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Blackpink





해가 늦게 뜨는 겨울 아침이라지만, 실비아가 아직도 꿈나라를

헤메고 있는데 비해 해는 출근을 완료하여 간밤에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에 따뜻한 햇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으으으으으....."

어제 꽁냥대다 너무 늦게 잔 탓일까, 실비아는 다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겨우 알람을 껐다. 


"아... 정말 출근하기 싫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비아는 관타나모 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난 실비아는 머리를 말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한 후 가지런히 묶었다. 카일이 어제

실비아의 묶은 머리를 더 좋아한다고 통화에서 밝힌 탓일까.

그녀는 만족스럽게 세팅된 거울 속 자신의 머리를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코트 안에 민소매티입고 가서 머리 한번 다시 

묶어주면 카일녀석 껌뻑죽겠지, 흐흐.


집을 나서기 전, 여느때 처럼 탄산음료를 챙겨가려다 멈칫한

그녀는 콜라 대신 블랙커피를 챙겼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지.

'나 어느새 일상 이곳 저곳에서 카일을 의식하고 있구나.'

실비아는 킥킥대며 집을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실비아 양. 좋은 열시입니다."

평소처럼 마리아의 집무실 앞에서 마주친 카일이 인사를 건넸다.


"그냥 좋은 아침이라고 해주면 안 되는 거였어?"

"오전 열시는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입니다.

오늘도 탄산.."


실비아는 커피가 든 텀블러를 카일의 코 앞에 흔들었고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그와 그녀 사이를 메웠다.


"...음료가 아니군요. 무슨 바람이 드셨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변화입니다."

"글쎄, 누구누구가 또 시비걸까봐? 흐흥."

"... 시비가 아니라, 건강에 대한 조언입니다. 보고서 이리 주시죠.

제가 중장님께 대신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특이사항은?"

"..없는뎅?"


카일은 실비아의 손에서 보고서를 가져가더니 이내 마리아의

집무실로 들어가버렸다.


실비아는 부루퉁해졌다. 애초에 공개연애도 아닌 만큼 닭살 돋는

행동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귀기 전과 다름 없이사무적이고 딱딱한 대화는 예상밖이었다. 심지어 단둘이었는데.

'뭐야, 나는 이제 잡은 토끼다 이거야?'

갑자기 시간을 들여 머리를 손질하고, 콜라대신 커피를 챙겨오고

들떠있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 실비아는 오기가 생겼다.


오늘 안에 나한테 헤롱거리게 만들고 말겠어.


작전을 수립하며 걷던 실비아는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혀 엉덩이를

바닥에 찧고 말았다. 


"꺄악!"

"어, 미안하다 실비아. 앞에 있는지 몰랐어."

"두리.. 아니 버터남! 앞 좀 보고다녀!"

"방금 두리안이라고 하려고 했냐? 쪼끄만게... 어? 오늘

뭔가 다르네. 머리도 이쁘게 묶고, 안경도 안쓰고.. 소개팅이라도

하나 보지?"


제이크는 넘어져 있는 실비아를 일으켜 세워주며 짓궂게 웃었다.


"소,소개팅은 무슨."

"오늘 따라 진짜 이쁜데? 어때, 나랑 데이트라도 한번 할래?"

제이크는 선글라스 너머로 찡긋 윙크를 보냈다.

"우웩, 됐네요."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대령님?"


카일이 브리핑을 마쳤는 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또 실비아 양에게 무례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니십니까?"

"무례라니, 임마. 외로운 남자가 아름다운 여성에게 데이트하자고

할 수도 있는거 아니야? 그리고 '또' 라니?"


다행스럽게도 제이크는 카일의 눈에 띄는 적개심을 읽지 못했다.


"지금 당장 사무실로 복귀하지 않으시면, 대령님에 대한 보고서를

레지날드 준장님께 전달하겠습니다."

"하하하, 빡빡하게 굴긴. 간다, 가. 일 열심히들 하라구."

제이크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등뒤로 인사를 건네며 멀어졌다.


'카일 녀석, 지금 버터남한테 질투한건가?'

실비아는 의아했다. 평소에도 제이크와 자주 다투긴 하지만, 

형제끼리의 싸움 느낌이 강했다면 오늘 카일이 내비친 적개심은

그 이상으로 느껴졌다.


"카일, 질투했어?"

카일은 대꾸없이 문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게, 대답 안 한다 이거지?'

실비아는 카일의 시선이 닿을 만한 곳에 서서, 보란 듯 겨드랑이를

드러내며 기지개를 킨 후 머리끈을 입에 물고 머리를 묶었다.


돌연 카일이 타이핑을 멈추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실비아는 깜짝 놀랐다.


"실비아 양. 잠시 저 좀 보시죠."

카일은 그 말과 함께 휙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당황한 실비아는 군소리 못하고 그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카일을 따라온 덕분에 코트를 챙길 여유가 없었고

옥상에 도착한 그녀는 겨울 날씨에 맨살이 고스란히 노출 되었다.


"저기 카일.. 화났어?"

덜덜 떠는 실비아를 발견한 카일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황급히

자신의 외투를 벗어 노출된 실비아를 어깨를 덮었다.

"화난 건.. 아닙니다."

여전히 카일은 실비아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실비아는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 것에 울적해져서, 카일의 눈 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그럼 내가 너한테 미움 받을 짓이라도 했어? 왜 나 똑바로 안봐?"

실비아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럴리 있겠습니까! 지금 제 눈엔 실비아 양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입니다. 덕분에 아무 것도 못하겠어서, 억지로 외면 했습니다.

근데 저만 실비아 양을 아름답게 생각하는게 아니라서, 저보다

남자답고 멋진 대령님이 실비아 양을 칭찬하는 걸 보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료에게 질투심을 품는 제 자신이 얼마나

못났는지 자각했습니다. 실비아 양이 저한테만 예뻐보였으면

좋겠는데, 실비아 양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 저를 유혹하는 태도나

취하시고..."


카일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가 이렇게 감정적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카일에게 다가가

그를 품에 안았다. 카일을 진정시켜 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실비아 양에게 화낼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부끄러워 죽겠습니다. 제가 이상해 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미안.. 그냥 너한테 예뻐 보이고 싶었을 뿐이야.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머리도 묶고 왔고, 안경도 안 썼고, 너의

변태같은 취미를 위해 이 겨울에 민소매 이너웨어도 입었어."

"..변태 아닙니다."

"그래 그래, 너의 신사적인 취미를 위해. 난 네가 질투해줘서

음.. 뭐랄까, 기뻤어. 너무 자책하지마. 원래 사랑이란건 독점하고

싶어 지는 거래."


카일은 비로소 실비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비아 양이 안아 주시니까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포옹이란게.. 이렇게 안정이 되고 기분이 좋은 거였군요."


실비아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카일을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떨어졌다. 카일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그녀의 품에 그가 있는 것 같이 따스하고 포근했다. 위로받은 건 카일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흠.. 어쨌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네? 슬슬 돌아갈까?"

실비아가 무안한듯 헛기침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순간, 카일이 실비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어..어어? 카일 군? 평소의 너라면 일해야 한다고 나를 끌고 가야

하지 않니?"

"모르겠습니다. 제가 실비아 양을 좋아하게 되고 나서 좀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러고 싶습니다."


실비아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아까는 눈치못챈 카일의

몸에서 나는 향기, 그에게서 느껴지는 체온과 심장 고동, 그리고

그녀의 몸과 밀착해 있는 그의 존재자체가 그녀를 설레게 했다. 


'부끄러우니까, 카일이 내 심장소리를 못 들었으면 좋겠다...'


"실비아 양, 아까부터 쭉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카일이 실비아의 귀에 속삭였다.


"탄산 대신 커피 가져오신 거, 머리 묶으신 거, 안경 벗으신 거,

일부러 제 앞에서 머리 묶으시는 거 다 표현하기 힘들 만큼 

귀엽고 예뻐서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 망했다. 이번 심장소리는 숨길 수 없겠어.'


"저기 카일, 오늘 내 손 잡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 대담한 거봐."

"저를 자극한 건 실비아 양이 먼저입니다. 전 잘못 없습니다."

"아주 한마디를 안지지?"


'그래, 이렇게 포옹부터 시작하는 커플도 어딘가엔 있겠지.'


실비아는 사랑받는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 그의 품에서 살며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