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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를 처음 봤을 때 리제가 느낀 것은 예상대로 막연한 친근감-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음.

그렇게 영향이 강한 건 아니긴 해도 경외, 혹은 위축.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쫄았다'에 가까운 감각도 공존했거든.

리제가 레아 앞에서는 좀 더 얌전해진다는 설정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설마 이것 때문인가.


뭐, 관점을 바꿔보면 그렇게 나쁘기만 것은 아니었지.

평범한 바이오로이드와는 달리 설정된 기억도 없는 입장에서 쌩으로 언니라고 부르는 건 그것대로 허들이 높았으니까.


- 안녕하세요, 언니.


해서 자매를 찾는 레아에게 조금 어색하게 손을 들어보였더니, 레아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만면의 미소를 지음.


- 어머, 리제구나? 어쩜, 못 알아볼 뻔 했네!


그야 디폴트 상태랑은 차림새부터 화장까지 이래저래 달라졌으니 그렇겠지요.

리제가 속으로 대꾸하는 동안 레아는 붕 하고 코앞까지 날아오더니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함.

너무 거침없는 행동이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굳어있는 걸 어떻게 이해한 건지 머잖아 숫제 끌어안고는 토닥이기까지 했지.

결국 놀람 반 숨막힘 반으로 버둥거리는 걸 보고 사령관이 끼어들어서 갈라놓은 다음에야 리제는 레아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음.


- 아, 죄송해요.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전혀 죄송하지 않은 어조로 그렇게 변명하고, 사령관과 리제의 관계를 들은 다음에는 천연덕스럽게 "그럼 제가 처형이네요? 주인님도 절 누나처럼 여기셔도 돼요!"라는 발언까지 던진 다음에야 레아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라비아타랑 다른 페어리 시리즈를 만나러 떠남.


저렇게 하나하나에 과하게 법석을 떠는 태도 때문에 원작에서 아줌마 같다는 소리를 듣…

까지 생각하다가 어쩐지 정전기가 오르는 기분이 들어서, 리제는 황급히 저녁에 먹었던 식단으로 의식을 돌렸어.


*   *   *


-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리제의 언니는.


레아와의 대면이 그날의 마지막 일정이었으니만큼 자연스럽게 함장실에 돌아온 후의 대화도 레아에게서 벗어나진 않았지.

사령관의 외투를 받아서 걸어두던 리제는 그 말에 짐짓 과장되게 입을 삐죽였음.


- 제가 시달리는 게 그렇게 웃겼어요?

- 아니라곤 못하겠지만, 순수하게 보기 좋기도 했거든.

- 기본적으론 상냥하니까요.

- 응, 정말로 날씨 같았어.


태양처럼 따뜻하면서도 북풍처럼 몰아치는 게.

화나게 하면 북풍이 아니라 뇌운이 되어버릴 걸요, 하고 받아주니 주의할게, 라는 답이 돌아오고 각자가 실내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자연스럽게 짧은 침묵이 찾아옴.


이대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가능은 했겠지.

설령 하루 24시간을 함께 하며 아무런 특별한 일이 없었더라도, 두 명은 그 평범한 일상에 대한 대화조차 즐거워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 응?


두 세번 정도 입을 열었다 닫긴 했지만, 정작 문장을 이루는 목소리는 또렷했음.


- …저는, 레아 씨가 자매로 느껴지지는 않아요.


막연한 친근감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라고 해도, 결국 입력된 정보 - 혹은 '설정' 이라고 불러야 할 - 이 없는 이상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었어.

인간으로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리제의 가족에 가까운 건 페어리 시리즈가 아니라 좌우좌였으니까.

그나마 다프네나 아쿠아는 입장상 동생이었으니만큼 돌봐준다는 느낌으로 대하면 존중받는 정도로 충분했지만, 역으로 자신을 동생 취급하는 레아랑 마주하니까 그 정도로는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이질감이 들고야 말았던 거야.


눈을 질끈 감은 리제를 잠깐 바라보다가, 사령관은 다가와서 자연스럽게 리제를 들어 무릎에 앉히고 달래듯 물어보았음.


- 그건, 리제 너의 특이성하고 관계가 있어?

- 네.


아무리 타고난 통찰력이 뛰어나다 한들 짐작할 수 있을 리 없는 비밀과.

리제가 내심 자기도 참 어지간히 귀찮은 여자라며 자조하는 동안, 사령관은 나름의 정리를 끝낸 건지 리제의 옆머리를 넘겨주면서 시선을 마주함.


- 나도 상식에서 이야기하는 '가족'을 가져본 적은 없어서 이게 제대로 된 답일지는 모르겠는데.

- 말씀하세요.

- 리제는 레아가 마음에 들지?


신체의 작용 덕분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틀린 것도 아니라 고개를 끄덕였더니, 답지 않게 자신없어하는 어조의 대답이 나왔어.


- 그게 가족이랑은 다른 거야?

- …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약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부정보다 딱 반 박자 늦게 깨달음이 찾아옴.


- 그건, 당신의 이야기죠?


사랑의 종류를 나누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었지.

결국 오르카 호의 모두를 진심으로 가족이라고 여기는 입장에서는 저게 당연하단 소리였으니까.

그릇이 크다고 해야 할지, 그렇게 뛰어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여전히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조금 멋쩍어하는 느낌으로 긍정하는 사내를 보자니 자신의 고민도 다 부질없어져서, 리제도 작게 웃으면서 사령관을 끌어안음.


- 하긴, 사이좋게 지내면 그게 제일이니까요.

- 그렇지?


조금 너무 친해지는 바람에 쫄지도 않게 되어서 언니 취급하는 걸 까먹더라도 그 레아라면 오히려 젊은이 취급이라며 좋아해줄 것도 같고.

티타니아가 나오면 또 달라지긴 할 것 같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겠지.

뭣보다 당장의 리제에게 급한 것은 사령관과 "사이좋게 지내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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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살짜리 에이미가 100살 넘긴 좌우좌의 보호자 행세를 하고 멸망전쟁 이후 복원된 블랙 리리스가 생존개체인 펜리르를 동생 취급을하는 것이 당연한 신비로운 바이오로이드의 세계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 :

레아가 사령관에게 자신을 누나처럼 여겨도 된다고 하는 발언을 직접 들었을 경우, 라비아타랑 마리는 내심 충격받았을 것이다

라비아타는 본인이 사령관을 동생처럼 여기고 있기 때문이고, 마리는 그 대단한 사령관님을 동생 취급하려 드는 그릇에 경탄 반 경악 반을 느낄 것이기 때문.


삼얀 외전 : https://arca.live/b/lastorigin/24508783

다음편 : https://arca.live/b/lastorigin/24564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