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0055745


2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0209595


3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0369956


4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0490834


5편 : https://arca.live/b/lastorigin/30485059


----------------------------------------------


#16. 조급함 때문에 때로는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일보고 하러 왔어.”


레오나가 서류를 들고 함장실에 들어오자 그는 자세를 바로 잡으며 미소 지었다.

보고 하라며 고개를 까딱 거리자 레오나는 서류를 책상 위에 올리곤 보고를 시작했다.

그는 레오나의 말을 들으며 서류를 한장 한장 넘기며 읽기 시작했다.


“..해서 발키리가 정찰 임무에서 복귀하여 휴식을 가지고, 베라와 님프는 임무 종료 후 자기개발 시간을 가지게 했..”


“잠깐”


그는 말을 끊고는 서류를 레오나를 향해 집어던졌다.

레오나는 펄럭거리며 떨어지는 서류더미들을 바라본다. 평소 같이 차가운 얼굴이지만, 순간적으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뭐하는 짓이야?”


“발할라 대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컨디션이 어떤지 따위는 왜 보고하는거지?”


레오나는 잠시 망각했었다. 사령관에게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그저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것, 평소 그대로 작성하여 올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인간성’의 문제.

레오나는 사령관의 인간성을 새삼 그리워졌으나 티는 내지 않고 말 없이 상체를 숙여 서류를 한장 한장 줍기 시작했다.

그는 숙인 레오나의 상체를 바라본다. 제복에 가려졌음에도 커다란 계곡이 보이는 듯한 야한 기분. 당장이라도 명령을 써 그녀를 자신의 노리개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백여년동안 동면한 그의 아랫도리의 사정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에 쳐지지 않는 텐트에 당황하였다. 당장이라도 닥터에게 찾아가 검사를 받고 싶었으나, 한낱 바이오로이드에게 성적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의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먹음직한 밥상 앞에서 침이나 흘리고 있는 개 신세라니. 이 얼마나 비참한가.


“다음부턴 중요 내용을 제외하곤 보고 하지마. 두번은 없어. 레오나.”


그는 레오나의 가슴을 쳐다보기만 하다, 급격히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책상에 발을 뻗어 올리자 바닐라가 덜컹하고 문을 열어재꼈다.


“또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주인님의 책상에서 발을 치우세요.”


바닐라가 노려보자 그는 피식 웃고는 의외로 순순히 발을 내렸다. 그러곤 일어나 바닐라 앞에 섰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닐라가 바닥에 쓰러지자 레오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다.

하얀 메이드복의 명치 부분에 선명하게 발자국이 남았다.

그는 이 건방진 메이드가 분명 숨이 막혀 컥컥대고 있을 줄 알았으나 바닐라는 곧바로 일어나 이를 악물고 새어나오는 신음을 참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손을 높게 들어올리자 레오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함장실에 울렸다.


“그만.”


레오나의 목소리에 손을 멈춘 그는 고개를 돌려 레오나를 쳐다보았다.


“그만?"


레오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눈을 마주본다.

광기. 광기에 찌든 눈이 살벌하게 반짝이며 레오나를 관통했다. 레오나는 기억에만 남은 구 인류를 떠올렸다.

경험의 차이는 이토록 크구나.


“대원들한테 폭력을 쓰다니 무슨 짓이지?”


“못 들었어? 저것이 주인님 구별도 못 하잖아.”


“사소한 실수일 뿐이야. 그릇의 크기를 키우도록 해.”


레오나는 말을 뱉고 함장실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완벽했다. 정확히는, 그의 거친 손이 그녀의 하얀 볼을 움켜쥐기 전까지는 완벽했다.


“실수? 주인을 못 알아보는게 메이드가 할만한 실수야?”


바이오로이드의 신체로 한낱 인간의 손을 뿌리치는건 일도 아니다.

레오나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레오나.. 내가 니년의 계획을 모를 줄 알았어?”


그가 레오나의 귀에 킥킥대며 속삭였다.

레오나의 눈이 커졌다.

실수한 부분이 있었나? 왜 거부할 수 없는거지? 마음 속 커져만 가는 의문을 제외하곤 레오나는 두 눈을 찡그리며 그를 노려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왜 표정이 그래? 그래, 날 속일 땐 기분 째졌겠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건 너희인데 말이야.”


소름 끼치는 목소리와 함께 그는 레오나의 귀를 혓바닥으로 핥았다. 레오나는 등 뒤로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소름을 느꼈다.

바닐라 역시 한마디 거들지도 못하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있기만 할 뿐이다. 인간을 거부할 수 없는 바이오로이드의 태생적 한계가 그녀들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여 가만히 서있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게 만들었다.


“레오나, 발키리를 불러. 명령이다.”


레오나는 복원된 이후 단 한번도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한 적도, 자신의 판단을 후회한 적도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자신의 무능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어.”


레오나의 얼굴에서 손을 떼자 레오나는 분한 듯 고개를 떨구곤 척척 함장실에서 나갔다.

바닐라 역시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풀린 기분을 느끼곤 레오나를 따라갔다.

그는 커다란 카타르시스가 온 몸을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가장 콧대 높은 지휘관을 자신의 장난감으로 만들었다는 생각, 오르카호의 진정한 사령관은 이제 자신이라는 생각, 자신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동면에 들은 것이 정답이었다는 생각.


그러나 바이오로이드들은 사령관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기분 나쁜 일이다. 뒤에서나 할 얘기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진정한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그는 발키리를 사령관을 두고 온 섬으로 파견보내 저격을 할 계획이다.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는 바이오로이드는 사랑하는 자신의 진정한 주인의 머리에 총알을 박고 돌아와, 증오하면서도 새로운 주인을 섬기게 될 것이다.

절망하는 바닐라와 레오나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생각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 수 없는 쾌감이 그를 덮었다.

그리고, 나의 그것만 다시 돌아온다면, 이 오르카호는 나만의 낙원이 되리라. 그는 의자에 털썩 앉아 미소 지었다.



#17. 리오보로스의 유산?



"로크오빠."


모두가 잠든 밤, 절전모드에 들어간 로크를 누군가 부르자 로크의 붉은 안광이 깜빡깜빡 거리다 작은 소녀가 있는 곳을 찾아 비춘다.


[닥터군요. 이상이라도 있었습니까?]


닥터는 로크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는다.


"그런건 아니야. 오늘은 오빠한테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왔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호경을 머리로 올리며 닥터는 패널을 켰다.

로크는 소녀의 눈 밑에 깔린 짙은 그림자를 보며 이 소녀가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는걸까 의문을 품었다.


"이번에 새로 온 인간님이 우리 오빠를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린 거 알고 있어?"


[알고 있습니다.]


"좋아,좋아. 알고 있다니까 이야기가 빠르겠네."


닥터가 패널을 조작해 로크에게 공문을 전송하자 로크는 머리 속에 들어온 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상자가 발키리군요.]


"맞아. 그리고 발키리 언니를 작전 지역까지 보낼 AGS를 파악하라고 했는데, 오빠를 추천하려고."


[잘 못 찾아오셨군요. 저는 새로운 사령관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닥터는 바로 그거야!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눈을 빛낸다.

원하던 답을 들은 닥터는 생각대로 계획이 흘러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최악의 경우엔, 로크의 모듈을 강제적으로 손 볼 계획이었으나 수고로움이 많이 줄어들었다.


"오빠는 새로운 인간님에 대해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지?"


닥터의 물음에 로크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닥터는 로크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빙긋 웃는다.


"오빠의 말을 듣고나서 인간님에 대해 조사해본 것들이 있어. 사실 그동안 헷갈렸는데, 레오나 언니가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단 말 듣고 확신할 수 있었어. 금발 백인이면서 바이오로이드들에 대한 명령권을 우선적으로 가지는 인간은 별로 없지. 결정적으로 과거 앙헬 리오보로스와의 자료를 대조해봤을 때 유사한 점이 많더라고?"


닥터는 패널에 앙헬 리오보로스의 사진을 띄워놓고, 탈론 패더가 찍은 그의 사진을 바로 옆에 띄워놓는다.

따로 본다면 모를 법할 정도로 닮지 않았지만 분명 닮았다.


"앙헬 리오보로스를 실제로 본 언니들에게 보여주니까 깜짝 놀라는 거 있지? 하긴, 시간이 오래 지났고, 금발 백인은 흔하니까 모르는게 당연해."


대충 모든 정황을 알게 된 후, 닥터는 생존 개체 중 블랙리버의 수장을 만났을 법한 높은 계급을 가진 바이오로이드들을 찾아갔다.

마리는 자신은 앙헬 리오보로스를 명령으로만 접했기에 정확한 판단이 불가하다 했고, 용은 파견 나가 있어 아직 그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라비아타는 여러 정황들을 보았을 때 확실히 같은 핏줄이 맞다며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였다.


"사실 여기 오면서 오빠가 '앙헬 리오보로스'의 명령을 따르는지, '리오보로스 가문'의 명령을 따르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는데 확신이 섰어."


자존심이 강한 AGS인 로크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안광을 번뜩인다.

닥터가 빙긋 웃으며 기분 나빴어? 하고 묻자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전 과거에도 앙헬공만을 섬겼고 지금은 사령관 각하의 명령을 들을 뿐, 다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습니다.]


"그니까, 로크 오빠가 우리 오빠를 지켜줘야해."


닥터는 로크에게 타이런트를 제외한 AGS들은 이미 명령 권한이 그에게 넘어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바닐라를 구타한 후 자신에게 권한이 완벽히 넘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콘스탄챠에게 명령하여 권한을 모두 위임 받았다.


"슬프게도, 발키리언니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사랑하는 오빠한테 총을 겨눠야한다니.. 끔찍한 일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발키리 언니를 제압해줘. 다치지 않게. 로크 오빠한텐 쉬운 일이잖아?"


[생물의 생사필멸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받아들임이 당연하고, 그러지 않는 것이 추함이죠.]


"오빠, 진짜..!"


닥터가 발끈하자 로크는 고개를 닥터한테 들이밀었다.

붉은 안광이 닥터를 강하게 내리쬐었다.


[그러나 같은 인간이라도 사령관 각하와 그 자의 무게는 같지 않겠죠. 이번은 도와드리겠습니다.]


닥터는 잠시 붉은 안광에 눈을 찌푸렸다.

분명 첫 만남에 로크에게 장난을 치긴 했지만, 로크정도의 AI에게 이 정도로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 로크를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다 이내 정신이 들어 방긋 웃으며 닥터는 로크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오빠! 일이 잘 풀리면 최고급 리튬 배터리를 왕창 줄게!"


닥터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어두운 복도를 지나쳐 자신의 실험실로 향했다.

그러면서 다른 AGS와 로크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머릿 속에 로크의 설계도, 램파드의 설계도, 알바트로스의 설계도가 펼쳐놓고 틀린 그림 찾기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다르길래 저렇게 된거야?"


닥터는 땋은 자신의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실험실을 지나쳐 한참동안 복도를 걸었다.


-------


수정사항이 있어 급하게 다시 쓰다보니 필력이 엉망이네요..

원래 로크를 설득하는건 닥터가 아니라 리앤과 아르망이었으나, 리앤을 처음부터 등장시키려면 한참 걸릴 것 같아서 닥터로 했습니다 ㅠㅠ

목표는 10화 안으로 전부 끝내는겁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