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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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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리? 그게 지금 내 모습의 이름인가 보군.'


자신을 디미트리라 부른 중년 남성의 말에 나는 그것이 지금 이 육체의 이름이라 판단하고 이 저택의 주인이였던 남자를 자세히 살펴봤다. 외관만 보면 50대에 막 접어드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기엔 자기 관리를 정말 잘한 것처럼 건강하고 여유로움이 넘치는 남자였다. 그 옆에 있는 쉬라이크는 현실에서와 똑같이 입 부분에 스피커가 장비된 머리를 한 걸 빼면 전형적인 집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쓸데없이 포인트를 준 나비 넥타이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온 내 반응에 쉬라이크가 남자에게 말했다.


"황혼의 주인이여. 저는 이만 물러나도 되겠지요?"


"그래. 디미트리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남자니까 네 경호는 필요 없지. 느긋하게 밑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도록 해."


"기꺼이. 그리고 디미트리. 늘 그래왔듯 황혼의 주인을 즐겁게 해주면 된다. 자유로운 소재의 이야기를 마음껏 늘어놓으라고. 그것이 허구든, 실화든 간에 황혼의 주인은 만족할테니. 하. 하. 하."


"잠깐만...!"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당황한 내 표정을 보고 노골적으로 꼴 좋다는 비웃음을 흘린 쉬라이크가 밖으로 나가버리자 나는 당황해서 황혼의 주인이라 불린 남자를 보고 있었고 그 남자도 피식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편히 앉게, 디미트리. 쉬라이크의 저런 태도는 자네도 익히 봐왔던 게 아닌가. 자, 이제 자네가 겪었던 이야기들을 내게 들려주게."


"이야기라니... 갑자기 그렇게 말해도 저는..."


남자가 보여주는 여유로운 모습과 홀로 남겨진 상황 때문인지 무심결에 존대를 하던 나는 남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자 또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넨 정말 겸손하군. 처음 이곳에 왔던 모습 그대로야. 하지만 알아두게. 지나친 겸손은 때론 죄악과도 같다는 것을. 자네가 이곳에서 새긴 시간은 분명 가치있는 것이고 난 그런 자네를 신뢰하고 있기에 이렇게 대하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나를 한 명의 부호가 아닌, 에단 리라는 한명의 인간으로 봐줬으면 좋겠어."


"...미안하다. 이런 건 영 익숙하지 않았거든."


"그래. 바로 그거라네. 역시 자넨 이해가 빨라서 좋아. 그렇기에 외인 부대에서 자네가 겪은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나에게 들려주고 있는 거겠지? 오늘도 자네의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네.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텐가?"


에단 리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의 반응은 분명 오랜 친구를 대하는 듯한 책망과 경고의 어조가 물씬 풍겼고 그래서 나는 동년배 친구를 대하듯 다소 어색한 반말을 했지만, 에단은 오히려 만족스러워 하는 표정으로 아까전과 같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돌아와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 요청했다. 당연히 나는 대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외인 부대에 속했던 디미트리라는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조차 몰라 당황하고 있던 그때, 이 상황이 가상 현실이라는 것과 쉬라이크가 나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이건 분명 키리시마 스캔들처럼 특정 전개로 나아가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구조야. 거기다가 쉬라이크는 유일하게 데이터가 아닌 현실의 존재이고. 그렇다는 건 아까 쉬라이크가 한 말은...'


"디미트리? 자네 괜찮은가?"


"아,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는 생각. 음... 그래. 이 이야기는 어때?"


어째서 내가 하필 이 주제를 선택했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그 사건이 내가 오르카 호의 사령관이 되고 나서 수도 없이 겪은 철충과의 사투나 그런게 아닌 바이오로이드 간의 질투나 경계에 휘말려 일어났던 '이벤트'에 가까운 사건이었기 때문일 수도, 지금은 오르카 호의 소중한 일원이 된 그녀를 떠올려서 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그 이야기를 적절한 각색을 거쳐 에단에게 들려줬다. 나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 이야기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그러니까 한 남자를 지독히도 사랑한 여인들이 요리대회를 열어서 서로 사랑을 쟁취하겠다고 온갖 말썽을 일으켰다는 건가? 인간에게 배터리를 먹이겠답시고 전기 충격을 가하거나 실수로 독버섯을 먹인다던가 같은?"


"말썽... 수준으로 가볍게 넘어갈만한 일은 아니었지. 그녀들 중 한명은 약을 써서라도 그 남자의 총애를 얻고 싶어했거든. 나중에 전해듣기론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그것 뿐이여서 그랬다는군."


"그건 좀 안타까운 일이야. 마치 야생에 버려졌다가 수년 만에 구조된 인간의 사례가 아닌가. 평생 배운 게 그것뿐이여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하나뿐이라면 아무리 의도가 좋았어도 결국 남자의 총애를 받긴 글렀을테니까."


"다행인 건 지금은 남자와 괜찮은 관계가 되었다고 해. 예전엔 그의 총애를 얻기 위해 음모도 꾸미고 경쟁자들을 직접 제거할 궁리도 하던 여자가 지금은 퍽 얌전해진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지."


"하하. 해피 엔딩은 언제나 환영이라네. 자네가 여태껏 들려주던 전쟁터 이야기랑은 다르지만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군."


에단은 내 이야기를 듣고 만족스러워 하며 박수를 쳤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 다음엔 어떻게 해야할지 궁리하고 있다가 누군가가 다시 방문을 열고 에단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나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바이오로이드?'


"주인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보나마나 또 삼안 산업의 직원들이겠지. 적당히 둘러대줘. 곧 갈테니."


"알겠습니다. 어머, 선객이 있었군요..."


거대한 관을 들고 있는 고딕풍 드레스를 입은 바이오로이드가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치마를 살짝 들고 인사한 뒤 물러나자 나는 에단에게 그녀에 대해 물어보려 했으나 귀찮다는듯 혀를 차고 그녀에게 지시를 내린 에단이 먼저 나에게 말을 꺼냈다.


"자네에게 말을 미처 못했군. 사실 자네가 근 한달 간 자리를 비운 사이 삼안 산업에서 자꾸 날 귀찮게 하고 있다네. 이 황혼의 저택을 사들이고 싶다면서 기웃거리고 있거든."


"그래서 표정이 마음에 안들었나?"


"당연하지. 여긴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란 곳이야. 좀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살아온 시간을 새긴 공간이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을 대지 않는 한 억만금을 줘도 팔 생각은 없어. 특히 어딘가 뒤가 구린 삼안이라면 더더욱. 내 입으로 표현하긴 그렇지만 거긴 연합전쟁으로 유라시아의 패권을 쥔 곳이 아닌가. 거기서 무슨 목적으로 이 저택을 살지도 모르는데 내가 마음 놓고 여길 팔아버릴 거 같나?"


"...그런 이유라면 함부로 팔 수 없을 법도 하네. 그럼 방해꾼은 이쯤에서 사라져도 되지?"


농담 반으로 건넨 내 말을 들은 에단은 피식 웃곤 나에게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그가 가진 알 수 없는 열정과 의지를 어렴풋이 느꼈다. 곧 내가 방을 나서는 순간 내 의식은 곧바로 사라졌고 정신을 차렸을 땐 장치의 고글이 벗겨진 상태로 멍하니 낡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정신을 다시 깨운 건 얼마나 계속 깨어있었는지 모를 쉬라이크의 새된 음성이었다.


"정신이 좀 드나 인간?"


"으... 머리가 좀 띵하긴 하지만 괜찮은 거 같아. 하지만 벌써 끝날 줄은 몰랐는데?"


"똑똑한 꼬맹이가 이 장치는 게임으로 비유하면 스테이지 하나 분량의 기록만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즉 이 저택 곳곳에 감춰진 다른 장치를 찾아서 계속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 쓸만한 보상은 얻은 거 같나?"


"...물질적인 보상은 없지만, 어쩌면 앞으로의 공략에 필요한 키워드는 알아낸 거 같아. 오르카 호로 돌아가야겠어."


"그래. 나도 가서 마땅히 찾아야 할 내 몸을 되찾고 싶다! 악의 세계의 미련의 꽃인 쉬라이크는 적합한 육체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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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하기 전까지 완결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