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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냐."


눈 앞의 모르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 애칭까지 불렀고 심지어는 '자기' 라는 호칭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현 오르카 호의 사령관임을 그는 알아차렸으나 그녀의 자세한 정보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 바이오로이드에게서 알려주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을 말이다. 눈 앞의 여성은 무척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제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자신이 숨긴 정보까지 알고 있다는 건 그를 충분하게 불편히 만들 수 있었다.


그녀는 눈 앞에 있는 그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하나도 예측하지 않았는지 한 동안 벙쪄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가 한 말이 사실 농담 아니었을까? 자신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맘에 그만 농담이라든지 장난이라든지 하는 건가?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그의 눈을 보면 그가 뱉은 말이 농담도 장난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자기,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날 그렇게 부르지 마라. 초면 아닌가."


"농담은 그 정도까지 해. 난 농담할 기분 아니야."


그녀도 알고 있다. 그는 진짜로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농담이라고 치부한 이유는 그가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그저 그가 장난끼에 하는 말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물었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몰라? 기억 안 나?"


"...."


아까까지만 해도 유지되었던 그녀의 여유와 웃음은 이제 사라졌다. 이제는 꽤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으나 그는 그 바램을 냉정한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의 침묵에 그녀는 표정을 싸악 굳혔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보고 있던 그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를 말 없이 바라보니 흐렸던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입술 아래의 점, 따로 서있는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에 오똑한 코, 선홍빛 입술....이 시각 정보들을 토대로 기억해낸 결과 그가 기억하기론 하나 밖에 없는 자가 떠올랐다. 심지어 지금 그가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있는 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바이오로이드.


그는 그녀를 자극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자극을 통한 그녀의 반응을 봐야하기에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를 말하였다.


"펙스 콘소시엄."


"....갑자기?"


그녀는 왜 그 말이 나오냐는 듯 그에게 물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그 기업의 회장이 생각나는군. 비열한 웃음을 짓는 말라깽이 노인네였지. 무고한 어린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를 살해한 후의 일인데....천인대로서 해야할 일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게 된 후엔 천인대의 이름을 달고 하는 모든 일들이 더럽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삼안, 블랙리버, 펙스....이 세 기업을 쳐부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뭐, 규모가 큰 기업이라 피해를 줘도 금방 복구했지만. 자신들이 모든 사람들의 위에 섰다고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쓸데없이 나댈 때, 그 안면에 주먹을 꽂아주는 것은 언제나 즐겁지. 특히 펙스의 일곱 회장들은 더더욱 그러했어."


그는 똑바로 앉아있다가 등을 굽히고 안면을 그녀 가까이에 대었다. 묶여있어서 그녀에게 더 접근하지는 못 했지만 그도 그녀도 서로의 얼굴을 확실하게 눈에 담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그 거리를 유지한 채 썩은 미소를 지었다. 한 쪽 입꼬리를 올리고 씨익 웃어 가지런히 정렬된 치아가 보이고 두 눈에는 조롱이 담겨있었다.


"특히 그 말라깽이 노인네. 우리들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그 웃음이 싹 사라졌었다. 지금의 너처럼."


"...."


"자신들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마자 화평을 요청하던 그 꼬라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되는군. 스콧은 왜 그걸 받아줬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펙스 콘소시엄 자체를 지워버렸어야 했는데 말야....안 그래?"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던 얼굴을 치우고 등을 펴 자세를 정자세로 바꾸고 코로 숨을 내쉬며 자신이 기억해낸 그녀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레모네이드."


솔직히 그는 여기서 그녀에게 뺨을 맞는다던가 하는 반응을 기대했다.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자신이 틀린 게 아닌 것이 되니까.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그는 조금 더 자극이 필요한가 싶어서 더더욱 그녀를 도발했다.


"오메가, 감마, 델타....내가 만난 레모네이드는 이렇게 셋이다. 하지만 넌 다른 개체들과는 외모가 살짝 다르군."


'그녀' 의 얼굴과 레모네이드의 얼굴을 반씩 섞은 것처럼 말이야, 하고 말하고 싶었고 또 그 말에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는 그걸 간신히 참고 그녀의 정체를 더 캐물었다.


"그래, 넌 어떤 레모네이드지? 알파? 베타? 엡실론? 아니면 제타냐?"


그 혼자서 하는 말에 계속 조용하게 있었던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그녀는 허밍을 하기 시작했고 허밍이 끝나자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그 노래는 듣는 이를 감탄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는 갑자기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이상하다 여겼고 잠자코 노래를 들어보았다.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 다른 목소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아닌 나름 괜찮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가사는.....그는 또 다시 흐렸던 기억이 선명해진 걸 느꼈고 바로 믿을 수가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노래를 어떻게 아는 거냐!"


그는 목소리를 높혀 말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는 더더욱 그녀의 정체가 오리무중이 되가는 걸 알았다. 이 노래는 자신들 밖에 모르는 노래다. 얼마나 들었는지 간주가 없어도 부를 수 있을 정도고 이걸 너무 많이 불렀던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그 너무 많이 불렀던 녀석이 직접 만든 노래이기도 했다. 그는 으득 하고 이를 깨물어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그럼에도 그녀가 노래를 멈추지 않자 크게 외쳤다.


"그만!!!"


그 외침에 그녀는 비로소 노래를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손가락으로 톡 톡, 탁자를 치면서 말했다.


"에반은 사이코 새끼였지. 천인대들이 대부분 망가진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서 에반이 특히 심했어. 그냥 보면 괜찮은 사람이지만 실상은 사람 죽이는 데에 희열을 느끼는 놈. 같은 천인대들도 에반보고 사이코 새끼, 소름돋는 놈, 살인마....이런 식으로 불렀는데 그럼에도 다들 에반과는 잘 어울려 다녔어. 천인대란, 그런 년놈들만 모인 곳이야. 자기가 천인대로 발탁된 아주 근본적은 원인이기도 했지. 아, 그래도 에반이 노래 하나는 잘 만들지?"


"너...."


"난 별로 맘에 안 드는 놈이었지만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기억해. 생각해보면 사이코인데 여러 재능이 넘쳐나기도 했었지. 그건 꽤 부러웠어."


그녀가 부른 노랜, 천인대의 일원이자 매튜의 동료이기도 했던 에반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였다. 쉬는 시간일 때 그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거나 불렀고, 임무 도중에도 노래를 부르면서 능률을 올린다느니 하는 말을 했었고, 일이 다 끝나고 모든 것을 태울 때에도 그 불을 캠프파이어의 모닥불로 보고 에어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자신이 직접 만들고, 또 가장 많이 부른 노래. 방금 그녀가 부른 노래였다.


다시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녀에게 그는 눈 앞에 있는 누군지 모를 여자에 대한 정체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천인대가 아니면 모르는 노래를 부르고, 에반에 대해서도 천인대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게다가 결정적으로 저 외모는 그녀의 외모가 반 섞여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설마?"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가 장난스레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아냐...그럴 리 없어. 만일 너가 정말로 그녀가 맞다면 내가 기억 못 할 리가 없어."


"부정하면 안 돼, 자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자기가 자기를 속인다니 이상해. 그렇게 생각했을 때부터 다 알아차렸잖아?"


자신이 직접 정체를 밝히지 않을 뿐, 그녀는 사실상 자신이 누구인지 그에게 밝힌 셈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로부터 직접 그 이름을 듣고 싶었다. 자신이 말하는 건 따분하고 재미없지만 여러모로 잊혀지지 않을 마지막 기억을 그에게 안겨줬으니, 그 기억을 가진 그가 자신을 말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반대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녀가 눈 앞의 여자가 절대 아니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자신의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하기 싫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는 조금 닮았을 뿐 원본과는 다른 얼굴이다. 목소리도, 눈도 다르다....절대 그녀일 리 없다. 계속 스스로를 속였지만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상처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렸다.


시각, 후각, 청각, 촉각이 모두 차단되었을 때 자신을 향한 공격들은 너무 무수해서 하나하나 다 세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무탄과 암염탄이 자신을 마구잡이로 강타했고, 날카로운 칼날이 자신의 몸을 베어내었고, 딱딱하고 무거운 둔기가 자신의 몸을 부순 것 정도는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그는 상처로부터 나오는 통증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상처가 또 다른 것을 일깨워줬다. 이그니스와 레아의 협공으로 자신이 숨을 은신처가 완전히 불탔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이그니스라면 그가 원거리에서 계속 돌맹이나 나무로 만든 화살을 쏘면서 대응할 순 있지만 레아라면 그럴 필요도 없다. 아니, 자신을 포획할 바이오로이드는 레아 하나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레아 못지 않게 강한 앨리스도, 엄청난 섬멸 능력으로 명성이 높은 둠 브링어도 자신을 잡기 위해 왔다.


레아가 그저 그에게 약한 번개를 떨어뜨린다면, 둠 브링어의 소속 인원들 중 그 누구라도 그를 집중 타격한다면, 앨리스가 미사일 하나를 쏘기만 한다면, 스카이 나이츠가 그 기동성으로 그를 철저하게 가뒀더라면, 칸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공격했다면, 아스널의 저격이 등이 아니라 복부에 맞았다면, 스틸라인이 실탄 사격을 가했다면....매튜는 죽거나, 혹은 완전 제압된다. 그러나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씩은 있었다. 이 구멍은 그녀들이 미처 막지 못 한 것이라고 여태껏 생각했지만 상처가 하는 말은 달랐다. 그녀들이 정말로 자신을 놓칠 구멍을 막지 못 했다고 생각하는가? 오히려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만들어주고 자신은 거기로 들어간 것 뿐이다. 통발 속에 들어가는 물고기처럼. 게다가 마치 자신이 가진 강점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들은 그를 봉쇄하고 공격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들에게 화학 물질으로 인한 강화를 설명해준 적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말해줬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상대방을 정확하게 파악한 상태에서, 그 상대의 강점을 하나하나씩 봉인하여 무방비 상태로 만들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대상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심어줘서 더더욱 자기 자신을 사지로 몰고 가게 하는 전술. 그가 당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전술을 쓰는 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다. 이 전술을 썼던 그 남자는 천인대이자 천인대의 대장이고, 희망고문으로 대상을 말려죽이는데에 능하다. 그리고....'그녀' 는 그 남자로부터 전술 교육을 받아서 그 남자와 아주 유사한 작전을 주로 짰다. 매튜는 더 이상 그녀의 정체를 부정하기엔 무리라는 걸 알았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회복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고통은 그의 다른 기억 역시 일깨워주었다.


이곳 저곳에서 칼날이, 이곳 저곳에서 둔기가, 이곳 저곳에서 비살상탄들이 자신을 계속 공격할 때, 그는 외쳤다.


코나아아아!!!!!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여전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제발 주변에 감시 카메라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박치기로 그녀를 때린다면 당장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까 들어오면서 봤듯이 여기엔 감시 카메라도, 도청기도 없다. 그는 결국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그녀가 원하던 답을 들려줬다.


"....코나."


"응. 반가워, 자기."


그녀, 코나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그가 기특해보였고, 그런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 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고 취조실에서 나갔다. 취조실에는 콧잔등에 키스를 받은 매튜만이 남았다.



☆ ★ ☆ ★



"꺄아아아악!!"


빨간머리와 빨간 눈의 바이오로이드, 레프리콘이 땀을 줄 줄 흘리면서 깨어났다. 가파르게 호흡하면서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엔 모두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와 같은 소속의 스틸라인 바이오로이드들이 누워있었다. 스틸라인의 전투제식복인 타이즈 차림이 아닌 모두가 편안한 생활복 차림이었다. 레프리콘은 생활복 상의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것을 느끼고 그걸 벗고 곱게 접었다. 생활복 안 쪽에 입고 있던 하얀 반팔 셔츠도 젖은 후였지만. 그녀는 자꾸 아른거리는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현 사령관은 스틸라인에게 그를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라고 했다. 이건 비유 상의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그의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라는 말이었다. 그 명령을 들은 후 그녀가 사라지자 스틸라인의 바이오로이드는 여러 반응들을 보였었다. 우선, 대장인 불굴의 마리는 이전의 패배로부터 배웠으니 이젠 돌려줄 차례라고 생각했고 피닉스와 레드후드도 그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제 복수할 차례라고 벼르고 있었다. 임펫 역시 그에게 살수를 쓰면 안 되니 암염탄을 가득 챙기면서 웃는 등 그에 대한 안 좋은 면을 보였다. 마리, 피닉스, 레드후드, 임펫은 스틸라인 내의 공개적인 전 사령관 축출 찬성파였다. 스틸라인의 모두가 그의 축출에 찬성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파고 들면 스틸라인에서도 그의 축출에 반대했던 자들도 존재했다.


이프리트는 중립이었지만 실질적으론 반대했었고 노움, 실키, 브라우니, 그리고 레프리콘은 반대했었다. 하지만 그녀들 중 그 누구도 찬성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스틸라인의 주름을 잡고 있는 마리와 레드후드가 찬성파다. 이 둘이 찬성을 지지하고 있다면 아무리 반대를 말해봤자 스틸라인은 축출 찬성이라는 표를 달 수 밖에 없다. 그 덕에 중립을 지키든 반대를 지지하든 스틸라인은 어쩔 수 없이 사령관 축출 찬성파에 속해버렸다. 레프리콘은 이에 큰 부당함을 느꼈지만 감히 자신의 계급으론 저들에게 항명할 수 없으니 그저 따랐다. 현 사령관을 맞이하고 그녀의 아래에서 싸웠을 땐 그의 아래에서 싸웠을 때보다 훨씬 안전하고 쉬웠다. 그녀는 마리와 함께 스틸라인의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했고 스틸라인은 승리의 기둥이 되었다. 비록 그가 쫓겨난 것엔 가슴이 아팠지만 현 사령관도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레프리콘은 그에겐 미안하지만 살짝 그녀에게 마음이 갔었다.


현 사령관이 이빨을 드러내자 그녀의 실체를 알았고 그녀가 말한 '독 안에 든 쥐' 작전에서 자신은 전 사령관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고무탄을 쏴서 그를 고꾸라뜨린 적이 있다. 그는 무척 아파보였다. 나이프로 그를 벤 적이 있다. 그는 무척 아파보였다. 총을 둔기 삼아 후려친 적이 있다. 그는 무척 아파보였다. 그를 때릴 때마다 그는 듣는 사람이 아찔할 정도의 비명을 질렀고, 몸이 걸레짝이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직접 목격했다. 레프리콘은 그가 죽지 않았으면 하고 계속 빌었고 그는 정말로 죽지 않았다. 대신, 죽지 않은 만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를 받았다. 그가 완전히 쓰러지고 브라우니와 자신은 그를 서둘러 싣고 오르카 호로 달렸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의 얼굴과 상처를 보았다. 양눈의 초첨이 정확하지 않은 상태일 뿐만 아니라 눈의 검은 자를 제외하면 흰 자는 전부 붉게 물들어있었다. 레프리콘은 그를 닥터에게 넘기고 난 후 곧바로 토했다. 모두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레드후드가 들어왔고 그녀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던 욕을 들었었다.


'씨발.'


그 욕을 뱉은 건 브라우니였다. 브라우니의 얼굴엔 그의 몸에서 튀어나온 피가 묻어있었다. 레드후드는 브라우리를 보며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 나를 향해 말한 건가?'


'그럼 누굴 향해 말했겠슴까? 마리 대장님이 없어서 아쉽슴다. 있었다면 침도 뱉어줬을건데.'


모두가 경악해야할 광경인데도 모두 브라우니를 말리지 않았다. 레드후드는 자신을 향해 욕을 뱉은 브라우니를 바라보다가 다시 앞을 보며 갔다. 레드후드의 얼굴도 착잡함이 가득한 상태였다. 브라우니는 자신을 지나쳐가는 레드후드를 향해 소리쳤었다.


'전 사령관님이 우리들한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했슴까?! 저희들한테 무척 잘 해주지 않았슴까!! 지휘를 못 한다고 쫓아낸 것으로 모자라 이렇게 뒤지도록 패기까지 해야한다니 해도해도 너무한 거 아님까!? 귀 안 먹었으면 대답하시지 말임다!!'


브라우니의 분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레드후드는 그 말을 계속 무시했다. 브라우니가 더 이상 선을 넘지 못 하도록 노움과 이프리트가 그녀를 간신히 말렸고 그렇게 소동이 끝났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소동 이후 빠르게 침낭을 펴고 잠들었는데 거기서 악몽을 꾸었다. 어떤 무리들에게 두들겨 맞는 그가, 레프리콘을 향해 살려주라고 손을 뻗었지만 그의 머리를 내리친 둔기로 인해 머리가 쪼개졌다. 레프리콘은 수박처럼 터진 그의 머리를 보고 경악했고 곧 그를 그렇게 만든 자는....레프리콘이었다. 이러한 악몽을 꾸고 그녀는 잠에서 깬 것이다.


"또 깼어?"


레프리콘의 옆에선 이프리트가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로 누운 상태다. 그녀의 뒤통수와 등만 보일 뿐, 그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다음엔 레프리콘의 왼쪽에 있는 브라우니가 말했다.


"4번째지 말임다."


"...죄, 죄송합니다."


자신 때문에 전우들의 잠을 깨운 것이 아닌가 하여 레프리콘은 사죄했지만 브라우니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슴다. 오늘은 잠이 뒤지게 안 오니 말임다."


킥킥 웃으면서 브라우니도 일어났다. 브라우니가 일어서자 이프리트도, 노움도, 실키도 똑같이 일어났다.


"히히...제가 완전히 정신이 나갔나 봄다. 레드후드 연대장님한테 그렇게 말하다니, 참 신기함다."


"그때 너 정말 미친 줄 알았어..."


이프리트가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한 뒤에 말하였다. 브라우니가 레드후드를 향해 욕한 것으로 모자라 스틸라인의 지휘관인 마리까지 욕보였다. 그 자리에 마리가 없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저도 '내가 미쳤나?' 싶었슴다. 그래도 할 말은 했으니 그렇게 후회되진 않슴다."


아예 침낭에서 다리를 빼고 위에 앉은 브라우니는 깜깜한 천장을 보았다.


"정말이지, 지금 사령관님도 마리 대장님도 너무함다. 아무리 지금은 아니더라도 예전엔 저희 사령관이었지 말임다? 이것 저것 저희들을 잘 챙겨주었지 말임다."


"그러긴 했지..."


이프리트가 긍정했다. 이전 스틸라인의 바이오로이드들이 먹었던 부식은 질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것들 뿐이었다. 그 참치캔 마저도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운이 좋은 날이었다. 전 사령관이었던 그는 대량의 참치캔이 보관된 장소를 철충에게서부터 탈환하고, 그 참치캔들을 모든 부대에 공평하게 나눠주었다. 특히 스틸라인에게 유독 더 많은 참치캔을 주어서 브라우니들에게 전 사령관은 그야말로 은인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축출되었던 이유는 그의 형편없는 지휘로 인해 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가장 크다. 대장 마리 역시 승리를 위해선 자기 목숨 내놓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 역시 승리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다. 이걸 보면 브라우니는 마리든 전 사령관이든 똑같은데 왜 그가 축출되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는 자신들을 잘 이해해주었다. 브라우니, 레프리콘, 노움, 이프리트 등의 병사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주었고 거기에 공감도 해주었다. 이 점에선 마리보다 훨씬 나았다. 마리는 언변을 통해서 부하들의 사기 진작에 큰 영향을 발휘했지만 전투 이후엔 부하들에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들이 느끼기엔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오르카 호에서 가장 많은 브라우니에게도 그 브라우니가 전사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같은 브라우니라는 이유로 사과했고 부하들이 오르카 호 안에서 느끼는 쾌적함을 위해선 마리와도 여러 언쟁을 벌였다. 그는 사령관이라는 위치임에도 지휘관들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그 지휘관 아래의 부하들과는 꽤나 사이가 좋을 뿐 아니라 부하들 사이에서의 평가도 좋았다. 그는 전술적으로 보면 0점이지만, 부하들의 사후처리에 관심을 보이고 신경쓰기에 그칠 뿐 아니라 정말로 사후처리를 하려고 하는 행동력도 가지고 있었다.


독 안에 든 쥐 작전에서 보급병으로 전장을 뛰어다녔던 실키도 옆에서 거들었다.


"전 사령관님은 정말 상냥하신 분이셨어요. 브라우니 일병님이 저 동계전투복을 전부 빨아버리는 바람에 하계전투복으로 있었을 때 추워서 떨고 있는 저에게 털 코트를 입혀주셨어요."


"오오, 제 덕이 좀 있지 말임다!"


"우, 우연찮은 행운이었지만....전 사령관님도 추우셨을텐데..."


뭐지 저게? 자랑인가? 하고 레프리콘과 노움이 생각했다. 실키의 일화를 듣자 다음엔 이프리트가 나섰다.


"아아....나도 좀 도움받은 적이 있네....전 사령관님도 나처럼 옛날 노래를 좋아하던 분이시더라....심지어 나도 잘 모르는 노래들이었어. 전 사령관님 덕분에 좋은 노래들이 컬렉션에 들어왔지.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항상 무릎 위에 올려줬고. 전 사령관님의 무릎, 엄청 편하더라."


"그러고보니 저도 있슴다! 스팸을 더 맛있게 먹는 법을 가르쳐줬슴다. 대파로 파채를 만든 다음에 밥이랑 같이 먹으면....크으~, 역시 전 사령괸님은 역시 맛잘알이었지 말임다."


셋이 대화를 시작했지만 노움과 레프리콘은 끼어들 수 없었다. 저 셋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그와의 추억이 적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저 셋보다 훨씬 더 행복했던 적이 있었으나 둘은 그걸 자랑하고 다닐 성격이 아니고, 이건 자신과 그만이 알고 있는 추억이기를 바래서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잠자코 있는 그를 브라우니가 캐치했다.


"근데, 왜 둘은 그냥 조용히 있지 말임다?"


"예? 아, 아아....저, 저는 그냥 듣기만 할게요."


노움이 손사레를 치며 어색하게 넘어가려고 했으나


"한 번 말해 봐. 궁금하긴 하네."


이프리트까지 가세하자 노움은 우왕좌왕하면서 당황했다. 그러나 모두의 눈길이 노움 그녀에게 끌리자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와의 추억 하나를 말했다.


"그...한 번, 전 사령관님과 육지로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저는 그 때 호위였어요. 다행히 거기서 철충들과 만나지 않았는데...."


"않았는데?"


이프리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셨어요. 저는 무척 당황했고 이리 저리 둘러보며 사령관님을 애타게 불렀죠. 4번쯤 부르니까 사령관님이 나타나셨는데 왠 얼룩 고양이 한 마리를 들고 계셨죠."


노움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스틸라인의 모두가 알고 있는 정보다. 긴 앞머리로 가려진 얼굴과 미세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봐선 노움은 무척 딱딱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사랑스럽다. 노움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고양이....저랑 사령관님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죠. 사령관님이 저한테 고양이를 주셨는데....저한테 이렇게 말하셨어요. '노움, 고양이 좋아하지?'. 제가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지만....저는 그때 정말로 귀여운 고양이와 놀았어요. 제가 즐겁게 고양이랑 놀고 있는 동안 사령관님은 다른 고양이도 데리고 오셔서 제 옆에 두셨고....전 그때 정말 행복했어요."


그냥 들어보면 고양이를 좋아하는 노움에게 고양이를 준 것일 뿐인, 좀 지루한 스토리다. 하지만 그 후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음 스토리가 모두를 흥미롭게 했다.


"갑자기 사령관님이 제 턱을 쓰다듬으셨어요. 저도 고양이 같다면서....저를 정말로 고양이처럼 대하셨어요. 제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시고, 턱도 약하게 긁어주시고, 양볼도 부드럽게 만져주셨고, 또 저를 안아주셨죠."


그 말에 실키와 이프리트는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고 브라우니는 흥분해서 더 물어보았다.


"오오~! 다음은?! 다음은 어쨌슴까!?"


"다, 다음이래봤자 별 거 없어요. 저를 안아주셨다가 진짜로 고양이인 것 같아서 그랬다고....사과해주시고 놔주셨어요. 아..."


마지막 아....에 모두가 눈으로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고 노움도 그 시선의 의미를 알고 답해주었다.


"그, 그 때....조금 대담해져서....사령관님의 볼에 그...뽀뽀를...저도 부끄러워져서 고양이들이 사람을 정말 좋아할 때 해주는 스킨쉽이라고 해서....네."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러브 스토리였다. 노움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빨개져 있었고 배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레프리콘은 저렇게 쑥쓰러워하는 노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늦은 시간이래도 모두 이렇게 하하호호 웃을 수 있어서 방금까지 꿨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레프리콘은 이제 다시 잠을 청하기로 했지만


"마, 마지막으로 레프리콘 일병님의 일화까지 들어보시는게...?"


노움이 그녀에게 표적지를 넘겼고 레프리콘이 화들짝 놀랐다. 브라우니는 어서 레프리콘에게 해보라고 재촉하였고 실키, 이프리트, 노움은 말 없이 레프리콘을 바라보았다. 레프리콘은 말하지 않았다간 절대로 못 자겠구나 싶어서 단념하고 그와의 일화를 말해주었다.


"그, 저번에 해변에 가서 잠시 쉬었을 때....브라우니가 나이트 앤젤 씨를 자극하는 바람에 결국 도망쳤었죠. 저는 왜 쫓겼는지 모르겠지만....도망가고 있는 저를 누가 획 채갔는데 전 사령관님이셨죠. 저에게 나이트 앤젤 씨가 가슴에 대해서 콤플렉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3일 동안 사령관님이 저를 숨겨주셔서 저는 나이트 앤젤 씨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어요."


"왠지 저만 쫓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였슴까?!"


"그, 그건 브라우니의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억울했다구요! 브라우니를 말리려고 하다가 화만 더 돋구고..."


"눈 뒤집힌 사람한텐 무슨 말을 해도 욕으로 들리지...."


이프리트가 경험에서 우러러 나온 조언을 해주었다. 레프리콘의 일화는 그저 브라우니만이 억울한 이야기였을지 모르나 그녀 역시 노움처럼 마지막이 모두의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그, 그 뒤에 제가 보답의 의미로 바디오일을 발라드리려고 했는데....바디오일을 어떻게 쓰는지도 어떻게 바르는지도 모르는 저에게 직접 알려주셨어요. 제 몸에 바디오일을 발라주셨는데 정말 능숙히 하셨죠. 기분도 좋았고....또 저랑 사령관님 둘 밖에 없어서...."


"그 다음은 혹시...?"


실키가 침을 꿀꺽 삼키고 그 다음을 물었지만 그녀는 노움보다 더 빨개진 얼굴을 하며 답하지 못 했고 모두 그 뒤에 일어난 일을 예상했다. 노움은 혼잣말로 귀여운 질투를 드러냈다.


"ㅈ, 전 그냥 뽀뽀였는데..."


그렇다. 이 중에서 진도를 가장 빠르게 나간 건 레프리콘이었다. 솔직히, 노움은 스틸라인에서 자신이 그에게 최초로 뽀뽀를 했고 가장 스킨쉽을 많이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다. 브라우니나 실키는 고작 해봤자 쓰다듬기가 끝이었다. 이프리트도 양볼에 뭔가 빵빵하게 찬 상태였다. 레프리콘은 괜히 말했다면서 침낭에 얼굴을 파묻었지만 브라우니, 노움, 실키가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편 그녀들의 대장인 마리는 책상에서 꾸벅 꾸벅 졸다가 펜이 책상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깼다. 비전투 상황일 때도 군복을 입을 필욘 없으니 연보라색 네글리제 속옷 복장의 위에 하얀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마리는 펜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에 깬지 벌써 4번째라는 것을 스스로 되뇌였다. 방의 불은 꺼져있고 주위도 조용해서 바로 옆에 있는 침대에 누우면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옷을 갈아입고도 침대에 누워서 자지 않고 책상에서 졸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 역시 레프리콘처럼 악몽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레프리콘이 꾼 악몽은 살려달라고 손을 뻗는 전 사령관을 결국 죽이고 마는 한 바이오로이드가 보이는데 그 바이오로이드가 레프리콘 자신이었다는 것이었지만 마리가 꾸는 악몽은 조금 달랐다. 마리는 자신이 꿨던 악몽을 다시 머리 속으로 재생시켰다. 주위가 활활 불타고 있고, 그 불로 인한 주황빛이 주위에 가득한 공간에 자신 혼자만 서있다. 주위엔 아무도 없고 그저 불과 자신 밖에 없다. 눈 앞에 보이는 거대한 불의 장벽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드디어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건 바로 온 몸이 산산조각난 채로 죽어있는 전 사령관이다. 깨진 유리처럼, 정말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나있는 그는 서로 초첨이 다른 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리를 본다. 마리를 보자 산산조각으로 나뉘었던 몸들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 뒤, 고개를 푹 숙인다.


'날 이렇게 만드니까 좋았어?'


고개를 든 그는 주위가 불로 가득해서 더운 열기가 넘실거리고 있는 공간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리는 그 무슨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다물고 있는 마리를 향해 그가 말한다.


'날 내쫓은 걸로도 모자라서 이젠 죽이기까지 했군. 그렇게까지 내가 미웠던 거야? 네 부하들을 사지로 내몬 내가 그리도 증오스러웠어?'


'....'


'그런 눈 하지마, 마리. 안 어울려. 너는 절대로 후회할 스타일이 아니잖아, 그치? 지휘 하나 똑바로 못 하는 사령관을 축출해놓곤 그 뒤에서야 죄책감 하나 느끼는 건 아니잖아?'


'각하....각하는 죽지 않았습니다. 닥터가 각하를 살려냈습니다.'


그 말에 매튜는 풋 하고 웃더니 큭큭 거리면서 웃음을 최대한 참았다. 그렇다. 마리는 현장에서 직접 스틸라인을 지휘했기에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마리는 혹시나 하면서 걱정하고 있다. 설마 하면서 후회하고 있다. 정말로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녀는 정말로 걱정스럽고 후회스럽다.


'왜, 뭐가 그리 후회스러워? 혹시....내가 이리저리 베이고, 맞으면서 내 일부분이 죽었을까봐?'


자신이 신경쓰고 있는 점을 정확히 찌른 그는 상의를 찢어서 던져버리고는 자신의 몸을 보여주었다. 칼에 베인 상처도, 어딘가 부러진 상처도 없는 깨끗한 남성의 몸이 보였다.


'내가 안 죽었다? 그럼 왜 이딴 악몽을 꾸는 거야? 이걸 봐, 내 몸은 깨끗해. 멍도 상처도 없잖아. 근데 넌 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전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겠지.'


냉소적인 그 한 마디가 마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렇다. 이는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니라 전부 그녀가 원한 것이었다. 그녀가 지시한 사항을 군인인 자신은 그저 따랐을 뿐. 자신의 부하들도 군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다. 말 그대로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놓으라는 말을 지시대로 이행했고 그렇게 그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그를 두들겨 팼다. 눈을 한 번 깜빡인 그녀는 방금까지 보였던 매튜의 환영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눈 앞에는 현장을 지휘하는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브라우니들과 레프리콘들이 있다. 그리고 저 앞엔....피투성이가 된 전 사령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일어서면 브라우니가 나이프로 그의 다리를 베었다. 크아악! 하면서 그는 주저 앉는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선다. 이번엔 레프리콘이 둔기로 그의 무릎을 내려친다. 으어억! 하면서 그는 다시 주저 앉는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선다. 노움이 충격탄을 던진다. 그는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선다.


브라우니가 둔기를 들어 머리를 강하게 친다. 레프리콘이 등을 나이프로 크게 벤다. 노움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갈긴다. 피닉스가 그에게 직선비행하면서 몸통으로 밀친다. 레드후드가 군장기의 끝으로 그의 복부를 찌른다. 임펫이 빠르게 도약해서 그를 걷어찬다. 이프리트가 박격포로 쏜 충격탄이 그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한다. 마리가 초능력으로 전기를 발사해 그를 지진다. 그를 공격할 때마다 모두의 얼굴이 경악에 차오른다. 명령 때문에 그를 때려야하는 스틸라인은 그를 때릴 때마다 마치 자신이 맞는 것처럼 아파했고 일부는 공격을 중간에 멈추기도 했고 아예 못 하겠다면서 주저 앉은 개체도 있었다.


마리는 보면 볼 수록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은 불굴의 마리인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폭력이 자신을 덮친다면 도저히 불굴이라는 이름을 지킬 자신이 없다. 바이오로이드인데도, 지휘관 개체라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다. 하지만 저 남자는 달랐다. 무엇에 맞아도, 어딜 맞든 다시 일어섰다. 온 몸이 피투성이다. 온 몸이 삐걱거릴 것이다. 근데 일어선다. 계속 일어선다. 멈추지 않는다. 어쩌면....'불굴' 이라는 이름은 자신을 뜻하는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마리는 그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면서 가까이 다가갔고 가까이 다가갈 수록 그의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 비명소리가 더 커졌다. 마리는 그 비명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그를 향해 외쳤었다.


'각하!!! 일어나지 마십시오!!!'


그의 눈의 핏줄이 터지면서 흰자가 붉게 물들어갈 정도로 강한 전기 충격을 받으면서도 그는 다시 일어서려고 하고 있었다. 마리는 그러면 더 크게 외쳤다.


'각하!!!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습니다!! 일어나지 마십시오!! 쓰러지십시오, 제발!!'


'각하...!! 제발...!!'


'일어나지 마세요, 각하...!'


그가 완전히 혼절하고 나서는 도망치듯 오르카 호로 돌아갔다. 그 때의 환영이 사라지자 다시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아니었나?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그 모습. 크, 내가 봐도 멋있는데.'


그의 몸에 금이 간다.


'넌 명령을 따랐을 뿐이야. 죄는 없지. 날 쫓아낸 것도, 따지고 보면 내 탓이 크니까 그것도 무죄지.'


처음엔 머리에 금이 가더니 이젠 얼굴에까지 금이 간다.


'나를 그렇게 철저하게 짓밟은 건 기분 좋았겠지, 그치?'


목과 어깨에 금이 이어진다.


'너 자신보다 더 불굴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니까 기분은 어땠어? 이름을 뺴앗기니까 조금 기분 나빴나?'


금이 더 길어지고 팔을 완전히 잠식하고 하복부까지 금이 갔다.


'내가 거기서 만일 또 일어섰다면 날 어쩔 생각이었어? 죽이려고 했어?'


금이 허벅지까지 침식한다.


'아니면 내 일부분을 죽였으니까 만족했어?'


이젠 발까지....그의 몸 전체에 금이 갔다.


'그런 거라면...축하해. 넌 내 일부분을 죽이는 데에 성공했어. 지금은 못 죽였지만 곧 죽일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몸이 다시 산산조각난다. 이번엔 산산조각이 아니라 아예 가루로 흩어졌다고 봐야 될 정도로 말이다. 마리는 깨지면서 가루로 흩어지는 사령관의 환영을 보며 비명을 지를 때 다시 눈을 떴다. 마리는 자리에 벌떡 일어서면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이래선 안 돼.'


마리는 지금 자신이 가장 해야할 것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그 무엇보다 서둘러야 하는 것은 자신이 죽인 일부분의 주인, 매튜 에이번즈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모든 체면을 벗어던져 사과하는 것이었다.



☆ ★ ☆ ★



"저리 가!!"


"아니....대장님. 아무리 그래도 약을 거르면 어떡합니까."


"됐어!! 저리 꺼져!!"


둠 브링어의 숙소에선 한 바탕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나이트 앤젤, 다이카, 지니야, 실피드, 밴시가 메이가 있는 방의 문을 계속 두들기고 있었다. 다이카는 물 한 컵과 작은 약 봉지 하나가 위에 담겨진, 예쁘게 장식된 쟁반을 들고 있었다. 나이트 앤젤은 이전부터 대장인 메이가 답답했지만 지금처럼 답답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 중이었다. 나이트 앤젤은 다시 인내심을 가지고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전 사령관님에게 폭격을 가한 것 때문에 우울하다면 약을 드셔야지 왜 거릅니까? 그냥 약만 받아가세요."


"안 먹는다 했잖아!"


"이런 씹..."


인내심에 한계에 다다른 나이트 앤젤은 그만 욕을 말할 뻔 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주위의 소리에 집중해보면 메이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나이트 앤젤 뿐만 아니라 다른 둠 브링어도 듣고 있는 소리였다. 다이카는 잠시 나이트 앤젤에게 쟁반을 넘겼고 나이트 앤젤은 고개를 젓지만 그래도 그 쟁반을 받아주었다. 이는 다이카에게 메이 설득을 한 번 맡겨보겠다는 것이겠지만 실패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다이카는 통 통 통 하고 그녀답게 아주 천천히 문을 두들겼다.


"메이 대장님..."


침묵으로 대답하는 메이에게 다이카는 둠 브링어의 모두가 느끼는 바를 말해주었다.


"메이 대장님이 느끼고 계신 모든 감정과 기분....둠 브링어가 느끼고 있는 거랍니다. 저희들의 폭격으로 다치신 전 사령관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메이 대장님도, 저희들도 크게 충격받았죠. 지금도 이렇게....눈을 감으면 그때가 아른 거려요. 죽어가는 전 사령관님이 살려달라고 손을 뻗는 것처럼 보여요. 물 속에서 저희들의 폭격으로 열과 충격으로 고통받으시기도 하셨죠. 그 때 기억나시나요?"


"...."


"모두가 빌었잖아요? 제발 사령관님이 맞지 않기를....간절한 기도를 하늘께서 들어주신건지 모르겠지만 사령관님은 폭격으로 죽지 않으셨어요. 우리 모두 거기에 안도했지만 동시에 사령관님이 다친 상처 중에 분명히 저희가 가한 것이 분명한 상처를 보았을 때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지요. 지니야 양도 식욕이 없다고 식사를 덜 하셨고, 실피드 양도 오늘은 하루종일 누워계셨고, 밴시 양도 평소에도 자주 하시던 독서에 손을 땠었죠."


"...."


"그거 아시나요? 나이트 앤젤 양은 오늘 하루 종일 대장님 걱정만 하신거?"


나이트 앤젤은 그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었지만 결국 다이카가 해버렸고, 저 말을 들어서 마음을 조금이라도 고쳐서 약만이라도 받아가면 좋겠다 싶었다. 둠 브링어의 모두가 고통받았다. 끓는 물 속에서 입은 화상, 그건 분명 둠 브링어인 자신들이 그에게 가한 상처다. 전신의 피부가 화상으로 손상된 상처를 보고 둠 브링어의 모두는 자신들이 낸 상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 죽지 않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물 속에서 그가 죽지 않은 건 신이 도운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상처를 본 후 둠 브링어는 모두 숙소에 틀어박혀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특히, 메이는 더더욱 자괴감을 가지고 방 안에 틀어박혀 지금까지 나오질 않았다. 심지어 식사까지 거르고 있으니 부대원들은 대장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다이카의 설득이 닿았는지 메이는 문을 열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가슴은 여전했지만 눈이 붉게 충혈되어있고 눈 주변에 빨갛게 부어있었고 손등과 팔엔 손톱으로 낸 상처들이 가득했고, 볼이 살짝 들어갔으며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윤기 있는 붉은색 머리가 그 빛을 조금 잃었다. 메이는 바로 약을 털어넣고 컵에 있는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약 봉지 안에는 영양제와 더불어 우울증에 잘 듣는 약까지 있었다.


"...대장님은 이때까지 전부 거른 약이지만 저희들은 그 날부터 지금까지 쭉 먹고 있는 약이에요."


나이트 앤젤은 메이가 먹은 영양제를 제외한 우울증 치료제를 지금까지도 둠 브링어의 전체가 먹고 있다는 걸 알려줬다. 메이는 컵을 살포시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나이트 앤젤을 불렀다.


"납작아..."


"네."


평소엔 뭐요? 하고 발끈해야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담겨있지 않았기에 나이트 앤젤도 이번 만큼은 넘어갔다.


"...사과해야할까? 전 사령관한테?"


메이 역시 자신들이 가한 상처, 자신이 그에게 가한 상처들이 신경쓰였다. 처음엔 그저 그의 피부를 상하게 한 화상들이 신경쓰였지만 그 상처를 더 파고 들면....그를 내쫓았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자신이 떠올랐고 그때 얻은 그의 상처까지 보이게 되었다. 자신은 정말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전 사령관이 받았을 여러 상처들은 전부 자신이 준 거다. 책임이 너무나도 크고 무겁다...


"저희 모두가 사과해야해요. 우리 모두, 전 사령관 축출에 찬성했잖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멍청한 판단이었어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늦었어...!"


메이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메이는 훌쩍이다가 울음을 터뜨렸고 쭈구려 앉아 무릎에 두 눈을 파묻었다. 대장인 자신이 그녀들 앞에서 쭈구려 앉는다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지만 이번 것은 달랐다. 이번 것은 둠 브링어의 대장이 아니라 둠 브링어의 소속으로서 그에게 상처를 준 바이오로이드라는 동일한 조건 아래에 있었다.


"너무 늦었다구...! 전 사령관이 바보야? 아니잖아....우리가 그런 상처들을 줘버렸는데....우릴 용서할 거 같아...? 내쫓은 걸로도 안 끝내고 죽이기 직전까지 갔어. 누가 이걸 용서하겠어...?"


다이카는 아까부터 분명 사과를 받아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말하려고 하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메이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저 육체적인 상처만 준 게 아니다. 정신에, 마음에 영원히 간직하게 될 상처를 준 건 둠 브링어다. 그 상처는 그가 자신들을 볼 때마다 느낄 것이고 아려오고 욱씬거릴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고 이를 사과하고 싶고 속죄하고 싶지만 그 누구도 그 속죄의 기회를 주려고 할까....


메이의 말에 있는 뜻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둠 브링어는 그저 메이의 훌쩍거림만이 들릴 뿐, 모두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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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븅신되가지고 꽤 오랫동안 못 쓰다가 이제 다시 쓸 수 있게되었다
전에 레모네이드 등장시킬 생각이 있냐고 물었던데 코나랑 레모네이드는 모종의 관계를 이미 맺은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