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68962655 - 1



전편 줄거리 요약


주인공 호시노 소라에겐 어릴 적에 1년 동안 친남매처럼 지내던 이름 모를 소녀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헤어지게 된 후,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만났다

주인공이 만났던 그 소녀의 정체는 바로 오니가시라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 오니가시라 마에루

그녀는 주인공과 결혼하기 위해 그를 성으로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마에루는 주인공에게 집착하면서도, 과거와 달리 너무 많은 것이 변해버린 상태였다...










“-그래, 류온지였다고?”


“응. 류온지였어.”


시마히메가 심드렁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훅 내뱉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 문 바깥에 있는 하인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시마히메는 미천한 인간들이

듣거나 말거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류온지, 라고.”

 

요즘 들어 류온지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졌다.

 

“하기야, 원래 자기 땅이었으니 더더욱 그렇겠지.”

 

그들의 땅을 빼앗고 어언 20년이 흘렀다.

 

이곳은 본래 류온지의 분가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류온지는 그들의 분가를, 땅을 잃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굴욕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수고했다. 몸을 씻고 쉬거라, 마에루.”


“서방님은?”


“아마 먼저 자고 있겠지. 내버려 둬라.”


솔직히 그녀로선 마에루가 그에게 집착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외모가 비범한 것도 아니요, 출신은 비천한 농민일 뿐.

 

고작해야 땅 파먹고 사는 재주뿐인 남자의 뭐가 그리도

특별한지, 시마히메가 저도 모르게 비웃었다.

 

그리고 마에루는 그런 조소를 참지 않았다.

 

“지금, 비웃은 거야?”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가지고.”


시마히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긴 했다만, 그 남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지렁이일 뿐이다.”

 

“어머님.”

 

마에루에게서 피의 냄새가 났다.

 

아주 미묘한 변화, 그러나 같은 오니의 피를 타고 태어난

시마히메는 그 변화를 바로 인지했다.

 

“죽고 싶은 거야?”


“네가? 나를?”


시마히메가 또 비웃었다. 

 

아아, 어찌도 이리 솔직하고 깜찍한 아이인고.

 

“해볼 테냐?”


마에루가 말없이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래야지.”


마에루는 생각이 단순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힘의 격차는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다.

 

“짜증 나는 아줌마.”

마에루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건방진 애새끼 같으니.”


시마히메가 큭큭 웃다가 밖으로 나갔다.

 

내 딸이지만 정말이지 귀염성 없는 꼬맹이다.

 

그녀는 그리 생각하며 밤의 복도를 홀로 거닐었다.

 

오니는 본래 야행성 동물, 낮에 활동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밤에 움직이는 걸 선호했다.

 

빛에서 태어난 인간이 아닌, 어둠에서 태어난 종족다운 습성.

 

그래서였을까, 오니는 유독 같은 오니보단 인간이 가진 빛에

이끌리기 쉬웠다.

 

‘그러는 나도, 말이지...’

 

그때, 시마히메가 발걸음을 멈췄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들고 창밖에

떠오른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덩치는 남자치고 작았고, 몸도 호리호리하게 말랐다.

 

촌마게를 틀지 않고 길고 덥수룩하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이

눈썹과 눈을 반쯤 가렸고, 검은 눈동자에는 빛이 없었다.

 

거뭇거뭇하게 자란 수염, 구릿빛 피부, 그리고 얼굴.

 

‘외모가 비범하지 않다는 말은 취소해줄까?’

 

이리 보니 또 나쁘지만은 않다, 뭐라고 해야 하나.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사람을 이끄는 묘한

무언가가 있다.

 

아마 그 무언가에, 마에루도 끌린 것이 아닐까.

 

“뭐하고 있느냐?”


“아, 시마히메 님.”


그가 얼른 바닥에 조아리며 말했다.

 

“달을...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군. 달구경이라, 여도 좋아한다.”

 

“그렇습니까.”


시마히메는 문득,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대체 무엇이 그 말괄량이를 미치도록 빠지게 했을까.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듣지 못했구나.”

 

“아...”


그도 그 사실을 깨달은 듯 말끝을 흐렸다.

 

“호시노 소라...입니다.”

 

별과 하늘인가.

 

퍽 어울리는 이름이군, 그녀가 작게 웃었다.

 

“과연, 좋은 이름이로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오늘은 기분이 썩 유쾌하구나, 아이야.

어째서일까? 널 보면 항상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그녀가 창가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러니 작은 선물을 주마. 뭐든지 하나 질문해봐라.”


“뭐든지...말입니까?”


“여의 속옷 색깔이 뭔지 물어봐도 좋다만?”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그, 그런 무례를...”


“농담이다, 농담. 그 정도 농도 받아치질 못하다니, 원.”

 

그녀가 작게 웃으며 그를 내려보았다.

 

“그래서, 질문은?”


“...듣자 하니, 마에루는 지난 10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거의 갇혀 지냈다고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인가?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어째서, 입니까?”


“마에루는 미친 개새끼다.”


그녀가 망설이지 않고 칼같이 대답했다.

 

“오니란 그런 족속들이지, 힘에 취해서 날뛰는 걸 그리도

좋아하는 난폭한 괴물들이야. 마에루도 마찬가지고.”


“그게 무슨-”


“마에루는 내게 도전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나를 죽이고자

몇 번이고 싸움을 걸었다. 패배하고, 패배하고, 패배하고,

패배하고, 패배하고, 패배하고...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고,

이빨이 뽑혀도, 마에루는 끝까지 내게 덤볐다.”

 

마에루에게 시마히메와 오니가시라의 이름은 족쇄였다.

 

사랑스러운 어머니도, 그리운 집도 아닌.

 

그저 자신을 붙잡아두는 무거운 닻에 불과했다.

 

“미친 개새끼에겐 몽둥이가 약이지. 여는 저것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만, 그 수단이 다소 과격했다는 건

인정해야겠군.”

 

“당신의 딸, 아닙니까?”


시마히메가 그의 눈동자를 보았다.

 

빛이 없던 눈동자 너머로, 무언가가 이글거리는 게 보였다.

 

“당신이 낳은 딸, 아닙니까?”


“여가 낳고 여가 길렀다. 그래서?”


“그런데 어째서...그런 짓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아이야.”


시마히메가 그의 뒤통수를 발로 짓밟았다.

 

“오니에게 혈육의 정 따위는 없다.”


“...”


“투쟁을 위해 살고 투쟁을 위해 죽는 동물이다. 우리는.

제 뜻에 맞지 않으면 낳아준 어미도 죽이고 자신이 낳고 기른

딸도 찢어 죽일 수 있는 종족이야. 너희 인간의 가치관으로

우리를 재단하지 마라, 애송이.”

 

그런데도 그는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시마히메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마에루를 이해했다.

 

아, 그렇군. 그런 건가, 그랬던 거였나.

 

“왜 마에루가 널 좋아하는지 조금 알 것 같군.”

그녀가 발을 치우자, 그가 천천히 일어섰다.

 

“애송이, 사람에겐 쓸모가 있어야 한다.”


“네...?”


“고작 너 따위로는 마에루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된다.”

 

시마히메가 조소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여자는 사랑 때문에 죽고, 남자는 인정 때문에 죽는다지?

이게 아니었나? 아무튼...마에루의 남자이길 자처한다면,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는 게 좋을 것이다.”

 

“알고...있습니다.”


“내 부하 중에 시기리라는 녀석이 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눈치가 있다면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아먹겠지.

 

“그럼, 여는 슬슬 자야겠구나.”


“안녕히 주무십시오.”


“오냐.”


짧은 대화였지만, 시마히메는 만족스러웠다.

 

“나머지는 저 녀석에게 맡겨볼까.”

 

 

 

 

 

“서방님! 일어나!!”


“크헥!?”


마에루의 기습 공격에 나는 죽어가는 복어 같은 소리를 냈다.

 

아니, 이게 아닌가. 아무튼 그랬다.

 

“마에루? 어제는 어디 갔었어?”


“아...그...산책! 그래! 산책 다녀왔어!”


“혼자서? 그 밤에?”


“혼자서! 그 밤에!”


거짓말이다. 마에루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아내의 거짓말을 모른 척해주는 것도 남편의 도리라

하지 않았나, 나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랬구나. 재미있었어?”


“으, 응! 재미있었어!”


그렇구나, 그럼 다행이다.

 

뭘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에루가 좋다면 나도 그걸로

좋다.

 

“그럼-”


그때, 누군가가 밖에서 헛기침했다.

 

“영주님께서 두 분을 호출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왜?”


“서둘러 오라고만 하셨습니다.”


이런 아침부터? 우리는 서로를 보다가 일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후, 영주님이 계시는

성의 중심부로 향했다.

 

“왔느냐?”


...이게 무슨 분위기지.

 

시마히메 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고,

나머지 가신들이 무장을 한 채 양옆으로 쭉 줄지어 있었다.

 

“모두 모였사옵니다, 영주님.”


“좋다. 이런 아침부터 너희를 소집한 이유가 궁금하겠지?”

시마히메 님이 우리를 내려보며 말했다.

 

“뭐, 별 건 아니다. 단지 여행을 좀 떠나려고 할 뿐이니.”

 

...여행?

 

갑작스러운 선언에 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영주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행이라뇨? 대체 어디로...?”


“닥쳐라.”


그녀의 한 마디에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일 년 정도, 여는 자리를 비울 것이니라. 즉, 당분간은

오니가시라 마에루가 영주 대리로서 이 땅을 다스리고

지킬 것을 명하니라.”

 

“에? 에? 잠깐, 어머님, 무슨 말이야?”


“또한, 마에루의 남편 호시노 소라는 영주 대리의 

고문관으로 임명한다. 이의 있느냐?”


그러자 가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영주님! 저희와 상의도 없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마에루 아가씨께선 아직 어리고 배움이 부족하옵니다!”


“뜻을 거두어주십시오, 영주님!”


하아- 시마히메 님이 늘어지게 한숨을 내뱉었다.

 

“여가 이곳을 다스린 지 어언 20년이 흘렀고, 여는 지금껏

열과 성을 다해 일했느니라. 마에루도 이젠 어른이고

남편도 있는 몸이다.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하, 하지만!”


“시기리.”


그녀가 옆에 서 있던 사무라이를 슬쩍 보았다.


“네이, 영주님.”


“내가 없는 동안 두 사람을 잘 도와주거라. 이해했느냐?”


“하이고, 꽤 어려운 일을 맡기십니다요?”


“너 같은 무식한 놈에게 맡기기엔 어려운 임무이긴 하지.”


그들이 동시에 큭큭 웃기 시작했다.

 

다들 심각한데, 대체 뭐가 그리 웃긴지는 모르겠다.


“그럼 이상이다. 여는 오늘 바로 출발할 테니, 너희는...

뭐, 각자 자기 할 일이나 하도록.”

 

뭐 이런 무책임한 영주님이 다 있지.

 

상의도 없이 일 년이나 자리를 비운다고?

 

그것도 그냥 여행하러 다닌다는 이유로?

 

아주 먼 나라의 어느 왕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왕국도

가족도 버리고 떠났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설마 그 비슷한

무언가를 살아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마에루.”


“어머님...”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무슨 생각이야?”


“오니가 생각 따위를 하는 동물이던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게 오니 아니던가?”

 

그녀가 딸을 비웃듯이 큭큭 웃었다.

 

“오히려 좋지 않으냐? 그리 성가시던 여가 사라지니.”


“...”


마에루는 그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여간, 귀엽지 않은 계집이로고.”


시마히메가 마에루의 머리를 팍팍 쓰다듬었다.

 

“어디 열심히 발버둥 쳐보거라.”

 

그리고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긴 칼 한 자루와 주머니 하나만 들고,

오니가시라의 영주 시마히메는 떠나버렸다.

 

“맙소사...”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녀다.

 

아마 인간인 내게, 오니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러다간 영지가 망하게 생겼다.

 

“마에루 님! 마에루 님, 상소문이 이렇게 많이 쌓여-”


“마에루 님! 제발 저희 말 좀-”


가신들의 말도 전부 무시하고, 마에루는 문을 쿵 닫았다.

 

“그럼 서방님, 오늘은 뭐 하고 놀까!?”


“...음...”


마에루는 영지 운영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정말 너무 관심이 없어서, 자기가 영주 대리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 건지 의심될 정도였다.

 

‘어쩌면 일부러 무시하는 걸지도.’

 

마에루에게 오니가시라 가문이란 족쇄에 불과했다.

 

차라리 망하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이건...아니야.’

 

어째서 시마히메 님이 마에루와 나에게 이런 짐을 떠안기고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야 한다.

 

“마에루, 잠깐 얘기 좀 할래?”


“응! 좋아, 무슨 이야기인데? 아...혹시...?”


마에루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뺨에 손을 얹었다.

 

“아기 이름은 나중에 지을까 했는데...”


“아니, 그런 거 말고.”
 
“그럼 뭔데.”


바로 식어버렸다. 왠지 마에루의 감정 기복이 전보다 더

심해진 거 같기도 하고...

 

“영주 대리, 어떻게 할 거야?”


“난 몰라. 관심 없어, 재미도 없고. 밑에 애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면 되는 거 아니야?”


마에루가 입을 삐쭉 내밀고 드러누웠다.

 

“세금이니 행정이니 그런 건 너무 복잡해!”


“뭐, 그렇기는 하지...”


이해한다. 마에루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소녀다.

 

거기에 그런 일을 제대로 처리할 정도로 똑똑한 것도 아니고.

 

‘결국 내가 해야 하나.’

 

문제는 나도 그런 걸 처리하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나는 촌동네 무지렁이일 뿐이었고, 그나마 운 좋게 글자를 

조금 배우긴 했다만...딱 그 정도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시마히메 님이 시기리 씨를 만나보라고 하셨나...?

 

“마에루, 시기리 씨는 어디 계셔?”


“...그놈은 싫어. 마음에 안 들어. 만나지 마.”


마에루가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마에루랑 같이 있자, 응? 마에루랑 누워 낮잠 자자!”


“마에루...”


“서방님은 일하지 마! 어머님이 멋대로 떠넘긴 거잖아!”

그럼에도 내게 부여된 의무였다.

 

마에루의 남편으로서, 제대로 행동해야 한다.

 

“잠깐 갔다 올게, 이야기만 좀 하려는 거야.”


“끄응...”


마에루가 길 잃은 강아지처럼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나를

흔들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방에서 나갔다.

 

...돌아와서 좀 달래줘야겠지.

 

나는 성안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시기리 씨의

위치를 물어봤고, 간신히 성 안뜰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성 안뜰에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거대한

벚꽃 나무 아래에 앉아있었다.

 

‘저 사람이 시기리 씨...멀리서 보기만 봤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비범한 기운이 느껴진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무라이겠지, 그의 몸 곳곳에 난 흉터와

검은 안대, 그리고 항상 차고 다니는 칼의 흠집을 보아하니

보통 사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이, 남편님. 거기 멀뚱히 서서 뭐하셔?”


뭣...어떻게...?

 

나는 그가 날 보지 못하는 각도에 서 있었을 텐데.

 

“잠깐 이야기나 좀 하려고 오셨는가? 자자, 앉으라고.”

그가 사람 좋게 웃으며 옆자리를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이, 우리 사이에 뭐 이리 격식을 차리시나? 나는

당분간 남편님 부하니까, 편하게 대하셔.”

 

그래도 되나...? 나는 긴가민가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 이런 시꺼먼 남정네랑

즐거운 만담이라도 나누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시마히메 님이 당신을 만나보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렇군, 그런 거였나.”

 

시기리 씨가 끌끌 웃었다.

 

“아씨는 직무유기 중이고, 남편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누가 말하길 총체적 난국이라 하던가?”

 

웃을 일이 아닌데. 그러나 그는 유쾌하게 웃어 재꼈다.

 

“뭐- 나는 글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 딱히 도와줄 건

없거든. 남편님이 원하는 답은 내주지 못할 테지.”

 

“그럼 왜-”


“하지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알고 있지.”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저 멀리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키사키.

 

일전에 나를 도와주었던 그 소녀가 기둥 뒤에 숨어있었다.

 

“어이, 키사키. 잠깐 이리 온나.”


“...”


“미안, 남편님. 저 아가는 나를 무서워하거든.”


그가 숨을 흡- 참았다.

 

“이리 오라고 이 가시내야!!”


“힉!”


그제야 키사키가 쭈뼛거리며 이리로 다가왔다.

 

“자, 소개하지. 아니 이미 만나봤으려나? 류온지 키사키.

앞으로 남편님을 가르쳐주고 보좌해 줄 아가여.”

 

...?

 

류온지? 잠깐, 내가 잘못 들었나?

 

“류온지는 분명, 옆 나라 용족-”


“어, 아네? 맞아. 이 아가는 류온지의 생존자거든.”


뭐지? 그럼 키사키가 용족이라는 건가?

 

하지만 어딜 봐도 그런 구석은 보이질 않았다.

 

“그러네, 그렇군. 설명이 부족했나.”


시기리 씨가 헛기침했다.

 

“뭐냐 그- 이래저래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이 아가는 여기서

살고 있거든. 볼모나 인질, 뭐 그런 거라고 해야 하나?”


“볼모...?”


“하여튼 이 아가는 보기와 다르게 제대로 배운 년인지라.

남편님을 도와주는데 아무 부족함이 없을 테지.”

 

아직 어려 보이는데...키사키는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데요. 마에루가 용납할지 어떨지-”
 
“아, 그거.”

 

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벼팠다.

 

“잘 들어, 남편님. 남편님은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도

아씨를 가르치고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해.”


“그게 무슨 말이죠?”


“아씨는, 그러니까, 에휴.”


시기리 씨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아씨는 제대로 된 교육도 뭣도 받아본 적이 없거든.

글자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

어미에게 배운 것은 사람 죽이는 방법뿐인지라.”

 

“...”


“거기에 오니잖아? 성질머리가 아주 그지 깽깽이 같지.

수틀리면 부수고 죽일 생각부터 하니 아주 문제가 많아.

남편님도 알고 있지?...이미 봤을 거 아녀.”

 

그래, 봤다. 나는 마에루의 본성을 보았다.

 

키사키를 죽이려고 했을 때, 나는...두려웠다.

 

내가 알던 마에루가, 너무 많이 변해버린 것 같아서.

 

“영주님은 남편님께 이 나라를 맡긴 게 아니야.”

 

“마에루를...내가 가르치라는 겁니까?”

 

“아마도. 뭐, 뭔 생각하는지 통 이해하기 어려운 분인지라...

그래도 아마 맞겠지. 참나, 자기도 못 하는 일을 생판 남에게

떠넘기다니, 어지간히 제멋대로인 영주님이셔.”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남편님, 이 늙다리 사무라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아. 뭐...칼질이나 좀 가르쳐 줄 수 있기는 해도.

그거 말고는, 여자 다루는 방법 조금?”


“여자 다루는 방법...?”


“그려, 있지...남편님은 조금 더 엄하게 나가야 해.

무서워도 참아, 마음 굳세게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영영

아씨를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

 

내가 마에루를 통제하고, 가르친다.

 

그게 가능한 일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라는 건 명확하지?”


그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제 방식대로.”


“좋아, 좋아. 이 늙다리는 조언만 살짝 해줄 테니까, 나머진

알아서 해봐. 아마 남편님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테지.”

 

뭘 믿고 나를 믿는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내 방식대로 해보기로 했다.

 

 

 

 

 

밤.

 

나는 온종일 마에루와 만나지 않고, 그 대신 키사키에게서

영지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그럼 봄에 빌려준 쌀을 가을에 받는다는 거지?”


“네. 이해가 빠르시니 편하네요, 다만 이 방법에는-”


드르륵, 쿵.

 

미닫이문이 열리며, 마에루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너. 뭐해.”

 

“아가씨-”


쿵, 쿵, 쿵!

 

마에루가 거침없이 다가와 키사키의 멱살을 잡았다.

 

“또 서방님한테 꼬리 치는 거야?”


“저는, 그러니까-”


“죽고 싶은 거야?”


그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에루의 손을 잡았다.

 

“놔, 마에루.”


“서방님,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야 할 사람은 너야, 마에루.”


나의 말에 그녀가 눈알이 튀어나오도록 눈을 크게 떴다.

 

“어, 그, 서방님? 하지만, 이, 이 녀석이 먼저!”


“키사키는 내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었어.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치만, 응?! 분명 못된 속셈이 있을 거야!

서방님을 유혹하려고 하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응!?”

마에루가 키사키를 찢어죽을 기세로 노려보며 말했다.

 

“너...서방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


“마에루, 다시 말할게. 그 손을 놔, 그리고 진정해.”


“싫어!! 서방님은 내 편이잖아! 나의 것이잖아, 그러니까!!”


“알겠어.”


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문으로 걸어갔다.

 

“어...”


“내가 사랑하는 마에루는 저항도 못 하는 여자애를 때리지

않아. 그런 짓을 하는 마에루는 내가 아는 마에루가 아니야.

그러니까 오늘은 마에루랑...안 잘 거야.”

 

그 한 마디에 마에루가 나라 잃은 사람처럼 주저앉았다.

 

“서, 서, 서방, 서방님...?”

 

“잘 자, 마에루.”

 

그리고 나는 그녀를 두고 떠났다.

 

내가 혼자 내 침실로 돌아오자, 마에루가 서둘러 달려와

문을 열려고 했다.

 

“안 돼. 문 열면 너랑 눈도 안 마주칠 거야.”


“그! 그, 그게, 마에루가, 그...마에루 잘못이 아니잖아!

전부 그 녀석이 나쁜 거잖아, 그렇잖아!”


“아니야. 마에루, 나는 너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너의 뜻대로 행동하는 인형이 아니야.”


시기리 씨는 말했다.

 

지금 마에루는 나를 일종의 인형이나 애완동물처럼 여기고

있다고.

 

그래서 자기 뜻대로만 해야 하고, 자기만 사랑해줘야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편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마에루가 틀렸을 때는, 틀렸다고 말해줘야만 한다.

 

“마에루가 반성할 때까지 앞으론 따로 잘 거야.”


“!”


마에루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으르렁거리며

문을 붙들었다.

 

“취소해! 그 말 취소해! 서방님은 그런 말 하면 안 돼!!”


“안 취소할 거야. 그 문을 부수든 넘어오든 그런 짓을

하면 두 번 다시는 눈도 안 마주칠 거야.”


“하지만, 하지만...그래도...”


“내 말도 안 들어주는 마에루는, 싫어.”


침묵.

 

그리고 침묵이 깨지는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앙...아아앙...! 으으, 으에에에엥...!”


울음소리는 옛날하고 달라진 게 없구나.

 

마에루는 성이 떠나가라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잘못, 끄윽, 잘못했어요...마에루가 미안해, 마에루가, 훌쩍,

마에루가 잘못했으니까...우으으, 훌쩍...”

 

“약속해. 앞으론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해치지 마.”

 

“약속, 훌쩍, 훌쩍...약속할게, 서방님...”


그제야 나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마에루가,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너의 남편이야, 마에루. 하지만 너의 장난감도,

애완동물도, 하물며 인형조차 아니야.”

 

“응...”


“나도 열심히 할 테니까...함께 힘내자, 응?”


“응. 마에루도 열심히 할게.”

 

나는 울먹거리는 마에루를 껴안았다.

 

그리고 마에루는 두 번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나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화내서 미안해, 마에루.”


“멋대로 굴어서, 훌쩍...미안해, 서방님.”

 

그렇게 우리는 화해했다.

 

아직 어리고, 어리석었던 너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미숙한 신혼부부답게, 하나씩 배워나가기로 했다.


















소설은 무려 3달 반만에 쓰나...올해 들어선 사실상 처음인듯?

오니 낭군 1편이 작년에 썼는데 2편을 이제야 써보네

그러니까 다음편은 내년에 쓰면 되는 거임?

그럼 2025년에 봅시다 뻑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