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게임 번역하면서 잠깐잠깐 짬날때 대충 번역한거라 이상한 부분이 있음

검수 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이전에 쓴 글 렉카해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레지나 마리나

1940년 레지아 마리나(이탈리아 왕립해군)는 이탈리아의 3군 중 가장 준비가 되고 더 나은 장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39개월동안 자신들보다 우세한 적들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으며, 31,347명이 넘는 병력을 잃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레지나 마리네의 실상을 밝히기 위해선 추축군의 수송선을 방어 실적을 분석연구 해야합니다.


레지나 미라네의 전략

1940년부터 1943년 초반까지 진행된 지중해에서의 전투는 통신과 보급로를 확보하고 지키기위한 길고 힘겨운 전투였습니다.

재해권은 이 전투에 주요 교전국인 이탈리아 왕국과 대영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에 달려있었습니다.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리비아 연안으로 출항중인 이탈리아의 수송선 '에스페리아'(왼쪽)과 '마르코 폴로'(오른쪽)


레지아 마리나는 본 이탈리아에서 리비아의 항구, 특히 트리폴리와 뱅가지에 이르는 수송로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영제국 또한 몰타섬을 통해 제보급을 실시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장큰 규모의 해전이 적의 수송대를 방해하거나 제보급 작전을 방해하기 위한 행동에서 비롯됬다는건 놀랄 일도 아닙니다.

그 예로, 칼라브리아 전투, 스파르티벤토곶 전투, 엑세스 작전, 미늘창 작전, 1942년 6월 중순과 1942년 8월 중순 시르테 만에서 일어난 2 차례의 교전

(작살과 받침대 작전)이 있습니다.

지중해 해전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재해권 확보를 위한 전쟁에서의 양측의 선택과 행동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단순히 상대방을 전멸시키는것은 그들의 결정적인 목적이 아니였습니다.


특히나, 한번 손실된 주력함을 충원 할만한 산업력을 가지지 못한 이탈리아가 더욱 그랬습니다.

심지어 구축함 건조에도 몇 가지 한계점에 직면하기도 했었습니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주력함이 손실되어도 충원 할 수 있을정도의 우세한 적들을 상대로 위험하고 무의미한 교전을 피했습니다.

이는 레지아 마리나가 중부 지중해의 재해권 확보를 위해 현존함대전략과 유사한 전략을 개념화 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제한적인 항구

이미 1938년 이탈리아 고위 지휘부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을 분석하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두 국가를 상대로 리비아에 재보급을 실시하냐였습니다.

여기서 교려해야 할 점은 리비아의 3대 항구인 트리폴리, 토브루크와 뱅가지는 평시에 각각 9척, 3척 5척 만을 동시에 관리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2척의 주간 호위함을 편성하고 3~4척의 수송선을 보호하도록 하였습니다.

1941년 트리폴리에 성공적으로 도착한 M13/40전차


전쟁은 이러한 현실을 악화시켰고, 1941년 1월 토브루크가 함락되었고, 이어 뱅가지도 함락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레지아 마리나는 육군을 충원하기 위해 매일 배를 바다에 두게 되었으며, 이후엔 아프리카 군단도 충원을 해야만 했습니다.

뱅가지를 수복함에도 불구하고 보급 처리량이 크게 줄었고 항구는 끊임없이 공습을 받았습니다.

이로인해 롬멜의 전차군단을 보급하기 위해 사용되던 트리폴리만이 남게되었습니다.

불행이도, 트리폴리의 보급 처리량은 1941년 중반까지 50%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송선이 도착한 뒤에도 최전선 후방에 위치한 보급 센터로 가기 위해선 육로 수백Km를 이동하거나 소형 보트를 통해 해안선을 따라 가야만 했습니다.


분석 결과

결과적으로,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총 993척의 추축군 수송선이 리비아로 향했습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수송선 1.9척, 호위함 2.2척이 보내졌습니다.

아래의 통계를 보면. 레지아 마리나는 병력의 91.6%와 85.9% 물자를 본토에서 북 아프리카로 안전하게 수송하였습니다.

리비아로 보내진 추축군 병력과 실제 도착한 병력을 비교한 통계자료 

이는 레지아 마리나가 자신들의 주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심각한 기술적, 물적 제약속에서 우세한 적을 상대하고도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데카네스 제도와 알바니아에서의 레지아 마리네 호송대

같은 기간, 레지 마리네는 도데카네스 제도와 알바니아로 가는 수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는 추축군이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전을 펼침에 따라 2차적인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총 3116척의 수송선(한달에 86대) 파견하였으며, 평균적으로 1.9척의 수송선과 0.83척의 호위함을 파견하였습니다.

수송선들은 항로를 따라 98만 2029명의 병력, 자재와 장비 등 총 1170만 50t을 수송하였으며, 발생한 손실률은 0.5% 보다 훨씩 적은 수준이었습니다.


대영제국 해군의 공격과 이탈리아의 수송선


리비아로 향하는 이탈리아의 수송선에 대한 대영제국 왕립 해군의 공세는 주로 잠수함과 구축함을 이용한 공세였습니다.

추가적인 공세는 몰타에 위치한 기지에서 발진한 다양한 종류의 항공기들로 부터 발생하였습니다.

불행이도, 이러한 종류의 공세를 기록한 정확한 자료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래의 그래프는 해당 유형의 공격 이력과 피격당한 함선 수를 요약한 그래프 입니다.

피격당한 함선들이 무조건 침몰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첫번째 그래프는 1941년 4월, 1941년 11월에서 12월, 1942년 12월등 3 기간 동안에 주로 공세가 집중됬음을 알 수 있습니다.

'K 함대'라고 알려진 구축함과 경순양함으로 구성된 함대가 1941년 10월에 배치된 시점과 일치합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추축군 호송대의 호송 효율은 몰타에 주둔한 함대와 루프트 바페,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가 가하는 압박의 수준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다는 점 입니다.

그 예로, 시칠리아에 주둔해 있던 독일 제 10 비행단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 부근으로 재배치됨에 따라

연합군은 간신히 몰타에 재보급을 수행 할 수 있었습니다.


1941년 말과 1942년 후반에 추축군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K 함대는 반격에 나섰습니다.

두번째 그래프는 잠수함의 공세가 훨 씬 더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로 U급 잠수함이 주로 이러한 공세에 투입되었으며, U급 잠수함은 지속적으로 추축군의 잠수함에게 압박을 가했습니다.


레지나 마리아의 호송대

수송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레지나 마리아는 대전기 시절의 어뢰정, 보조함, 스피카급과 오르사급의 신형 어뢰정과 나비가토리급, 다르도급, 폴고레급,

터빈급 구축함등을 배치하였습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해당 함급들의 함선들은 끝임없는 활동으로 인해 수량이 부족해지자,

솔다티급, 마에스트랄레급과 오리아니급 구축함들이 순차적으로 수송선단 호송 임무에 투입되었습니다.


1942년 말에 뛰어난 성능의 가비아노급 호위함이 수송선단 방어에 투입되었습니다.

하지만, 수송선단을 두고 벌어지는 막바지 전투에서 변화를 일으키기엔 너무나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때때로 보급품의 긴급 성과 그에 따른 경로의 위험성에 따라 콘도티에리급 혹은 타란토급 순양함이 고가치 수송선을 호위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투입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K 함대가 활동할 땐 보조 호송함으로서 카보우르급 전함과 안드레아 도레아급 전함이 투입되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공군의 역할

수송선단 위를 비행중인 SM.79 뇌격기


레지아 아에로나우티카(이탈리아 왕국 왕립 공군)와 해군소속 공군은 공중 엄호와 대잠전을 수행 할 목적으로 호송대에 합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역활한 다양한 장비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엔 CR.42, G.50과 MC.200 같은 전투기부터, SM.79 뇌격기와 수상비행기인 CANT Z501, Z506.

Ro.43과 피아트 RS14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현대적인 교리의 부재와 무선장비의 부족으로 공군과 해군과의 조직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튀니지로 가는 죽음의 항로

2차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롬멜이 지휘하는 전차군단의 패잔병들은 빠르게 이집트에서 퇴각하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리비아에서 철수 한 후 튀니지에 집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북아프리카에 남은 추축군의 잔존병들은 끊임없이 재보급을 요청하였고, 레지아 마리나는 다시한번 끈질기게 매일같이 호송대를 조직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6개월 동안 276척의 수송선이 투입되었으며, 하루 평균 1.6척의 수송선과 2척의 호위함이 출격하였습니다.

수송선이 부족해진 레지아 마리나는 매달 62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튀니지로 물자와 인력을 수송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레지아 마리나는 K 함대와 알제리 보나에 본부를 둔 새로 편성된 K 함대와 대치하였는데, 그곳엔 주로 폭격기로 구성된 5000대가 넘는

연합군측 비행기와 재개된 영국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개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레지아 마리나는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함선과 인력에 큰 피해를 입게되었습니다.

1942년 11월에 344척의 수송선을 사용 가능했던 추축군은 해당 전역에서만 몇 척의 호위함을 포함하여 함선 254척을 잃었습니다.

이 중 1943년 4월에만 29척을 잃었습니다.

대략 93%의 추축군 병력과, 71%의 장비가 튀니지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지중해 수송선단을 통해 튀니지로 수송된 인력 그래프 

추축군 호송선단을 통해 튀니지로 수송된 장비 그래프


결론

이 자료를 통해 이탈리아 해군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여 북아프리카에 대한 보급로를 효과적으로 유지했음을 보여줍니다.

출항한 수백대의 추축군 수송선 가운데 91.6%의 인력과 86% 물자와 장비가 무사히 리비아에 도착하였습니다.

또한 튀니지엔 93% 인력과 71%의 물자와 장비가 성공적으로 도착하였습니다.

특히 북 아프리카 전역의 중요한 순간 특히 1941년과 1942년 초 추축군 보급로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손실률 또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보급과 정보 그리고 기술도 열악했던 점을 고려해도, 레지아 마리나는 추축군의 패망 직전까지 보급로를 지켜냈습니다.


인용한 자료들

Giorgio Giorgerini, La Guerra Italiana sul mare: la marina tra vittoria e sconfitta 1940–1943, 

Edizione Mondadori (2001). J. Lopez, V. Bernard, N.Aubin, World War II: Infographics, 2019. 

Pier Paolo Ramoino, Una storia “strategica” della Marina Militare Italiana, Rivista Marittima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