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https://arca.live/b/arknights/57377983

1-2화 - https://arca.live/b/arknights/57492726

1-3화 - https://arca.live/b/arknights/57711735

1화 외전 - https://arca.live/b/arknights/57896660

2-1화 - https://arca.live/b/arknights/58580951
2-2화 - https://arca.live/b/arknights/58870871 

2화 외전 - https://arca.live/b/arknights/59395760

3-1화 - https://arca.live/b/arknights/60388786




다음날, 아침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의 생활을 바꾸지 않고서 하루가 바뀌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박사는 비록 밤에 조금 늦게 잤지만,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겠다는 본인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일찍 일어났다.


"네 시...되게 이른 시간이네."


사실 일찍 일어난 건 그냥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지만, 아무튼 그런거라고 합리화 한 박사는 평소대로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기 시작했고, 늘 그랬듯이 재빨리 마치고 나와서 옷을 입었다.

일찍 일어난 김에 뭘 할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박사는 이왕 이리된 거 로도스 갑판에 올라가서 산책이나 하기로 마음 먹고 문 밖으로 나갔다.

중간중간 지나가던 오퍼레이터들에게 인사도 하고, 로도스 아침 메뉴도 한 번 확인하면서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박사는 자신의 뒤를 누가 따라오고 있음을 알아챘다.


"...날 따라오는 건 혹시 누구야?"


대답할리는 없겠지만, 일단 말이라도 한 번 해볼까. 그렇게 박사는 조용한 복도에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박사의 예상대로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예상이 적중했음에 빙긋 웃으며 계단으로 향하는 문을 여는 박사의 시야가 순식간에 따스한 무언가로 인해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밀착하는 감촉과 함께 귓전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누구게?"


이런 이른 아침부터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칠 만한 사람은 누구지? 혼란스러워하는 박사의 감정을 감지했는지, 웃음소리와 함께 박사의 시야가 다시 빛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박사의 눈을 가리던 손은 이젠 허리로 가있었고, 그로 인해 박사가 뒤로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밑을 내려다 본 박사는 손을 본 순간 순식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혹시 아침 운동도 하는거였어?"

"응. 좋은 아침이다, 박사!"


며칠이나 같은 손을 봐왔는데 모를리가 없지...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박사는 손을 뻗어 자신의 허리에 감긴 팔을 풀어내고 뒤를 돌아봤고, 거기에는 어제와는 다른 트레이닝 복을 입은 백파이프가 빙긋빙긋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목소리도 낼 수 있구나, 난 순간적으로 누군지 몰랐어."

"엥? 너무하다, 박사. 그것도 빨리 못 알아채믄 되긋나?"

"하하, 평소와는 차이가 제법 크니까?"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는 박사와 그 뒤를 따라오면서 잡담을 하던 백파이프의 앞에 갑판으로 향하는 문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손잡이를 돌려서 열린 문 밖으로는 떠오르는 아침 태양과 백파이프처럼 아침 운동을 나왔는지 체육복 차림으로 뛰고 있는 실루엣들과, 박사처럼 산책하러 나왔는지 느긋하게 걷는 실루엣들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신선한 아침 공기는 다른 맛이 있구나, 그렇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박사의 왼쪽에서 백파이프는 보조를 맞춰 느릿느릿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침 운동을 하러 나왔는데 나한테 맞추면 좀 그렇지 않아?"


그렇게 걷기도 잠시, 혹시 아침 운동에 방해일까봐 걱정하던 박사는 옆에서 호흡을 조절하면서 뛰는 백파이프에게 말을 걸었고 백파이프는 손사레를 치며 대답했다.


"아이다, 박사. 원래 디게 빨리 뛰는 것 보단 천천히 뛰는 게 더 힘들다!"

"...그런가? 네가 상관없다면 그걸로 충분하긴 한데...그럼 나도 조금만 더 빨리 걸을게."

"괜찮다! 박사는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내는 그걸로 족하다."

"아니야, 이럴때는 서로가 서로한테 맞춰주는 거니까...나도 조금만 달릴게."


그렇게 박사는 조금씩 속도를 높이더니 가볍게 뛰기 시작했고, 그 옆을 백파이프가 바짝 붙어서 달렸다.

마음이 가는대로 몇 바퀴를 돌면서 주변의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들을 받던 둘이였지만, 막상 접근하는 간 큰 사람은 없었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걷는 박사의 옆에서 백파이프도 천천히 뛰면서 말했다.


"아 글구 보이까 이제 첸 햇아가 어시스턴트는 그냥 그라니로 고정하자고 했는데 괜찮나?"

"아, 그래 그거는 괜찮겠다. 내가 등록해놓을게."

"고맙사! 글구 아침 운동도 같이하믄 운동이 이마이 된다! 앞으로도 같이 하자."

"그럴까? 그런데 그러면 너무 피곤할 것 같기도 하고...생각은 해볼게."


그렇게 말하며 후드를 벗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는 박사를 보던 백파이프는 놀리듯이 박사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아직도 생각보다 약골이다. 글치?"

"너랑 비교하면 누구라도 약골 아닐까...앗!"


물론 백파이프는 평소보다 힘을 매우 적게 준다고 줬지만 들뜬 탓에 힘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는지 박사의 손에서 손수건이 미끄러져서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허둥지둥 손수건을 줍기 위해 팔을 뻗던 박사였지만, 그것보다 더 빠르게 백파이프가 손수건을 휙 낚아채서는 주머니에 집어 넣더니 뻗은 박사의 손을 잡고 말했다.


"흙 묻은건 더럽으니 이건 내가 빨아서 돌려주겠사."


그 모습을 본 주변의 시선이 순식간에 둘에게 쏠리고, 백파이프는 짖궃게 웃더니 박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주변에는 안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말했다.


"밤에, 또 보자. 박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순식간에 끝났다.

중간중간 멍 때리다가 도장을 두 번 찍는다던가, 운동을 하던 도중 시선을 마주칠때마다 백파이프가 싱긋 웃어준다던가, 회의 중에도 멍때려서 켈시에게서 오만가지 소리를 다 듣기까지.


"박사님, 오늘 많이 힘드신가요? 오늘은 조금 쉬셔도 될 것 같아용♥"


오죽하면 아미야가 박사의 어깨를 톡톡 두들겨주면서 평생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을 했을까.

어쨌든 하루 일과를 끝마치면 그녀가 찾아온다. 그것에 온 정신이 팔려버린 탓에 정신적으로 피곤해져버린 박사는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방으로 올라와서 방 정리를 시작했다.

청소기도 돌리고, 바닥을 닦고, 침실의 이불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그렇게 하다보니 순식간에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마지막으로 옷들을 세탁기에서 꺼내서 건조대에 널어놓은 박사는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탁자 위의 잡지를 아무거나 손에 들고 펼쳤다.

물론 잡지의 내용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은채, 건성건성 읽으면서 시계를 한 번씩 보던 박사였지만, 오늘의 정신적인 피곤함이 너무나도 큰 탓이였을까.

잡지를 어떻게든 기계적으로 넘기던 박사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것은 희미하게 숙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따스한 온기였다.



자신의 팔 안쪽에서 따스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지고 있다. 

그 온기를 놓치기 싫어서 팔에 조금 더 힘을 줘서 껴안으면 그 온기도 자신에게 밀착해온다.

조금 더 밀착하고 싶어서 온 몸으로 달라붙으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있는 힘껏 밀착해와서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만족스럽고도 행복한 순간.

그렇게 다시 한 번 잠에 빠져드는 박사의 귀에 요란한 알람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님! 쉬시믄 안대용♥! 박사님! 쉬시믄 안대용♥! 박사님! 쉬시믄 안대용♥! 박사님! 쉬시믄 안대용♥! 박사님! 쉬시믄 안대용♥!』


아미야가 '직접 녹음했다면서' 건네줬던 알람시계에서 단호하고도 달콤한 소리가 들려오고, 넌덜머리를 내며 억지로 눈을 뜨고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비쳐오는 햇빛을 가물거리는 시야로 응시하던 박사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저거 진짜 싫은데..."

"동감이다야, 박사. 내가 앞으로 매일 깨우러 올까?"


박사의 말에 옆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그 따스함을 다시 끌어안고 박사는 아직도 잠에 취한 채 몽롱한 정신 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래그래, 앞으로는 그냥 같이 살자."

"그거는 쪼매 이른 것 같기도 한데...그래두 내는 괜찮다."

"별 문제는 없지 않을까, 백파이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자각하는 순간, 박사의 머릿속에 번개가 치듯이 정신이 확 돌아왔다.

ㅡ아까부터 왼팔에서 느껴지는 이 무게감.

ㅡ그리고 따스한 온기.

ㅡ어제 내가 뭘 했더라.


순식간에 상황 판단을 끝낸 박사는 자신의 왼팔을 바라보았고, 거기에는 역시나 주황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다.

허둥지둥 일어나면서 이불을 걷은 박사는 자신이나 백파이프나 그냥 평범한 체육복을 입고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어나 그런 박사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백파이프는 오른손을 뻗더니, 박사의 뺨을 검지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말했다.


"잘 잤나, 박사? 자는 얼굴도 제법 귀여웠다."


1차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야만 한다. 그렇게 판단한 박사는 자신의 뺨을 콕콕 찌르던 백파이프의 손가락을 왼손으로 붙잡으며 물었다.


"어, 응. 잘 잤는데...네가 왜 여기에 있는거야?"


박사의 물음에 부끄럽다는 듯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백파이프는, 박사에게 잡힌 오른손을 살며시 빼내서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빗으며 대답했다.


"어제, 박사의 방에 오니까 박사가 소파에서 자고 있어가, 침실로 옮겼사. 그카니 박사가 내한테 딱 달라붙지 않드나. 하는 수 없이 같이 누웠지."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그렇게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자괴감에 고개를 숙인 박사의 고개 너머로 쿡쿡,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에잇,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밀쳐진 박사는 천장을 바라보며 대자로 누웠다.

이내 따스한 무게감이 박사의 온 몸을 덮더니, 천장을 보던 박사의 시야에 백파이프의 얼굴이 들어왔고 순식간에 뺨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자신이 백파이프에게 덮쳐진데다가 뺨에 키스를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박사를 뒤로 한 채, 그럼 아침을 준비할테니 씻고 오라는 백파이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아침은 백파이프의 보리죽이였고,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아침 식사를 둘이서 마친 뒤의 박사는 백파이프와 거의 딱 붙은 채 나란히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그렇게 가까이에서 함께 걷는다면 연인으로 보이겠지만, 그보다 더 한 스킨십이 기본이던 박사나 백파이프나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이야기를 하며 걷던 도중, 박사의 시야에 마침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던 분홍색 머리카락의 자라크 소녀와 은발의 쿠란타 소녀가 우연히 들어왔다.

어떻게든 말려야겠다고 생각한 박사는 태연하게 둘의 사이에 끼어들면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라벨, 그리고 플래티넘. 그동안의 파견 수고했어. 어제 돌아온 것 같은데...오늘도 혹시 싸우거나 그러는 건 아니지?"

""어머. 박사.""


둘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겹치고 허둥지둥 손에 든 가벼운(?) 냉병기들을 순식간에 감춘 두 명의 소녀는 박사의 양 옆에 바짝 붙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오늘도 멋지네요. 박사. 그러고보니, 오늘은 향수가 조금..."

"좋은 아침. 박사. 그러고보니 유원지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별로 비싼 건 아니니까 다음에 같이..."


경쟁하듯이 박사의 양 옆에서 말을 쏟아내던 둘은, 박사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자신들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백파이프를 그제서야 발견하고 순식간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응시했다.

찰나의 눈빛 교환이 이뤄지고,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백파이프에게서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둘은 더더욱 박사에게 달라붙기 시작했고, 질세라 백파이프도 박사에게 업히다시피 바짝 달라붙었다.

물론 박사 본인은 순식간에 우르수스 한복판의 추위와 시에스타의 더위가 동시에 느껴지는 수준의 분위기에 당황해서 얼어붙어버렸다.


"박사는, 일을 하러 가야하니 둘 다 놓그라."

"...내가 잠깐 박사의 곁을 비운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나봐...? 박사의 곁은 내 거야..."

"정말 재미없어. 너. 이름이 뭐였지?"


아까보다 훨씬 험악한 분위기가 점점 더 커져가고, 마치 자신의 목에 불겐지의 칼날이 겨눠진 듯한 공포를 느끼던 박사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주변을 한 차례 둘러봤으나, 부럽다는 듯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다가 쏜즈에게 걷어차여서 끌려가는 엘리시움이나, 렌즈의 위에 올라타서 인사도 채 마치기전에 사라지는 씬이나, 꽐라가 되서 *우르수스 욕설*을 내뱉는 지마와 있는 힘껏 끌고가는 이스티나 등등, 현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만 주변을 지나가고 있었다.

임계점을 넘으면 분명 냉병기가 꺼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박사가 무언가를 어떻게든 하려던 찰나, 뒤에서 구두 소리와 함께 예의바르면서도 박사의 기준에서 듬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무슨 상황인가, 맹우여."

"실버애쉬!"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실버애쉬가 오자 하는 수 없다는 듯 떨어진 그라벨과 플래티넘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백파이프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고, 걱정되서 말리려던 박사에게 괜찮다, 내사 다녀오겠다.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백파이프.

그리고 목숨(?)을 건진 박사는 오랜만에 만났으니 같이 대화를 하자는 실버애쉬의 제안에 로도스 아일랜드의 카페로 그를 안내했고,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금방 나온 음료를 가지고 마침 빈 개인실에 들어갔다.


"후...덕분에 살았어, 실버애쉬."

"네가 아무래도 조금 귀찮은 일에 엮인 것 같으니, 당연히 도와야하지 않겠나. '맹우'여."


문을 닫고 앉자마자 박사는 실버애쉬에게 감사를 표했고, 마주 앉은 실버애쉬도 맹우라는 말에 유독 강세를 주며 태연하게 감사에 응하더니,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모금 마시고, 호오...하고 가볍게 감탄을 내비친 실버애쉬는 잔을 내려놓더니 팔짱을 끼고 박사를 응시하며 말했다.


"장기간 출장으로 내가 자리를 비운 틈에 이런 편의시설도 생겼군. 모쪼록 리더는 직원들의 복지 수준 향상에 신경써야하지."

"그렇지. 나도 생각해보니까 이런 카페 같은 게 하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저번 달부터 설치한거야."

"그런가...그나저나, 맹우여. 아까 그 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나의 도움이 필요한가?"


다시 한 번 잔을 들고 커피를 마신 실버애쉬는 아까와는 달리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원한다면 그 셋 정도는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 오퍼레이터 그라벨, 플래티넘, 백파이프였나."

"아, 아니. 괜찮아. 별 것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손사레를 치면서 말하는 박사의 눈을 실버애쉬는 예리하게 꿰뚫어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평소의 침착한 얼굴로 돌아가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했더니, 엔야와 엔시아보다 선수를 쳐버린건가."

"응? 아까 뭐라고 했어?"

"아, 아니다. 맹우여.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그나저나 내가 없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만...그동안 어떻게 있었나 이야기 해주지 않겠나?"

"아. 그래,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나..."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몫인 우유를 마시며 박사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중간중간 호오, 음, 그런건가, 그렇게 호응해주는 실버애쉬에게 동아리와 관련된 일들을 설명하니, 어느새 둘의 잔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운동중이고, 백파이프가 도와주고 있어."

"...분명 그녀 혼자서는 생각하지 않았을텐데, 혹시 누가 네게 말해주었는지 알 수 있나."

"어, 아까 말 안했나? 첸 팀장님...아니 첸이 그랬어."

"...첸 훼이지에..."


몇 번 곱씹듯 실버애쉬는 이름을 중얼거리더니, 박사의 팔목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 기기는 제법 신기하군. 나에게 잠시 보여줄 수 있겠나?"

"어? 뭐 상관은 없는데...자, 여기."


의아해하면서도 박사가 풀어서 건넨 기기를 몇 번 이리저리 보던 실버애쉬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박사에게 돌려줬다.

박사가 기기를 팔에 차려던 찰나, 박사의 주머니에서 통신기가 울렸고, 괜찮다는 듯 따스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실버애쉬를 보며 박사는 통신기를 꺼내서 귀에 가져다댔다.


"어, 응. 박사입니다...훈련실이? 어, 갈게."


칼로리 측정기를 팔에 찰 틈도 없이 통신기와 함께 주머니에 넣으며 급한 일이 생겨서 미안하지만 다음에 봐, 그렇게 말한 박사는 순식간에 따스한 표정이 사라지면서 통신기를 여러 개 꺼내들던 실버애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재빨리 훈련실을 향해 뛰쳐나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로도스 아일랜드의 훈련실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무척이나 튼튼한 편이다.

클로저가 자신있게 바병, 아니 범고래가 와도 괜찮을 거라고 말했던 그 훈련실은 지금, 박사의 시야에서 폐허가 되기 일보직전의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입을 떡 벌리고 주변을 둘러보던 중, 바로 옆 교관실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고개를 빼꼼 내민 박사의 눈에 보인 것은 옷의 이곳저곳이 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서로를 씩씩거리면서 보는 플래티넘과 그라벨, 백파이프의 머리에 불벼락 같은 잔소리가 떨어지기 시작한 모습이였다.


"훈련은 좋은 것이 맞지만, 이정도로 서로를 죽이려고 할 정도로 훈련한다면 오히려 독이라는 것을 모르나! 내가 볼리바르에 있을때도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당신들에게는 채찍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한데, 특히 은발 아가씨. 개인적인 원한은 아무튼 없지만."


무릎을 꿇고 앉은 셋의 앞에선, 검은 머리카락의 페로족 교관 도베르만, 그리고 밝은 금발의 쿠란타 교관 위슬래시가 있었다.

한참 설교를 하던 도중, 박사가 온 것을 눈치 챈 위슬래시는 도베르만에게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사에게 다가가서 인사했다.

한 편, 그런 둘을 보던 셋은 도베르만의 호통에 다시 서로를 보며 기싸움을 시작했다.


"안녕, 박사...이걸 어떻게...음...여튼 흉한 광경을 보여줘서 미안해."

"아니, 그건 괜찮은데, 일단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까?"


그렇게 묻는 박사에게 위슬래시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쟤네들, 훈련이 좀 필요하다고 하더니...보다시피 훈련실을 좀 많이 망가뜨렸네."

"...몸은 다들 괜찮고?"

"보다시피 전부 멀쩡해...훈련실은 안 멀쩡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기기들은 다 무사해서 그나마 다행이지...외관만 수리하면 괜찮을 것 같아."

"그럼 다행이네...휴, 나는 또 무언가 일이 생겼을까 싶어서..."

"일이라면 일이지, 저기 도베르만 교관, 많이 화났거든."


한참 설교를 하는 도베르만을 보며 위슬래시는 박사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솔직히...쟤 설교 시작하면 엄청나다니까. 완전...어휴..."


위슬래시와 박사가 가까이 붙는 모습을 눈치채자마자 설교를 듣던 셋의 눈에서는 다시 한 번 불꽃이 일어났고, 그것을 캐치한 도베르만은 셋의 머리를 한 대씩 주먹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어디에 한 눈을 파나! 안 되겠군, 너희가 이 훈련실을 다 고치도록 해라! 내가 지켜보고 있을거고, 박사의 얼굴에 먹칠하기 싫으면 얌전히 하도록!"

"""하아?"""

"무슨 하아냐! 빨리 시작하도록 해라! 너희가 밖에서 어떤 것을 하든, 여기서는 내가 관리자며 책임자며 감독이다! 당장 해라!"


씨익씨익 거리면서 서로를 노려보던 셋은 도베르만의 호통에 하는 수 없이 뭐라 중얼거리며 자재들을 찾아 밖으로 나가더니, 순식간에 한 가득 자재를 얻어와서 열심히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위슬래시와 박사에게 다가온 도베르만은 그녀 특유의 딱딱한 어조로 손에 쥔 채찍을 허리에 차며 말했다.


"박사, 보다시피...일이 이렇게 되었다. 미안하지만 그녀들은 당분간 내가 데리고 있도록 하지."

"어...응. 괜찮아. 그보다...자세한 사정이 어떻게 된 건지 혹시 알 수 있을까?"

"처음에는 단순히 훈련이라길래 내가 참관하는 조건에서 좀 보기로 했었지. 그런데..."


한숨을 내쉰 도베르만은 팔짱을 끼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서로 말싸움을 하더니, 내 제지도 무시하고 신나게 싸우더군...아마 너와 관련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나도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다. 동아리...또 어쩌구 저쩌구 하던데."

"아, 그래. 맞아. 도둑고양이? 박사 혹시...음...어디 이렇게 하면..."


도베르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슬래시가 끼어들어서 말하더니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박사에게 다시 한 번 가까이 다가갔고, 한창 벽에 무언가를 바르던 셋의 눈길이 순식간에 쏠리는 것을 보고 그렇게 되었구나, 하면서 재밌다는 듯 웃으며 다시 떨어졌다.


"역시 사랑 싸움이였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사랑 싸움? 흠. 그런 걸 할거면 차라리 그냥 나가서 싸우던가..."

"아니지,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것도..."


한동안 박사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흥미진진하다는 듯 말하던 도베르만과 위슬래시는 우두커니 서있던 박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가서 일을 보라는 듯 손짓을 했고 이내 박사는 밖으로 나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뭔가 점점 뇌절 같아지는 기분이지만 어쨌든 또 왔다

피드백은 언제든지 환영

다음화는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