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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집



-손자 로이 버넷에게


아무것도 없던 텅 빈 페이지에 글씨가 가득 채워져간다

무의미했던 낱말들이 모여 단어가 되고 이내 의미를 가진 문장이 되었다


-먼저, 이 글을 읽고 있을 귀여운 손자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하...."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거지?


글자는 심란한 내 마음을 무시한채 계속 이어졌다


-네가 보고 느낀것이 어떤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전부 나의 기억들이다


-분명 혼란스러울거다. 하지만 우리 사고뭉치 손자는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


-나는 네가 이 기록을 읽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단순한 글자일텐데 어째서인지 글을 보면 할배의 감정이 조금씩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지금이라면 할배의 저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본 기억이 맞다면 할배는 나를 끌어들이기 싫었을테니까


-세턴. 너의 아버지는 가문의 "의무"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도망치는걸 선택했다


이조차 잘 아는 얘기다

어렸을때부터 내게 아빠는 없는 인간이나 다름없었으니


-따라서 나는 내 대에서 이 의무라는 이름의 사슬을 끊어내려고 했지만 결국 얻은건 최고의 요원이라는 이름뿐이더구나


"....."



-로이. 나는 기관의 방식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명을 위해서라지만 지식욕에 잠식된 괴물을 상대하기위해 개인이 가진 감정을 잘라야했던 그 방식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어.



기억속 기관의 요원들은 그 누구 할거없이 사명을 위해서 희생을 당연시했다



-그런 생각이 하나 둘 떠오르자 그 무엇보다 단단했던 나의 사슬은 덧없이 끊어졌다.


서로를 결속해줬던 사슬은 힘을 잃고 땅에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나는 은퇴를 결심했지. 왜 그랬냐. 라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더이상 싸울 의지조차 남아있지 않았어



어째서인지 글 너머로 좌절감과 슬픔이 넘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나는 실패했다. 기관을 바꾸는것도, 내가 모든것을 끝내는것도 말이야


슬픔은 회한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나는 기관을 나오고나서야 깨달은거야. 내가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것은 기관이 정해준 사명이 아닌 나의 인연이었던것을.


-그러나 내가 눈치챘을때는 이미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아들까지도.



-그래서인지 네게 어리광을 피우게 된거 같아 미안하구나.


"....그럴리가 없잖아..."


종이 위로 조그만 얼룩이 하나 둘 번져간다


-로이. 내 귀여운 손자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마


글이 생겨나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우리의 "사슬"은 마음이 꺾이지 않는 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도 있지.

-그러니. 바라건데 부디 사명이라는 사슬에 묶여 자기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마



-요한 버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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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웬 기관의 일상은 언제나 바쁘게 흘러간다

고위험 아티팩트의 처리부터 시작해 기관의 숙적인 "학회"동태파악까지

그런 기관의 안에서 유일하게 조용한곳이 있다면 기관장실이 유일하다


"이 정보. 틀림없는것이겠죠?"


그리고 기관장실의 안에는 어느때보다 진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침착하게 업무를 처리하던 엘리자베스조차 손에 들린 문서를 보자 여유로운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의 손에 있는 문서는 막대그래프가 그려진 차트가 포함된 형태의 보고서였다



"사실입니다 아가씨. 거기에 '오래된 목소리'의 말에 따르면 이미 탐식자의 본체는 봉인이 풀려버린 상황입니다."


라이언의 대답에 옆에있던 검은 신사 모건은 평소처럼 농담도 하지 않은채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탐식자 가아그셰블라


클리포트의 마왕이자 측정이 불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신성침식체

그 힘은 너무도 끔찍하여 여러조각으로 쪼갠뒤 격리시설에 '보관' 후 프리드웬 기관으로 하여금 봉인의 사명을 지게 만든 원흉 그자체다


하지만 어떤이유에서인지 봉인이 풀린 탐식자는 학회로 찾아가 학회장의 자리에 앉았다


그것만으로도 현재 기관에는 비상이 걸릴 사항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문서를 검토 후 테이블 한쪽으로 밀어넣었다

"아가씨 당분간은 외출은 불가능할거같습니다."

라이언은 그 누구보다 엘리자베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만에하나 그녀가 별안간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를 비워버린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될게 자명했다


"걱정마시길. 페리어 저는 그정도로 자제심이 없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이언은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반신반의한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그에게 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보고는 여기까지 하는걸로 하죠. 나머지는 부탁드리겠습니다. 페리어, 모건."


"맡겨주시죠. 아가씨."

"물론입니다."


둘은 각자의 대답을 마친 뒤 기관장실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서 정적이 찾아오자 엘리자베스는 나지막히 혼잣말을 뱉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넓은 방에서 나지막히 울린 목소리는 깊은 슬픔의 색을 띄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서랍에서 또 다른 보고서를 꺼내 읽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 보고서는 이미 열번도 넘게 읽었던 보고서

보고서의 내용따위 이미 마침표의 위치까지 외울정도였다

그녀가 이 보고서를 또다시 읽는건 이 자리에없는 로이에 대한 속죄와 동시에 무능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은 얼마전 로이 버넷이 단독으로 진행했던 아티팩트의 회수작전


로이 버넷은 그녀 자신의 오판에 의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뻔했다

임무 종료 후 급하게 임무의 난이도를 두단계나 격상시켰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후우...."



그러기에 두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없어야한다


하지만 열번을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부분이 있었다



"어째서 학회가..."


로이에게 회수를 지시한 아티팩트는 잘 쳐줘야 B급 하위권에 머무를 정도의 평범한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로이의 진술에 따르면 최근 학회장이 직접 고용한 용병의 인상착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이가 임무중 대뜸 등장한것이다


그것도 결정적인 순간에



여태까지의 학회가 저등급 아티팩트를 회수하지 않는건 아니지만 학회장의 측근이 노릴만한 물건은 절대아니었다


따라서 소거법으로 아티팩트를 제외하면 목적은 두가지가 남게된다


하나. 리플레이서 잔당

둘. 로이 버넷


리플레이서 잔당은 어디서나 볼 수 있기에 합리적인 이유는 절대 아닐터

그렇다면 남는건 기관의 요원인 로이 버넷

그들이 로이를 노릴 이유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사소하게 시작된 의문은 의심을 낳았다


어째서 전투불능이 된 로이를 살려둔채 아티팩트의 회수조차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노리는건 무엇인가


"....그럴리가 없겠죠."


엘리자베스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한가지 가설을 이내 지워버렸다


"후우..."


찻잔에 있는 밀크티를 입에 털어넣자 기도로 따뜻한 싸구려 우유향이 맴돌았다


"생각보다는 괜찮네요."


이 싸구려 밀크티는 과거 로이 버넷이 그녀에게 추천해준것

그에게 추천 받았을 당시에는 어째서 귀족인 그가 자신에게 이런 싸구려 밀크티를 추천한지 의문이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죠."


엘리자베스는 비워진 찻잔을 내려놓은뒤 밀려있는 서류작업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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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배의 일기장을 잘 정리해둔 뒤 그대로 침대로 간 뒤 그대로 누워버렸다


"하아..."


참 길고 긴 하루였다

빌어먹을 친구녀석을 도와준 뒤 집에 돌아오니 할배가 남긴 메세지가 나를 반겨준다니

홍차폭탄이 들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받아쳤겠지


내가 침대에 눕자 마치 마취제를 맞은것마냥 힘이 빠져나간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망할."


할배의 기억 그리고 편지에 담긴 기록들을 비추어봤을때 이 기관이라는곳은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빌어먹을 집단이다



-역대기관의 요원들중 그 누구도 자신의 처치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물벼룩은 어째서 그러는거죠?



머릿속에서 홍차폭탄이 했던 말이 지나간다


어째서인지 그 말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후우...."


긴 한숨이 얼굴위에서 맴돈다


이 기관에 오게된 계기를 다시 떠올린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호기심이었다


내가 몰랐던 할배의 모습이 작은 호기심을 만들고 작은 호기심은 흐릿한 의무를 만들어냈다


그 의무는 점점 커져가 불완전한 정의를 만들어내고


불완전한 정의는 양날의 검이 되어 결국 나 자신을 찔러버렸다



"별 같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네."


정의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눈 앞에 있는 거슬리는걸 치워버리면 그만인 이야기다

이제와서 의무니 사명같은 부질없는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나는 나야."


밤은 길고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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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의 휴가는 순조로웠다


길가에있는 자잘한 쓰레기를 줍는다거나 한번씩 루터스 녀석의 고민을 들어주는게 전부였다


그리고 휴가 6일차가 되는날



나는 할배의 묘가 있는 성당으로 다시 향했다


"주의 은총이 그대를 비추기를."

"그래. 너도"


인사를 건네는 수녀를 뒤로 하고서 나는 성당 뒤쪽에 있는 할배의 무덤에 도착했다


할배의 무덤 옆에는 작은 글씨로 '리사'라고 쓰여있는 무덤이 붙어있었다


"....할머니."


두분의 무덤은 누군가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온듯 흔한 잡초조차 없었다


"저번에 오지 않아서 미안해."


기관에 들어가기전 잠시 이곳에 들렸던적이 있었다

그때는 할배의 낚시친구였던 필립신부님에게 질문을 위해 방문했지만 결국 허탕을 친 뒤 돌아가야만 했다


미리 준비해두었던 국화 두송이를 꺼내 가지런히 놓았다


"그곳에서 잘 지켜봐."


나는 가볍게 목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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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니 잘 안써지네

읽어줘서 댕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