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집



비록 밤이긴 하지만 아직은 잘 때가 아니다. 정보가 필요하다. 천장의 전구는 깨져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베트롯이 라이터로 촛불에 불을 하나씩 붙여가며 실내를 밝혔고, 그동안 난 망가진 현관문을 닫고 의자를 문 앞에 대서 바람에 열리지 않게 고정시킨 뒤 방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잠시 후 하베트롯이 내 앞에 앉고 나서야 밀린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인간님? 묻고 싶은 게..."


"딱딱하게 인간이라고 부르지 마. 라붕이라고 불러줘."


"아, 네. 알겠습니다. 라붕님."


"그리고 이 쪽은 보리."


"멍!"


"아! 와아! 강아지다! 귀여워!"


"...강아지라고 부르기엔 좀 크지 않나?"


보리를 소개시켜주자 하베트롯은 곧장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이더니 헤실헤실 웃으며 보리의 머리와 볼을 마구 쓰다듬었다. 낯선 손길에도 보리는 물거나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러다가 쓰다듬이 너무 과한건지 머리를 이리저리 털어 하베트롯의 손을 떨쳐냈다.


"앗, 미안. 너무 많이했나? 헤헤, 옛날에 옆 부대에서 진돗개를 키웠었는데 그 애가 생각나서..."


"저기. 보리가 귀여운 건 알겠지만 우린 해야 할 얘기가 있지 않니?"


"아, 네! 실례했습니다!"


"그리 긴장 안해도 돼.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던 거였어?"


하베트롯에게 질문의 우선권을 넘기자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게... 라붕님은,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찾아오신 건가요?"


"철충을 피해서 떠돌다가 우연히 이 동네에 흘러들어왔고, 그러다가 보리가 널 감지한 건지 이 집으로 안내해주더라고. 그 덕분에 쓰러져있던 너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거야."


"아하... 보리야, 고마워."


"멍."


"그래서, 하베트롯 너는? 여기서 혼자 살고있는 거야? 보통 스틸라인은 뭉쳐다니지 않나?"


"네, 네... 예전에는, 멸망 전에는 그랬는데요, 그게..."


"...전부 전사한거야?"


하베트롯은 입을 열지 못하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부대는 멸망 전쟁 때, 철충으로부터 블랙리버 임원들이 숨어있는 벙커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었어요. 워낙 상황이 급박했기에 저같은 행정병도 제조되자마자 즉각 전선에 투입됐었죠. 

그런데, 철충은 물밀듯이 몰려오는데도 벙커 안의 인간님들은 지원도 끊은 채로 저희에게 싸우기만을 강요하고, 최소한 부상병 만이라도 안으로 들여보내달라는 요청도 전부 거절당했어서... 상황이 점점 안좋아졌어요."


멍청한 좆간 평균이네. 어떤 결말일지 대충 예상간다.


"결국 저희가 구축했던 저지선이 뚫리고야 말았어요, 연대장님이 저격당해서 쓰러진 게 기점이었죠. 철충이 저흴 제치고 벙커 안으로 들어가 인간님들을 몰살했었어요. 그, 직접 보진 못했지만 무전으로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만 들리다가 통신이 끊겨버려서 짐작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지휘부가 전부 사라지고 부대가 와해되면서, 저는 무기도 내팽개치고 혼자서 미친듯이 도망쳤다가 이 마을에 도착했어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혼자 살게 됐죠, 라붕님이 오기 전까지는요..."


"고생 많았겠네..."


"아뇨, 그냥... 제가 너무 많이 얘기한 것 같네요. 잊어주세요..."


하베트롯의 얼굴에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자 나는 화재를 돌리기 위해 내 쪽에서 질문을 꺼냈다.


"...참, 그렇지. 휩노스 병을 막을 방법 뭐 아는 거 있어? 아님 휩노스 병에 관해 연구한 블랙리버 연구소라던가 뭐 그런거는?"


"휩노스 병이라면 분명... 죄송합니다. 그걸 어떻게 막아야 할 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베트롯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자 오히려 보는 내가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그리 쉽게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진 않았어. 그냥 물어본 것 뿐이야."


"그러고보니 라붕님은 어떻게 지금까지 안죽고 살아계신 건가요? 예전에 동면포드에 들어가셨었나요?"


"나도 몰라. 어제만 해도 평범한 세상에서 살고있었다가 오늘 아침에 눈 떠보니 지구가 망해있던데."


"...네?"


"진짜야."


"...그, 혹시 소설에 나오는 타임슬립이나... 뭐 그런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대충 그렇다고 치자."


대답을 들은 하베트롯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나 내 심기를 거스를까봐 걱정하는 건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말을 부정했다.


"죄송하지만 그건 좀... 믿기가 힘든데요..."


"허공에 포탈 열리고 외계인이 쏟아져나오는 사건도 실제로 벌어졌는데 시간이동이라고 안될 게 뭐있어?"


"그, 그런가요...?"


"아무튼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넘어가고, 앞으로가 문제지. 살아남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야. 식량도 찾고, 거처도 찾고..."


"그냥 여기서 저희끼리 단촐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마을 밖으로 나가기 무서운데..."


"내가 당장은 괜찮아도 머잖아 휩노스 병으로 죽는다니까. 치료법을 찾기 위해 뭔가 시도라도 해봐야지. 게다가 니가 굶어죽을 뻔한거 보면 이 근처엔 먹을 게 동난 모양이던데, 안그래?"


"그... 그건 그래요..."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 동이 트면 먼저 식량을 구할 수 있을만한 곳을 찾아서 이동해보자."


"...네, 네? 저도요?"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깜박거렸다.


"...같이... 가줄거지? 나랑 보리만으로는 불안하거든."


"아, 네! 물론입니다! 이 시간부로 라붕님을 명령권자로 설정하고 동행하겠습니다!"


하베트롯은 무릎꿇고 앉은 채로 거수경례를 하며 호기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직후 도로 소심한 목소리로 돌아오면서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러면 그, 구체적으로 어디로 향할 예정인가요?"


"글쎄, 이 근처 지리는 나보단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식량이 남아있을만한 가까운 도시 뭐 그런 거 아는 거 없어?"


"전 이 마을에 들어온 뒤로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서 잘... 죄송합니다..."


"어... 또 보리한테 기대봐야 하나? 얘 보리야, 어디 갈만한 데... 보리야?"


내 옆에 얌전히 앉아있을거라 생각했던 보리가 안보였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방 한켠에 놓여진 상자 안에 든 잡동사니를 킁킁 냄새맡으며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하하... 저희들의 얘기가 좀 지루했나봐요. 저건 고장났거나 안쓰는 물건들 모아둔 상자인데..."


"쓰레기통이야 그럼?"


"그, 쓰레기는 아니고, 버리기는 좀 아까운... 그런거요."


계속 상자에 머리를 파묻고있던 보리는 뭔가를 입에 물어 꺼내더니 나한테 와서 보란듯이 내 앞에 내려놓았다. 한손만한 사이즈의 작은 라디오였다.


"라디오잖아? 이게 갖고싶어?"


보리는 표정으로 대답하겠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혀를 살짝 내민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 이걸 왜? 공이나 그런 장난감이라면 모를까."


라디오를 집어들어 눈에 보이는 버튼을 이것저것 꾹꾹 눌러봤지만 예상대로 묵묵답답이었다.


"그거 배터리가 다 되서 더이상 못쓰는 건데... 남은 배터리도 하나도 없고요..."


"멍!"


하베트롯이 난색을 표하자 보리가 뭔가 말하려는 듯 내 가방을 앞발로 슥슥 긁었다.


"...난 하나 갖고 있는데."


나는 가방을 열고 매장에서 주웠던 배터리를 꺼내들었다. 매장 쓰레기통 안에 떨어져있었던 배터리, 누가봐도 쓰다버린 거였지만 어쩌면 조금이라도 전력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지껏 보리가 보여준 행적으로 보아, 이번에도 뭔가 의미가 있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자, 보리야. 라디오에 이 배터리를 넣어서 한번 켜볼까? 긍정이면 한 번 짖고..."


"멍!"


"좋아 그럼. 한번 해보지 뭐."


나는 라디오를 뒤집어 뒷면의 덮개를 열어 녹슨 채로 끼워져있던 낡은 배터리를 꺼낸 뒤 새 배터리를 끼워넣었다. 

그 다음 제일 큰 전원 버튼으로 보이는 것을 누르자 놀랍게도 라디오에 불빛이 들어왔다. 배터리에 전력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치이익---]


그러나 예상대로 라디오 스피커에선 백색 소음만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렇지, 방송국이고 나발이고 죄다 멸망했는데 누가 라디오 방송을 하겠어. 보리도 잡음만 나오는 라디오가 마음에 안드는지 바닥에 내려놓은 라디오를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 주파수를 한번 맞춰보는 게 어때요? 보리가 그렇게 하자는 것 같은데... 요...?"


"응? 주파수?"


하베트롯의 말을 듣고서 자세히 보니 보리는 아무렇게나 라디오를 치는 게 아니라 앞발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둥그런 스위치를 집요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물론 개의 신체구조상 앞발을 손처럼 쓰긴 힘들기에 제대로 스위치를 돌리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도로 라디오를 집어들어 직접 스위치를 돌리며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춰보기 시작했다. 옛날에 본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선 생존자끼리 라디오로 정보 공유하고 하는 장면도 있었으니까.


[치이익---]


"제발 뭐든 좀 나와라...!"


[치익-- 생존자들은-- 치이익---]


"어...!?"


"라, 라붕님! 아까 거기! 거기!"


한순간, 라디오에서 잡음 이외의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하베트롯이 호들갑을 떨며 그 주파수로 돌아가보라고 재촉하자 나는 초조하게 좀 전의 소리가 나온 주파수를 찾아 스위치를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좀 전의 그 주파수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구 각지에 흩어져있는 생존자들에게 전한다. 우리는 오르카 저항군이다. 철충을 박멸하고 인류를 재건하기 위해 최후의 인간의 지휘 아래서 싸워가고 있는 중이다.]


"오르카...!?"


"이 목소리는, 마리 대장님이에요!"


라디오 너머의 마리의 말이 귀에 들오면서 뇌가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르카호가 있다, 원작의 그 오르카호. 그것도 원작 주인공인 사령관이 타고있는 오르카호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멸망해버린 세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설마 이런식으로 오르카의 존재를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보니 여기있는 보리는 죽은 콘스탄챠 S1과 함께 인간을 찾기 전의 라비아타 저항군 출신이었었지. 그 덕에 저항군에서 이런 생존자들을 모으는 방송을 때린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나 보다.


[지구를 되찾기 위해선 모두가 힘을 합쳐야만 한다. 누구든 이 방송을 듣게 된다면, 우리에게 합류해다오. 우리는 의식주를 제공해줄 수 있다. 합류하길 희망한다면, 좌표 xxx xxx로 와주길 바란다. 반복한다. 합류할 의향이 있다면...]


"하베트롯! 종이와 펜!"


"네, 네! 그, 그러니까, 어디다 뒀더라..."


하베트롯이 자리에서 일어서 허둥지둥 서랍을 하나씩 열어보는 사이 방송에선 다시 첫 구절을 반복해서 읊기 시작했다. 10초 정도 뒤 하베트롯이 이면지랑 몽당연필을 가져와 착석하고 바닥에 종이를 댄 뒤 좌표를 적으려 했으나-


[-누구든 이 방송을 듣게된다면, 우리에게 합류ㅎ-- 뚝.]


하필 이 때 배터리의 수명이 다해버렸다.


"앗..."


"어... 어어...? 이러면..."


망했다. 완전히 개망했다.


오르카호로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사라져버렸다. 눈 앞에서 희망이 사라져버리자 나는 말도 잇지 못하고 양 손으로 얼굴을 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긴 커녕,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있던 그 때였다.


[합류하길 희망한다면, 좌표 xxx xxx로 와주길 바란다.]


그러자 방송에서 좌표를 읊었던 부분이 다시 들려왔다. 라디오가 아닌, 내 옆에 있는 보리에게서.


"어...? 보리, 너...!"


[합류하길 희망한다면, 좌표 xxx xxx로 와주길 바란다.]


"멍!"


보란듯이 목덜미에 맨 기어에서 다시한번 녹음된 방송 내용을 재생한 보리는 입꼬리를 올리고 헥헥거렸다. 이에 보답하듯 나 역시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칭찬하며 두 손으로 보리의 머리와 턱을 쓰다듬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보리야! 하베트롯?"


"네, 적었어요!"


"좋았어! 그럼 이제... 좌표 읽는 법을 알아내야 겠는데..."


두번째 고비가 찾아왔다고 생각하자 나도모르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으나 다행히도 그 문제는 곧장 해결되었다.


"그건 걱정마세요, 제가 읽을 줄 알아요."


"그래? 다행이다... 그럼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하도록 하자."


"네, 알겠습니다! ...나도 칭찬받고 싶은데..."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베트롯이 뭔가 말했던 것 같은데 워낙 작게 중얼거려서 잘 못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보면 아마 중요한 건 아니겠지.


우선 잠자리에 들기 전 짐부터 쌌지만 솔직히 이 집엔 별로 챙겨갈 만한 건 없었다. 따로 가방을 들 필요도 없이 내가 매고있는 가방에 다 담아도 될 정도의 양이였다. 다른 집들을 뒤져보며 쓸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야 하나 싶었는데 하베트롯이 이 마을 안에서 쓸만한 건 진작에 긁어모았기에 이 집 외엔 건질 게 없을 거라고 했다.


출발할 준비를 마친 뒤 바닥에 이불을 펴고 몸을 눕혔다. 라오 세계에 떨어진 뒤 보내는 첫번째 밤이었다. 근데 난방이 전혀 안되는 집이었기에 바람은 막아도 실내 온도가 떨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옆에 누운 하베트롯은 익숙한듯 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따듯한 방 안에서 잤던 내겐 가혹한 환경이었다. 


방석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자고있던 보리를 끌고와서 껴안자 좀 따듯해졌다. 천아가 왜 핫팩타령하는지 알 것 같구만. 옆에서 하베트롯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눈을 감고 두번째 인간이라도 상관없으니 부디 오르카호에 갈 수 있기를 빌다가 스르륵 잠에 들었다.



라붕이 파티 결성!

장편 연재는 힘들어서 최대한 빨리 진도빼려고 노력중임


내가 작명센스가 없어서 작중 라붕이 이름 그냥 라붕이라고 정했는데, 분위기 깼다면 미안합니다 스미마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