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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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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선
尹潽善 | Yun Posun
출생
충청남도 천안군 모산면
(現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해위길52번길 29)
사망
1990년 7월 18일 (향년 92세)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산28-2
재임기간
제4대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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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윤치소, 어머니 이범숙
형제자매
남동생 윤완선, 윤원선, 윤한선, 윤택선, 윤형선
여동생 윤예경, 윤의경, 윤계경
배우자
여흥 민씨[2], 공덕귀
자녀
윤완구, 윤완희, 윤상구, 윤동구
본관
경천(敬天)
해위(海葦)
학력
관립교동보통학교 (졸업)
게이오 중학교 (졸업)
세이소쿠 고등학교 (졸업)
에든버러 대학교 (고고학 / 학사·석사)
종교
신체
169cm, 70kg, O형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3, 4, 5, 6
약칭
, PS

1. 개요2. 일생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3.2. 부정적인 평가
3.2.1. 계파 갈등
4.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 유일하게 상징적 국가원수이다. 또한 유일한 대통령 출신 국회의원이다.

최규하와 함께 인지도가 없는 대통령 투톱이다. 심지어 당시는 장면 내각이라 실권도 없었다.

2. 일생 [편집]

1897년 8월 26일 출생.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광복 이후에는 민주당계 정당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하야하자 새롭게 대통령에 뽑혔다. 그러나 윤보선, 김영삼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와 장면, 김대중 등을 중심으로 한 신파의 대립으로 국정운영이 마비되고, 그 사이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

5.16 군사정변 직후 장면 내각이 무력화되지만 1년 정도 더 대통령 하다 하야 한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하다가 1980년에 은퇴하고, 1990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평가 [편집]

3.1. 긍정적인 평가 [편집]

  • 독립 운동
  • 경제 5개년 계획[5]

3.2. 부정적인 평가 [편집]

3.2.1. 계파 갈등 [편집]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모습.
왼쪽이 윤보선, 오른쪽이 장면이다.
"저 난데 없이 굴러 들어온 놈"
4.19 혁명 직후 윤보선과 장면, 그리고 당시의 민주당은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크다고 판단해서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고 내각책임제로 개헌 하며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간단히 설명하면,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써의 역할과 외교 등을 담당하는 반면에, 실권은 국무총리에 있다 봐도 된다.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과 총리 장면은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시시건건 대립을 거듭했고, 민주당은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구파와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파로 나뉘어진다. 참고로 구파 소속 유명 정치인으로는 신익희 의장, 유진산 총재, 조병옥 장관,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있고, 신파 소속 유명 정치인으로는 이철승 부의장, 정일형 장관, 그리고 슨상님이 있다.

민주당 구파는 주로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출신 인물들로, 토착 지주 출신들과 지식인들이 많은 세력이었다. 반면에 신파는 신진 세력으로, 세력은 작지만 소장파, 관료 출신들이 많은 세력이었다.

결국 두 세력의 내분으로, 급기야는 교섭단체까지 따로 생기기도 했고, 끝내 두 세력이 분열해 구파 세력이 신민당이란 새 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혼란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생각하는 이들도 많은데, 당시 시대상을 보면 시위도 매일 같이 일어났고, 정치인 암살 사건도 흔했으며, 당내 갈등은 2021년 오늘날 이재명-이낙연 대립, 이명박-박근혜 갈등 이상이라 볼 수 있다.

암튼 이 내분을 틈타,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구파와 신파는 오랜만에 손을 잡고 야권 단일 후보로 윤보선[6]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게 된다.

4. 관련 문서 [편집]

[1] 이승만 정부 붕괴 직후, 의원내각제로 헌법을 개헌해 대한민국의 첫 상징적 국가원수이자 유일한 상징적 국가원수이다.[2] 민영환의 6촌 관계인 민영철의 딸이라고 한다.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윤보선과의 사이에서 2명의 딸을 낳았다.[3] 도제공파 22세손 'O선(善)' 항렬.[4] 집 바로 앞에 있는 안동교회(安洞敎會)에 다녔다.[5] 사실 이건 장면 당시 총리의 공으로 봐야 하는 거라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라면 몰라도, 윤보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라 보긴 어렵다.[6] 당시에는 대통령 재선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