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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싫더라도, 어쩔 수 없다


아-52가 들어온 곳은 한 낡은 건물 안이었다. 제법 넓은 방이었지만 가구나 생활용품은 최소한으로 있는 것이 누군가 산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장치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그녀는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이쪽을 마주보는 형태로 앉았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처음부터 말하자면 1986년이라는 까마득한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겠군요. 그 해에 이 발전소의 첫 사고가 일어났고, 이 땅이 죽었죠. 뭐, 전 역사학자가 아니니 그 사고에 대해선 더 안 말할랍니다. 어쨌든 그 이후 우리 두나이 기종들이 2080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이 지역에 배치되었죠. 그렇게 저희들은 백 살도 더 된 이 고물을 정비하고 오염된 지대를 제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혹시 제 일련번호 기억하십니까?]

 “아-52 아니었어?”

 [네. A-52. 저는 52번째로 태어난 두나이 기종입니다. 그 이후로 저희는 아(A)부터 체(Ч)번대까지, 총 25000명이 생산되어 지금까지 이곳을 지켜왔습니다. 방사능에 찌든 도시긴 해도 저희들은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고, 인간들도 저희가 불편한 일을 도맡아 하는 만큼 그들의 간섭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2112년까지 저희는 이곳에서 일종의 바이오로이드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면서 임무 또한 충실히 해 그때는 조심하면 인간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프리피야트의 오염도 약해졌습니다. 원자로 또한 낡긴 했어도 잘 돌아갔고 옛날에 사고가 났던 4호기 원자로도 다 해체되어 있었죠.]

 

 아-52는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이쪽을 쳐다봤다. 

 

 [그러나 2111년 5월 19일, 프리피야트 일대는 폭격을 받았습니다.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치며 일어난 우연이었죠. 하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대량의 항공폭탄이 발전소 부지 내로 떨어졌습니다. 개장 당시 건설된 원자로 차폐용 돔은 매우 단단하게 만들어져 어지간한 충격에는 끄덕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격적인 항공폭탄과 60t 가량의 벙커버스터를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죠.]

 

 아주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결과는 1,3호 원자로 폭발. 2호 원자로 파손. 배전설비 전멸. 어마어마한 양의 방사능 물질 유출. 만약 이 사고가 등급이 책정되었다면 역사상 최초의 8등급 사고가 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엔 멸망전쟁 중이라 안 그래도 외부 보급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었고, 거의 우리들만으로 사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3달간의 사투 끝에서야 겨우 세 원자로를 전부 콘크리트와 철재로 덮어 더 이상의 방사성 물질 유출을 막을 수 있었죠. 그 와중에 용융된 핵연료가 지표층을 뚫고 내려가는 것도 막아야 했죠. 네. 그렇게 동유럽은 멸망을 피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대는 아니었죠. 아까 보신 그 묘지를 기억하십니까? 그 묘지에만 1만여 명이 묻혀 있습니다.]

 “그렇게나 많이...잠깐만. 그 묘지에‘만’?”

 [두나이 25000명, 브라우니 250명, 레프리콘 80명, 발키리 50명, 더치 걸 200명, 다프네 30명, 포티아 100명, 아자즈 2명, 주라블리 5명. 그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건 두나이 4327명, 주라블리 1명이 전부입니다. 사망자들 중 두나이를 제외한 모두는 방사선 피폭으로 사고 수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두나이 기종들도 죽은 20000명 중 반 이상이 그때 죽었습니다. 나머지는 천천히 이 땅에서 죽어갔죠. 우리들이 받은 명령에는 허가 없이는 무슨 상황에서도 프리피야트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60년간 이곳에서 갇혀 지낼 수 밖에 없었죠.]

 

 “그럼 아까 그 두나이들이 들고 있던 무기들은....”

 [네, 저희들의 기관단총은 본격적인 전투용은 아닌지라, 그 녀석들 유품을 빌려 썼죠, 원주인에 비하면 잘 못 다루지만 그래도 무기의 위력은 그대로니 말이죠.]

 

 아-52는 갑자기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이쪽을 노려봤다.

 

 [자, 이 과거 이야기는 잠시 여기서 마치죠. 중요한 건 현 상황이니.]

 

 그러고 보니 잠시 원자로 상황을 까먹고 있었다. 애초에 이 지역에 온 것이 그것 때문이었는데.

 

 [오르카호의 사령관님. 현재 2호 원자로를 덮고 있던 구조물이 붕괴되며 화재가 발생했고, 노심이 노출되어 대량의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고 있습니다. 다행히 예전에 가동을 멈춘 원자로라 멜트다운 같은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방사능 물질의 유출은 상당합니다. 현재 두나이들이 잔해 정리 작업을 우선 실행 중이지만 장비, 의약품, 식량, 생필품 모두가 부족하며 조금 전처럼 철충들의 습격 또한 받는 상황입니다. 이 기지의 지휘권자로서 묻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을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아-52의 어조는 무거웠고, 두 눈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희뿌옇게 변해버린 눈에서도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우리 세력의 규모를 정확하게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물자를 나눠달라는 요구를 한 데다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까지 숨김없이 말했다. 하지만 전혀 그 말에 불쾌하지 않았다. 

 

 인간의 명령 때문에 이곳에 매여 있는 거라면 나에게 다른 명령으로 그것을 덧씌워 달라고 부탁했을 것 이였다. 만약 지휘계통 하의 문제로 내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면 조금 전에 자율적으로 상황을 판단해 주어진 명령-침입자를 쫒아내라-을 비상상황을 이유로 어긴 것처럼 명령의 허점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즉, 그녀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오르카호의 사령관으로서 약속합니다.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이 사고를 수습하는 걸 돕겠습니다. 같이, 재앙을 막읍시다.”

 

 [감사, 합니다.]

 

 이 재앙이 다른 곳으로 퍼지는 것을 막는 것, 그것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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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 진지구축을 서둘러라! 어이, 거기! 손이 놀고 있다!”

 “브!”

 “브라우니! 여기 이것 좀!”

 “브!”

 “야! 여기 철거해야 되는 곳이야! 빨리 비켜! 아, 진짜. 내 목소리를 이런 데에나 쓰게 하다니....”

 “브?!”

 “아, 여기는 이렇게 해서...이렇게 하면 더 효율이...아무래도 이 부분은 다시 공사에 들어가야....”

 “브으읏?!”

 

 저 멀리서 대규모로 건물이 철거되며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보자 토마토 주스 생각이 났다. 현재 오르카호는 오데사 항만에 정박, 인근 도시의 물자를 최대한 수색해 모은 뒤 그 대부분을 이 키예프로 보내고 있다. 그 후 이곳에서 물자들을 관리하는 동시에 프리피야트로 수송하고 있다.

 

 며칠 전에 아-52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 같은 녀석들 아니면 현장 작업은 무리입니다. 그러니 그쪽은 물자 지원을 중심으로 해 주십시오. 우선 방호복이 우선이고, 그 다음은 식량과 의약품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그쪽에 부탁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아, 진짜. 너 정말 이러기야?”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작업복에 안전모 차림의 드라큐리나가 내 옆에 와 있었다. 

 

 “이런 건 원래 로봇들이나 했는데. 이 내가 건물 철거나 하다니!”

 “미안. 그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자. 여기.”

 

 내가 토마토 주스 병을 건네자 드라큐리나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맙다는 말을 남기곤 코웃음치며 사라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바이오로이들이 다가왔다.

 

 “흐음. 드라큐리나 양도 아직 애군요.”

 “아자즈, 그리고 마리도? 무슨 일이야?”

 “아, 별 건 아니고, 현재 석관 설계상 일부 구역은 설계와 맞지 않아 추가 공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마음 같아서는 어마어마한 걸 만들고 싶지만, 지금은 질보단 시간이 문제니 어쩔 수 없네요. 그래서 이 부분, 확인 부탁할게요.”

 

 아자즈가 건넨 문서에 사인을 하던 나는 저 멀리 생겨난 공터를 봤다. 얼마 뒤에는 저곳에 대형 구조물이 건설될 것이다.

 

 -이걸 끝내려면 원자로를 덮는 거대 구조물, 즉 석관을 건설해 원자로 위를 덮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의 방사성 물질 유출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그런 걸 이곳에서 만들기엔 무리입니다. 그러니, 그쪽에서 석관을 건설해 이곳으로 수송, 현지에서 조립한다는 방식밖에 없습니다.

 

 “어때, 시간 내에 건설할 수 있겠어?”

 “네. 다만 여기서 오르카호까지의 거리가 상당히 먼 만큼 중장비 투입이 제한적이란 문제가 있지만요. 이럴 땐 바이오로이드의 신체 능력이 고마워지는군요. 스틸라인 분들. 특히 브라우니 분들이 대량으로 와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무슨 말씀을. 우리 스틸라인이 이런 일에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각하. 철충에 대비한 도시 외곽 방어선은 거의 구축이 끝나갑니다. 그 후에는 인원을 최대한 석관 공사로 돌리겠습니다.”

 “아, 그래. 하하. 하하하.”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괜찮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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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아아악! 전혀 괜찮지 않지 말임다!”

 “브라우니, 조용히 하고 빨리 일하세요.”

 “분대장님! 방어진지 구축 직후에 노가다라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님까?”

 “야, 닥쳐라...나 시멘트 포대 옮기는 거 안 보여?”

 “전원!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꾸물거리지 마라!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렘린 씨, 포츈 씨. 저 녀석들 실컷 부리시지요. 우리 용맹한 스틸라인은 이 정도 노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 그렇다 해도 레드후드 님은 팔 나은 지 얼마나 됐다고 중노동을. 아예 옷도 작업복에 안전모라니....”

 “상관이 모범을 보여야 하는 법! 전 괜찮습니다!”

 “...안 괜찮을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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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 이 정도면 당장은 되겠지?”

 “네. 대장답지 않게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대장답지 않다는 건 뭔데?”

 

 프리피야트의 두나이들에게는 당장의 보급이 절실했다. 오드리와 다른 AGS, 그리고 제작 설비들의 분투에 힘입어 방호복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식량은 당장이라도 대량으로 지원 가능했다. 의약품과 연료, 무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기지의 두나이들은 약 4300명. 그만한 인원수에게 필요한 물자는 어마어마했고, 평범한 방법으로는 옮길 수 없는 데다 방사능에 오염된 곳이라 함부로 진입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문제로 사령관이 골치아파하던 중, 메이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메이는 무인 폭격기를 운용 가능하다. 그래서 그걸 이용해 폭탄 대신 보급물자들을 자신의 폭격기에 적재해 공수로 전달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바로 채택되어 실행되었다. 그 결과는 성공적으로, 메이의 폭격능력에 힘입어 대량의 물자는 정확하게 프리피야트 내로 투하되었다. 우려되었던 방사선도 고고도에서 투하한 덕에 문제가 없었다.

 

 “이 정도면 사령관도 기뻐하겠지? 그러면 사령관한테 이, 이런저런 거라든지....”

 

 대장의 고질병이 또다시 도지자 옆에 있던 나이트 앤젤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번 한 번 만큼은 세운 공 때문에 열려던 입을 닫았다. 

 

 5분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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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거대한 비행기가 지나가자 일제히 낙하산들이 펼쳐졌다. 정확하게 기지 내부 공터로 상자들이 떨어지자 두나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떨어진 상자들로 달려갔다.

 

 상자 안에서 새 방호복과 식량, 식수, 약, 연료 같은 물자들이 나올 때마다 그녀들이 지르는 환호성은 더해져만 갔다. 잠시 현장에서 물러나 물자 정리를 지휘하던 아-52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부분 수십 년도 더 살아온 바이오로이드들이었지만 지금 그녀들은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마냥 들떠 있었다.

 

 “...다들 좋아하네요.”

 

 왼팔에 삼각건을 댄 두나이 하나가 아-52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알아본 아-52는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다? 넌 저기 안 끼냐? 들으니 커피도 있다는데. 진짜 커피 말야.”

 “됐습니다. 다들 가져가고 남으면 가져가죠. 팔하고 등 치료받았으면 충분히 누린 거 아니겠습니까. 며칠 누워 자다 몇 시간 전에 겨우 일어났더니 혼란스럽네요. 무슨 상황인지 다른 녀석들에게 듣지는 했지만.”

 “그래, 그나저나. 다음부터 맨손으로 AGS랑 싸우진 마라? 엘-756 부반장.

 

 꼴사나웠던 자신이 떠올랐는지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귀가 새빨갛게 변하는 걸 본 아-52는 키득거렸다.

 

 ”웃지 마십쇼. 싸우다 보면 정신이 나갈 수도 있고...그리고 규정상으로는....“

 

 엘-756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멈췄다. 상자에서 꺼낸 통조림들을 잔뜩 껴안은 채 웃고 있는 두나이를 보자 엘-756은 고개를 돌려 아-52를 보며 말했다.

 

 ”여러 의미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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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세상에...어떻게 이렇게 살아오신 거죠? 아, 죄송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에이, 뭐.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니 기분 좋네요. 다프네 분들도 오랜만에 보는지라 반갑네요.”

 

 기지 외곽에 급조된 야전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던 다프네는 그 말을 듣고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방호복의 방독면 너머로는 자신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위안으로 삼으며 눈앞의 두나이의 피부에 연고를 바른 거즈를 올려놓았다.

 

 이곳에 왔을 때 그녀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두나이들에게 내려진 명령 때문에 그들은 기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그래서 기지 외곽의 가장 방사선 농도가 낮은 곳에 야전병원-외벽을 두꺼운 콘크리트와 납으로 만들어 충분히 방사선을 차폐할 수 있다-을 세워 다프네 기종들이 방호복을 입고 교대로 상주하며 진료한다는 안이 나왔다. 그 같은 사령관의 말에 다프네들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사령관은 충분히 안전대책을 세웠고. 부득이하게 자신들을 보내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당장 치료해야 하는 중환자들이 다수 있는 만큼, 의외로 다프네들은 의기충천한 채 프리피야트로 날아왔다.

 

 그러나 병동에 피부가 벗겨지고 괴사하고 폐, 신장, 위장 전반 등 각종 장기가 죄다 망가진 두나이 기종들이 몰려왔을 땐 그녀들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증상이 심각한 자들만 최소한으로 골라 보냈다고 두나이들이 말했지만 이송되어 온 환자들은 병원의 수용 가능 인원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병상에 환자들이 가득 차자 나머지 환자들은 병상 사이의 공간에 앉았다. 다프네들은 오르카호에 남은 다프네들과 닥터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며 환자들을 진찰했고, 수송기로 공수해온 어마어마한 양의 의약품들을 아낌없이 소모했다. 수많은 주사를 맞고, 각종 검사에 시달리고, 온 몸을 거즈로 감싸져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그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두나이들은 불평은커녕, 아낌없이 미소를 지으며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그녀들에게 건넸다. 

 

 하지만 다프네들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두나이들의 증상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부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증상들. 현실적으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강력한 진통제로 고통을 덜고, 항생제로 감염을 막아주는 것 같은 게 다였다. 항방사선제를 작업에 나가는 두나이들에게 공수해 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이미 피폭되어 망가진 몸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한다. 그저 추가적인 피폭을 줄여 줄 뿐.

 

 일정 시간이 지나자 다프네들은 오르카호의 수송기에 타고 돌아갔다. 그러면 새로 온 다프네들이 이어서 환자들을 돌봤다. 피폭 환자들의 진료가 결코 쉽지 않은데다가 덥고 불편한 방호복을 계속 입고 있어야 하는 만큼 교대하는 다프네들은 거기서 벗어난 것에 기뻐해야 하겠지만 아무도 기뻐하지 못했다.

 

 오르카호로 돌아가는 수송기에는 다프네들이 잔뜩 타고 있었지만 그녀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엔진 소리만이 내부에서 울리는 가운데 한 다프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하는 것이...의미가 있겠죠?”

 

 애석하게도, 아무도 그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수송기가 남쪽으로 날아가는 가운데, 숲 속의 나무들 사이에서 붉은색 빛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