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섬에서의 마지막 아침.

커튼 사이로 비추는 햇빛에 잠이 깬 메티스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흐으으읍...! 흐아...엣취!"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구미호의 꼬리를 살며시 치우고 이불에서 나온 그녀는 조용히 커피를 내려 테라스로 향했다.

아직은 아침바람이 조금 쌀쌀해 거실 소파에 널부러져있는 겉옷을 입고 나와 앉으니

어쩐지 낭만적인 분위기에 마음이 조금 들뜬 메티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던 와중,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테라스 문이 열렸다.

"일어났어?"

"응... 잠깐만."

차가운 아침 공기 때문인지 나비는 다시 들어가 겉옷을 입고선 다시 나와 메티스의 반대편에 앉았다.

"나비, 이번 여행은 재미 있었어?"

"응. 바다도 가 보고, 수영복도 입어 보고, 맛있는 것고 많이 먹고, 또..."

나비는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움츠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친구도 생겼으니까."

살짝 미소짓는 나비의 표정에 메티스는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잠시 말을 고르던 메티스는 커피잔을 양 손으로 쥐고선 나비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나비. 내가 너 혼자 내버려 두고 구미호랑 카지노 간 거... 화 안 났어?"

"......"

아무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니, 약간 멍하면서도 무해해 보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그제서야 나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 일이 없었으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었을 테니까."

차분한 나비의 목소리에 메티스는 코 끝이 찡해져와 애꿎은 기침을 몇 번 하고선

남아 있는 커피를 한 입에 털어넣고 일어섰다.

"고마워, 나비. 아침 할 건데 같이 먹을래?"




조금 엉성하지만 군침 도는 아침을 해치운 뒤,

 메티스는 침대에서 꼬리를 매만지는 구미호에게 물었다.

"구미호. 우리 오늘 언제 출발해?"

"점심 먹고 느지막하게 간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그럼 아직 여유 시간이 조금 있네. 구미호는 뭐 할 거야?

"나는 고기 쇼핑하러 갈 거라는 것이다. 메티스도 같이 가자는 것이다."

"으응. 나는 들릴 데가있어서. 나비는?"

"난... 악마랑 바다에 한 번 더 가고 싶어."

"그럼 개별 활동이네. 이따가 점심시간에 여기서 다시 보자."

둘의 손인사를 받으며 나온 메티스는 곧장 번화가로 향했다.

숙소에서 가기엔 조금 먼 거리였지만

섬의 풍경을 눈에 새겨두고 싶었던 메티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을 걸어 그녀가 도착한 곳은

큼지막한 야자수나무 옆에 있는 자그마한 선물가게였다.

작은 종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싹싹한 목소리의 종업원이 메티스를 반겨주었다.

"어서 오세요. 혹시 찾으시는 선물 있으신가요?"

"아니요. 한 번 둘러볼게요."

"네~ 도움이 필요하시면 바로 불러주세요."

가게 안을 슬쩍 둘러보니 작은 장식품부터 커다란 액자까지 온갖 물건들이 다 있었다.

어느 정도 생각해둔 게 있는지 금새 선물을 고른 메티스는 카운터에 선물들을 올려놓았다.

"선물하시는 건가요?"

"네, 포장해주세요."

종업원은 선물을 모두 꼼꼼히 포장한  뒤 쇼핑백에 담아주었다.

"다 해서 25000 크리스탈입니다."

"네, 잠시만요."

계산을 하기 위해 지갑을 꺼낸 메티스는 패닉에  빠졌다.

'크리스탈? 그건 어느 세상 화폐야??'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기다리는 종업원의 얼굴에

메티스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단념한 메티스가 크리스탈이 무어냐고 물어보려 할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랑 같이 계산해주게."

"네. 전부 해서 28000 크리스탈입니다."

"주, 주피터. 왜 여기 있어?"

황당한 표정의 메티스 옆으로 술을 하나 올려둔 주피터는 품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아침에 숙소로 갔는데 안 보이길래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

"계산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자에 담긴 술을 받아든 주피터는

메티스의 쇼핑백까지 집어 건네주고선

가게를 나갔다.

"다음에 또 방문해주세요~"

"가, 같이 가!"



잰 걸음으로 자신을 따라잡은 메티스를 보며 주피터는 놀리는 말투로 물었다.

"내가 없었으면 어쩔뻔 했나?"

"몰라! 근데 그 크리스탈이라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화폐야?"

"이 섬에서만 쓰는 화폐라고 하더군."

"그래? 참...그러고보니까 그 카드는 어디서 났어?"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워 머큐리라는 차일드에게 술 살 곳을 물으니, 이 가게를 알려주고 카드도 같이 주더군."

"그랬구나. 나도 물어보고 올 걸."

어찌 됐든 성공적으로 선물을 사 기분이 좋아진 메티스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따 점심은 같이 먹는 거지?"

"주인이 봐 둔 식당이 있다고 들었네. ...잠깐, 자네가 카드 받았나?"

"아니. 왜? 카드 놓고 왔어?"

"그런 것 같군. 나는 따로 들릴 데도 있으니 먼저 가게."

"응? 알았어. 그럼 이따 밥 먹을 때 봐."

빠른 걸음으로 가는 주피터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린 메티스는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들 마음에 들어해주면 좋겠다. ...근데, 25000 크리스탈이면 얼마지?'

지갑에 들어있는 지폐 몇 장을 떠올린 메티스는  금방 그 생각을 지워버리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아모스 섬의 하늘을 즐겼다.




이 곳 저 곳을 다니다가 아슬아슬한 시간에 숙소로 돌아가니 이미 짐을 다 싸두고 거실에서 떠드는 넷이 있었다.

쇼핑백을 들키지 않게 몰래 가방에 넣은 메티스는 거울을 한 번 보고서 거실로 갔다.

"주인. 우리 밥 먹으러 어디로 가?"

"저번에 티와즈가 꼭 가보라고 한 식당에 갈 거야. 뭐 이것저것 다 있다던데?"

"나는 고기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있으면 더 좋고."

"꽤 기대되는군."

"메티스. 잘 다녀왔어?"

"응. 나비는?"

"아까 나 해변으로 끌고가서 말도 없이 한참 앉아있다 왔어."

'왜 그랬는지 둘만 있을 때 물어봐야지.'

"그럼 슬슬 나가자. 안 챙긴 거 없는지 확인하고."



아모스 섬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호화로웠다.

최고급 재료에, 최고의 요리사가 해 준 식사에 주피터는 약간 감동까지 받은 것 같았지만

메티스는 지난밤 영화를 보며 함께 먹던 간식만큼 맛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비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고,

악마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요리에 긴장을 한 나머지 그만 체하고 말았다.






머큐리의 배웅을 받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다.

"으... 난 들어가서 바로 잘래. 너무 피곤해."

악마뿐 아니라 다른 차일드들 역시 말은 안 해도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다녀왔습니다."

"악마. 여러분, 어서오세요."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앞치마를 입은 상아가 그들을 맞아주었다.

"여행은 즐거우셨나요?"

"응. 누구 때문에 이틀 밖에 못 있긴 했지만."

"그 얘긴 끝난 것 아니었나?"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악마와 주피터는 으르렁댈 힘도 없는지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축 처진 어깨로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오늘은 일찍 자겠다는 것이다. 꼬리가 말이 아니란 것이다."

메티스가 보기에는 여전히 풍성한 꼬리였지만, 구미호의 생각은 다른듯했다.

"메티스. 난 살로메한테 다녀올게."

"안 피곤해?"

"괜찮아."

편한 신발로 갈아신고 나가는 나비를 보고

메티스는 거실로 향했다.

그 곳에는 언제나처럼 에르제베트가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어야 할테지만,

오늘 그녀는 소파에 앉아 메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 왔니?"

"네. 다녀왔어요."

잠시 망설이던 메티스는 그녀의 옆으로 가 기댔다.

"잠시 안 보는 사이에 어리광이 늘었구나, 아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 손길에

비로소 메티스는 집으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얼마나 졸았던 걸까, 왁자지껄한 소리에 메티스는 눈을 떴다.

"다 졸았니?"

"아.. 죄송해요. 팔 안 아프세요?"

"후후. 괜찮단다."

"메티스, 일어났어?"

차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 곳에는 아모스 섬에 갔던 멤버들이 모여 얘기를 하고있었다.

"다 자러 간 거 아니었어?"

"그냥 자기는 좀 아쉽더군."

"그랬구나... 참, 내 가방 어디있어?"

"아까 상아가 네 방에 가져다뒀어."

"호, 혹시 열어보거나 하진 않았지?"

"그걸 왜 봐?"

악마의 질문을 듣지도 않은 메티스는

방으로 달려가더니 쇼핑백을 가져왔다.

"그건 뭐야?"

"아까 섬에서 산 선물이야. 에르제베트 님. 이거 선물이에요."

메티스가 주는 금색 팔찌를 받아든 에르제베트는 그 자리에서 팔을 걷어 팔찌를 찼다.

"잘 어울리니?"

"네... 정말 근사해요."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가늘고 흰 그녀에 팔에 채워진 팔찌는 꽤 그럴듯했다.

"고맙구나. 소중히 간직하마."

"네. 그리고 나비. 이건 네 거야."

"나...?"

나비가 받아든 건 파란 보석이 작게 박혀있는 반지였다.

구미호는 꼬리를 다듬을 빗을,

악마에게는 다소 오버스러운 선글라스를 준 메티스는 마지막으로 주피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주피터 거야."

"이건..."

"손수건이네?"

"고맙네. 잘 쓰도록 하지."

"맞다. 상아 선물도 있는데. 상아는 자?"

"온천에 다녀온다고 하더라고. 내일 아침은 돼야 온다고 했으니까 기다리지 마."

"응... 그럼 내일 줘야겠네. 그런데 무슨 얘기 하고있었어?"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하는 에르제베트에게 잠투정을 할 때까지 웃고 떠들던 메티스는

겨우겨우 양치질을 하고서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내일부터는 또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겠지만,

그렇기에 이런 일탈에 의미가 있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이 들려던 찰나

묵직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다행히 바로 잠들진 않았나보군."

"주피터? 웬 일이야? 불 좀 켜줘."

"아니네. 곧 나갈거야."

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주피터는

머뭇거리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게 뭐야?"

"선물이라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군."

"잠깐만. 불 켜 줘. 지금 보고싶어."

하는 수 없이 주피터는 벽을 더듬거려 불을 켰고

메티스는 곧장 그 선물로 다가갔다.

"이건 언제 산 거야?"

"...아까 그 선물가게에서 샀다네."

"그 선물가게? 거기 좋은 거 많았지."

메티스가 졸린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주피터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포장을 뜯어 작은 상자를 열자, 갈색을 띈 리본이 들어있었다.

"이게 선물이야?"

"자네가 뭘 좋아할 지 몰라서 눈에 보이는 걸로 골랐다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미안하군."

"으응. 마음에 들어. 내일부턴 이거 하고 다닐게."

"그럼 이제 나가보지. 잘 자게."

주피터가 불을 끄고 나가려할 때, 메티스가 조용히 다가와 뒤에서 그를 안았다.

"주피터. 다음엔 우리 둘이서 아모스섬 갈까?"

"...그건 그것대로 좋겠군."





다음 날 늦은 아침. 샤워를 하고 나온 메티스는 옷을 다 입고서 거울 앞에 앉았다.

지난 밤 늦게 잔 것 때문인지 약간 피로감이 있었지만 크게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 한 리본이 잘 어울리는지 이리저리 살펴본  그녀는

문을 열고서,

다시 반복되는 나날에 발을 내딛었다.









이것도 보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