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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아이자와 미후유는 시즈카를 휠체어에 태우고 진단실로 향한다. 걸을 때마다 갈색 머리카락과 간호사 모자가 흔들거렸다. 시즈카는 깁스를 한 다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미후유가 휠체어에서 손을 놓고 실례합니다, 라고 말하며 진단실의 문을 열었다. 진단실 안에는 젊고 수염이 난 의사가 동그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꽤나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의사다. 미후유가 병실을 떠나자 진단실 모니터에 약 3주 전 처음으로 시즈카가 입원했을 때 방사선으로 촬영한 다리 사진과, 방금 전 촬영한 사진이 동시에 출력되었다.


"많이 호전이 됐어요. 이 정도면 통깁스를 하고 목발로 걸어다니셔도 상관이 없을 걸로 보이네요." 그는 마우스를 조작한다. "분명 목요일에 퇴원 예정이셨죠?"


"네."


의사가 웃었다.


"그럼 그 때까지 천천히 정원이나 건물 내를 걸어보는 연습을 하시는게 도움이 될 것 같군요."


그녀는 다시 휠체어를 탄다. 수술실로 가 부러진 다리에 석고로 된 붕대를 하고, 목발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나와 휠체어를 탄다. 


"걷지 않는거야?"


마후유가 속삭인다. 시즈카는 부러지지 않은 다리를 움찔거린다. 넓은 땅에 작은 발가락을 닫는 것이 두렵다는 것 처럼. 마후유는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즈카를 병실로 옮긴다.


어제와는 달리 병실에는 새로운 사람이 입원해있었다. 피곤해보이는 모습의 오피스 레이디가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시즈카는 그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평소 누워 있던 침실로 돌아와 눕는다. 창문 밖에서 건조한 공기가 들어왔다.


"항상 병실 안에 있으니까, 근육이 많이 빠졌네."


정원이라도 가지 않을래? 라며 아이자와가 말을 건다. 시즈카는 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자와는 웃고 있다.


"오늘은 친구가 오지 않나보네."


"굳이 말하는군요."


"뭐, 어때.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사람끼리."


둘은 입을 꾹 닫고 있다. 토라진 아이와 말을 고르는 내성적인 어머니가 된 것 처럼.


"말 할 거야? 나는 상관 없어."


"......내일에는 꼭."


이 이상 시간을 빼앗길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아이자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나왔다. 한 의사가 그녀를 부른다. 그는 주사를 놓을 사람을 찾고 있다. 아이자와는 환자에게로 찾아가 주사기를 들어올린다. 주사기 바늘이 환자의 살점을 뚫기 위하여 번쩍 빛났다.



#


아침 10시다. 아이리와 마유는 의자 위에 앉아 책상 위에 새하얀 진술서 용지를 놓고 그 위에 펜을 끄적이고 있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봐온 경찰관들 에게도 대낮부터 여고생들이, 그것도 왕따 사건 같은 모종의 비행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특정 사건의 목격자와 신고자로 경찰서에 들어와 진술서를 작성하고 있는 건 신기한 광경이었다. 물론 평소보다 조금 더 특수한 광경이라고 해도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닌 데다가, 그들도 각자 해야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관들은 곧 아이리와 마유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바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아아리는 묵묵하게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적어야 했지만 제대로 적을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어머니가 이혼을 한 부분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사건에 대해서만 적어야 할까. 그래도 어머니가 딸의 돈을 훔치고 달아난 어이없는 사건을 경찰들이 바로 이해해 줄까. 나도 이런 상황인데 뜻하지 않게 말려는 마유는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까.


"미안."


아이리가 말했다.


"뭐가?"


마유가 되물었다.


"그야, 나 때문에 이런 일에 말려든거니까."


"신경 쓰지 마."


사각사각. 마유는 펜을 움직인다.


"어차피 내가 멋대로 끼어든거고. 무시하면 기분이 나쁘니까. 그러니까 끼어든 것 뿐."


"그래도."


"정 그러면, 하나만 물어보자."


마유가 손을 멈춘다.


"쫓아가고 있던거, 누구?"


아이리가 굳는다.


그녀는 대답을 망설인다. 두 눈을 오른손으로 가리고, 그대로 입가까지 쓸어내린 다음, 숨을 내쉰다.


"......엄마야, 믿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


마유가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아이리는 진술서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학교에 연락을 하고, 진술서를 적고, 양조위를 닮은 경찰이 던진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한 다음 마유는 12시에 경찰서를 나왔다. 아이리는 아직 대답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었고, 들어야할 것도 많이 남아 있었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어머니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냐. 어머니에게 이런 저런 전과기록이 남아 있는 걸 알고 있었냐. 진술서에 적혀있는 것과 적혀있지 않은 것을 여러가지 물은 다음 마지막으로 경찰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품에서 사진 4장을 꺼내 아이리의 눈 앞에 펼쳤다.


"이 사람들을 본 적 있니?"


수려한 외모를 한 남자, 금발에 문신을 한 약간 통통한 남자, 초쵀한 인상에 더벅머리인 여자, 왼쪽 뺨이 여드름으로 뒤덮힌 추한 여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은."


더벅머리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경찰이 아이리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어머니와 함께 사라졌던 사람입니다."


시간이 지나 아이리가 떠난 취조실에 다른 경찰이 들어왔다. 다크 서클이 짙은 여자다. 그녀는 최근 뉴스에 나온 보이스 피싱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던 도중 연락을 받고 방금 전 이 경찰서로 찾아왔다.


"얼굴을 그렇게 갈아치워 놓고, 설마 이렇게 잡히게 될 줄은 몰랐겠죠."


여자는 아사네에게서 압수한, 액정에 금이 간 구식 폴더 핸드폰이 담긴 비닐을 집어 올리며 말한다.


"이런 중요한 걸 버리지 않고 딸한테 문자를 했다니, 모성애라도 남아 있던 걸까요.


남자가 대답한다.


"그랬으면 사기를 치기 전에 진작 집에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처음부터 돈을 떼먹고 도망칠 생각이던 거겠죠. 그런 사람치고 행동이 멍청하고 성급한거는, 뭐, 저런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획을 세워서 직접 움직인 게 아니라 시키는 것만 해온 사람들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은......"


여자가 눈을 내리 깐다. 


"그래도 최소한의 모성은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네요. 저 애가 불쌍하니까."


남자가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덛붙인다.


"그래도 교우 관계는 좋은 모양이니,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죠."


#



긴 머리카락이 겨울 바람에 휘나꼈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경찰서 정문 옆에 있는 벤치에 마유가 앉아 있었다. 아이리가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마유는 흘깃 눈을 돌려 아이리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금색 머리에 층층이 쌓인 눈을 손으로 털어내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드디어 나왔네."


아이리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피했다.


"이제 어떻게 할래?"


대답하지 않는다.


"기왕 이렇게 학교를 빠지게 된 거, 가기도 뭣하고. 이런 일이 있으니까 집에 가서 공부를 하기는 싫고."


마찬가지다.


"밖에서 놀까, 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은 수업중이니까 친구들은 못 부르고. 이 상태면 혼자서 돌아다닐 수 밖에 없으려나. 그런데 점심도 못 먹어서 배도 고프고 말이야.


아이리는 다시 마유를 본다. 서리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지만 무시하려고 애를 쓰며 입을 열었다.


".......같이, 갈까."




#


콘크리트 길에 서서히 눈이 쌓이고 있다. 주택가를 지나 역이 있는 넓은 번화가로 나오자, 기나 긴 도로 위에 잔뜩 늘어선 고층 건물들이 둘을 반겼다. 대형 프렌차이즈나 상점의 간판들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다. 비록 평일이었지만 거리에는 사람이 북적였다. 일사불란하게 횡단보도 위를 걷는 이들 중에는 외국인도 있었고, 일본인도 있었다. 둘은 나란히 걸으며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뭘 먹고 싶냐. 사람이 많다.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눈이 계속 내려서, 둘은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투명한 눈우산을 구매했다.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눈을 잔뜩 맞아 꽤나 축축해진 상태였다. 우산은 딱 두 사람의 몸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마유는 한손에 우산을 들고 아이리의 곁에 다가갔다. 먹거리를 파는 상가로 들어서자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트는 곳을 지나치면 그 다음은 나름 유명한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음악을 트는 곳이 나오는 식으로, 발을 움직일 때마다 계속 다른 음악이 들렸다. 아이리는 그것이 지나치게 혼잡하다고 생각했다.


"춥지 않아? 코트도 없고."


마유가 묻는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이리가 애써 말한다.


'왠지 먹고 싶다' 라고 말하면서, 마유는 아이리의 팔을 붙잡고 나름 커다란 우동집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열기가 둘을 맞이했다. 둘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켰다.


음식을 시키자 말이 끊겼다. 


"가끔은 이렇게 조용한 것도 좋다고 생각해."


마유가 말했다.


"나도.......그건 알 것 같아."


아이리가 답했다.


"그래."


마유가 말했다.


식당을 채운 김 너머로 흰 모자를 쓴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회사원들이 세명 문을 열고 들어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는다. 마유는 힐끔 힐끔 아이리를 곁눈질 한다. 아이리는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계속 엄지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설마 이렇게 같이 먹게 되는 일이 올 줄은 몰랐네."


마유가 말했다.


"그러게."


아이리가 답했다.


"뭐라도 더 시킬래? 뭣하면 사 줄수도 있는데."


"고마워, 그래도 그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


마유는 미안하다는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도로 집어 삼킨다. 동시에 우동이 두 그릇 나왔다. 마유는 그릇을 손으로 잡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뜨거워."


"갓 만든 거니까."


마유는 입김을 불어가며 겨우겨우 한 젓가락을 삼켰다. 그러면서도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 건지 고양이가 앓는 것 같은 신음을 끙끙 내다가, 급하게 물을 한 잔 따라 입 안에 부어 넣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아이리가 무심코 쿡, 웃었다. 아이리는 주머니에서 끈을 꺼내 머리를 묶고, 한 젓가락 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런 걸 잘도 바로바로 먹는구나,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뭐라고 해야하나, 익숙하니까?"


"나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단 말이지."


마유가 툴툴거렸다. 그래도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 이 정도 아픈 것 정도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면을 집는다. 


"에취."


계속 면을 삼키던 도중, 아이리가 작게 기침을 했다.


"너, 춥지?"


"아하하......." 아이리가 뺨을 긁적였다. "너무 오랫동안 눈을 맞으면서 달렸나봐."


"어쩔 수 없네." 마유가 한숨을 쉬었다. "저기, 다 먹으면 우리 집에 갈래?"


"괜찮은데, 왜?"


"괜히 밖을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실내가 편하겠지. 거기다가 너도 나도 상의가 축축한 상태면 걷기 싫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그리고 뭔가 가스, 안 잠그고 온 것 같아."


아이리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마유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아직 집에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


두 사람은 음식을 전부 먹고 밖으로 나왔다. 한 뼘 정도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둘은 함께 걸었다. 이따금 서로 손이 스쳤다. 꽤나 길에도 눈이 쌓여, 길에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서벅서벅 과자를 베어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아이리는 '이번엔 우산을 내가 드는게 맞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마유의 손을 향해 몇번 손을 뻗었지만 그럴 때마다 마유는 우산을 든 손을 바꿨다. 결국 맨션이 보일 때까지 계속 마유가 우산을 들었다.


고층 맨션의 건물 안에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마유의 집에 도착했다. 실례합니다, 라고 작게 아이리가 말했다. 거실 벽에 거대한 TV가 달려있었다. 성인 2명이 족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은 검은 소파가 그 맞은 편에 있었고, 창가에는 커다란 흰색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의 모니터가 한 대 있었다. 마유는 소파에 있는 작은 리모컨을 들어 무언가 버튼을 눌렀다. 천장에 달린 히터로부터 따뜻한 바람이 세어나왔다.


아이리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넓은 창문 밖으로 마을의 정경이 보였다. 학교도 보였고, 공사중인 도로도 보였고, 주택가의 지붕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풍경도 보였다. 아이리에게 이런 광경은 익숙치 않았다. 




"앉아. 아무 곳이나."


마유가 말했다.


"그, 그럼."


아이리는 소파에 앉았다.


"마의는 벗지? 축축해서 기분 나쁠테고."


"아, 응."


아이리가 허겁지겁 축축해진 교복 마의를 벗어 바닥에 두었다. 새하얀 와이셔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동안 마유는 방 안으로 들어가 옷을 검은 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는 거실로 나오자마자 소파 위로 올라가 다리를 끌어모아 안았다.


마유는 묘하게 감상에 젖은 눈빛을 하며 아이리의 옆에 앉아있다. 아이리는 허벅지 위에 올린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따뜻한 바람을 쐬자 점차 아침에 있던 일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우울함으로 이루어진 늪 속에 발을 담근 것 처럼, 우울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역시 아직 진정되지 않아?" 마유가 조용히 물었다. "위로는 잘 못해서, 미안."


"괜찮아."


아이리가 답했다. 마유는 입술 안쪽을 이빨로 가볍게 씹었다.


"저기, 괜찮다면 말이야."


"응."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알려줄 수 있을까."


마유가 말한다.


"왜, 그, 말을 하면 후련해진다는 말도 있고 말이야."


힘들면 할 필요는 없지만. 하고 마유가 말을 마친다. 위잉, 따뜻한 바람이 계속 불고 있다. 아이리는 머릿속으로 두 가지 길을 전부 상상한다. 말을 하지 않는 것, 말을 하는 것. 나는 어느 쪽을 바라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나는 편해지는 걸까. 과거가 마부처럼 등을 채찍질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어느 쪽이 더 편한가 생각해보면 전자였다. 당장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설령 그 이면에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고 하여도, 후련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유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무서웠다. 과연 이건 호의인 걸까. 지금 말을 한다면 나중에 학교에 내 과거가 수돗물을 담은 물통에 물감을 흘린 것처럼 전부 퍼져있는게 아닐까. 믿을 수 없었다. 믿기가 두려웠다. 


마유는 아이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대로 말한다.


"......나, 가족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이리는 가만히 말을 듣는다.


"우리 가족은 내가 7살일 때 이혼했어. 아빠는 처음부터 잘 맞지 않았다고 하시더라.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어머니는 퍽 큰 집안 출신이셔서, 아버지랑 결혼한 걸 집안에서 내키지 않아 했다고 해. 그래도 데릴 사위로 받아들여서 결혼은 했지만, 정작 아버지가 자수성가를 하기 시작하니 어머니 쪽에서 질리고, 자존심이 상해 어쩌지 못 했다나봐. 그래서 조금 더 얼굴이 멋있고,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법한 남자와 불륜을 했다고 해. 정말 못 된 사람이지.


아무튼, 이혼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로 돌아갈게. 나는 그 때 슬프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조금은 아, 일어날게 일어났구나. 싶었어. 그야 우리 집은 엄마나 아빠나 잘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생일에도, 생일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에도. 혼자 멍하니 앉아서 근처 빵집에서 사온 케이크를 먹고 자고. 계속 그렇게 지냈으니까 조금은 당연하지. 오히려 모르는 게 이상한 걸.


양육권 싸움이 계속됐고, 결국 아빠가 이겼지.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엄마가 쓰던 성을 썼어. 그야 창피하잖아. 이혼을 한 게 여기저기 까발려지면."


마유가 기지개를 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니까, 겨울방학에 아빠가 갑자기 애인을 데려온 거야. 물론 나한테 들키기 싫었는지 내가 피아노를 배우러 학원에 갔을 때 데려오시기는 했지만, 우연히 그 날은 피아노 선생님께서 편찮으셨거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집 문을 열었지.


문을 열자마자 보였던 건 말이야, 아빠가 모르는 사람이랑 고등학생 커플처럼 서로를 껴안고 키스를 하던 모습이었어. 서로 우스꽝스럽게 '하아, 하아' 하면서. 그 때까지 키스는 TV에서 본 것처럼 낭만적이거나, 아름답거나, 아니면 하다 못해 좋은 건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것 만도 아니라는 걸 그 날 처음 알았어.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갔어. 집을 나가서,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르고 계속 달렸지. 초등학교, 주택가, 공원, 계속 동네를 배회하다가 결국 밤에, 백화점의 앞에서 주저 앉았지. 방학이라 거리에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았어.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애도 있었고, 커플도 있었고.


그런 행복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질투가 났어. 다른 사람들은 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데, 왜 나는 이런 집에 태어나고 만걸까. 나는 여기에 있어도 되는 사람인걸까. 울면서 혼자 있었지. 엄마가 보고 싶었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참 추했지! 마유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런 나도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거야. 어쩔 수 없는 일들 뿐인 현실에 욕을 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떻게든 저항도 하고 순응도 하는 나날을 보내면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마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아, 정말이지! 이래서 위로는 못 한다고 한 거야. 결론을 내지를 못하잖아, 결론을.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말로 할 수가 없어."


마유는 제기랄, 하고 얼굴을 피했다. 아이리는 그런 마유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정말, 웃지마!"


"미안, 미안. 그래도 알겠어! 정말 위로라던가, 그런 건 잘 못하네."


아이리가 웃는다.


"...그래도 고마워, 정말로. 마나베씨는 사실 상냥한 사람이었구나."


마유는 얼굴을 피한 상태 그대로 작게 중얼거린다.


"딱히."


아이리는 후후 웃는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동시에 의아한 심정이었다. 정확히는 마유가 자신에게 이렇게나 해주는 이유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해주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눈 대화나, 시이나를 향한 마음을 감안한다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기, 마나베씨."


"뭐야."


"마나베 씨는 말이야."


아이리가 머뭇거렸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거야?"


"...무슨 말이야?"


마유가 되물었다.


"그야, 나는 시이나를 빼앗으려고 했는 걸. 거기다가, 나는 언제나 마나베 씨한테 나쁜 말만 한 것 같아서......"


아이리가 말을 흐렸다. 


그 말을 들고 마유는 어딘가 놀란 것 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얼굴을 내리고, 초조하게 입술을 웅얼거렸다. 아이리는 걱정스럽게 그 모습을 무언가 결심한 듯 표정을 굳혔다. 


"아카사카 양."


마유가 말한다.


"응."


아이리가 답한다. 마유는 크게 숨을 들이 쉰다.


"백화점에 매달린 시계는 기억하고 있어?"


"?"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아이리는 설명을 요구하듯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마유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잇는다.


"나는 기억하고 있어.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기 직전에, 새해가 될 때까지는 밤마다 그 시계에 아름다운 빛이 켜진다는 것도. 그 앞에서 내가 죽도록 우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날이 오기 전 까지 그 아이와 몇 번이고 만났다는 것도."


마유가 일어난다. 그 날 보았던 여자아이는 포니테일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주저 앉아 있으면 언제까지나 혼자일 뿐이라고. 그야 달리지 못하는 아이는 인기가 없으니까.


"그래서 말이지, 다시 그 사람과 만났을 때는 뛸 것 처럼 기뻤어. 기억하고 있던 건 나 뿐이었던 것 같아. 허망하지. 싫어라.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잊을 수는 없었어. 슬픈 일이지?"


마유는 불안했다. 내 말은 온전하게 너에게 전해질까. 나는 네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걸까. 말이라는 건 싫다.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순간 그 말은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직접 상대를 향해 표현하지 않으면 마음을 전할 수 없으니까. 오로지 몸짓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알아 차리기에 사람이란 너무나도 둔감하고 자기 중심적인 생물이니까. 결국 언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머리 끈, 푸는 걸 잊었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린다. 마유는 서서히, 서서히 아이리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솔직해져도 괜찮다고 말했지, 아카사카 양."


히터의 온기 때문인걸까, 마유는 뺨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온도가 변해서 그런지 약간 머리도 어지러웠다. 하지만 전력질주를 마친 것 처럼 가슴이 뛰는 것은. 머리를 묶어 훤히 들어난 목덜미가 살짝 야하게 보이는 것. 눈에 젖어 살짝 투명해진 와이셔츠에 손을 올리고 마는 것은. 크게 뜬 검은 눈동자에 무심코 눈길이 가고 마는 것. 족제비의 털로 만든 고급스러운 붓에 붉은 물감을 머금어 정성스럽게 그린 것 같은 입술 위에 입술을 겹치고 싶어지는 것은. 고작 온도가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 건, 너니까."




마유가 숨을 멈췄다. 입술에 물감이 번졌다.



























AI 삑나서 키스씬 그림을 제대로 못뽑음


마음 같아서는 너무 내용이 급해서 여기다가 5천자정도 추가하고 싶은데 힘들다


다음은 과거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