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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걸린 사슴의 머리를 날카로운 나무 창으로 찔러 즉사시키고 사슴의 시체를 들쳐매고 야영지로 돌아온다. 오르카 호에서 나온지 3일이 지났고 그 동안 먹은 거라곤 물 뿐이라 아주 배가 고팠다. 이렇게 배고플 때면 소완이 해주는 식사가 생각났지만 지금은 그러한 음식마저도 사치스럽다. 자신의 몸에 박혔었던 라비아타의 검 조각을 칼 삼아 사슴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얻어내고 그 중 일부를 구웠다. 고기가 구워질 때 동안 그는 아직 치유력이 전부 회복시키지 못 했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코코넛 껍데기 안의 초록색의 끈적한 액체를 손가락으로 찍어 상처 부위에 발랐다.


상처 회복에도 좋고, 진통 효과도 있는 약초를 발견한 것이 무척 운이 좋았다. 이렇게만 발라놓으면 상처는 더 빨리 나을 것이다. 약을 다 바른 그는 고기가 다 익을 때까지 자신이 봤던 환영들을 다시 떠올렸다. 자세힌, 스콧의 환영을 말이다.


스콧의 환영은 '그녀에게 물어라' 라고 말했다. 그녀라? 그가 가르킨 그녀라는 게 누구인지 그는 전혀 몰랐다. 바이오로이드를 뜻하는 건가? 하지만 스콧은 바이오로이드를 '그녀' 라 하는 사람을 부를 때의 지칭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여성이 있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는 이 세상에 남은 인류가 자기 하나 뿐인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것은 아니라고 봤다. 아직 오르카 호에 새로운 사령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레모네이드인가 하고도 생각해봤지만 레모네이드도 역시 바이오로이드이다. 그렇다면 스콧이 가리킨 자는 대체 누구일까....하고 깊게 생각이 빠질 때 그는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맡았고 돌 위에 올려놨던 사슴의 간이 전부 익은 것을 알았다.


소완의 음식에 비해선 형편없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것도 만찬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그는 다 익은 사슴의 간을 크게 베어물었다. 딱 좋게 익어서 육즙과 간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고 이 고기를 아껴먹는다면 식량 걱정은 당분간 없어진다. 하지만 곧 그의 귀는 식사를 방해했다. 저 옆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 다른 동물인가? 하지만 4족 보행 동물이 내는 발걸음 소리가 아니라 2족 보행의 발걸음 소리일 뿐 아니라 그것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것들이 소유한 물건들도 미세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하늘 위에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치의 엔진 소리도 들린다. 그는 고기를 내려놓고 바로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위로 올라가 은신했다.


그를 데려올 특수 팀의 존재를 들은 그녀는 라비아타에게 거기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했고 라비아타는 그녀를 향해 전 사령관 회수 작전을 그녀에게 설명했다. 그녀는 오르카 호 안의 모든 바이오로이드를 향한 처벌을 잠시 중단했고 우선 그를 데리고 오는 것이 가장 급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당장 그 팀을 파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특수 팀이 파견을 가기 전에 그녀들을 향해 만에 하나 그를 회수하지 못 하고 맨손으로 돌아오면 아까 전보다 더 끔찍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압박을 주었고 특수 팀들은 덕분에 더더욱 그를 회수하는데에 몰중하고 있었다. 오르카 호는 특수 팀의 빠른 복귀를 위해 암초 사이에 대기 중이었고 특수 팀들은 해변가에 올라와서 꽤나 빨리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 처음엔 해변가 근처에 있는 불을 땐 것으로 추정된 장작더미와, 비닐 위에 있는 담수로 그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철충에 감염된 AGS 개체들이 파괴되서 널부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해변가의 모래에 이어진 붉은 선혈이 만든 길을 따라간 끝에 그 피들은 한 곳에 이곳 저곳에 흩뿌려져 있었고 특수 팀은 여기서 전 사령관이 어디론가로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다들 처음엔 바다 속으로 투신했나 하는 가능성도 생각해봤지만 인간의 뇌파가 숲 쪽에서 감지되자 바로 거기를 향해 들어갔다. 샌드걸은 비행이 가능하다는 자신의 특징을 이용해 꽤 넓지만 뇌파가 감지된 위치 위주로 날아다니면서 수시로 정보를 전달했다. 지상 팀들은 뇌파가 감지된 쪽으로 오자 그의 야영지를 발견했고 발키리는 아직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아직 붉은 빛을 가진 사슴의 고기, 그리고 이빨로 베어문 흔적이 있는 사슴의 구운 간을 보고 확신했다.


"최근까지 여기 있었군요. 멀리 도망은 못 간 것 같습니다."


"뇌파는 여기 위주로 감지돼요."


콘스탄챠도 그가 지닌 뇌파가 여기서 가장 강하게 감지된다는 것을 보아서 그가 여기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숨어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발키리도 거기에 동의하였다. 그녀들은 그가 숨어있는 나무 바로 아래에 있었다. 그는 숨을 참고 움직임도 멈췄을 뿐 아니라 나뭇잎에 전신이 가려진 덕에 잘 보이지 않았고 회수 팀들은 근처에 있을 그를 고개를 돌려보며 찾아다녔다. 이 팀의 리더인 발키리는 자신들이 서있는 바로 이 곳에 그의 뇌파가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에 바로 자신의 옆에 있는 나무를 보았다. 그녀는 혹시나 하고 나뭇잎을 향해 총을 겨눠 방아쇠를 당겼고 발키리의 총은 나무의 머리를 향해 총알을 내뿜었다. 타앙, 하는 소리만 남을 뿐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전 사령관은 절묘하게 총알이 바로 옆에 지나간 덕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발키리는 여전히 이 근처를 의심 중이었다.


"....일단 주위를 좀 더 탐색해볼까요."


발키리는 각 팀에게 명령을 내렸다. 미호와 자신은 긴 공격 사정거리를 통해 그를 발견하는 즉시 팀원 전체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제압 사격을 가할 수 있기에 함께 했고 샌드걸은 좀 더 아래로 내려와 비행하라는 명령을, 콘스탄챠와 바닐라를 해변가로 보내고 네오딤에게는 주위에 탐지되는 금속이라면 뭐든지 띄워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점차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을 보았지만 아직 자신의 뇌파 때문에 그녀들이 멀리 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게다가 콘스탄챠가 보리를 데리고 왔기에 자신의 후각 정보가 밝혀진다면 더 이상 숨을 수 없다. 여기서 도망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지만 공중에는 샌드걸이 있고 미호와 발키리의 긴 사거리를 생각한다면 도망치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라곤 도망 뿐이다. 결국 도망가기로 결정한 그는 이제 루트를 정하기로 했다. 숲이다보니 어느 쪽으로 가든 숨을 곳을 찾기란 쉬우며 루트도 이리 저리 나뉘어져 있으니 일단 여기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계속 숨을 수 있다. 그 때였다.


"네, 여기는 발키리. 바닐라, 무슨 일이죠? 철충 발견? 6체? 금방 가겠습니다!"


저 멀리서 총성이 들려온다. 발키리는 바닐라의 상황 보고를 들었고 철충 6체를 콘스탄챠와 함께 상대하고 있는 듯 했다. 발키리는 서둘러 자신과 미호, 샌드걸, 네오딤을 데리고 그곳을 향해 갔으며 그는 그녀들이 저 멀리 가자 그제서야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나무에 내려오면서 크게 당황했었다. 자신의 오감은 극도로 발달되어있어서 청각은 상대방이 손가락 근육을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고, 촉각은 이 무인도 땅 속에서 굴을 파고 있는 개미의 행동마저 알 수 있다. 이 청각과 촉각은 천인대 임무를 수행할 때도, 전투에서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감각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녀들이 이렇게까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 했다. 밤부터 새벽까지 철충과의 교전에서 얻은 부상의 후유증인가, 하고 생각한 그는 어쨌든 간에 마침 나타난 철충들 덕에 거리가 벌려졌으니 이 때를 틈 타 더 정교한 곳으로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앞으로 가려던 때에 다리에 박힌 나이프로 인해 넘어진 그는 그것이 꽂힌 종아리를 보고, 이 나이프가 날아온 방향을 역산했다. 역산한 결과 철충들과 그녀들이 교전하는 지역에서 날아온 게 아니었다. 이건 모닥불 쪽에서 날아온 것이다. 하지만 모닥불 근처라면 자신의 촉각과 청각이 근육의 진동 소리를 듣지 못 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눈으로 봐도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적잖게 당황하면서 다리에 꽂힌 칼을 뽑으려던 때에 곧 자신을 공격한 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점차 나타나는 여체의 모습. 그 여체는 보라색 모발을 가지고 있었고 머리에는 후드를 쓰고 있었다. 그 때서야 그는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팬텀..."


팬텀은 모든 것이 발키리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발키리는 상륙하면서 그는 궁지에 몰리면 반드시 우리들이 가진 무기를 빼앗아 그것으로 역공을 가할 것이니 아예 무기를 주어선 안 된다고 알렸다. 맨손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상대이니 만큼 절대로 무기를 빼앗겨선 안 된다는 판단에 따라 무기에 각각 소형 전기 충격기를 붙였다. 무기 강탈 걱정을 해결하자 그 후에 그를 향한 포위망을 어떻게 결성할까 고민하다가 그가 파괴한 것으로 추정되는 철충들의 흔적을 보고 발키리는 곧바로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아마 숨거나 도망칠 것이며 도망친다면 계획을 수정하겠지만 만일 숨는다면 이 계획대로 할 것이었다. 우선 네오딤에게 AGS 금속을 회수하라고 지시해 그녀가 언제든지 그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샌드걸 역시 비행으로 주위를 날아다니게 한다. 샌드걸이 아니더라도 비행이 가능한 바이오로이드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는 도망치는 것보다 당장 숨는 것을 택할 것이다. 그의 야영지를 발견하고 그의 뇌파가 가장 강하게 탐지되는 나무에 모두가 모여서 그를 찾지 못 하는 척 했다. 사실 그는 위치를 이미 들킨 것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몰아간다면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고 발키리는 상륙하면서 너무 포위망을 여유없이 좁힌다면 그의 돌발 행동 때문에 피해를 볼 수 있고 그것을 주의하라는 지시로 인해 모두 발키리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발키리는 그를 정말로 못 찾은 척을 하면서 콘스탄챠와 바닐라를 앞으로 보내고 네오딤이 미리 배치해둔 파괴된 AGS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철충들을 발견하고 교전을 시작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다.


그의 정보를 더더욱 교란시키기 위해 정말로 그것들이 나타난 것처럼 행동해 미호와 자신, 샌드걸, 네오딤 모두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 은폐장을 발동시킨 팬텀 만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그가 나무 아래서 내려오면 곧바로 선제공격을 하라며 팬텀에게 지시, 그녀는 그걸 따랐다. 은폐하고 기다리더니 정말로 나무에서 그가 내려왔고 도망치려고 하는 찰나 그의 다리에 나이프를 던져 박은 것이다.


팬텀은 이어피스로 모두에게 알렸다.


"여기는 팬텀, 모두에게 알립니다. 전 사령관, 발견했습니다."


그는 당장 다리에 박힌 나이프를 무기로 삼으려고 했지만 나이프의 손잡이를 잡자 소형 전기충격기에서 나온 전격에 의해 손잡이를 잡지 못 했고 그 나이프는 네오딤의 금속 조종 능력으로 인해 뽑혔고 곧 다시 팬텀의 손에 들어갔다. 네오딤이 공중에 부양한 채 내려오고 있고 샌드걸 역시 그에게 총을 겨누면서 비행했다. 등 뒤에는 미호, 콘스탄챠, 바닐라, 발키리가 모두 그에게 총을 겨눴고 팬텀 역시 총으로 그를 겨눴다. 발키리는 그가 손을 들자 긴장 끝의 한숨을 내쉬고 이어피스로 오르카 호에 있는 자들에게 전달했다.


"여기는 특수 회수팀....사령관 제압, 성공했습니다."


-그대로 데리고 와. 내가 빨리 보고 싶다고 전해주고.-


현 사령관은 발키리가 일을 생각보다 빨리 처리하자 어서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고 발키리는 대꾸 없이 그를 향해 말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사령관님."


"이젠 사령관이 아니야."


"...아뇨. 저의 사령관은 오직 당신 뿐입니다."


발키리, 그녀는 사령관 축출에 반대표를 던졌고 같은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내에서는 유일하게 반대했던 자였다. 그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잡으러 온 그녀들을 둘러보았다.


"콘스탄챠, 바닐라, 미호, 발키리....하늘 위에 있는 네오딤, 샌드걸, 그리고 내 뒤에 있는 팬텀. 모두 안녕."


그의 목소리에 힘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여기에 있는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콘스탄챠는 가장 먼저 총을 거뒀고 앞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저에요, 콘스탄챠."


"...아이러니하군. 날 발견한 것도 너였는데, 날 데리러 온 것도 너라니."


콘스탄챠는 그 말에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죄송하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를 직접 마주하고 그의 꼴을 보고 나니 하려던 말도 나오지 못 했다. 피로 범벅이 되고 이리저리 찢어진 옷을 입고, 이곳 저곳에 흉터가 가득한 그의 신체와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할 정도로 피곤하고 초췌해보이는 얼굴은 콘스탄챠와 그녀들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콘스탄챠 다음으로 바닐라가 총을 거두었다. 바닐라는 그의 강력한 근력에도 절대 끊어지지 않을 수갑을 꺼냈고 그에게 다가갔다.


"....손, 주세요."


바닐라도 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가장 할 말이 없는 자는 바닐라였다. 사령관 축출 소동 때 바닐라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못 했다. 그를 축출해야할지, 아님 보호해야할지 몰랐고 그래서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중립을 지킬까도 생각했지만 가뜩이나 없었던 그의 곁에 있던 아군을 떠올리면 중립을 지키자는 생각은 그녀로선 죽어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가 자발적으로 물러남으로서 소동은 일단락되었지만 바닐라는 사령관을 도와주지 못 했다는 커다란 상처로 남게 되었고 찬성도 반대도 중립도 하지 못 했던 자신 스스로가 미웠다.


그는 말 없이 손을 내밀었고 바닐라는 그의 손에 수갑을 채우려고 했다. 그의 수갑이 채워지는 모습에 모두가 그를 향한 공격 준비를 멈췄다. 하지만 발키리, 그녀는 뭐라고 했던가?


궁지에 몰리는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자가, 바로 그라고 했다. 그녀는 안심하는 것보다 더 빨리 당황했다. 수갑에 손을 내미는 척 하다가 바닐라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부러뜨리려고 했었으니까. 당장 모두가 다시 그에게 총을 겨눴다. 바닐라는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바닐라의 목에는 그의 왼팔이 감겨져 있었고 바닐라의 머리엔 그의 오른손이 올라가 있었다. 콘스탄챠가 당장 놔주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한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으면 바닐라의 목을 부러뜨리겠다."


"허튼 짓 하지 마시죠?"


샌드걸이 위협했다. 샌드걸은 그의 축출에 찬성표를 던진 자고 그래서 그에게 조금 날카로운 태도를 취했다. 저 자로 인해 죽은 자매들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총으로 쏴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할 말만 했다.


"네오딤, 당장 땅으로 내려와라. 샌드걸, 너도 포함이다."


둘 다 공중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았으나 바닐라가 괴로워하는 표정을 보면 내려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선 그는 네오딤과 샌드걸이 자신의 도주에 가장 방해되기에 그녀 둘의 기동성과 능력을 봉인해두고 싶었다. 그는 우선 바닐라가 들고 있는 총을 대신 들어서 샌드걸의 엔진을 쏴서 그녀가 비행을 하지 못 하게 했고 네오딤을 향해 말하였다.


"네오딤, 두 손을 모아."


안 그러면 바닐라의 목이 부러지니까 네오딤은 군말 없이 따랐다. 그녀의 두 손이 모여지자마자 자신의 손에 차여질 뻔 했던 수갑을 던져 네오딤의 손에 채웠다. 수갑이 채워지자마자 전격이 흘렀고 네오딤은 그 전격에 의해 잠시 쓰러지고 말았다. 손 좀 묶었다고 네오딤을 막을 순 없었고 마침 바닐라가 가져온 수갑에 전격 흘리기 기능이 있어서 그걸로 그녀를 최우선적으로 제압할 셈이었다. 저 능력이면 세상 끝까지 도망쳐도 결국 잡히니까. 그는 발키리, 미호, 팬텀, 콘스탄챠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무기를 분해해라."


모두 그의 말을 들었어도 총을 놓지 않았다. 그는 다시 경고했다. 바닐라의 목을 두른 팔에 힘을 줘서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식으로. 그 행동에 미호가 가장 먼저 총을 분해해서 떨어뜨렸다. 대 테러부대인 그녀는 이대로 테러범의 지시 사항을 안 따라준다면 테러범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걸 잘 알기에 일단 그가 내린 지시 사항을 따름으로서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미호는 다른 팀원에게도 말했다.


"모두들, 그의 말에 따르자."


"하지만 그가 없는 채로 돌아가면...."


팬텀이 사령관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말하자 미호는 고개를 저었다. 명령도 중요하지만 지금 인질로 잡힌 바닐라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이건 홍련의 가르침이었다.


"인질의 목이 부러진다면 그건 우리가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야. 사령관...아니지, 전 사령관. 만일 우리가 무기를 분해하고 내려놓는다면 바닐라를 살려줄 거야?"


미호는 그를 굳게 믿고 있기에 이러한 질문을 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희들이 날 놔주기만 한다면, 바닐라는 무사할 거야."


"들었지?"


그 말에 모두 바닐라의 목숨을 우선시헀다. 콘스탄챠는 보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자신의 총을 분해해서 내려놓고, 발키리와 샌드걸도 자신들의 총을 분해해서 내려놓았다. 팬텀도 기관단총을 분해한 뒤에 단검과 후드를 벗어 던졌고 마지막으로 그가 악력으로 바닐라의 무기를 구겨버리자 모두가 비무장 상태가 되었다. 그는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이게 마지막이야. 저 멀리 가. 너희들의 무기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 너희들이 안 보일 만큼. 그럼 바닐라를 보내겠다."


뒤돌아보지 말고, 천천히 뒤로 걸어가. 다시 총을 주워서 조립하는 것은 그녀들에게 어려운 것이 아닐 거다. 바닐라의 총이야 자신이 다시는 쓸 수 없게 구겨놨지만 다른 총들은 온전하게 분해된 상태라 조립도 쉬울 것이다. 게다가 네오딤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니 그는 서둘러야했다. 미호의 말에 따라 대상을 자극하지 않아야하기에 그녀들은 천천히 천천히 뒤로 걸어갔다. 그의 눈을 쭈욱 응시한 채 모두 걸어갔다. 샌드걸은 쓰러진 네오딤을 들쳐업었고 모두들 그의 눈에서 점점 작아져갔다. 어느 정도 작아진 뒤에 그는 바닐라를 잡은 팔을 놓았다. 팔을 놓자마자 바닐라는 획 뒤로 돌아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쳤다. 짜악, 하는 소리가 숲 속에 퍼졌고 일부 새가 그 소리에 놀라 날아올랐다. 오른쪽으로 돌아간 고개를 앞으로 돌린 그는 바닐라의 얼굴을 보았다. 이렇게 다시보니 반갑다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 분위기는 그런 말을 꺼내기엔 썩 좋지 않았다.


바닐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이 울먹이고 있었다.


"...이 멍청한 주인님."


"이럴 수 밖에 없었어. 미안해."


바닐라는 그가 오르카 호를 탈출하려고 했을 때 그를 막아선 적이 있었다.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눴었지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지 못 했다. 그는 그때, 바닐라에게 성큼성큼 다가가고 바닐라는 이제 자신이 제압당할 차례라고 생각해 눈을 꾹 감았지만 그는 바닐라를 못 본 체 하며 지나갔다. 이 때, 바닐라의 머리 속은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었고 자신을 상대하지 않는 그를 향해 가지 말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또한, 그의 축출 소동이 벌어질 때 그녀는 찬성도 반대도 중립도 지지하지 못 했고 그러한 모습을 그는 전부 보았다. 그 날은 그녀에게 있어 최악의 날이었으며 자신은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는 좌절감과 무력함에 그녀는 자신이 잘 하던 요리에 차질이 생겼고, 섬세한 미각 센서가 발동하지 않아 미세한 맛의 차이를 모르게 되었으며, 음식을 예쁘게 장식하는 미적 감각 또한 없어졌다. 전부 바닐라의 심리적 요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했다.


"차라리...그 때 당신의 축출에 찬성했더라면, 차라리 당신이 탈출했을 때 저를 무력으로 제압했더라면 아니면 제가 당신에게 총을 쐈더라면....이런 감정은 느끼지도 않을 건데...."


"....미안해. 이 말 밖에 할 수가 없어."


바닐라. 그녀는 만들어질 때부터 주인을 향한 매도와 독설 때문에 그녀를 그닥 선호하지 않는 인간도 존재했지만 오히려 그 점에 환호하며 그녀에게 물질적 호감을 띄우는 인간도 존재했다. 멸망 전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인간도 존재했었다고 한다. 전 사령관인 그는 바닐라의 매도와 독설에도 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바닐라가 임무에서 다쳐서 돌아올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방문해 미안하다고, 부족한 지휘 탓에 상처받게해서 미안하다고 그저 자신의 무능함만을 탓했다. 이건 바닐라 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이 수복실에 있을 때 그는 수복실에 직접 찾아가 진심으로 자신의 무능함으로 상처입은 부하들에게 사과했다. 이는 지휘관들에게 오르카 호 총사령관으로서의 위엄이 깎이는 행동이었고 자연스레 여러 바이오로이드들에겐 그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행동이었지만 일부 바이오로이드들은 오히려 그 점에서 호감을 느꼈다. 바닐라는 그런 부류였다.


"왜....왜 항상 속삭였어요? 그냥 목을 부러뜨리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바닐라의 이마에게 약하게 딱밤을 놓으며 말했다.


"그럴 순 없어. 그 누구도 죽게 할 수 없어. 날 축출하는데 찬성했든 반대했든 중립을 지켰든. 난 그 누구도 죽일 생각 없어, 바닐라."


그는 바닐라를 잡았고 바닐라도 처음 잡혔을 때는 아, 끝났구나 하고 그의 손에 죽을 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바닐라를 죽이지 않고 그저 인질로 잡기만 했고 그녀의 목을 살짝 조르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모두가 못 듣도록, 바닐라만 듣도록 작게 속삭였다.


잠깐이면 돼, 바닐라.


조금만 참아, 바닐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 끝나면 놔줄게.


이 말을 들으니까 그를 향한 마음이, 끊으려고 노력했던 마음이 결코 끊이지 않는 마음이 되버렸다. 닥치고 있어. 조용히 안 해? 가만히 있으라고. 자신이 한 때 사령관이었던 그에게 평소처럼 하던 대로 그냥 독설을 자신에게 날렸더라면 그게 나았을 거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불안해하는 줄 알고 안심하라는 듯 그 굵고 두꺼우며 낮은 톤의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바꿔서 말했다. 바닐라는 결국 참던 울음을 터뜨려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그는 바닐라를 그저 지켜만 보았다.


"차라리 욕을 했으면, 당신을 증오하기라도 했을텐데....이렇게 저를 안심시키면 어쩌자는 거에요...! 돌아가기 싫어지잖아요...!"


그냥 여기에 있고 싶다. 철충의 위협을 항상 맞이하더라도 그와 있고 싶었다. 그녀도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방금 그녀가 보인 면모는 무척 섬뜩했다. 그런 섬뜩한 면을 가진 사령관보다 이렇게 조금 멍청하고 부족하더라도 자신에게 상냥한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바닐라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매튜는, 우는 바닐라의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그녀에게 키스가 아니라 그저 입맞춤만 한 것이지만 바닐라의 울음을 그치기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바닐라의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돌아가야 해. 위험하잖아. 여기엔 나 혼자 밖에 없지만, 오르카 호에는 언니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지. 그러니까 돌아가야지?"


"....정말, 바보같네요."


바닐라도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하고 눈물이 맺힌 눈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그 후 그는 바닐라를 그 자리에 둔 채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고 바닐라는 그와 입맞춤에서 느꼈던 그의 입 속을 느꼈다. 딱딱한 성격이지만 입술 만큼은 그도 부드러웠다. 딱 하나의 단점만 뺀다면.


"고기 먹고 뽀뽀하는 바보같은 주인님."


그녀는 특수 팀들이 분해하고 두고 간 총기들을 전부 주워서 그녀들이 물러간 방향으로 향했다.



☆ ★ ☆ ★



결국 특수 팀들은 사령관실에서 그녀를 마주했다. 사령관은 바이오로이드 2명을 자신의 양 옆에 세우고 있었다. 사디어스와 나이트 앤젤. 이 둘은 전 사령관 축출 사건 때 찬성표를 던졌었고 그 탓인지 그녀들의 몸에는 피멍과 상처가 나있었다. 콘스탄챠는 이 둘이 입은 상처는 수복실에 가면 손 쉽게 고쳐질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명령으로 인해 둘은 여기에 있으며 아마 자신들이 오기 전까지 그녀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라고 추측했다. 심지어 상처 중 일부는 날카로운 날붙이에 베인 절상이라 그녀들을 폭행할 때 아마 칼같은 도구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바이오로이드라고 해도 여성인데....같은 여성이 여성의 얼굴에 저런 피멍을 물들여놓다니 조금 너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까는 지휘관 개체들에게만 손을 댔다면 이젠 그 아래의 개체들에게도 손을 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축출에 찬성한 바이오로이드들을 사냥할 차례라는 것이었다. 발키리는 보고를 시작했다.


"특수 팀, 보고합니다. 전 사ㄹ..."


"아, 말하지 않아도 돼. 실패했지?"


"...예. 임무 실패했습니다."


자신들이 떠나기 전 그녀가 했던 경고가 떠올라 모두 꽤나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특수 팀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후 그녀는 상큼하게 웃는 얼굴을 보이며 고개를 들어 발키리에게 말했다.


"뭐, 이럴 줄 알았지."


"....임무 실패함에 따라, 특수 팀의 리더인 저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부디 저를 처벌하시길."


"으응, 아니아니. 너희들이 실패할 줄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게 무슨....?"


발키리가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자 그녀는 의자 등받이를 등으로 눕혔다. 그녀 역시 의자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 된 상태로 사령관실의 샹들리에를 바라보았다.


"그가 지닌 전투력. 어느 정도인지 알아. 너희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너희는 그저 확인용이었어."


그 협박도 거짓말이었고, 라고 덧붙히자 발키리를 포함한 특수 팀들은 한시름을 놓았다는듯 맘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가 가보라고 손짓하자 특수 팀은 사령관실에서 나갔고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는 둘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하였다.


"그 동안 어땠어? 철충이랑 싸울 때와는 달랐지? 너희들은 실컷 괴롭혔으니까 이제 됐어. 수복실에 가봐도 좋아."


사디어스와 나이트 앤젤의 상처를 누군가가 본다면 그 누군가가 찬성파였다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 찬성표를 던졌던 바이오로이드들을 전부 불러내서 차례대로 그녀들처럼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중립은....조금 애매하다. 그래도 자신이 아까 연대책임으로서 중립을 지킨 용과 홍련에게도 그 짐을 부여했으니 중립에게도 큰 메세지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사디어스와 나이트 앤젤은 특수 팀이 돌아오지 않을 때 동안 죽을 맛이었다. 아무리 마리가 방어하지 않았고 그저 맞아줬다지만 그 마리를 벽에 부딪힐 정도의 완력을 가진 그녀다. 그녀 둘에게도 전혀 살의를 담지 않았다. 그게 그녀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그 일격 하나하나가 바이오로이드라 튼튼한 자신들의 몸에 외상을 입히고 몸체를 뒤로 밀려나게 할 정도인데 그러한 공격에 살의는 전혀 담기지 않았다. 그럼 만일 그녀가 자신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면....둘은 인사를 짧게 끝마치고 수복실로 향했다.


다음날, 현 사령관의 사냥이 시작됐다. 그의 축출에 찬성표를 던진 바이오로이드들의 정보를 입수한지 오래였고, 그 정보를 토대로 찬성자들을 불렀다. 하루마다 총 10명씩. 가장 먼저 온 바이오로이드부터 선착순으로 세우고 그녀들을 한명씩 한명씩 사령관실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약실에 총알이 딱 하나 장전된 리볼버를 하나 던져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안 룰렛, 알지?"


6발의 장탄수를 가진 리볼버의 약실에 총알 하나만 넣고 실린더를 돌린 뒤, 서로 돌아가며 자신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미친 도박. 멸망 전 인류가 했던 도박이라고 바이오로이드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거기서 자신이 고안해낸 룰을 하나 추가했다.


"하지만 너희들이 배운 러시안 룰렛에 내가 만든 룰을 하나 만들어냈어. 너희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지 말고 오로지 나한테만 겨눠. 이 1분을 가리키는 모래시계가 다 떨어질 때 동안. 모래가 다 떨어졌는데 나를 겨누지도,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 했다면? '5' 정도의 숫자를 얻는 거야. 나를 향해 쐈는데 총알이 안 나가면? '6' 정도의 숫자를 얻는 거고. 총알이 나간다면? 모든 숫자는 사라져. 어때, 재밌겠지? 이건 약 10분 동안 할 거야. 10분 동안 아무것도 안 한다? 그럼 '30' 정도의 숫자를 얻는 거지!"


처음으로 이 러시안 룰렛을 한 건 스프리건이었다. 스프리건은 아무것도 하지 못 했다. 인간의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으나 아무리 총알이 딱 하나 장전된 리볼버라 하더라도 인간에게 겨누는 것은 그녀에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리볼버를 들긴 했으나 그녀에게 겨누지 못 했다. 그렇게 10분이 흘렀다.


"10분 초과. 아무것도 못 했네? 80점~!"


"사령관님, 대체 이게 무슨 게ㅇ-"


그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스프리건은 그녀의 주먹이 왼쪽 볼에 꽂혔다. 그녀의 완력은 마리를 벽에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다. 지휘관 개체는 일반 개체보다 더 튼튼하게 지어졌음에도 마리는 멍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코피까지 흘렸다. 스프리건은 바닥을 여러번 굴렀을 뿐만 아니라 벽에도 부딪혔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스프리건을 그녀는 마구잡이로 후려패고, 짓밟고, 때리고, 던졌다. 특히 스프리건이 맞으면서 내는, 듣는 사람이 아파보이는 신음소리가 오르카 호 전체에 울리도록 사령관실 안에 마이크까지 설치했다. 이 음성은 사령관실 앞에서 대기 중인 찬성파 바이오로이드들 뿐만 아니라 아직 그녀가 부르지 않은 찬성파 바이오로이드들에게도 들렸고, 중립파와 반대파에게도 들렸다. 그녀가 바이오로이드를 때리는 소리는 사람의 살을 때리는 그런 부류의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어떤 나무 구조물을 부수거나 벽돌을 부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게다가 바이오로이드라 할지라도 인간의 신체처럼 부드러운 부위를 치면 스프리건은 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했고 그 괴로운 소리도 역시 방송되었다.


현 사령관의 의도는 그저 한 바이오로이드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스프리건은 스타트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그의 축출에 찬성했던 바이오로이드들에게 앞으로 닥칠 일의 예고였다. 복도에서 대기 중인 인원들은 딱히 마이크가 아니더라도 들리는 스프리건의 비명과 신음에 서로 눈치를 보면서 점점 불안에 떨고 있었고 이걸 방송으로 듣는 찬성파 바이오로이드들도 마음이 무거웠다. 모든 바이오로이드들이 폭력을 두려워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들은 철충과 싸우면서 정말 목숨을 내놓는 전투를 하고 있으니까, 고작 인간 하나의 폭력 쯤이야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령관실은 스프리건에게서 나온 침, 피, 토사물이 바닥과 벽을 칠하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토사물 위에 쓰러진 상태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현 사령관은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가학심으로라도 얼굴이 상기되지도 않은 채, 자신이 거의 죽도록 폭행한 스프리건을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자, 80점이 전부 사라졌어. 10분은 다 지난 상태니까 나가도 좋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사령관실의 문을 열고 스프리건을 문 쪽으로 던져서 복도에 나뒹굴게 했다. 대기하고 있는 9명들은 스프리건에게 닥친 폭력의 증거들을 보고 모두 가슴이 떨리기 시작해왔다. 그리고 9명 모두 스프리건처럼 무자비하게 폭행당했다. 맞다가 실금하는 자도 있었고 제발 그만하라면서 울부짖은 자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정확히 80대만 때렸고, 이 80대는 다리가 풀려서 나가지 못 하는 인원들을 문 밖으로 던지는 것까지 포함이었다.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수복실에서 수복 중인 그녀들을 보았다. 모두들 충격을 금치 못 헀다. 저게 한 사람의 인간이 남긴 거라고? 철충이랑 싸웠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처. 개중엔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자도 있었다.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그녀를 다시 보았다. 특히 전 사령관 축출 찬성파는 더욱 그러했다. 전 사령관보다 훨씬 더 사령관다운 그녀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고 그녀의 웃는 얼굴부터 말투까지 전부 호감 그 자체였는데 그 뒤에 이런 면모가 숨겨져 있었다니? 게다가 이건 바이오로이드들 사이에서 자신의 권한과 위치를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라고 보기엔 정도가 심했다.


중립파와 반대파는 그녀의 폭력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고 닥터도 반대파라 무사할 수 있었다. 닥터는 탈론페더로부터 공유받은 영상기록과 음성기록을 토대로 그녀가 왜 러시안 룰렛에 저런 룰을 추가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저건 바이오로이드들을 정신적, 심리적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육체적인 고통은 뒤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이나 다름없다.


우선 리볼버를 말해보자. 리볼버 약실에 장전된 탄환? 그런 건 없다. 리볼버 안은 그냥 텅 비었다. 러시안 룰렛이라 5/6의 확률로 총알이 나가지 않을테니 리볼버에 탄환이 나가지 않아도 어색할 것은 없다. 그렇기에 탄환이 안 나간다 하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고, 약실을 확인하는 것도 그녀가 허락할 리 없어서 총알의 유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리볼버,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주는 것은 바이오로이드에게 입력된, 인간에게 해를 끼쳐선 안 된다라는 점을 노린 것이고 그 총으로 무려 자신, 오르카 호 총사령관을 쏘라는 것은 더더욱 그녀들이 못할 짓이다.


겨누지도 당기지도 못 하면 5점. 총알이 안 나가면 6점. 10분 동안 아무것도 못 하면 30점. 여기서 1점이란 1대다. 스프리건을 보면 10분 간 겨누지도 못 해서 점수가 5×10으로 점수가 누적되어 50점이고 10분 간 아무것도 안 했기에 30점이 추가되었다. 이렇게 80점을 먹으면 80대를 얻어맞는다. 그녀의 완력은 지휘관 개체인 마리를 날려버릴 정도이다. 모두가 봤듯이 그녀의 완력은 인간으로서 정상이 아니다. 영상기록에서 그녀가 스프리건이나 다른 9명에게 가하는 폭력의 수위로 보아선 저건 적당히 죽지만 않을 정도로 때린 것이다. 그러나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때린 것이기에 그녀에게 맞으면 아마 많이 아플 것이다.


총합해보자면 바이오로이드의 인간을 절대 해쳐선 안된다는 점을 노려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약실이 텅 빈)리볼버를 줘서 자신에게 쏴보라고 그녀들의 정신과 심리를 1차적으로 몰아가고, 이미 본보기로 걸레짝이 된 1명을 보여주면서 다른 9명도 이렇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여 2차적으로 몰아가고, 그 방송을 듣는 찬성파 바이오로이드들은 다음 차례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언제나 긴장하게 되서 3차적으로 몰려진다. 이건 덤이지만 그녀는 바이오로이드가 인간을 본따 만들어졌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인간의 약점 부위들을 주로 때렸다. 저렇다면 철충의 공격에도 싸우는 바이오로이드가 아파하면서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도 납득이 된다. 약점을 얻어맞고 멀쩡할 자가 어디있는가? 게다가 그녀는 이미 차례가 지난 대상이라고 해서 제외시키는 법이 없었다. 이미 그녀에게 폭행을 당한 바이오로이드는 왜 또 자신인지 모르는 표정과 함께 또 그녀에게 맞아야하는 것 때문에 공포를 느낀다. 닥터도 그저 영상으로 보고, 음성으로 듣는 것일 뿐인데 왠만한 철충을 만난 것보다 더 무서웠다.


사령관은 보기보다 교활하고 영악한 자였다. 또 어느 날은 칸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직접 와서 차라리 자신이 맞겠다고, 그러니 자신의 부대원들은 봐주라고 그녀에게 부탁하는 음성기록이 왔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로 지휘관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해당 부대의 지휘관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방송을 더 크게 틀었다.


"다들 오빠를 무시했지만....언니는 무서워하네."


혼잣말로 중얼거린 닥터지만 정말로, 그녀가 말한 것이 맞았다. 찬성파들은 그를 무시하고 우습게 봤다. 그녀를 마냥 좋게만 봤다가 날벼락을 맞고 그녀를 혐오하지도 싫어하지도 못 하게 되었다. 그저 공포만을 그녀에게 느낄 뿐이었다. 11일 간의 사냥을 끝마치고 사령관은 전체 방송으로 말했다.


-내가 호명하는 바이오로이드는 당장 정비실로 오도록.-


그녀가 부른 바이오로이드는 대략 이러했다.


네오딤, 에키드나, 레아, 블러디 팬서, 이오, 둠 브링어 전원, 세라피아스 앨리스, 스카이 나이츠 전원, 스틸라인 전원, 칸, 퀵 카멜, 워울프, 키르케, 베로니카, 이그니스, AA캐노니어 전원, 그리고 닥터.


그래, 이렇게 많이 부르는데 당연히 정비실로 가야지. 사령관실은 비좁을테니까. 하고 중얼거린 닥터는 타이탄과 함께 정비실로 향했다.


정비실로 모인 그녀들은 사령관을 마주했다. 개중에는 그의 축출에 찬성한 바이오로이드도 있어서 일부는 사령관을 마주하는 것이 좀 꺼리는 눈치였다. 사령관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신경쓰지 않고 단말기를 조작해서 홀로그램을 만들어냈다. 그 홀로그램은 어느 작은 섬의 모양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사령관은 모두가 홀로그램을 보고 있을 거라 판단했다.


"이거 보이지? 저번에 특수 팀이 그를 발견한 무인도야. 꽤 작지. 그의 전투 능력은 대단한 수준이야. 나도 영상을 통해서 봤지만 도저히 인간의 전투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았지. 하지만, 그런 거와는 상관없어. 난 그를 잡을 수 있는 계략이 있으니까."

그녀가 마저 하려는 말은 잠시 여러 질문에 의해 끊겼다. 가장 먼저 질문을 시작한 것은 메이였다.


"하나 잡는데 이렇게나 필요해?"


"내가 원하는 그림을 위해선 딱 이 정도가 적당해."


다음은 앨리스가 말했다.


"저 하나만 있으면 될텐데요?"


"내가 원하는 그림이라고 못 들었어?"


다음은 워울프였다.


"하지만 이 정도의 숫자라면 오히려 과한 것 아닌가? 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길래 그러는 거야?"


"....모두들 잘 들어. 너흰 내가 원하는 그림이 뭔지 제대로 파악 조차 못 하고 있어."


그녀는 잠시 홀로그램을 뒤로 치워두었다. 싱긋 웃었고 그 웃음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히 활력이 있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러시안 룰렛 '게임' 을 직접 같이 하거나, 혹은 듣거나 했던 자들은 그 웃음이 얼마나 소름돋는 웃음인지 알 수 있었다.


"내 어릴 때를 잠시 말해줄게. 나는 시골에서 자랐거든? 그래서 쥐가 정말 골치였어. 나는 쥐들을 잡으면 그 쥐들을 한 곳으로 모은 뒤에 그것들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조금 줬지. 그 길이 죽음의 함정인지도 모르고 쥐는 그대로 가더라. 하지만 그 쥐들은 몰랐지. 어디로 가던, 결국 내 손바닥 위라는 걸. 이제 내가 좋아하는 걸 눈치챘어?"


모두, 심지어 닥터마저도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직접 그 입으로 말해줬다.


"대상이 무슨 짓을 하던, 그것이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마치고 다시 홀로그램을 앞세운 그녀는 앞으로의 작전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작전을 들은 모두 표정이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으면 좋겠어.', '대사이 무슨 짓을 하던'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정말 최악의 전략이었다.


그렇게 전 사령관 완전 포획 작전, 일명 '독 안에 든 쥐 작전' 이 시작되었다.



☆ ★ ☆ ★



11일 동안 운이 좋았다. 그는 그 동안 철충도 안 만나고, 바이오로이드와도 안 만났다. 11일 동안 그는 자신의 야영지와 함께 자신의 무인도에서의 삶을 발전시켰다. 인류가 없어진지 100년이 지나니까 이런 무인도에도 자원이 넘쳐난다. 처음에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만 지은 텐트 뿐이지만 이제 그것이 돌과 나무, 나뭇잎, 덩쿨로 지어질 뿐만 아니라 개미나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땅과는 떨어져서 지어졌다. 그 뿐인가? 덫을 여럿 설치해서 고기를 얻을 수 있고 물에서도 덫을 설치해 물고기를 얻었다. 그간 비가 많이 온 덕에 식수도 확보, 불을 땔 장작도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그는 꽤 만족스럽게, 알차게 마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비록 소완이 해준 음식도 못 먹고, 깨끗하게 씻지도 못 하고, 한시도 편하게 있을 수 없지만 이렇게 자기 혼자서,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이런 원시의 생활을 즐기다니. 어쩌면 자신이 원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고 그는 스스로 생각했다. 때는 밤.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그는 증축한 집에 들어갔다. 그의 침대는 아래에 열을 충분히 머금은 뜨끈뜨끈한 돌들이 깔려있었고 그 돌의 온도에 화상을 입지 않도록 열의 대부분을 차단하여 따뜻함만이 올라오게 했다. 덮고 잘 이불과 머리를 놓은 배게도 있다.


그래, 이 정도면 호강하고 있어. 하고 그는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 잠을 청했다. 그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가 잠든지 몇 시간이 지나자 일이 벌어졌다.


쿵!! 쿵!! 쿵!! 하는 거대한 소리가 났고 그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무기를 챙겼다. 무기라고 해봐야 앞뒤가 뻥 뚫린 대나무의 뒤에 고무관을 묶고 뾰족한 나뭇가지를 장전한, 정말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큰 소리에 당황해서 횃불도 안 챙기고 나온 그였다. 무인도의 밤은 칠흑 그 자체이지만 그런 어둠 속에서도 그는 볼 수 있었다.


무인도의 주변에 커다란 금속 장벽이 꽂히고 있다. 하늘 위에 떠있는 거대한 금속 장벽들은 무인도 주변에만 박히고 있었고 그는 점차점차 박혀가는 장벽을 보았다. 어느새 마지막 금속 장벽이 박혔다. 그는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지금 상황을 확실하게 인지했다.


수십개의 금속 장벽들은 무인도를 둥글게 감싸고 있다. 이 말은 즉....자신은 이 무인도에 갇혔다, 를 의미했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하늘 위를 무언가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고 그것들은 땅으로 무언가를 투하했다. 자신과 거리가 먼 곳이었으나 투하된 것은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잘 보이는 것이었다. 연기와 폭발. 그 중 달빛 덕분에 거대한 옥좌에 앉아있는 바이오로이드를 본 그는 그것이 메이임을 알아차렸고, 냉정하고 빠른 계산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가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을 깨달았다.

근처에 이족 보행 소리 내는 것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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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후회물스럽게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