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31438225 > 말랑말랑한 1편

https://arca.live/b/lastorigin/31492402 > 움찔움찔한 2편

https://arca.live/b/lastorigin/31678753 > 그렁그렁한 3편

https://arca.live/b/lastorigin/31742077 > 우울한 4편



***


 콰광!

 

 “돌격하라! 사령관 각하를 위해 싸우자!”

 “와아아아!”

 

 오르카에서 좀 떨어진 모래사장에선 날벼락 같은 폭탄 소리와 함성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뇌가 정지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아무튼 땡볕에서 구르고 기고 쏘고 난리를 치는 스틸라인 대원들을 보자 말문부터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초리로 용을 노려봤지만 용은 그저 땡볕에서 구르고 있는 스틸라인 대원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흐뭇하게 보지 말고 멈추라니까? 

 

 “오셨습니까, 각하.”

 

 때마침 마리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보아하니 마리도 똑같이 훈련에 참여하고 있는 건지 온통 모래 투성이였다.

 

 “마리! 어떻게 된 거야? 오늘 야외 훈련한다는 보고는 못 받았는데?”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오늘 그런 내용의 보고는 없었다. 설마 그 꼼꼼한 금란이 빼먹었을 리도 없고. 화가 난다기보단 당황스러운 마음에 자꾸 눈길이 훈련하는 쪽으로 갔다. 

 

 “보고가 늦은 점 죄송합니다, 각하. 하지만 내일 있을 모의전에 실제 전투 데이터를 반영하기 위해선 부득이하게 지금부터 훈련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이터?”

 “네, 지금 기술팀이 데이터를 분석 중입니다.”

 

 자세히 좀 말해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귓가에 청량한 목소리가 쨍하고 울렸다.

 

 “오빠!”

 “닥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애가 쫄래쫄래 달려오고 있었다. 

 

 “용 언니랑 같이 있다 왔구나?”

 “…….”

 

 미묘하게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인가.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더운데 바깥엔 왜 나와 있어?”

 “덥다고? 헤헷, 오빠 우리가 땡볕에 고생한다고 생각한 거구나? 걱정마! 므네모시네 언니랑 티타니아 언니, 그리고 음…글라시아스 언니? 가 안 덥게 도와주고 있거든!”

 

 과연 저쪽에선 글라시아스가 바닷물을 천천히 얼리고 있었고 훈련하는 곳 위쪽을 자세히 보니 무슨 얼음으로 된 투명한 천장 같은 게 햇볕을 막아주고 있었다. 므네모시네와 티타니아의 합작품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긴 왜 있는 거야? 훈련 구경이라도 하게?”

 “오빠는! 내가 무슨 LRL이나 알비스 같은 줄 알아? 난 어린애가 아니라고!”

 “…….”

 

 닥터는 저번 겨울 때 성장약 한번 먹더니 자기가 다른 애들이랑은 다르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일단 이거 봐봐. 다 되면 보여주려고 했는데 기왕 지금 온 거 지금 보여줄게.”

 

 뾰로통한 표정을 짓던 닥터는 패널 하나를 내게 주고선 그늘가로 데리고 가더니…그대로 내 무릎 사이에 쏙 들어와 앉았다. 안 그런 척 하지만 용의 시선이 따가웠다. 진정해, 용. 애 상대로 무슨 질투야……. 

 

 “이전 모의전까진 그냥 ‘별의 아이’를 얼마나 잘 구현하는지에 초점을 맞췄는데, 생각해보니까 우리 쪽은 전부 그냥 옛날에 있었던 표준 규격 데이터만 썼지 뭐야? 그래서 현재 오르카의 전력을 수치화하기 위해 나랑 다른 언니들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하나씩 기록하고 있단 말씀! 오늘은 스틸라인 언니들부터야!”

 

 닥터가 준 패널엔 스틸라인 대원들의 일련번호부터 시작해서 심박수, 움직임,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훈련 하달 내용까지 딱 봐도 현기증 날 만한 수치가 쉴 새 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나마도 내가 파악한 게 그 정도고 실제 수치는 거의 줄잡아 수십 가지가 넘어 보였다.

 

 “이걸 한 명 한 명 거를 다 기록하고 있는 거야? 지금?”

 “응! 근데 난 그냥 기록만 하고 있는 거라 별로 할 일 없어! 있잖아, 아자즈 언니랑 오드리 언니 진짜 대단하다? 내가 실시간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나 일하기 편하라고 저것도 만들어줬어! 덕분에 엄청 편하게 일하고 있지!”

 

 과연 스틸라인 대원들은 무슨 검은색 조끼 같은 걸 전부 착용하고 있었다. 어라, 마리도 입고 있었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마리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병사들의 현재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칩이 내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선 저희가 시범적으로 착용해서 훈련 중이고, 현재 두 분은 다른 부대에 맞게 조정해서 양산 계획을 짜고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와, 언제 이런 걸 다 했대…….”

 

 그러니까 훈련 겸 테스트도 겸하고 있다 이 말이구나. 뭔가 거대하게 일이 돌아가는 것 같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각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리가 나를 보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거의 항상 진중한 표정이지만. 아까 전 모의전 끝나고 도망치듯 떠난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솔직히 내 양심을 조금 찌르는 표정이었다.

 

 “응, 얼마든지.”

 “다음번엔 절대 지지 않겠습니다.”

 “…….”

 

 나는 말문이 막혔다.

 

 “각하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저도, 그리고 다른 대원들도 모두 한마음입니다. 저들을 보십시오.”

 

 훈련 중인 대원들의 표정은 진지했다. 짜증내거나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정말 이게 마지막 전투라는 듯 최선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미래에 맞닥뜨릴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까 제가 훈련 보고가 늦었다고 말씀드렸지요.”

 “어, 응. 그랬지.”

 “실은 이번 훈련은 병사들의 요청 사항이었습니다.”

 “엑? 진짜?”

 “정확히는 분대원의 건의를 받은 이프리트 병장의 요청 사항이었습니다, 각하. 솔직히 저도 의외긴 했습니다만, 이프리트 병장 역시 군인이었습니다. 별의 아이를 상대로 애를 쓰시는 각하의 모습을 보고 어찌 투지를 불태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것 참 대단…….” 난 섬찟한 기분에 말을 뚝 끊었다. “잠깐만, 다른 대원들이 모의전 내용은 어떻게 알아?”

 “전 대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었습니다, 각하. 혹시 모르셨습니까?”

 “몰랐어! 어떻게 된 거야, 용?”

 “…사령관이 승인하지 않았소. 소관은 분명 보고서에 그리 써서 올렸다오.”

 

 뭐가? 그 탈탈 털린 영상이, 그것도 실시간으로 죄다 대원들에게 전송됐다고?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보고서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 당장 사령관실로 돌아가서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게 부질없는 짓이란 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았다.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순 없다지만 이건 너무 성대하게 엎질러졌잖아.

 

 “그, 그럼 설마 다른 부대들도…….”

 “그들 나름대로 뭔가를 하고 있지 않겠소.”

 “설마 오르카 전부가 아는 건 아니지? 그렇지?”

 

 제발 그렇다고 해주라. 하지만 용은 미간을 짚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모든 대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고 하지 않았소, 사령관.”

 “…….”

 

 기분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리 춥지도 않은데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때 잠자코 보고 있던 닥터가 툭 한마디 던졌다.

 

 “오빠, 설마 우리가 오빠 모의전에서 지는 거 보고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

 

 너도 독심술 배웠니? 이거 진짜 아르망하고 진지하게 얘기 좀 해봐야겠다.

 

 “맞구나? 에휴, 우리 오빠가 그렇지 뭐. 모의전 끝나고 터덜터덜 나가길래 분명 끙끙거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다들 쉬라고 웃으면서 나갔는데 무슨 터덜터덜이야.”

 “와, 그거 설마 연기라고 했던 거야? 아르망 언니가 한숨 쉬던 거 못 들었지? 저번에 연극할 때 가르쳐 준 거 다 까먹은 거 같다고 하던데.”

 “…….”

 

 아르망하고 진지하게 얘기하는 거 전면 취소. 아르망이 아니라 또 ‘아르망 선생님’이 튀어나오면 난 아마 죽을 거야.

 

 “어차피 모의전인데 이기고 지는 게 뭐 어때서 그래? 데이터 잘 뽑아서 지휘관 언니들이 전략 잘 짜고, 훈련 열심히 하고, 나는 이것저것 도움 될 만한 거 만들어 주고! 다들 그렇게 노력해서 나중에 그놈 상대로 빠밤! 하고 이기면 되는 거 아니야, 오빠?”

 “그거야 뭐 그렇지만…….”

 “그거야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야, 오빠!” 닥터가 작게 볼을 부풀리며 내 무릎을 통통 쳤다. “이 초천재 미소녀 과학자 닥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내가 나중에 별의 아이 약점에 구조까지 다 분석해서 오빠한텐 찍소리도 못하게 잔뜩 발명품 만들어 줄게! 흥, 고작 그런 촉수 괴물한테 오빠가 신경 써야 한다니 자존심 상해!”

 “그래, 고마워. 닥터.”

 

 닥터가 허공에 휙휙 주먹질을 하는 걸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왜 이리 기특할까? 혹시 딸이 있다면 딱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오빠가 다 짊어질 필요는 없어. 난 오빠가 다 짊어지는 거 싫은걸.”

 

 빤히 올려다보는 닥터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마냥 어린애로 치부하기엔 아주 깊은 눈이었다.

 

 “똑똑한 걸로 따지면 내가 오빠보다 훨씬 더 똑똑할 거고, 빠른 걸로 따지면 칸 언니나 슬레이프니르 언니가 더 빠를 거야. 힘으로 치면 라비아타 언니가 더 셀 거고. 한마디로 오빠보다 힘세고 빠르고 똑똑한 언니들은 많아, 그렇지?”

 “어, 뭐 그렇지…….”

 

 지금 얘가 날 위로하려고 하는 건지, 돌려서 까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렇구나, 악의 없는 순수함이 때론 이렇게 무섭구나……. 오늘 또 하나 교훈을 배워갑니다, 닥터 선생님.

 

 “하지만 그렇다고 그 언니들이 우리들 사령관은 아니잖아. 우리 모두를 모을 수 있는 건 오빠뿐인걸. 오빠는 오빠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언니들이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오빠는 사령관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면 돼. 우리도 오빠가 그런 표정 짓지 않도록 노력할 거야.”

 

 그리고 닥터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오빠가 그렇게 슬퍼하는 표정 절대 안 짓게 할 거야. 그런 얼굴은 오빠한테 안 어울리는걸. 오빠한테 제일 어울리는 얼굴이 뭔지 알아?”

 “뭔데?”

 “언니들 홀딱 벗은 거 보고 헤벌레하는 얼굴이야!”

 “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얘가 방금 전까지 진지한 얘기하다가 왜 갑자기 급커브를 틀지? 옆통수가 따가워지는 건 절대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방금 용이 혀 찼다. 틀림없어.

 

 “왜? 저번에 아자즈 언니 수영복 입은 거 보고 얼굴 빨개지면서도 계속 훔쳐봤고, 이터니티 언니 수영복도 계속 봤고, 베로니카 언니 엉덩이는 맨날……읍, 읍읍! 읍!!”

 “아, 아니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하하, 아니 하, 얘가 진짜 뭘 보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니까, 하하!”

 

 옆통수 뚫리는 거 같다, 닥터야! 얜 왜 이렇게 눈썰미가 좋은건데?! 아니 막말로 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너무, 그 뭐시기냐 너무 대놓고 보여주려고 하는데 나보고 어쩌란 거니……. 너 진짜 용 언니가 오빠 상대로 ‘포격 개시!’라고 외치는 거 듣고 싶어서 그래? 진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닥터의 입을 막아야 했다.

 

 “읍, 푸하! 아이 참, 오빠! 오빠가 그런 거 좋아하는 거 다들 아는데 왜 안 그런 척 해? 가슴이랑 엉덩이 엄청 좋아하면서!”

 

 내 얼굴이 시퍼렇게 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닥터는 결국 제 할 말 다 했다. 

 

 “후후, 사령관이 그렇게 색을 밝히는 줄 몰랐소. 약간…의외로군.”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난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그 밑에서 끓어 넘칠 듯 차오르는 분노라는 이름의 용암을…….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려는 찰나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쨍 하고 울렸다.

 

 “사령관 각하! 이병 브라우니 2312번, 각하께 건의 사항 있슴다!”

 “말해봐!”

 

 나이스 브라우니! 훈련 중 잠깐 휴식 시간이었는지 브라우니는 아주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레프리콘! 브라우니 팔 잡지 마! 지금 내겐 걔가 화제를 돌릴 구원자란 말이야! 

 

 “저희들 엄청 노력하는데 이번 모의전 이기면 혹시 휴가 주십니까?”

 “받고 스틸라인 온라인 대회까지 열어줄게!”

 “와! 우승 상품은 당근 사령관님이시지 말입니다!”

 “그래! 그…….” 

 

 아무 생각 없이 말하다가 끼익 멈췄지만 이미 말은 튀어나온 후였다.

 

 “제군들! 각하께서 친히 힘써 주시겠다는데 남은 훈련도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나!”

 “맞슴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마리가 쐐기를 박았고, 대답소리는 브라우니가 제일 컸다. 망연자실한 눈으로 마리를 보자 마리는 싱긋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설마 마리가 날 배신할 줄이야…….

 

 “좋아, 스틸라인! 모두 전열 앞으로!” 마리는 호기롭게 외친 뒤 나를 향해 경례를 했다. “그럼 사령관 각하, 다시 훈련에 임하겠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으, 응.”

 “오빠, 나도 이거 훈련 참가하는 거니까 나한테도 휴가 줄 거지? 나 휴가 받으면 오빠랑 놀고 싶은데.”

 “그래……. 놀자, 놀아…….”

 

 이미 난 죽었는데 뭔들 못 말하겠니……. 닥터는 환호성을 지르더니 내 볼에 쪽 뽀뽀를 하곤 마리를 따라 가버렸다.

 

 “후후.”

 “요, 용?”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용이 처음 내뱉은 건 웃음소리였다. 그것도 눈썹이 곤두설 정도로 스산한.

 

 용은 웃는 얼굴로 화를 내고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 날 ‘사령관’으로 부르는 건 매우 안 좋은 신호 중 하나였다. 그게 하필 지금이었고 말이다.

 

 “다른 부대도 시찰해봐야 하지 않겠소, 사령관.”

 

 거부권이 없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용은 바람소리가 날 정도로 등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어디 다른 부대에선 그대에 대해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구려. 뭔가를 이렇게 기대해보긴 처음이오. 아주 즐거운 시간이 되겠군.”

 

 용은 내가 따라오든 말든 척척 걸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모래가 아주 부드럽군.”

 “…….”

 

 내뱉듯 중얼거리는 용은 발에 있는 대로 힘을 주며 걷고 있었다. 마치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내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건 절대 기분 탓이 아니었다.


 

 

 

 

 

 

 

 

 

--------------------------

 

 

분량 조절 대 실패

한번에 올리려다 10장 넘어가서 쪼갭니다

 

용 많이 사랑해주세요

용 많이 이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