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카운터사이드 단편



 건틀렛은 대정화전쟁 이후 관리국, 특히나 그라운드 원에 모인 태스크포스으 교류회를 겸하여, 관리국의 주최로 이루어진 것이며⋯⋯.


음성이 이어진다. 관리실패의 참상을 묘사한 디오마라 너머로 손을 잡은 남녀가 걸어간다. 버튼을 누르면 안내하는 음성이 다시 이 디오라마에 대한 설명을 읊는다. 처음부터.

여자는 다시 한번 누른다. 그 손짓. 움직임에 따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행성이 찰칵, 찰칵. 계속해서 따라오며 이 항성의 플레어는 어디인가. 어디가 흑점인가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남자는 눈앞의 상황이 싫었다. 정도라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생각과 달리 행성은 지치지도 않는지 항성을 따른다. 여자는 그것조차 당연히 여기고 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가 구태여 입을 열지 않기에, 남자도 말하지 않는다. 만약, 남자의 사원들이 이런 꼴을 겪고 있다면 남자는 물론 상대를 봐가며 방식을 고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대처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봐요, 내려와야만 볼 수 있는 것도 있죠?”


지금도, 찰칵이는 셔터음. 그 빛깔을 조명 삼아 순수하게 웃고 있는 여자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싫어도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었다. 자신이 감독에서 내려오는 그 순간. 이 세계의 한 인간이 되는 그 순간. 마주해야 하는 것들을.


이것이 그 편린, 일부분이라는 것도.


디오라마는, 축소 모형을 통해 그 순간을 재현하는 것.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과거이고, 누군가에게는 내버린 현실이고, 누군가에게는 구태여 쓰다듬지 않은, 혹은 못 했던 일부분이다. 

남자는 이 순간을 목도할 때마다 목이 미어져 온다. 죽어 나가는 병사. 전투기를 내리꽂는 침식체. 사지가 잘린 카운터. 지휘하고 있는 피규어. 폭발하는 탱크. 장렬한 전투의 한 장면은 누군가가 초래한 결과물이다. 그렇기에, 기꺼이 무시하고 있었던 인간의 감성이 폭발하듯 솟구친다. 


⸻⸻⸻⸻가라사대 너로 인해 말미암았고

너로 인해 기꺼이 말미암았으니

이 어찌 너의 죄가 아니라 할지인데


남자의 탓은 아니다. 오롯이 남자의 결과물은 아니다. 남자는 알고 있다. 



⸻⸻⸻⸻딴 생각을 하고 있군요.



표정이 좋지 않은 남자의 팔을 품에 안아 들며, 여자가 말한다. 세계의 이야기다. 건틀렛 박물관 B 관은 일종의 현대 역사박물관을 겸하고 있다. 이 현대 2020년의 비극은 분명히 누구 하나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알려져 있고,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가 선택한 결과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가령 그저 부풀어 오른,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우연히 남자가 물방울을 넣자 터져버렸다는 억울함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남자가 터트린 것은 사실이다. 그 행위에 충분한 의도를 담지 않았어도 사실로써 사람들에게 흘러나오면, 그건 남자의 작품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다. 설령 그게 자신이 하지 않았어도.


“⋯⋯아니, 묘하게. 코스가 겹친다고 생각했을 뿐이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고 있으니까요.”

여자가 이끄는 데이트 코스는 남자에게 있어 데자뷰를 느끼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루트는 일전, 남자의 사원이 휴식기 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을 따라가고 있다.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리 공공연하지 않은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여자다. 궁금한 것은 그 의도. 그 또한 남자는 대략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물음은 입으로 소리 내 확인했을 때.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한 과정이 존재했을 때 비로소 가치가 발생한다. 공상만으로는 철학을 할 수 없고, 실험 없이는 논증할 수 없다.


“⸻마치, 스토커 같군.”
“어머.”


여자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서, 여유롭게 웃는다. 그것만으로도 한폭의 그림. 사건의 지평선. 더 들여다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빛조차도 먹어 치울 순간. 그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



제가 당신의 추억을 덮어씌우는 코스를 의도했다?



“이런 미인이 상대니,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라는 것도 일리 있지 않나?”
“재미있네요.”


상대방의 추억과 동일한 공간에, 자신을 겹쳐서 이미 지나간 시간을 덮어씌운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마저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싶다. 이 행위가 상대방에게도 호의적으로 다가온다면 무척이나 매력적인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까지 함께하길 바란다라는 귀엽게도 볼 수 있을 면모.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호의적일 때나 성립하는 이야기. 어머니의 사랑은 숭고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동일한 것은 기분 나쁠지도 모른다. 남자는 그러기에 스토커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스토커에게 시달릴 것 같은 여자에게.


“⸻그래도 의외로군. 자네도 건틀렛에 흥미가 있나?”


남자의 팔을 끌고 계속해서 전시관을 걸어가는 여자. 둘은 별 무리를 이끌고, 계속해서 걸어 나간다.

그것 자체가 무언가의 쇼인 것처럼.


“아뇨, 전혀요. 아시겠지만, 샤레이드의 건틀렛은 허상이죠.”

가짜라며, 여자가 돌아본다. 그렇게 표현한 이유를 남자도 대강은 이해하고 있다. 로비가 일상. 얼마든지 가진 것에 의해 바뀌는 결과. 그건 건틀렛을 넘어 이 도시, 샤레이드 자체가 돈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 그러니 허상.


“전혀 몰입하지 못하는 연기자의 딱딱한 발음과도 같죠. 자기 연인이 살해당했는데 그냥 비명을 내지르기만 하는⸻ 그냥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한, 조립부품 같은 그런 부류의 허상이요. ”
“그러니 관심은 없다? 하하, 이것 참.”


그 말을 비틀어 본다면, 남자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올 리가 없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남자는 그 부담스러운 의도에 쑥스러운지 귀밑을 검지로 긁어내린다.


“기쁘지만, 저기에 갤러리가 듣고 있을 수도 있는데?”

“비하하는 게 아닙니다.”

여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에 든 우산을 지면에 내려놓는다. 탁, 하고 전시관 타일을 치는 경쾌한 소리. 어느 회장의 의사봉처럼 정적과 주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급 요리보다 패스트푸드가 못 미친다고 해서 둘 사이의 절대적인 우열이 있지는 않죠. 소재는 나쁘지 않아요. 예로 든 기계적인 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역이 아닌 엑스트라에는 감정도, 표현의 의도도 필요 없습니다. 배경으로써 거기에 존재하기 위한 거니까요. 일종의 기계적인 소품으로서 기능하면 됩니다.”
“⸻그럼 자네의 말은, 소재의 배치가 잘못되었다는 건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무릇, 작품이라는 것은 의도치 않아도 표현의 영역입니다. 혼자만의 망상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면 다른 누가 볼 수도 있기 때문이죠. 반면, 보는 인간은 불명확한 것을 싫어하기에, 그것을 판단하려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재단하려 들죠.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그 사이를 잇는 것은 명백한 의도와 표현법의 연마.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면, 그 의도만큼은 제대로 담아내야 하죠.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다, 한마디 거든다.


“순수예술적인 관점이로군. 순수 창작이 아니라.”
“표현과 감상. 제가 허상이라고 한 것은, 감상자가 어떻게 느끼든 이미 건틀렛이라는 의도 자체는 잘 굴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틀렛은 분명히, 관리국이 주관하는 태스크포스끼리의 교류회. 하지만 이미 돈벌이 수단과 광고 매대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여자는 의도 자체는 잘 굴러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허상. 비친 것. 여자는 그 안의 숨은 의도를 알고 있다는 양, 웃는다.



당신이 한 것과 닮았죠. 다른 사람이 겉면을 보고 왈가왈부하도록 내버려 두고, 진실한 의도는 명백히 관철하는 것. 배는 흔들려도, 절대 침몰하지는 않는 테세우스.



“⸻거기까지만 하지. 이 이상은 서로 곤란해질 것 같군.”
“불이 붙기 시작했는데, 덮으려 하시네요. 하지만 좋아요. 아직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시의적절한 파트에 소재를 배치하는 게 맞겠죠.”
“그게 아니라, 나는 예술에 관해서는 영 아는 게 없네. 자네만 떠들어서야⸻”


남자가 붙들린 팔을 여자에게서 떼어낸다. 그런 뒤에 손을 건넨다. 신사처럼 정중하게 내민 오른손에 여자가 응한다.


“어디 데이트라고 할 수 있겠나?”


별 무리를 이끌고, 쌍성이 우주를 유영하듯 걸어 나간다.

멀리서 본다면, 꼬리를 늘어트린 혜성 두줄기처럼.




***




 둘의 다음 경유지는 정해져 있다. 이제는 남자도 알고, 여자도 안다. 아포칼립스의 시작. 지상으로 이어지는 출입구만 500개가 넘는 샤레이드 최대의 지하 쇼핑몰. 스트리트 몰 브랑겔.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반발력으로 밀어내듯이, 걸어 나가는 남자와 여자. 아테네 학당의 중앙을 걸어 나오는 두 사람처럼 남자와 여자 사이에 풍경으로써 일렁인다. 말을 붙여 보려는 이도, 묘한 아우라에 떠밀리듯 놓쳐버린다. 혜성과 같은 분위기였다. 앗차, 하는 사이 금세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리는 그런 것.


한순간이기에 차마 붙잡을 수 없는 것. 그러니 우아하게 두 혜성은 몰을 가로지른다. 남자와 여자를 향해 번쩍이는 플래시. 이래서야 쇼 윈도의 강렬한 조명도 무용지물. 팔아야 할 아이템보다 구경꾼이 더 빛이 나고 있다. 여자는 남자 옆에서 찬찬히 걸으며, 곁눈질로 마네킹에 걸린 의상을 훑고 있다. 


“자네도 이런 곳에서 쇼핑을 하나?”
“그건 왜요?”

“스몰토크일세. 딱히 사생활을 캐려는 건 아니니 안심하게.”



⸻농담도, 데이트라고 말한 순간부터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겠다는 것이 전제가 아닌가요?

추론이 아니라.



남자는 가볍게 팔짱을 끼며, 여자를 내려다본다.


“거리감이라는 게 있는 거지. 선을 넘은 이후에 역순으로 가는 관계도 좋지만,

이런 건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하네. 나는 지긋이 단계를 밟아 나가는 걸 선호한다네.”

“고전파로군요. 빌드업에 꽤 많은 시간이 들겠어요. 표현 또한 섬세해야 할 거구요.”

여자는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고, 붙잡은 손을 이끌며 계속 걷는다. 시선은 쇼 윈도를 계속해서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있다. 어느 브랜드의 여성복 라인이 끝나고, 그에 맞는 남성복 라인이 이어진다. 이번 테마는 복고. 레트로. 고전을 재해석한 부류의 것들. 데어 스토커나, 혹은 망토 달린 코트. 인버네스케이프류, 프록코트, 톱햇. 현대 일상복으로는 좀 과하다 싶은 정도의 격식을, 재구성하는 형태로 본래의 멋을 유지한 채 일상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한 라인업.


“남성복에도 관심이 있나?”
“모든 일의 시작, 기초는 관찰이죠. 보기는 하는데,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고

관심이 없다고 흘리기엔 아쉽죠. 예를 들면.”

여자가 남자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오른손을 잡고 있는 남자의 배, 그보다는 조금 위를 향해가다 멈춘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클래식, 검은 슈트. 얼핏 보면 특색이 없어 보이지만, 원단은 매우 좋은 양모고 염색도 차분하게 잘 먹었네요. 거기에 과하지도,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는 것도 아닌 클래식한 골드 넥타이핀. 포인트로는 더할 나위 없죠. 커스텀 오더인가요?”


남자의 복장을 파헤치듯 눈알이 고상하게 전체를 핥아내고서 얼굴에 이른다. 


“아쉽지만, 난 패션에 관해서는 잘 모르네. 그저 누군가를 만날 때 격식이 없어 보이지 않게끔 꾸밀 뿐이지.”

“⸻그런가요. 하긴, 그렇게 해도 되겠네요. 옥석도 닦아야 빛이 난다지만, 보석은 애초에 가공 전에도 명백히 차이가 나기에 보석인 거죠.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거니까요. 다만⋯⋯.”



그러면, 서사적 연기밖에 할 수 없겠네요.



“난 연기자가 아니니 말일세. 그리고,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어떤 것이든 필요한 곳에 배치되기만 하면 문제없다고.”


여자가 가볍게 웃으며, 앞서 나간다. 붙들린 손에 의해 남자도 따른다. 



⸻그렇죠. 

역할의 ‘분노’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몰입, 자신의 분노라는 감정을 불러와 거기에 집중하고 그 감정에 푹 빠져들어 책상을 차는 형태. 그리고, 일단 책상을 차면 ‘분노’가 유발되는 형태. 둘 다 틀린 건 아니니까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식으로 들리네만.”


미학적인 표현법의 차이죠. 배역의 감정에 몰입해서,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훌륭하냐.

아니면 자신을 하나의 예술적 도구, 벼린 칼처럼 만들어 보는 이에게 표현하는 것이 훌륭하냐.

정답은 없죠. 취향, 가치관의 차이일 뿐.



“자네의 특기는 전자 쪽이 아니었나?”

“극(Play)이 아니라, 배우(Player) 쪽의 특기죠. 재즈를 잘 연주하는 연주자가 대중적인 곡을 작곡할 때 재즈만을 쓰지 않는 것처럼요. 큰 범주에서는 우열은 없으니까.”

“크게 본다면, 하나의 무기니까?”

“네, 이해가 빠르시네요.”


여자가 돌아본다. 어느새 왼손에 들려있던 우산은 그녀의 팔에 걸려 있고, 손에 들린 것은 두 종류의 모자.

하나는 현대적으로 리파인한 톱햇. 영국 신사의 그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데어 스토커. 사냥용 모자. 여자가 톱햇을 남자의 머리에 올린다. 


“그다지, 신사 같지는 않네요.”

“내겐 좀 부담스럽군.”

“네, 뒷조사하시기나 하고, 정말 신사답지 않아서 어울리지 않네요.”


여자와 남자는 오늘 처음 만났다. 일방적으로 서로를 알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남자는 그날, 회장에서 처음 여자의 존재를 인식했다. 여자의 특기가 무엇이고, 어떤 사람인지까지는 단순한 배경만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알아봤듯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둘은 신중하게, 이름 없는 가면무도회를 추고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


여자가 했을 점원에게 건네고, 이번에는 데어 스토커.



⸻불가능한 것을 전부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말이 되지 않더라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전부 다 안 어울리네요.



“모자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눈앞에서 미인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좀 침울해지는군.”


남자의 말에 여자가 손에 든 것을 내린다. 뒤로 뻗자, 점원이 재빠르게 회수해간다. 

그리고 빈손이 남자의 재킷, 카라에 오른다. 살짝, 헝클어진 라인을 고르게 피는 그 움직임에

조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표현법이 안 좋았네요. 원판 그대로가 가장 매력적인 원석이에요. 가공하면 멋이 죽는 타입이네요 당신은. 잘 쓰려면 까다로울 것 같네요.”

“⸻그건 데이트하는 상대방의 입장인가? 아니면 감독의 입장인가?”


우아하게, 여자의 입꼬리가 오른다. 검은 장갑끼리의 얽힘에 힘이 들어간다. 여자의 장갑 쪽이 더 칠흑처럼 검다.



그건, 직접 추리 해보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아까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지긋이 단계를 밟아 나가는 쪽이 취향이라고.

제 속 마음을 전부 알려주면, 클라이맥스가 의미 없어져 버릴 테니까요.



남자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목젖을 덮듯이, 목을 감싸 안은 뒤 살짝, 힘을 준다. 그런 뒤에 입가에 띄우는 

선은 명쾌하게 끝점을 날린 명필의 흔적. 슬슬, 별 무리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 쪽에게도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종막. 마지막 행적은 정해져 있다. 여자가 밝혔듯이, 남자도 알고 있다. 샤레이드의 대관람차. 규모만으로는 세계 최대. 런던의 런던 아이와 같이, 360도를 볼 수 있는 형태로 본래라면 여러 사람이 한 차량에 탑승할 수 있는 구조. 하지만, 여자가 갤러리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운 작품의 구상 때문이니, 잡음이 섞이는 것은 싫다고. 라일락과 마젠타 사이를 줄타기하는 그 눈동자에, 그 누구도 반론할 수 없었다. 가쉽을 목적으로 쫓아온 이들마저도 남자와 여자. 둘이 관람차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지금 가진 욕망을 깨닫고 말았다. 돈벌이보다는, 저 그림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 저 그림의 방점은 클라이맥스를 보지 않는 것에 있다고. 모든 일이 끝나고 내려온 뒤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그러니, 방해하지 않는다. 이 의도적인 공백을 위해, 굳이 모여드는 자신들을 방치했던 것일 거라 짐작하며 물러난다. 여기서부터 별 무리, 부스러기들은 따라 올 수 없다. 끝없는 우주를 계속해서 얽히며 여행을 떠난, 모험 혜성의 두줄기의 다음이다. 


서서히, 고도를 올라가며 좌석에 마주 앉은 남자와 여자가 멀어져간다. 이제 밑에서는 위치에 따라 어느 쪽은 남자밖에 보이지 않고, 어느 쪽은 여자밖에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관람차가 둘을 데리고 하늘을 향해 떠오르고 있었다. 완만한 기계음과 조금씩 떨리는 차체. 저녁노을이 져가는 샤레이드의 바깥 풍경. 라이트가 들기 시작하는 무렵에 골든 옐로우가 새빨간 관람차를 점점 묽게 하고 있다. 여자의 눈은 촬영감독처럼 서서히 발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하는 노을을 저공 비행하듯 훑은 뒤에, 남자에게 옮긴다. 곧 매직 아워가 찾아올 테니. 최고의 색감이 나오게 될 것이다.


“자, 그럼 말해주겠나? 왜 이런 짓을 했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타이를 고치며 입을 연다.

이런 짓. 오늘 있었던 일련의 일들, 선뜻 데이트하자고 한 것에 대해.

혹은 그 너머의 무언가. 남자는 늘 그렇듯, 몇 가지 짐작하고 있기는 하다.

정답에 가까운 것을 내놓고, 반응과 소거법으로 다가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 여자에게는 그 방식은 해가 될 것 같아 참고 있을 뿐.


“서두르시네요. 이제 막, 노을이 져가는데요.”



⸻⸻그다지도 이 데이트를 빨리 끝내고 싶으신 건가요?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선의 일이라면 이다음을 어떻게 할지가 궁금해서 그러네.

저녁 식사와 단출히 술을 마시는 일정도 괜찮지. 그러려면,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할 게 아닌가?”

“그런 것치고는 여유로워 보이는데요? 더한 걸 기대하셨나요?”

“아까도 말했지만, 순간의 기세로 자네와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자네가 말한 대로 어디까지나 취향, 기호니까. 정답은 없지.”


여자가 그 말에 손에 쥔 우산은 좌석에 걸쳐 놓는다. 다리를 꼬지만, 양손은 가지런히 무릎 위. 아찔하게 늘어나며, 색이 살짝 옅어진 스타킹의 움직임. 하지만 곧게 서 있는 상체가 독특한 고상함을 자아내고 있다. 기가 막힌 밸런스로 일부분의 에로티시즘을 고혹적인 영역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 남자를 향해 뻗어진 시선은 지금 막, 고도의 차이로 차체를 완전히 관통하는 일몰보다 더 강하게 남자를 집어삼킨다. 남자를 눈 안에 가두고서 자신도 똑같이 본디지처럼 갇힌다.



⸻배우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남자의 눈동자에 갇힌 여자가 입을 연다. 어떻게 본다면 갇힌 게 아니라 남자의 눈동자를 전부 자신으로 채웠다고 느껴질 정도의 묘한 아우라.



당신은 감독에서 배우의 자리에 내려왔다고.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건지를 충분히 고찰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군. 생각해보겠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닐세.”


고도가 노을을 밀어낸다. 남자는 자신을 덮는 노을에서 벗어나고, 위태로운 석양빛은 사선으로 여자 쪽만을 적시고 있다.


“왜? 라는 근저가 궁금하네. 자네가 내게 흥미가 있는 건 알겠어. 무엇을 말하려 하는 건지도 이해하네.

하지만, 그 감정의 발로가 알고 싶네. 자네 같은 미인의 호의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받는 것이 예의겠지만, 아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표현은, 명백한 의도가 없으면 허상일 뿐이라고.”

“기계적인 하나의 소품일 뿐이라고.”


“⸻⸻⸻, 그렇죠.”


여자의 말에 남자가 끄덕인다. 노을은 고도에 떠밀려, 이제는 여자의 발끝까지 몰린다. 저 멀리, 다른 관람차의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여자의 뒷편을 후광처럼 비추고 있다. 이렇게나 해가 애절하게 쏟아내는 붉음에도 그녀의 머리칼은 본래의 광채를 잃지 않고, 은은히 빛을 내고 있다. 남자를 향해.


“이야기를, 큰 스케일로 짜다 보면 혼자서는 불가능한 시점이 꽤 있죠. 아무리 뛰어난 배우도 결국 그 역할을 연기할 이야기라는 토대가 필요하고, 아무리 뛰어난 감독도 자신의 생각한 컷을 담을 촬영감독이 필요해요. 누구의 공이 더 크냐의 문제보다는 상호보완, 나쁘게 말하면 누군가의 토대에 기생하는 형태라고 해야 할까요. 표현을 정정할게요. 이용이라고 하죠.”


이윽고, 노을은 여자를 그렇게나 내리쬐었음에도 물들이지 못하고 튕겨 나간다.


“저는 각본가이기 이전에, 배우였습니다. 감독에서 배우가 된 당신과는 닮았지만, 순서가 반대죠. 그렇기에 당신을 ‘관찰’ 하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은 여자가 말한 ‘건틀렛’과 닮았다. 허상. 표면적 이유로 잘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알 바 아니다. 라고, 위장한 것. 수면 아래의 일부로 숨겨 둔 진짜 의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의도. 그것의 정체는 모르지만, 일부분에 불과한⸻한 측면이라는 것은 눈치챘다.


“그렇군. 그래서? 알아낸 것이 좀 있나? 그렇담, 내게도 들려 줄 수 있겠나?”


여자가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말했잖아요? 단계는 차근차근, 조금씩 다가가고 싶다고?



“또 그거로군.”

“네.”

“그럼, 아무런 수확이 없었으니⸻”


“이 데이트는 말 그대로 데이트였겠군.”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수확이 없지는 않았죠. 하나의 작품에서 끝나는 형태가 아닌 연작이라는 측면에서, 당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커다란 시리즈 내의 하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얼마나, 작은 알갱이에 모든 것을 걸었을까요. 그때마다 새로운 배역(몸)을 준비하고, 바뀐 테마(방법)에 맞춰서 시리즈의 기조(대의)만은 잃지 않고 변주해야 했으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전, 당신을 깊이 존중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존중 해줬다고 하니 고맙네. 하지만, 존중이라는 것은⋯⋯.”


남자가 오른쪽 귀밑을 긁는다. 아까와는 달리,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행동했다.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러니, 다음번에는⸻”


⸻⸻이 모든 것이, 불쾌한 연극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건가요?


이제는 관람차의 고도가 중반을 넘어섰다. 이리저리 산란하며, 세상을 물들이던 주황이,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음, 이렇게 나도 표현을 바꾸지. 자네가 오늘 보인 호의마저 연기해 버렸다고 한다면 나는 의심할 수밖에 없네. 곱게 보이지 않지.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은 자신에게 보인 모습이 자신만의 것이기를 원하지. 다른 누군가에게 해줬던 것의 되풀이를 원하지 않아. 더 깊게 말하자면, 행동의 원천. 감정의 발로가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주길 바란다네.”


이건 ‘그’의 것이다. 라고 남자는 생각하면서도, 흠칫하고 놀란다. ‘그’라는 건 누구지? 하지만, 자신을 향한 행동이 오롯이 남자의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슬금슬금 깨닫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 여자의 행동이 고마우면서도 소름이 끼친다⋯⋯라고.


“거짓, 허상, 연기이기에 오늘 이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렇지는 않네.”
“거짓말을 왜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나?”


여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여자는 거짓말 따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거짓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무수히 많은 거짓을 또 준비해야 하지. 이윽고 그 거짓말에 짓눌려 파멸하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단 한 번, 단 하나의 거짓말을 지키는 건 가능하지.”

남자는 눈을 감는다. 눈 덮인 설원 위에서의 그 녹슬고, 망가졌음에도, 구부러졌어도 끝까지 관철해낸 거짓말과 그녀를 인정한 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남자도. 그 연장선에 서서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왔던 일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들키지 않고 연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죽을 때까지 숨긴다면, 그건 이미 그 사람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네. 소아성애자의 욕구가 있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 욕망을 실현하지 않고 버텨냈다면 그건 역겨운 성벽을 가진 변태가 아니라, 피눈물로 자신의 이성을 연마한⸻⸻ 존경해 마지않을 수 없는 하나의 인간이라고 볼 테니.”

“그러니, 할 거면 제대로 하라는 말이로군요. 로맨티스트네요. 당신은.”


여자는 웃는다. 하지만, 그건 오늘 하루 동안에 계속해서 보여줬던 은은한, 고상한 부류의 무언가가 아니다. 싸늘하게, 황혼이 식어가는 것보다 차갑게, 벼린 칼로 목젖 아래를, 쇄골을 뽑아내려는 것처럼 섬뜩한 부류.


“⸻⸻자네가 말한 대로 나는 이제, 일개 배우일세.”



그 근저가, 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해도?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미지의 영역일세.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니. 그러니⸻, 나는⋯⋯”


남자가 혀를 차고, 짧게 숨을 내쉰다. 대화라는 수단과 대면이라는 상황을 거친 이상에야 일방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다. 여자가 남자를 본 만큼, 남자도 여자를 봤다. 둘 다, 정확한 본질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말라는 과정을 통해 전혀 뜬금없지만, 자신 자신을 정리할 수 있다. 둘은 판에 박힌 캐릭터가 아니다. 현실을 살아가던가, 과거를 살아가던가, 그런데도 숨을 쉬는 시곗바늘의 노예. 생명. 다시 시작할 수는 있어도 뒤로 뛰어갈 수는 없는 절대불변의 섭리에서 태어난 물고기. 물고기가 어떻게 태어난 바다를 뒤집을 수 있겠는가.


“한 가지만 말해두겠네. 나는 자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네. 조사를 해봤지만, 그리 깊이 알지는 못해. 설사 여기서 더 자네를 알게 되더라도, 사람은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네. 그래야만 차이가 생겨나니까. 

그러니, 한 가지.”


“내 소중한 것들을 해하려 들지 말게.”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서글픈 사람. 당신은 그렇게, 이야기에서 내려왔군요. 그리고⸻

일개 배우가 가지기엔 너무 큰 범주의 것을 아직도 가지고 계시네요. 저처럼요.

반대지만.



“그러면, 꽤, 발버둥 쳐야 할 겁니다.”


여자의 말에 남자가 끄덕인다. 가벼운 웃음과 함께, 바깥은 어수룩한 푸르름이 찾아들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고생하고 있지. 자네도 안 그런가?”



⸻네, 정말. 지독하게도,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표하는 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해내는 타입이죠.

당신도 그렇고, 저도.”

“⋯⋯그럴지도 모르겠군. 슬슬, 여기가 제일 높은 곳인데 괜찮겠나?”


남자가 창밖으로 엄지를 가리킨다.


“저는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데이트 상대에게 몰입하는 편이라서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양 어깨를 들어 올린다.


“혼자 보기엔 아까울 정도로 절경 이네만? 도심의 라이트도 들어와서 야경, 이라기엔 좀 이르지만⋯⋯.”

“같이 있는 순간을 하나하나 곱씹는 편이라서요.”
“이런, 자네가 그렇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배려가 부족한 거 같군.”


남자의 말에 여자가 검은색 장갑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다.


“그 편이 제가 더 우아하게 보일 테니 상관없지 않나요?”

“적재적소라는 건가?”
“대비죠.”

“조화롭다고 알아듣겠네.”
“한마디를 안 지시는군요. 가끔은 신사답게 져주는 것도 필요할 거예요.”


천천히, 하강해가는 관람차 안에서 가벼운 웃음이 번진다. 이것이 아마, 오늘 하루 동안 둘이 동시에 웃음을 얼굴 위에 올린 순간. 하지만 떨어져 간다. 관람차는 시곗바늘처럼, 중앙에 묶여 원을 그릴 수밖에 없으니 올라갔으면 반드시 내려가야 한다. 일말의 유예가 돈이고, 시간이고, 안전이고, 신용이며,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건 작품이다. 그러니, 문제없이 내려간다.


“이제 저녁이군. 그래서? 뒤는 어떻게 하겠나?”

“애프터 신청은 감사하지만, 저는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고 싶어서요.”

“예상외의 변수는 늘 골치 아프지. 이해하네.”


이윽고, 관람차가 처음 돌았던 위치에 선다. 문이 열리고 그 아래에는 둘을 고대하며 기다린 이들. 내려서자마자 어둠을 환히 밝히는, 아니 둘을 태워죽일 기세로 쏟아지는 플래시. 갤러리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둘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어 나간다. 50분 가까운 기다림에 이제는 더는 참을 수 없는지 질문이 쇄도하고 있다.


진짜 열애 상대이신가요? 신작 배우 면접이라는데 맞습니까? 각종 SNS와 뉴스에 나온 사실들을 인정하십니까? 이것도 하나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열애를 인정하시는 거면 이전 건틀렛 선수와의 건은 어떻게⋯⋯ 신작에 대한 부분은 추후 제대로 매체를 통해 공개하실 예정이신가요? 실례지만 누구시죠? 외모로 봐서는 배우이신가요? 스완 씨, 제발 답변 좀 부탁드립니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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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그 모든 질문, 혹은 관심, 또는 광기에, 빛에, 한마디도 없이

그저 웃음만을 남길 뿐이다. 라일락과 라벤더. 어느 쪽도 아닌 눈동자를 우아하게 내리 까며

백조가 날갯짓하듯 우아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이제 알겠어요. 상세한 건 더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그는 그가 아니에요. 설령 그가 맞다고 하더라도⸻

저기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에요.

안타까운 사람. 여전히 나를 얕보고 있네요. 당신은 그때 도망치라고 했었죠.

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역할을 위해 방해되는 것을 희생시킨 것처럼

저 또한 당신처럼, 방해되는 것은 전부 치울 겁니다.


설령, 당신을 이용해서라도, 저는 당신을 만나야 하니까요.

이 쇳내 나는 손으로

눌어붙은 죄의 심장으로

거짓이다 못해, 가짜인 입술로


⸻⸻반드시.






잔뜩 화난 차량이 남자를 태우고 멀어지고, 여자도 마찬가지다.

올라가는 스탭롤, 찾아드는 적막, 밝아지는 주변.

혜성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구경꾼들만이 어색한 여운에 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