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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자키 마유. 초등학교에서 마나베 마유는 타니자키 마유로 있어야 했다. 양육권을 둘러싼 분쟁이 아버지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타니자키 가와 준이치로는 아이가 따돌림을 당할 까봐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치정 관계를 표면으로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 그런 결정을 내렸을 뿐이다.




마유의 부모님은 언제나 바빴다. 돈을 못 벌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에 바빴다. 준이치로는 의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스타트 업을 시작했다. 척수노쇠변성증으로 인하여 돌아가신 어머니와 일본 사회의 폐쇄성, 당시 급히 부상하고 있던 스마트폰 기술 등, 다양한 것에 영향을 받아 희귀병 환자들을 위한 커뮤니티 및 정보 제공, 나아가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 환자들의 개별 데이터를 수집하여 파악하는 어플리케이션을 만든 것이 회사의 첫 걸음이었다.




첫 걸음은 좋지 않았다. 아직 일본 내 스마트폰 보급율이 타 국가에 비해 월등히 낮았기 때문이었다. 실패한 걸까, 고민하며 2년 간 굶주리던 그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찾아온다. 아스텔라스 제약이 그의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회사와 연락을 하고 한 달이 지나 미팅을 가졌고, 더 한 달이 지나 프레젠테이션을 발표했다.




그 결과 결국 준이치로는 데이터 제공과 기술 협업을 조건으로 아스텔라스와 계약을 체결하는데에 성공했다. 그 이후로 회사는 탄탄일로였다. 회사가 커질 때마다 사업을 확장했고, 사업이 확장될 때마다 등에 진 짐이 커졌다. 어떻게든 성공을 이룬 준이치로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본래 태생부터 돈이 많은 집 안에서 태어난 사유는 가업에 목을 매느라 마유에게 시간을 쓰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이과 연구원이나 자수성가한 인물들 중 가끔 있는, 가혹할 정도로 이성을 추구하는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 예컨대 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몰랐다. 그들은 딸에게 교육학 논문에 의거한 독일식 교육을 시키는 것은 능숙하게 해냈다. 하지만 딸에게 언젠가 같이 있어주겠다는 단 한 마디를 하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그들은 딸에게 그들이 바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늘어놓았다. 




이런 부부는 직장에서 지치기 이전에 서로에게 지치기 마련이다. 마나베 준이치로는 타니자키 사유가 너무 냉담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소리를 지르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조금 더 모성이 있으며 상냥한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에 대해 알아갈 수록 예상과는 다른 면이 보였다.




타니자키 사유는 마나베 준이치로가 너무 고집이 강하다고 느꼈다. 연애를 하고 있었을 때는 순순히 말에 따라줬으면서, 결혼을 하고 나서 부쩍 말에 반항을 하기 시작한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조금 더 완고하지 않고 융통성이 있는, 덤으로 젊은 남자를 만나고 싶었다. 준이치로는 30 중반이었을 때는 나름의 멋이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 수록 사유는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가치가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 관계는 사유가 준이치로를 떠나면서 완전히 막을 내렸다. 위자료 전쟁이 일어났다. 이혼 소송이 대개 그렇듯 시작은 아내가 우위에 섰다. 그 천칭이 변호사를 거치며 서서히 기울어져 6:4에 도달한 순간 둘은 합의를 봤다. 준이치로는 이 결과에 만족했다. 이는 그래도 세간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혼 소송들보다는 원만한 결과였다. 애초에 준이치로는 이 결혼이 이렇게 끝날 것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으니, 특이할 것도 없었다. 사유는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 사유가 준이치로보다 더 만족했다는 사실이 당시 이혼소송을 하던 준이치로에게 있어서 유일한 수치였다. 준이치로는 합리화를 통해 그 찝찝함을 잊으려고 했다. 적어도 8:2는 아니었다. 적어도 한쪽이 양육권을 순순히 포기하기는 했다. 깔끔하지 않은가? 그 사이에 끼어버린 한 여자아이는 차차하더라도.




준이치로는 42세이던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유를 놓친 것은 아깝지만 적어도 여자는 널려있는 법이 아닌가. 그는 사유를 보내고 나서, 젊었던 시절의 고생을 보답받고 싶은 것처럼 여자놀음에 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참 미녀가 많았다.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의 수만큼 미녀가 있는게 아닐까. 하지만 방종을 즐기면 즐길 수록 그는 우울해졌다. 뱃살이 축 늘어지고, 술에 의존하게 되었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는 머리를 싸맸다.




그는 다른 일반적인 가정을 2년 간 더 관찰하고 나서야, 더 나이를 먹고 나서야 뒤늦게 딸의 고독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를 위해 휴가를 내는 사원의 표정을 보고 나서야. 겨우겨우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마다 거실에서 외롭게 잠을 자고 있는 딸을 보고 나서야. 외면은 거창하지만 아무도 없이 텅 빈 집을 보고 나서야. 도망가는 딸의 뒷모습을 쫓지 못하고 수치심에 마음이 잠기고 나서야. 딸의 방 안에서 한 때 딸을 낳았을 때 찍었던 가족사진을 발견하고 나서야 겨우.




어른들은 핑계대는 것을 좋아한다. 마유는 5살 생일을 혼자 보냈던 때부터 이미 그렇게 믿고 있었다. 가끔은 핑계를 대지 않고 함께 놀아줬으면 좋겠다고 몇번이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행복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결별을 하는 법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사랑을 배우기 이전에 고독하게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






눈 속을 헤맨다. 타니자키 마유는 9살이다. 그녀는 오후 5시에 집을 나와 발길이 가는 곳을 아무렇게나 걸어 다녔다. 이제 막 오후 7시가 된 참이었지만 세상은 어두웠다. 겨울이라 해가 빠르게 져서 그런 것이다. 몇 시간이고 걸어다닌 탓에 발이 아팠지만, 그녀는 여전히 손을 주머니 안에 넣고 거리 위를 서성이고 있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나고도 거리에 남은 장식들이 이따금 눈에 걸렸다.



거리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는 얼굴이 벌개져 균형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 옆에는 휴대전화를 붙잡고 계속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이, 그 앞에는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달래려고 필사적으로 말을 늘어놓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팔짱을 낀 채 걷고 있는 커플이나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부모도 있었다. 마유는 그런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힐끔힐끔 바라보다가, 바로 앞에 있는 전신주에 어깨에 부딪혀 오른쪽 무릎부터 넘어졌다.


"아팟!"

무릎에 벌건 피가 송골송골 고였다. 마유는 주위를 둘러본다. 바로 왼쪽 횡단보도 너머에, 유럽에 있는 첨탑처럼 거대한 백화점 건물이 있었다. 해가 지는 참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심히 보니 시계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 앞에는 마침 버스 정류장도 있었다. 마침 신호등 불은 파란 불이었다. 마유는 다리를 절뚝이며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다리가 아팠지만 겨우겨우 정류장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마유는 정류장에 있는 벤치에 쪼그려 앉았다. 정류장의 벤치 뒤에는 버스의 시간표가 달라붙어 있었다. 


마유는 고개를 숙인다. 아버지가 하고 있던 행위에 대해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분노나 배신감보다는 혼란이 앞섰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말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털어 놓기 위하여 입 밖으로 내뱉는다면 조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말할 사람이 없었다. 학교 선생님처럼 명확하게 답을 알려주고, 틀렸다고 말해줄 사람은 어딜가도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싫은 어머니라도 계속 집에 있어줬다면, 조금은 덜 고민 할 수 있었을까. 


손이 시렸다. 시린 손을 후후 불어 보지만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눈가는 뜨거웠다. 마유는 양손으로 난로처럼 뜨거워진 눈을 가렸다.



"괘, 괜찮아?"



한참을 가만히 있던 마유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머리를 한 쪽으로 묶은, 키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마유는 눈물을 닦고, 코를 킁 소리가 나도록 세게 들이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저리 가."


"그래도, 울고 있는거지?" 여자 아이가 슬며시 마유의 무릎을 봤다. "다친거야?"


"아니야." 마유가 쏘아붙였다. "신경 꺼."


"......."


여자 아이는 입을 다물고 마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상처를 검지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아팟!"


"거봐, 거짓말이잖아."


"너, 너......!"


마유는 발끈하며 목청을 높이려다, 소녀의 표정을 보고 몸을 멈췄다. 세상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표정은 얼추 알아볼 수 있었다. 마유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확 돌려버렸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줄래. 소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런 소녀에게 마유는 이렇게 답했다.


"그거, 무릎이 이렇게 된 걸 놀리려고 하는 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유는 왠지 모르게 소녀가 다시 찾아오는 걸 기대했다. 아주 조금, 조금이었다.


#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했지만, 소녀가 돌아오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15분 정도 걸렸다마유는 소녀가 올 때까지 백화점에 달린 시계를 올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소녀는 한 손에는 연고를, 한 손에는 반창고가 든 상자를 들고 있었다. 소녀는 면목이 없다며 쓰게 웃었다.


"근처에 약국이 어디있는지 몰라서, 조금 걸렸어."


마유는 눈을 감으며 흥, 하고 핀잔을 준다.


"평생 저주하기 직전이었어, 정말이지."


"미안."


맥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마유는 감은 눈을 살짝 떠 얼굴을 엿보았다. 안 그래도 키가 작고 약해보이는 소녀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마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 그래도 조금 고맙기도 하고. 응. 역시 괜찮아.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그건."


소녀가 웃었다.


마유는 직접 연고를 발라주겠다고 나서는 소녀의 제안을 거부하고, 소녀에게서 연고와 반창고를 받았다. 연고를 열어 내용물을 짜내자 끈적한 액체가 무릎 위에 듬뿍 흘러나왔다. 연고가 닿자 상처는 더욱 욱신거렸다. 눈에 눈물이 송골송골 고일 것 같았다. 소녀는 그런 마유의 손에 살짝 손을 포갰다.


다음은 반창고를 뜯어 그 위에 올릴 차례였다. 마유는 소녀의 손을 살짝 쳐낸 다음 양손으로 반창고의 접착면에 달려있던 보호용 종이를 벗겨내고, 반창고를 상처 위에 올려 살짝 눌렀다. 읏. 작은 신음이 세어나왔다. 


"괜찮아?"


다시 소녀가 물었다.


"괜찮아."


손을 떼자, 무릎에 붙은 반창고가 보였다.


"거 봐, 혼자서 했지."


마유가 투덜거렸다.


"그러네. 잘했네."


소녀가 대답했다. 대견하다는 듯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마유는 괜히 짜증을 냈다.


"뭐야, 그 말투 하지마."


"말투?"


"그, 어린 애한테 하는 것 같은 말투."


소녀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장난기있게 씨익 올렸다.


"시러쪄요?"


"죽인다?"


"미안, 미안." 소녀가 손을 턴다. "내 친구는 항상 이런 식이라, 조금 전염되고 말았나봐."


"정말......"


째깍. 시계의 분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둘은 한동안 벤치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가?"


마유가 묻는다.


"나는..." 소녀는 말을 고른다. "나는, 조금 있다가 갈 생각이야. 너는?"


"나도."


마유가 답했다.


"어디로?"


소녀가 물었다.


"그건..." 마유가 말을 흐렸다. "그건, 네 알 바 아니잖아."


"그러네."


소녀가 답했다. 마유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무릎에 붙은 반창고를 엄지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아직 약간은 따가웠지만 전보다는 견딜 만 했다.


"너 말이야."


"응?"


"왜 도와준거야?"


마유가 물었다.


"나같은 녀석, 계속 짜증나는 소리만 하니까 두고 가면 좋았을텐데."


"두고 가기를 바랬어?"


마유는 문득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째서 그 모습이 떠올랐는지 스스로도 잘 몰랐다. 단지 떠올린 것 만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모르겠어." 마유는 다시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소녀는 그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눈을 내리 깐 다음, 입을 연다.


"나는 말이지, 집에 가기 싫어서 이곳에 있어."


마유가 소녀를 바라본다.


"어른들 말이야, 언제나 싸우지. 그것도 그냥 싸우는게 아니야. 주먹질을 하는 것도, 솔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명확하게 말을 하는 것도 아닌....... 이상한 방식으로 싸운단 말이야. 어른들한테도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왜, 학교에서 선생님이 '싸우지 말거라!' 라고 하면 싸우는 걸 멈추는 것처럼."


소녀가 말했다. 마유는 그런 소녀에게 핀잔을 던졌다.


"어차피 선생님이 없는 곳에서는 또 싸우는 걸."


"하지만 선생님이 있는 곳에서는 괜찮잖아?"


"그건 그렇지만, 선생님이 언제나 사람들을 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마유는 반박한다. "거기다가 선생들도 자주 틀린다고. 다 아는게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네."


소녀는 기지개를 켰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만 싸울까?"


"그건." 마유는 뜸을 들인다.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걸지도 몰라."


"그렇구나."


소녀는 손에 깍지를 낀다. 두 사람은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싸우는 걸 보고 힘들어도, 그 사이 사이엔 분명 좋은 일도 있을테니까. 바뀌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바뀔 거라고 믿으면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걸지도 몰라."


그래, 예를 들면. 하고 소녀는 생긋 웃었다.


"너를 만난 거라던가, 너한테 있어서는 나를 만난 거겠지."


"뭐?"


"기쁘지 않아?"


마유는 반박을 하려다가, 다시 한 번 반창고를 쓰다듬는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가지 말을 떠올렸다. '오글거린다.' 라던가, '아니거든.' 같은 평소 내뱉을 것 같은 말을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말이야, 고맙다고 생각해."


마유는 시린 손을 꽉 쥐며 띄엄띄엄, 단어를 조합해 대답을 만들어나간다. 


"그래도, 나는 이 동네에 살지도 않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도 몰라."


다시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린다. 마유는 언제나 둘이 미웠다.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게 싫었다. 생일인데도 집에 와주지 않는 게 싫었다. 그래도 마유는 둘을 좋아하고 싶었다. 분명히 외로운 생활이었지만, 가끔씩은 둘과 행복한 순간을 지낸 적이 있었으니까. 마냥 어머니의 손을 잡는 게, 아버지의 수염에 얼굴을 비비는 게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 수록 부모님들은 모든 행복을 잊은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혼을 하고 싶다며,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혼한지 2년이 지나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새로운 연인을 만들었고, 딸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연인을 집에 들였다. 그 상황 속에서 마유는 강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야 나도 너를 잊을거고, 너도 분명 나를 잊게 되겠지."


결국 행복했던 일은 잊혀지고 좋지 않았던 일만 세상에 남는게 아닐까. 부모조차 존재를 잊어버린 나는 이 세상에 남아있을 가치가 있는걸까. 누군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다시 잊혀지는게 두려웠다. 스스로 품고 있는 고민을 알아채기에 마유는 너무 어렸다. 그렇기에 그녀가 할 수 있던 건 오직 방황 뿐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소녀의 대답을 들으며, 마유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신호등의 붉은 불이 푸른 불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이걸 줄게."


그와 동시에 소녀는 벤치에서 일어서, 자신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유는 소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녀가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자, 얇은 끈에 속박되어 있던 머리카락이 한 올 마다 요동치며 마유의 눈 앞에서 끝없는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하늘하늘 내리는 눈은 그 찬란한 은하수 위를 수놓은 별무리가 되었고, 붉은 머리 끈은 타오르는 혜성의 궤적이 되어 이글거렸다. 그 혜성은 갸날픈 다섯 손가락에 담겨 마유의 손 위에 닿았다. 차가운 손 한 쌍이 서로를 붙잡으며, 난로처럼 열을 발한다.


"네가 이걸 가지고 있는 동안, 언젠가 나는 다시 너와 만나게 될거야. 나는 멍청해서, 혹시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내가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도, 그 끈을 보면 언젠가 다시 너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손이 겹쳤다. 시침과 분침, 초침이 동시에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8을 가리킨다. 그 순간 백화점 표면에 있던 거대한 로고와 시계가, 금빛으로 파앗 발화하며 세상을 섬광으로 가득 채웠다. 길에 나란히 서있던 가로등들도 축제가 열리는 길을 치장하려는 것처럼 차례차례 파앗, 점등한다. 마유는 그제서야 소녀의 외형을 찬찬히, 제대로 뜯어볼 수 있었다. 그 길다란 눈썹과 입가에 걸린 상냥한 미소, 새하얀 손가락, 긴 스커트가 미처 가리지 못한, 가느다란 발목.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슬픈 표정을 짓지 말아줘."


아름다운 달이 도시의 하늘에 걸렸다. 마유는 멍하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뜨거웠다. 거리는 조용했지만, 귀가 먹먹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마유는 끈을 쥔 손으로 소녀의 옷 소매를 붙잡았다.





"이름..."


"응?"


"나는, 타니자키, 타니자키 마유."


마유는 얼굴을 가린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분명 추한 표정이겠지. 사랑스러운 표정은 아닐거야. 그래도 지금 잡지 않으면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모르니까. 어떤 동네인지도 잘 모르는 이 동네에서, 다시 소녀를 만날 수 있는 일말의 확률을 붙잡기 위해서, 마유는 또박또박 이름을 말하고, 눈을 치켜떴다.


"너는?"


#


"아카사카 아이리."


마유는 양갈래 중 오른쪽 갈래를 묶고 있던 붉은 머리끈을 손가락으로 집어, 아이리에게 건냈다.


"이거, 다시 만나게 된다면 돌려달라고 했지."


아이리는 손에 들어온 머리끈을 꽉 잡았다.


"머리는 변해버렸지만, 이제는 조금 기억이 나려나? 아니면 타니자키라는 성까지 듣고 나서야 기억하게 되는걸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유는 소파에 있는 마의를 강제로 아이리의 품에 안기며 뒤로 반걸음 걸었다. 상처를 입은 것을 감추려는 어른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이번 화도 AI군은 제가 원하는 이미지를 뽑지 못했습니다......


반했다는 말은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 넣지 않았다


준이치로 회사는 실존하는 성공 사례를 기반으로 만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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