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102186741?p=1

2편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102227487?p=1


조선 각 도의 조운을 담당하던 전운국은 청나라의 권유로 조선 최초의 해운회사 '이운사'를 세우는데...!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근대 해운사 이야기다. 다들 눈물 닦을 휴지 준비하도록.


사진은 전운국 -> 이운사로 소속이 변경된 당시 이운사 소속 '창룡호'다.


이운사는 전운국이 가지고 있던 기선 4척 외에도 1천톤급의, 당시로서는 조선이 보유한 선박 중 가장 큰 선박을 보유 했을 정도로 활동에 의욕이 넘쳤다. 설립 멤버는 민영준, 정병하, 우경선 이었으며 이들은 당시 조선의 관료였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민영준은 민영휘의 본명이며, 당신들이 아는 그 친일파 민영휘가 맞다.

정병하는 김홍집 내각에 들어가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에 우호적으로 변해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민씨에게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 보고했으며 폐비시키는 것에 힘도 많이 썼다.

그러다가 아관파천 직후에 이완용 심복한테(!) 경무청 앞에서(!!!) 피살되는 인물이다.


아무튼 이운사는 사장 민영준(민영휘), 부사장에 정병하, 사무장에 우경선이었지만...

문제는 이들도 해운회사 관리가 처음이었단거다.

이운사는 여객운송, 남해안과 서해안의 조운등의 업무를 맡았지만 경영 관리에서는 일선까지 관리가 들어올 정도로 관의 간섭이 심했고, 윗선은 낙하산도 많아 효율적인 경영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해외로부터 차관, 용선 실무, 재무 회계에 어두운 사람들이라서 사기를 당하는 일도 잦았는데 문제는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선박에서 근무하는 해기사, 즉 항해사와 기관사 같은 고급인력은 모두 일본인이 고용되었고, 그로 인해 육상 - 선박 간의 업무연계도 쉽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운사는 선원들의 불친절함, 일정표 위반도 수시로 문제가 되었고, 그로 인해 운송과 여객이 줄어들어 일본 상선과도 경쟁이 불가능했다. 


갑오개혁 이후 전운국이 없어진 뒤, 일본에서 13만원의 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이운사가 가지고 있던 선박들의 위탁경영을 요구했고, 돈에 허덕이던 조선 정부는 이를 허가하며 일본의 '니혼유센'(일본우선)회사가 위탁받게 된다. 이후 니혼유센은 연안항해의 독점권을 장악, 모든 선운업자는 이운사의 허가를 받아야만 영업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수 많은 배들이 개항장을 드나들고, 무역활동을 왕성히 하자, 돈 냄새를 맡은 민民 에서도 이를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들중 몇은 실제로 해운회사를 차려 일선에 나타났으나, 경영 흑자로 이득을 본 회사는 아주아주 드물었다. 

대부분 차관으로 배를 사온터라 자금압박이 심했고, 경영을 할 줄 모르니 적자도 많이 봤다. 게다가 선박을 운항하는 입장에서도, 육지에서도 일본인들이 운항에서 일하고 있었고, 배도 일본에서 건조되어 오래 된 배들을 굴리다가 조선으로 도입하였으며, 운항의 핵심이던 항해사와 기관사도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지고 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해운사이던 '대흥상회'는 가지고 있던 '대흥호'를 자금압박에 못이겨 매각을 공고하고 경매를 받았는데, 미국인 레이크(대흥호의 전 선주이다.)의 획책으로 구입선가의 10분의 1에 낙찰이 되어버리며 대흥상회는 1년만에 파산했고, 이운사를 발족했던 사람 중 한명인 우경선은 인천에서 일본인 '토리 리키타로'와 '광통사'를 운영했는데, 3년간 흑자를 보다가 영업부진으로 1901년에는 회사가 통째로 토리 리키타로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리기까지 한다.


물론 성공 사례도 있다. 인천을 모항으로 하던 '삼산회사'와 '의신회사', 부산을 모항으로 하던 '우체기선회사'와 '협동기선회사' 등이 있다. '협동기선회사'는 '대한협동우선회사' 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대한협동우선회사는 조선 정부로부터 우편물 체송이나, 연안운송을 도맡아 했지만 그렇다고 일본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이중 가장 크던 것은 대한협동우선회사인데 이운사가 운영하던 선박을 조선정부로부터 공여받아 운항했음에도 1903년부터 경영악화에 시달리더니 일본 석탄회사로부터 석탄값이라며 배를 일방적으로 뺏기기도 했고, 일본회사 선박과 사고가 났을때도 일방적으로 돈을 요구받고 배상하는 일까지 터지며 결국 1904년에는 파산하고 만다....


그러나! 그렇다고 조선정부와 칠전팔기의 한국인들도 이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우선 가장 먼저 한국인 해기사를 양성키로 한다.


한국인들은 이전부터 최하급 선원으로 일본인 밑에서 일을 배웠다. 그중 적지 않은 수가 해기 기술을 어깨너머로, 혹은 일본인들에게서 직접 배웠을 것이고, 그들 중 몇몇은 실제 항해사, 기관사로 일했을 가능성은 배제 할 수 없지만 그들에 관한 기록은 없다.

우경선은 구한말 선장으로 일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어떤 루트로 선장이 될 수 있었는지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해군사와 해운사에서 중요한 바로 이 '신순성'이라는 인물은 여기서 나온다.

신순성은 박종서, 한만원과 함께 1895년 국비로 일본에 있는 선진 해양교육기관, 도쿄고등상선학교(현재의 도쿄해양대학교)에 유학을 떠난다. 500여년을 이어져 온 바다에 대한 천시를 뚫고 이런 선택을 한 것 만으로도 이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901년, 박종서와 한만원은 귀국했고, 한만원은 귀국 후 일시로 해운업에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뒤는 알 길이 없으며, 박종서는 귀국 후 무엇을 했는지 아무 기록이 없다.

신순성은 6개월 뒤에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 대한우선협동회사에서 근무하였고,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의 '함장'으로 근무한다. 

양무호는 해원양성의 역할도 겸했다 하니 아마 신순성은 해기사들의 양성에 힘썼을것이다.

신순성은 여러 배에서 근무를 했지만, 유일한 '한국인 해기사'였으며, 일본에서 약소국에 대한 멸시와 괄시를 견디며 귀국한 신순성은 한국인 최초로 갑종 해기면허 주인이 되었다.(현재의 1급 항해사 자격증) 이 모든 것은 청춘의 꿈이었으며, 해양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젊은 조선인에게는 한줄기 희망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진은 당시로서 봐도 최신 기선이던 광제호. 일본에게서 거금을 주고 직접 건조하였으며 해안경비, 등대 순시, 세관 감시 등의 업무에 쓰였고, 함장으로는 '신순성'이 발탁됐다. 


그러나 이렇게 앞으로 밝은 길만 있을 것 같던 한국 해기사들과 신순성은, 1910년 경술국치를 겪으며,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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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안쓰러운데 일제강점기 시기 되면 더 암울해진다...

다음화는 적을지 말지 고민좀 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