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조선군 떡밥 굴리면서 갑지기 삘 받아서 써봄. 되도록 팩트만 쓰도록 노력하겠지만 사료를 기반으로 한 뇌피셜이 있을 수도 있으니 알아서 걸러듣거나 지적해주면 고맙겠다 이기


먼저 조선 조정은 다들 알고있다시피 군주가 민생을 살피는 것과 검소함 같은 유교적 가치를 조오오오온나 중요시했음. 따라서 세율이 낮으니(일본에서 가장 낮았던 세율이 조선에서 가장 높았던 세율보다 높았다는 말도 있음.) 자연스럽게 국가 예산도 쪼그라들 수밖에. 문제는 조선은 여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특이할 정도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고집했다는 거임. 그래서 조정 규모가 통일신라나 고려에 비해서 훨씬 커서 조정대신들 급료로 나가는 재정이 상당했음. 그러니 관료들의 녹봉은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할 정도로 낮았고(지방 아전 같은 경우엔 책정되어 있는 녹봉이 아예 없어서 생계비는 알아서 충당해야 했음.), 그렇게 낮은 녹봉으로 쇼부를 쳐도 재정부담이 상당했다. 


이게 문제가 뭐냐면, 문관들 녹봉 주기도 급급한 나라에서 국토 전체를 지킬만한 상비군을 운용할 돈이 있겠음? 그나마 각자도생 하고 있는 지방 유지들에게 사병을 보유하는 걸 허용했으면 어느정도 보완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본인 사병으로 쿠데타 일으켜서 집권한 태종이 지방 호족들의 사병 보유를 싸그리 금지시켜서 그럴 일도 없었음. 다만 지방 호족의 사병 보유는 일장일단이 있어서, 사병을 보유하는 게 가능했던 고려는 교과서에 다 못 적을 정도로 크고 작은 반란이 존나게 많긴 했다. 


하여튼 이런 재정 문제 말고도 다양한 문제들 때문에, 조선은 대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했고⋯. 그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제 효율을 뽑아내는데 많은 훈련이 필요한 살수(창병), 등패수와 팽배수(검방보병)는 점점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성기였던 조선 초기의 경우 태종과 세종이 돈 퍼부어가며 등패수랑 팽배수를 어느정도 유지시켰는데, 슬슬 재정에 빵꾸가 나기 시작하던 세조 시기에 이르러서 점점 줄어들더니 양란으로 크리티컬 터지고 나선 등패수와 팽배수는 조선군 병종체계에서 상당히 비율이 줄어들게 되어버리고 그 자리는 살수가 메꾸게 됨. 정확히는 전후에도 광해군이 호란 대비한다고 증병을 좀 시켜두긴 했는데 이괄이 그걸 반란으로 싹 날려먹어서⋯⋯. 


여기서 전근대 병종에 관심이 좀 있는 게이들은 "어? 창병 그건 농노들한테 창 쥐여주면 되는거고 오히려 궁병이 더 모으기 빡센 거 아님?"이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조선은 양반부터 쌍놈까지, 심지어는 일개 기생도 활쏘기를 즐기던 남녀노소 활에 미쳐있던 민족이라서 상대적으로 궁병 운용이 더 수월했음. 그리고 하늘색 옷과 물 수 적힌 천쪼가리 걸치고 싸우는 미디어들 때문에 잘못 알려졌지만, 조선군은 살수나 등패수 같은 백병전 병종들에게 갑옷을 잘 갖춰주는 나라여서, 각종 갑옷 방패 입혀주고 쥐여줘야하는 근접 병과와는 다르게 갑옷은 좀 부실하게 입혀도 되고, 활이랑 호신용 환도 한자루 정도만 지급하면 되는 사수가 유지비가 더 싸게 먹혔던 것도 있음. 궁병 모집의 난해함은 유지비가 높은게 아니라 활이란 무기가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여튼 이렇게 비대해진 조선군의 사수 비율은 임란시기를 맞으면서 문제가 커지는데, 상비군을 극도로 축소하고 심각할 정도로 양인의 군역에만 의존하는 특성상 적은 숙련병과 과하게 많은 사수 비율이 서로 안좋은 쪽으로 시너지를 일으켜서 지들끼리 심심하면 싸우던 일본군과 야전에서 회전이 걸리기만 하면 거의 열에 일곱여덟은 박살날 정도로 야전에서 주도권을 잡질 못 했음. 임란시기 조선 육군의 대규모 승전이 거의 전부 수성전(행주대첩, 진주대첩 등)에 몰려있는 것도 이 이유임. 수성전에서야 모루의 역할을 성벽에 맡길 수 있지만 야전에서는 과장 좀 보태서 모루가 없는거나 다름 없었거든. 


그런데 위에 조선군의 사수가 유지비가 싸게 먹혔다고 했지? 하지만 임란 이후 항왜들에게 조총 기술을 입수하면서, 조선군 안에서도 점점 포수(조총병)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면서 요구 숙련도는 낮아졌지만 이 저렴한 유지비조차도 늘어나게 되어버림. 


단적인 예로 사르후 전투 당시 조선군 3영 소속 병력 1만여명 중 절반인 5천여명이 포수일 정도로 조총병의 비율이 늘어났는데, 문제는 조선에서 이 조총이란게 돈 빨아먹는 귀신이었음. 


먼저 조총의 가격도 가격이지만, 문제는 조총을 비롯한 조총 이전에도 즐겨쓰던 각종 총통을 포함해서 조선의 열병기가 사용하던 흑색화약이 조선땅에선 수요만큼 자체수급이 안 됐단 거임. 화약 제조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인 초석(염초, 질산 칼륨)은 땅에 똥오줌 뿌려가며 염초밭을 만드는 눈물의 똥꼬쇼까지 펼쳤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모자라서 수요량의 상당수를 중국에 의존해야 했음. 그리고 다른 재료인 유황은 상황이 더 심각했는데, 숙종대에 유황 광산이 발견되어서 대량채굴에 성공하기 전까진 거의 전량을 일본에서 수입해와야 했음. 


이런 만성적인 화약 재고 부족에 시달리던 조선군은 전투에서 이겨놓고도 다음 전투에 쓸 화약이 모자라서 몇개월 동안 빌빌대던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머한 육군의 포병 집착은 조선때부터 이어져오던 유구한 전통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