞이다. 

이제는 몸이 기억하는 비밀번호를 빠르게 누르며 집 문을 연다. 



"여보~ 어서와"

"다녀왔으면 다녀왔다고 말을 해야지"


뭐지.

모르는 여자가 내 집안에 있다.  

그것도 상당히 미인이다. 

그리고 나를 여보라고 부른다. 


일단 여기서 할 수 있는 가장 상식적인 대처는 아마. 


"누... 누구세요?"


"응~? 무슨 소리야. 우리 여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와이프지."


"무.. 무슨... 난 결혼한 적도 없는데..."


"여보. 이상한 장난은 그만하고 빨리 손 씻고 밥이나 먹어요. 여보가 좋아하는 반찬이니까."


나는 식탁을 흘깃 쳐다본다. 

식탁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닭튀김과 정성들여 만든 것 같은 여러 반찬들이 놓여있다. 


점점 소름이 돋는다. 

이 여자는 내 집에 몰래 들어와 요리를 했고,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까지 알고 있다. 


일단 이 여자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그다지 유쾌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 

평소에 아무거나 되는 대로 먹었기에,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성스레 만든 음식의 맛이다. 

이런 공포스러운 상황에 놓여있는데도 맛있다는 생각이 들다니 참 웃긴 일이다. 


"어때. 맛있어?"


"..으응. 맛있어"


뭐, 맛있다는게 거짓말도 아니고, 일단은 맞춰주자. 


"다행이다. 우리 여보를 위해서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네."


아무래도 이 여자는 나를 진짜로 남편이라 믿고, 또 꽤나 사랑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병명은 모르겠으나, 그녀가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계속 이 여자를 내 집에서 쫓아낼 방안을 궁리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경찰을 부르는 것이다. 

잠깐 화장실에 가는 척 해서 경찰을 부르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잠깐 화장실에 갖다온다고 말하려던 찰나. 


"여보. 핸드폰좀 보여줘."


"...응? 핸드폰은 왜?"


"여보가 다른 여자랑 카톡하거나 전화했을 수도 있으니까 검사하게."


"나 화장실 좀 먼저 갔다 올게."


"그럼 핸드폰 주고 가."


망했다. 

이젠 경찰을 부르는 것도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모르는 여자한테 폰까지 검사당하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낸다. 

그녀는 능숙하게 내 핸드폰의 잠금을 풀고, 카카오톡 내역과 통화목록을 살핀다. 


"송나연? 누구야? 여자지?"


"아니. 거래처 직원이야..."


"여보. 핸드폰에 나 이외에 다른 여자 연락처 저장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물론 난 그런 약속 한 기억이 없다. 


"전부 지울게. 그리고 벌로 폰은 압수야."


그렇게 그녀는 무심하게 내 핸드폰의 여성의 연락처를 전부 지워버렸다. 


오싹한 식사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 나에게 남은 방법은 직접 밖으로 나가 경찰을 부르는 것 뿐이다. 

잠깐 편의점에 갔다온다고 말하고 밖에 나가보자. 


"나 잠깐 편의점에 갔다 올게."


"응? 뭘 사러? 퇴근한 이후에는 나랑 단 둘이서만 보내기로 약속했잖아."


물론 그런 약속 역시 한 적이 없다. 


대충 얼버무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그녀가 내 팔을 붙잡는다. 

뿌리치고 나가려고 힘을 주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슨 여자가 힘이 이렇게 세. 

물론 내가 운동을 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결국 나가는 것도 실패해버렸다. 

나는 아마 최소한 내일 아침까지는 이 집에서 이 낯선 여자와 함께 지내야 할 것 같다.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TV나 보기로 했다. 

요즘 TV는 그다지 재미가 없지만, 핸드폰도 없는 마당에 그나마 TV라도 보는게 나을 것이다. 


TV에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 뉴스로 흘러나온다. 

아마 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알려진다면 당장 내일 뉴스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TV를 보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나에게 먼저 씻는다고 말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욕실에서 나온다.

 

목욕가운(분명 우리 집에는 목욕 가운을 둔 적이 없다.)을 입고 나온 그녀의 모습은 이런 상황에서 말하긴 뭐하지만 상당히 아름다웠다.

곧 그녀는 나에게도 씻으라고 말하며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나도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원래라면 하루의 마무리로 피로가 날아가는 기분이 들어야 하지만, 오늘은 왠지 피로가 더욱 쌓이는 기분이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적당히 가릴 곳을 가리며 엉거주춤 욕실 밖으로 나온다. 

그녀의 머리는 거의 다 마른 모양이다.


"여보. 머리만 말리고 바로 침대로 와."


"... 뭘 할려고"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하게 하고 싶어? 빨리 오기나 해."


그녀가 나를 남편으로 착각하고 있고, 침대로 나를 유인하고 있으며,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러운 무언가라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그녀는 나와 그렇고 그런 일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것만은 안된다. 

아이가 생기기라도 하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버린다. 

도망쳐야 한다. 


나는 적당히 팬티만 주워 입고 문으로 달려나간다. 

아쉽게도,

그녀가 더 빨랐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질질 끌고 침대로 간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는다. 


"왜 그래 우리 여보. 부끄러워서 그래?"


따뜻하다. 

너무나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체온이다. 

따스하다. 포근하다. 

순간이지만 그녀가 진짜 아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다시 한번 그녀는 나를 끌어안는다. 

나의 머리가 그녀의 품속에 꼭 안겨있다. 

행복하다. 

이대로 어떻게 되버려도 좋을 것만 같다.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해줄 여자가 또 있을까. 

나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마, 나는 역시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