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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하루에 2만 명 이상의 양국 국민들이 왕래하며 민간교류도 활발하고 교역 규모도 크다. 하지만 정치나 역사 면에서는 감정적 대결이 일상화되었다.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위안부 문제에 이어 북핵 문제가 모두 두 나라의 첨예한 관심사이자 인식이 완전히 갈리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로서는 당연히 양보할 수 없는 문제들이고, 일본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국 두 나라는 친구가 아닌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를 일본 탓으로 돌린다고 하더라도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이미 전쟁의 경험과 어두운 과거사를 가지고 있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양국 간에 신뢰가 부족해지고 대결과 갈등이 이어진다면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든 대결이 아니라 공존을 선택해야 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경제와 정치 문제뿐 아니라 역사와 국민 감정 문제까지 끼어든 한일관계는 그야말로 특수해서 갈등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대한 고민을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한 것이 아니다. 400여년 전 한일관계를 둘러싼 근본적인 고민과 숙고의 결과로, 혹은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통신사’이다. 나는 통신사의 역할과 활약상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과 일본의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지식인 집단이 인식하기에 두 나라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믿음과 소통의 부족’이었다. 양국 간의 신뢰가 부족해지자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고, 임진왜란은 양국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通信’-믿음을 통한다-이라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만남과 교류의 가장 큰 목표는 신뢰 회복이었다.


통신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둔 부분이 있다. 통신사는 왜구에 의한 일방적인 약탈을 교역과 공존이라는 틀 안으로 전환시켰고, 임진왜란이라는 침략과 전쟁을 평화와 공생의 관계로 만들어 갔다. 양국의 노력으로 교류가 활발할 때는 약탈과 전쟁은 없었다. 반대로 교류가 끊어지면 대결과 침략이 다시 일어났다.


지금 한일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일제의 국권 침탈과 이어진 강점의 역사도 한 요인이겠지만 협의와 소통의 부재도 한 요인이 되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렇게 서로 이견이 생기고 감정적 대립이 고조되는 때일수록 관계를 단절하고 교류를 줄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한일 경제 갈등에도 충분한 협의를 거치지 못한 합의나 조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분노시킬뿐더러 이후 한일 관계는 진전보다는 퇴보를 거듭할 것이다. 당연히 오늘의 우리도 어떤 문제에 봉착할지 모르지만 신뢰의 회복과 더 많은 교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에 대한 무시와 감정적 배척은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지 모르지만 결코 온당한 길은 아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수도 있고, 한미일-북중러가 난마처럼 얽힌 동아시아의 외교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을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1604년 포로 쇄환과 강화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 간 조선 정부의 사절단‘탐적사’는 일본국왕(덴노) 명의의 강화요청서,임란 당시 왕릉도굴범의 소환, 그리고 조선 피로인의 송환을 조건으로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국서를 위조하고, 도굴범은 잡범으로 대치했다. 물론 조선 측에서도 이를 알았지만 외교적인 실리를 얻기 위해 1607년 통신사의 파견을 재개했다. 이런 자세와 선인들의 지혜가 한일관계의 실마리를 제공하는게 아닐까.


좋든 싫든, 밉든 곱든, 일본은 이미 우리와 떼려야 뗄수 없는 나라이다. 물론 공존을 위해선 역사의식과 미래에 대한 비전의 공유가 전제되어야 하고 양국이 과거사의 오해나 왜곡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할 것이다.


통신사가 양국의 역사를 통해 증명된 평화적 외교 노력의 살아 있는 증거물이고, 당대의 동아시아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의 수준을 보여주는 지적 유산이며, 항구적인 평화공존 체제와 이문화 존중을 지향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유산인 만큼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여 미래의 자양분으로 삼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