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은 언제일까



 오늘만큼은 무언가를 써보자는 마음가짐으로 꼭두새벽에 액정에 불을 붙였다. 배터리를 장작으로 타오르는 불꽃은 어두웠다.


 " 흐으윽.. "


 꽉 쥔 두 주먹,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선혈이 흘렀다. 새하얗지만 자그마한 손가락을 따라 흐르며 붉게 물들였다.


 무언가 주어가 생략된 기분이 들었다. 손가락이 붉게 물들었다로 끝마쳤어야 훨씬 부드러운 글이 되었을 것이다.


 " 다 안다고! 말하지 않아도, 결국, 죽어버릴 건 알고 있어.. 그래도, 그렇지만.. "


 그녀는 굳게 세워진 성문을 몸으로 밀어냈다. 자그마치 4미터나 되는 높이의 성문은 놀랍게도 천천히 밀려나며 광활한 평야를 드러냈다.


 결국 이렇게 우스운 이야기가 될 뿐이다. 이야기를 구상할 능력조차 제로에 가깝다. 풀어낼 수도 없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앞뒤 없는 클라이막스라고, 전개 없는 절정이라고, 혹은 나에게만 감각적인 장면들일 것이다.


 " 하아아... "


 자그맣던 소녀는 여전히 비슷한 키로 거대한 회백색 성벽을 등지고 섰다. 소녀는 더더욱 왜소하게만 보였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단순한 욕망의 풀이일 뿐이다. 잠들지 않기 위한 핑계로 나는 이 조잡한 활자 덩어리를 써내려가는 것이지, 창작을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쿵, 쿵, 쿵, 쿵, 쿵 • • •


 이내 거대한 평아가 울리기 시작했다. 미약했던 발걸음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저 소리가 멈추는 순간이, 소녀와 뒤의 성벽에게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을 터였다.


 이렇게 노력한다고, 이런 노력조차 아닌 행위를 이어간다고 무언가 바뀔 거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한 시간조차 투자하지 않았고, 할 인간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평선을 넘어선 그린 호드의 군세가 빛을 등지고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하게 솟아오른 그림자가 마구잡이로 뻗은 가시들의 그림자와 닮아있었다.


 졸렸다. 졸리지만 잠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몸이 잠을 극도로 요구하게 되면 그 때가 되어서 나는 마지못해 허용할 것이다. 나는 겨우 그런 사람이었다.


 그림자는 현란히, 또는 흉악하게 춤추듯 움직였다. 선봉의 그림자는 소녀의 발 밑으로 구겨졌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 군세의 그림자는 소녀를 그림자 아래로 굽혀넣었다.


 지독한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모두는 죽는다. 누군가가 먼저 죽느냐의 차이일 뿐, 그런 의미에서 나는 후순위였다.


 초록 피부, 거대한 키, 강인한 근육, 그린 호드의 충격군 역할인 오크 부대가 도드라지게 보였다.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고블린보다 키가 1미터, 크게는 2미터 이상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겨진 자는 무엇을 하느냐, 그 자체로, 늦는 죽음은 저주가 아닌가? 나의 꿈 따위는 이미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평야는 거대했지만, 오랜 전쟁과 행군으로 단련된 군세는 순식간에 소녀의 앞까지 당도해왔다. 소녀는 점점 몸을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공포감이 자신을 잠식해옴을 느꼈다.


 결국 죽음은 찾아올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하지만 순위를 나눠놓은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한꺼번에 데려간다면.


 소녀는 아까처럼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연약한 피부는 다시 한번 선혈을 토해냈다. 축축한 대지가 소녀의 피를 머금었다.


 드디어 나는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에 드는 결말은 맞았다. 이따위 절망보다야 자신을 불사르는 이야기가 아름다우리란 건 개미도 알았다.


 -쾅, 쾅, 쾅, 콰앙. 척.


 군세의 중앙, 거대한 나무탑이 있었다. 분명 오크가 그것을 끌고 있을 것이었다. 탑의 위에는 악기 두세 종류와 홉 고블린 하나가 있었다.


 -펑, 슈우우우우웅ㅡ!


 홉 고블린이 수정구 하나를 하늘 위로 힘껏 던지자, 주위로 폭발이 일며 수정구는 더 높게 솟아오르며 눈부시게 점멸했다.


 검은 색. 정지 신호였다. 그린 호드의 군세는 단순하면서 철저한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지휘탑은 몇몇 강화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으며, 쉽게 조립할 수 있는 몇 개의 재고가 충분히 지급되었다. 간단히는 기수라 불리는 홉 고블린 또한 열 마리가 넘었다.


 호드의 병력 단위는 군단이었고, 군단마다 지휘탑을 가졌다. 군단끼리의 통신은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수정구를 통해 했고, 군단 안에서의 명령은 악기를 통했다.


 소녀는 그들의 계획성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저것들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까지 계획적이어야 했던 것일까. 그저 살육을 위해서?


 소녀는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 따위를 할 시간은 없었다. 그 동안 한 번의 쉼호흡을 더, 조금의 마나를, 조금이라도 술식을.


 -둥, 둥, 둥, 둥, 둥, 둥.


 북의 소리가 지휘탑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크기로 지평선을 가득 매우던 고블린 무리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전진엔 규율 따위가 없었다. 성벽을 방오하는 병력을 찾지 못해서인지, 소녀가 열어뒀던 거대한 성문를 보았던 것인지, 살육에 눈이 멀어버린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소녀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손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에 정신을 차렸다. 두 손을 들어올린 소녀는, 자신의 뇌를 터질 것만 같게, 술식으로 가득 채웠다.


 -우우우우우웅, 파앗!


 수십 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어떤 것은 푸르게, 어떤 것은 붉게, 어떤 것은 검게 빛났으나 방향은 한결같았다. 군세를 향해.


 ㅡ


 결국은 종말에 다다랐다. 나는 이 이상 써낼 수 없었다. 멍청한 인간의 섣부른 도전과 자만, 솔직히 얘기하자면 자만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수준에서 멈추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고블린의 군세는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지휘탑에서 발사되는 마법과 오크들은 건재했다.


 그 때, 군세의 뒤 하늘로 붉은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혜성 같기도 해서, 멸망의 신호탄이라는 생각이 들어왔다.


 모두 후방의 또다른 군단이 쏘아올리는 신호탄일 것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신호탄과 함께 들려오는 것은 더욱 크고 강렬한 북소리였다. 마나 과다사용의 후유증으로 쓰러진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전부가 아니었다.


 모든 마법은 대기 중 마나를 사용한다. 인간의 몸은 마나가 가쳐가는 통로이자, 정제되는 하나의 공장이었다. 과하게 가동된 공장이자 기계는 결국 망가진다.


 -쿵, 쿵, 쿵,쿵,쿵쿵쿵쿵!


 오크의 군세가 점점 속도를 붙이며 성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크는 마법에 대한 저항력 또한 갖추고 있어 소녀 단신으로 막아내는 것은 도저히 무리일 것이었다.


 생명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녀의 피가 대지를 적셨다. 주먹으로부터 흐르던 피는 웅덩이가 되었다.


 고블린의 피로 한 번 덮힌 대지 위로 더욱 더 선명한 선홍빛이 피어올랐다.


 오크들의 아래에서, 다시 한 번 기적이 펼쳐지고 있었다.





 졸렸다. 모든 활자는 새벽의 특이하다고도 표현 못 할 멍청한 감정에 의한 쓸데없는 부산물들일 뿐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서기 위해 노력했으나, 온 몸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진흙탕이 되어버린 땅에 쓰러지듯이 몸을 눕혔다.


 비릿한 혈향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녀의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군단 하나를 막아냈다.


 성벽은 굳건했다. 성의 문은 함락당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은 뒤의 방어선까지 안전히 후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엄마랑 아빠, 그리고 귀여운 동생, 멍청한 오빠.


 -펑, 펑, 퍼벙, 슈우우우우우웅ㅡ!
 

 성벽의 뒤에서, 옆에서, 안에서. 여러 개의 수정구가 솟아올랐다. 녹색 빛. 점령, 약탈, 살육.


 모든 것이 땅 아래로 녹아 없어질 것이었다. 소녀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소녀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소녀는 영영 그녀라 불리지 못 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