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에는 시간이 많았다. 내 대화 상대는 나뿐이었다.

외로움과 불안이 들개처럼 내 안을 떠돌 때, 누군가가 그랬다.

 

"그곳에선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어."

 

 

 

바이스와 여행의 끝

 

 

 

"아주르 씨는 왜 나를 좋아하는 거예요?"

 

조종사는 맥락도 없이 그렇게 물었다.

로맨틱한 장면이어야 했으나, 조종사와 아주르 사이에는 불쾌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야 우리 꼬마는 귀엽고… 착실하고, 제 역할을 하려고 하잖니. 누나라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주르는 한순간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다 다시 조종사를 보았다.

조종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으나 따로 내색하지도 않았다.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 고마워요. 나를 좋아해 줘서. 바쁘신데 괜히 귀찮게 했네요."

 

"아니야 아이테르 꼬마랑 있는 게 누나는 가장 즐거운걸. 좋은 밤 되렴. 꼬마야. 술은 적당히 하고."

 

"누나도요."

 

조종사는 자리를 떠나는 아주르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감기약 맛이 나는 술을 홀짝이며 조종사는 계속 다른 곳을 건너다보았다.

어두운 함교 끝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미묘한 달빛 아래 바이스가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

 


누구도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조종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끝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에도 몇 번이나 보았다.

스러져가는 게임의 스러져가는 커뮤니티. 몇 명 남지 않은 유저들이 부침하는 모닥불 앞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습은 흔했다.

돈으로 사랑을 산 자들의 마지막은 항상 그랬다.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은 대략 17년도부터였다.

그 시절엔 수집형 RPG 모바일 게임들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왔다.

그곳에서는 돈만 낸다면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남녀들이 제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 중에는 이 세상의 주변인들도 있었다.

아웃사이더들. 조종사도 그중 하나였다.

 

데이터로 구성된 인공인격에 애정을 느낀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단지 잠시 즐기는 것이다.

그렇게 되뇌면서 조종사는 백야극광의 세계로 왔다.

그때 바이스를 만났다. 처음 만난 바이스의 호박색 눈을 조종사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뭐해.”

 

조종사는 바이스의 어깨를 건드리려다 말았다.

바이스는 부르기도 전에 이미 조종사가 다가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그냥. 너무 조용해서.”

 

“연주할 줄도 모르잖아.”

 

“연주할 줄 알았으면 콜로서스가 산에 처박혔겠지.”

 

그러면서 바이스가 피식 웃었다. 좋게 말해도 기운 빠지는 미소였다. 몇 달 전부터 이런 식이었다.

바이스는 이제 애정을 표현할 생각도, 농담하면서 즐겁게 웃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종사는 그런 바이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아무 일 없는 체하는 다른 오로리안보단 나았기 때문이었다.

바이스의 어두운 표정은 수수께끼 같은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었다. 모두 해명되어 종말을 앞둔 이 세상과는 달리.

 

“앞으론 더 조용해질 거야.”

 

조종사는 바이스의 왼편에 앉아 왼손으로 건반을 몇 개 두드렸다.

바이스는 건조한 표정으로 조종사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종사도 칠 줄 모르면서.”

 

“알아. 고등학교 때는 피아노 전공이었거든. 내가 가르쳐줄게. 안 심심하게.”

 

“너. 그런 말은 금지되어 있는 걸 알면서…….”

 

바이스는 건반을 건드리는 조종사의 팔을 붙잡았다. 조종사는 바이스의 심각한 얼굴이 재밌어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수집형 RPG에서 ‘롤플레잉’은 등장인물뿐 아니라 플레이어의 의무이기도 했다.

현실의 이야기를 끌고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콜로서스의 조종간을 피아노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하지만 조종사는 바이스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았다.

 

“이 마당에 뭐 어때? 너도 궁금하지 않았어? 조종사가 아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아.”

 

“열한 살 때 피아노를 시작했어. 그런데 늦었기도 했고 재능이 없었어. 그래서 기술을 배우려고 전문대에 들어갔는데 강의가 잘 이해가 안 가더라고.”

 

“말하지 마.”

 

바이스는 계속 조종사를 노려보았으나 의자에서 일어나거나 떠나지는 않았다.

 

“졸업하고서는 계속 백수였어. 부모님이 보내주는 돈을 갉아먹으면서 살았어. 피아노 과외라도 할 걸 그랬는데. 왜 안 했을까. 못생긴 남자라서 그랬을 거야. 고등학교 때까지 육칠 년 깔짝 한 것 가지고 피아노 선생 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기도 했고.”

 

“…….”

 

“그러다가 여기로 왔어. 심심풀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 사람이 그리웠던 거지.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그런데 바깥에 나설 용기도 없어서 여기로 도망쳐왔어.”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소릴 이어가면서 조종사는 계속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레레파♪ 레레파♪….

좋아하던 만화영화 주제가의 반주 부분이었다.

무심코 만든 침묵 사이에서 조종사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무슨 노래야 그건.”

 

바이스는 무관심한 듯 관심을 보였다. 아직 인상 쓴 채였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려서 아픈 것 같은 표정이었다.

 

“거봐 너도 배우고 싶지? 피아노는 재미있어. 아름답게 연주하기는 어렵지만, 재미 붙이기는 쉬워.”

 

“그만해. 이래 봐야 아무 의미도 없어.”

 

“왜? 재밌다니까. 자취방에서는 피아노를 칠 수가 없었어. 근데 여긴 아무리 연주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세상은 곧 끝날 거야. 그러니까 그냥 가. 우리 같은 건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어.”

 

건반을 두드리던 조종사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레레파♪ 레레파♪.

 

“없어. 이제 돈도 없고. 여기가 끝나면 다 그만둘 거야.”

 

“그럼 더더욱 이러면 안 돼. 놓는 게 어려워지기만 할 거야.”

 

“왜 이래? 그냥 좀 이 분위기를 같이 즐겨주면 안 될까? 그냥. 끝날 때까지.”

 

그럼 편할 것 같았다. 과거에도 셀 수 없이 그런 적이 있었다. 우울함에 몸을 맡기고 자학적인 카타르시스에 빠져드는 것.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어두운 표정의 인공인격과 함께라는 것이다.

하지만 조종사는 자신이 정말로 그런 걸 바라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런 걸 바래? 넌 고작 이런 걸 찾아서 여기 온 거야?”

 

바이스는 조종사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럼 뭘 바라야 하는데?”

 

조종사는 반문했다. 진심이 담긴 말이었지만, 동시에 자아가 희박한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종사는 정확히 알았다. 바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넌 진실을 바라잖아.”

 

조종사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그래. 그럴지도 몰라. 근데… 네 말은, 그러니까 이 가짜 덩어리인 세상에서 나가라는 거야? 너 같은 가짜 인간들이랑 가짜 감정을 주고받는 건 그만두고 제대로 살라고?”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럼 뭔데!”

 

조종사는 건반을 때리려던 손을 가까스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소음에 대비하던 바이스의 눈주름이 조금씩 펴졌다.

바이스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조종사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조종사. 너는.”

 

“…….”

 

“왜 나를 좋아했던 거야?”

 

이유는 수백 가지라도 댈 수 있었다.

호박색 눈과 단발이 좋아서, 활기찬 듯 차분한 목소리가 좋아서, 웃음이 헤픈 게 좋아서, 잘하지도 못하는 걸 몇 번이나 시도하는 게 좋아서, 바뀐 자신을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그 모습을 붙잡아주고 싶어서.

하지만 좋아하는 네가 진짜가 아니라는 그 사실이 조종사를 아프게 했다.

 

“왜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려고 했어?”

 

“아무 이유도 없었어.”

 

“모든 게 다 끝나버려서 네가 떠나야만 하면, 내가 외로울까봐. 그래서 그랬던 거잖아.”

 

“넌 그냥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해. 그냥 심심풀이였어. 이 게임에 돈 썼으니까. 그 돈으로 널 샀으니까. 그래서 그냥 쓴 돈이 아까워서 남아 있었어.”

 

“거짓말이야.”

 

바이스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야? 넌 누군가가 만든 가짜 인간이야. 난 돈으로 널 샀어. 이 세상을 샀어.”

 

“바보야. 나는 배포 캐릭터인걸.”

 

아까 같은 시답잖은 농담이었다.

 

“조종사.”

 

“네 농담은 재미없었어.”

 

“내가 진짜가 아니라서 미안해.”

 

그 사과조차도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종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연민과 애정, 슬픔으로 범람하는 이 바이스의 사과는 진짜일 수 없다. 게임의 종말과 함께 공지될 운영자의 형식적인 사과야말로 진짜일 것이다.

진실의 여부는 비정하리만치 지금 이곳에 흐르는 감정의 무게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바이스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너는 진짜야.”

 

“그게 뭐 어쨌다고.”

 

“네가 내게 품었던 그 감정들은 진짜야. 내가 가짜 사람이라고 해도, 나를 누가 만들었다고 해도, 내가 네게 팔린 상품이라고 해도.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 네가 내게 진짜 감정을 줬잖아.”

 

바이스는 두 손을 모아 자기 가슴 위로 가져갔다.

 

“내 가짜 그릇이 텅 비어 있다는 게. 이렇게… 이렇게 아플 정도로.”

 

조종사는 바이스의 두 손을 붙잡고 기도하듯이 이마를 기댔다. 어깨가 떨렸다.

바이스는 두 손을 빼서 되려 조종사의 손을 감싸 쥐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확신에 찬 손길이었다.

 

“괜찮을 거야. 넌 잘할 수 있어. 여길 떠나서도 너는 여전히 진짜일 거야. 네 감정도.”

 

“그럼 너희는. 너흰 어떡해.”

 

“우리 걱정은 하지 마. 우리 장점은 그것뿐이잖아. 우리 시간은 멈춰 있다는 거. 난 영원히 여기 있을 거야. 영원히 너를 기다리면서. 네가 돌아와도 난 널 알아볼 수 없겠지만, 인사도… 안부도 물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 있을 거야.”

 

조종사는 고개를 들고 바이스를 보았다. 그녀의 호박색 눈을 보았다.

바이스의 말처럼 그녀는 영원할 것이다.

호박석에 갇힌 생명이 영원하듯이. 끝난 사랑에 영원성의 빛이 드리우듯이.

 

“너는 틀리지 않았어. 조종사. 여기에서 너는 진짜였어. 기억해줘. 나를 보러와 줘.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해도 꼭 보러와 줘…….”

 

그렇게 되뇌는 바이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조종사는 가슴에 놓은 건반을 두드렸다.

레레파♪레레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