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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과 입술 사이에 생긴 연한 실을 손가락으로 떼어내며, 마유가 말했다.


"이제 가봐. 병원이라도 좋고, 집이라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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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라는 건 꼭 보답받는 건 아니다. 오히려 노력을 하는 사람의 태반은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수렁에 빠지는 법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노력하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실패를 거듭한다.  


마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니자키 마유는 중학교 1학년이 되어 마나베 마유가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이제 어머니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익숙해졌고, 아버지의 얼굴보다 한쪽 머리를 묶은 모습이 더욱 익숙해졌다.


머리끈을 만질 때마다, 아직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힘을 얻었다. 아카사카 아이리. 이제 마유는 그녀가 있던 동네에 있었다.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하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이곳으로 이사를 갔다. 처음 이사를 가고 나서 한 것은 거대한 시계가 달린 백화점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역, 중학교 사이를 배회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며.


1년이 지나고, 다시 1년이 지났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아카사카 아이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아버지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고, 마유의 머리카락은 샛노란 금발이 되었다. 


기다리는 건 익숙하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새엄마가 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어째서 이렇게 비싼 건지 모를 소고기를 질겅질겅 씹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언젠가 아버지는 나를 봐주겠지. 다시 아카사카를 만날 수 있겠지. 5년이 흐를 동안 마유는 밝은 일상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친구들의 말에 말을 맞추며. 냉소를 숨기며.


'바뀌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바뀔 거라고 믿으면서 노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걸지도 몰라.'


학교 가방이 툭, 손에서 떨어졌다. 텅 빈 거실에 마유 혼자였다.




마유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시즈카와 같은 반이 됐다. 그 전에도 가끔 이름을 듣는 일이 있어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얼굴을 보게 된 건 그 해가 처음이었다. 시즈카는 과묵하고 어딘가 우울한 면이 있는 여자애였다. 미려한 외모 덕분에 반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새까만 머리칼과 먹으로 칠한 것 같은 눈동자가 햇빛을 받을 때마다 군청빛을 띄었는데, 마치 바다가 눈동자 속에서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그와 대비되어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 점이 또 묘한 색기를 자아냈다. 우수에 젖은 눈으로 딴청을 피우다가 선생이 지명을 해 교과서를 읽게 될 때면, 고른 치열이 또박또박하고 느긋한 목소리와 함께 드러나 어딘가 이지적인 미녀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시즈카에겐 언제나 나쁜 소문이 따라다녔다. 마유는 반 여자 아이들이 모여 시즈카가 원교를 한다느니, 사실 애인이 몇명이나 있다느니 하는 뒷담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여자인 주제에 여자만 노리고 다녀서 기분이 나쁘다, 그런 주제에 항상 여자를 갈아치우니 분명 헤픈 거겠지. 저번에도 바람을 피다가 애인에게 걸렸다고 한다. 원교라도 하는거 아니야? 누군가 입을 연다. 옆 반의 미나가, C반의 하루사키가 입을 연다. 소문을 들을 수록 마유는 의문이 들었다. 


마유에게 있어, 시즈카는 들리는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꺼림칙한 모습을 자주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항상 사라지지만 급식실에서 모습을 본 적은 없고, 개인사에 물어보면 좀처럼 답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외의 것을 물어보면 오히려 상냥하게 답을 해주는 편이었다. 이런 소녀가 정말 소문대로 헤픈 여자인 걸까.


그 때까지만 해도 마유는 어느 정도 호기심은 품었을 지언정, 직접 시즈카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아."




도시락을 먹을 곳을 찾던 와중 올라간 학교 옥상의 문 앞에서, 우연히 시즈카와 얼굴을 마주치게 되기 전 까지는.


시즈카는 옥상의 문 앞에서 다리를 쫙 피고 편하게 앉아있었다.


"안녕."


마유가 인사했다. 시즈카가 조용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앉아도 될까. 마유가 말하자 시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유는 스커트 끝을 손가락으로 집어 사뿐히 들어올린 다음, 바닥에 앉았다.


"저기, 왜 여기에 있는거야?"


마유가 물었다.


"옥상, 먼저 온 사람들이 있어서."


마유가 문 틈 너머를 슬며시 넘보았다. 학생 몇명이 모여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우왓." 마유가 질색했다. "내려가는게 좋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시즈카가 말했다. "익숙하니까."


"담배가?"


마유가 물었다.


"기다리는게."


시즈카가 대답했다. 마유는 시즈카의 손에 든 빵봉투를 보았다. 항상 이곳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던 걸까. 그 외로워보이는 옆모습에 마유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마유는 시즈카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 건드렸다.


"너, 아직 점심은 안 먹었지?"


마유가 말했다.


"응. 그런데."


시즈카가 대답했다.


"그럼 같이 내려가자고. 이대로라면 나도 혼자 먹어야 하니까."


그 다음 날부터 둘은 친해졌다. 봄이었다.


#


"마나베 씨는 말이야."


창연한 하늘이 넘실거리는 어느 날, 시즈카가 밥을 먹다 말고 입을 열었다. 


"왜."


마유가 대답했다.


"왜 항상 나랑 밥을 먹어주는거야?"


시즈카가 묻자, 마유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내가 말할 건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평판이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걸 알고 있으면, 하지 말라고 말하면 될 거 아니야."


"음." 시즈카는 작게 웃었다. "전부 거짓말은 아니니까, 할 말이 없는 것 뿐이야."


마유는 귀에 걸린 머리카락을 왼손의 중지와 검지 사이로 집어 뒤로 넘겼다.


"의외네. 그럴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의외라는 말은 많이 들은 것 같아."


시즈카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외형에서 오는 인상에 비해 질척거리고, 재미없는 사람인 모양이라."


"누가 그래?"


"전에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말을 하던데."


마유는 시즈카의 주위에 돌던 소문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다들 헤어진 것을 상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연애 같은 거 하지 않으면 좋을텐데. 마유가 시즈카에게 그렇게 말하자, 시즈카는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거절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이야. 그래도 이제는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적어진 것 같으니까."


"나는?"


"네가 특이한거야." 시즈카가 말했다. "이런 녀석한테 관심을 써주다니."


시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 안에 구깃구깃 접은 빈 빵 봉투를 집어넣고는 도로 자리로 돌아왔다. 여전히 음울한 표정이었다. 


"정말, 어쩔 수 없네."


마유는 한숨을 쉬고, 도시락에 있던 소시지를 한 젓가락 집어 시즈카의 입 안에 집어 넣었다.



"뭐하는 거야?"


시즈카가 우물거렸다.


"너, 어차피 항상 빵 하나만 먹고 때우잖아? 그럼 배도 남아 돌겠지. 그러니까 잔반 처리나 해달라고. 나는 쓸데없이 커다란 너랑 달라서, 뭘 많이 못 먹거든."


마유가 다시 소시지를 집었다.


"그러니까, 점심은 앞으로도 같이 먹도록 해. 이상."


시즈카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마나베씨는 상냥하네."


"바보 같은 소리!”


마유는 턱을 괴고 그 말에 반박했다.


#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직전. 학교 옥상.


"오늘도 죽상이네."


"......"


건조한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유가 입을 열었다.


"저기, 왜 항상 그런 표정으로 있는거야?"


난간에 기댄 시즈카의 몸이 움찔, 떨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어?"


시즈카가 물었다.


"뭐?"


마유가 되물었다.


"됐으니까."


다시 묻는다. 마유는 얼굴을 그대로 두고, 답한다.


"다들 한 번 쯤은 가볍게나마 생각하는거 아니야? 그런거."


마유는 시즈카가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한다. 마유는 시즈카가 그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왠만해서 제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꼭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 건 아니었지만, 만약 그 안에 무언가 알아주길 바라는 의도가 있다면 받아들여주고 싶었다.


"나는 말야, 매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중2병이네."


마유가 약간 가벼운 말투로 말한다.


"그런 걸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시즈카에게, 마유는 농담이라고 한다. 가끔 시즈카는 너무 진지해질 때가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


시선을 느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검푸른 눈동자가 눈썹으로 만든 베일 뒤에서 마유의 마음을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적한 옥상에 거친 바람이 불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시이나였다.


"나, 예전에 정말로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어서."


시즈카가 말한다.


"응."


마유가 말한다.


"옛날부터 한 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붙어다녔고, 실제로 항상 붙어다녔어. 그랬는데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서 헤어지고 만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응."


마유가 눈을 감는다. 시즈카는 주저 앉는다.


"헤어지는 날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 녀석은 말했어. 하지만 말이야, 다시 만난다고 해서 그 녀석이 나를 기억해줄까? 나는 그 녀석을 기억할 수 있을까?"


침묵.


"애초에 다시 만날 수는 있는걸까.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시모키타자와에 있을 수도 있고, 시부야에 있을 수도 있고, 오사카에 있을수도 있고, 어쩌면 이제는 일본에 없을 수도 있지. 세상을 살아가며 다시 그 녀석하고 만나게 될 확률이 얼마나 되는 걸까."


얼굴을 양손으로 가린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존재가 사라진다고 믿는 어린 아이처럼.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시즈카는 호흡을 내뱉으며 손을 축 늘어뜨렸다. 긴 한숨이 회색 하늘에 섞였다. 마유는 감은 눈을 뜨며 생각한다. '더 이상 기다려봐야, 찾을 수는 없는 걸까. 5년이면 긴 시간이 아니었을까.'


"너에게 전부 말할 수 없지만, 그 녀석이 가고 나서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어.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강해서 매일 같이 꿈 속에 떠오를 정도로 후회하고 있는 일이 일어나서, 항상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된거야. 그 순간부터는 그 녀석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어져서, '어떻게 하면 과거에 있던 일을 전부 잊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여러가지 것들을 해봤어. 차라리 공부를 하는게 나을 정도로 지루한 연애를 해봤고, 발에 걷어 차이며 인연을 선고 받기도 하고."


시이나는 계속 말한다.


"나는 떳떳해지고 싶지만,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거야. 그러니까 차라리 죽고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어. 왜, 그런 소설 있잖아. 주인공이 너무 강해서 혼자서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고. 막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조금만 노력해도 성대하게 성공을 할 수 있고. 아주 조금만 노력해도 다른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훌륭하게 노력을 쌓아 올렸다며 칭찬해주는 그런 소설."


"그렇게 되고 싶은거야?"


마유가 묻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거 아니야?"


시즈카가 역으로 묻는다.


"하긴."


마유는 납득했다. 점심 시간이 끝나갈 시간인가, 싶었다.


".......나도 비슷한 사람이야. 잊혀진 건 아닐까 불안하기도 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또 운명같은 만남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애처럼 생각하고 그래."


마유가 말했다. 아마 다시는 그런 만남을 할 수 없겠지. 머리를 묶은 끈이 회색 하늘 밑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런 마음을 타인에게 내놓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단 한 명을 빼면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평소에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말하지 않지만, 이 소녀에게라면 조금은 터놓아도 좋지 않을까. 마유는 마음 속에 있던 말을 풀어놓았다.


"옛날에 단 한 번 만났던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없어도 그 속에서 조금이라도 행복한 일이 일어난다면, 노력하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그 말에 멋대로 나는 반해버려서 말이야. 우습지만 그 말대로 살아나가면 어떨까, 싶어서 몇년이고 살아가려고 노력한거야."


기지개를 켠다.


"그래도 피곤하기 짝이 없어, 그런 삶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일화는 어렸을 때 일어난,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일인 것 같고 말이야."


시이나는 마유의 옆모습을 올려다본다.


"그래서 나도 버리려고 노력을 몇 번 해봤지만, 나는 아무래도 무거운 사람인 것 같아. 바보처럼 계속 그 말을 따라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말아. 이제 이 마을에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사람인데."


종이 울리는 소리가 둘의 귓가에 울린다.


"그래도, 10년이 넘게 살아서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러니까, 죽는다고 생각하기 이전에 말이야.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피차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바람의 흐름을 타고 올랐다. 그와 동시에 시즈카가 몸을 일으켰다.





창공은 푸른색. 점심이 끝나기 직전의 하늘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마나베 마유는 머리를 양갈래로 묶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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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바퀴가 굴렀다. 마치 시계의 시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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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사카 아이리가 시이나 시즈카와 재회한 날.


시즈카는 아이리가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이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마유가 뒤이어 뒤를 돌았다. 마유는 시즈카의 시선을 쫓았다. 미처 아이리를 포착하지 못한 마유는, 시즈카의 눈가에 치밀어오른 애수와 경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아이리는 다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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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사카 아이리, 라고 합니다."


반에 울려퍼진 작은 목소리에, 마유는 의자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제 와서야. 어째서 지금. 또각. 또각. 나무로 된 교실 바닥을 걷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진다. 얼핏 보기에 아이리는 어릴 때와 전혀 변한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점점 그녀가 가까이 올 수록, 그녀가 얼마나 자신이 없어 보이고 상처를 입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을 늑대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아이리는 마유를 스쳐 지나가, 그 바로 뒤에서 발을 멈췄다. 


"시이나."


혈관에 흐르고 있던 피가 서늘하게 얼어 붙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쉬는 시간, 학생들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인파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당황해하는 아이리를 향해, 마유가 다가간다. 마유를 보자마자 아이리는 천적을 만난 동물처럼 몸을 흠칫 떤다. 그 모습에 덩달아 마유는 상처입었다. 


"안녕."


입꼬리를 올려 처절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그녀를 향해, 아무도 모르게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즈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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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동안 그들은 같은 반이었다.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카사카의 표정을 볼 때마다,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묵직한 사슬이 되어 마유를 사로잡았다. 설령 그 때 만나지 않았더라고 해도, 나는 너에게 반해버렸겠지. 마유는 확신한다. 동시에 참 웃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반해버렸던 상대에게 다시 반해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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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대로 정하지마!"


전화기에 대고, 마유가 소리를 지른다.


"유학이라니, 그렇게 말을 해도......"


시간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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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 1년이 지나간다. 시간이 흐를 수록 마유와 시즈카는 서로를 만나게 되는 횟수가 줄었다. 만남을 가질 때마다 무언가로부터 눈을 돌리듯 행복해지기를 추구했지만, 결국 끝까지 행복한 채로 끝을 맺게 되는 일은 없었다.


사소한 것들이 폭발하게 되는 계기는 대개 단순한 법이다. 우연히 식당에서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거나. 애인이 무신경한 발언을 했다거나. 매일같이 던지는 어색한 농담이 질렸다거나. 다른 여자와 손을 잡으며 풋풋한 미소를 짓는걸 봤다거나. 그 여자가 애인에게 품고 있는 연정을 깨달았거나. 그런 사소한 것으로 잠시 화가 나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만다. 그렇게 사이가 멀어진다.


우연히도 그 날은 그 모든 일이 한번에 일어났다. 두 사람은 카페에 앉아 각자 다른 음료를 마시고 있다.


"저기, 요즘 조금 이상하지 않아?"


마유가 말한다.


"그런가?"


시즈카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요즘 전혀 흥미 없다는 듯이 굴지. 뭘 해도."


"그런가."


무관심하다는 듯한 대답이 이어진다. 마유는 화가 솟아올라 언성을 높였다.


"정말이지, 속이 좁은 녀석이네!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확실하게 말을 하란 말이야! 그렇게 삐진 애처럼 굴지 말고!"


시즈카는 그제서야 음료를 내려놓는다. 그녀는 눈쌀을 찌뿌리고 마유를 노려본다.


"애처럼 구는 건 서로 같잖아."


"뭐?"


"너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너도 요즘 같이 있을 때마다 지금 내가 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하고 있어."


정적.


"...아이리였구나. 좋아했다는 건."


시즈카가 말한다. 


"상관없잖아. 지금 사귀고 있는 건 너니까."


마유가 눈을 피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시즈카가 말한다.


"그러는 너는?"


마유가 되묻는다. 시이나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문다. 잔의 표면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서로를 상처입히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는지, 마유는 자조했다.


"같은 처지네. 우리."


시이나는 동의한다. 그들은 그저 아직도 첫사랑에게 얽매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첫사랑이 그들의 바뀐 모습을 보고 어떤 말을 할지 두려워서, 지레 겁먹고 되지도 않는 관계를 계속 이어간 것이다.


"나, 있잖아."


마유가 입을 연다.


"내년에 영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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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즈카는 오토바이에 치였다. 그 오토바이는 아무런 전조도, 맥락도 없이 나타난다.


시즈카는 입원을 했다는 소식을 반에서 떠들며, 마유는 아이리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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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기다렸어?”



커튼 틈새로 침입한 햇빛이 아이리의 얼굴에 음영을 만든 그 순간, 마유는 아이리의 등이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친구네."


마유가 병문안을 온 날, 마유는 병실 밖으로 나가는 아이리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시이나는 마유의 말이 맞다고 대답했다. 아무튼 상관없지만, 이라고 마유가 중얼거린다. '아직 너희 둘은 친구지.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은 친구야.' 


"당분간 병문안에는 못 올 것 같아."


그야, 아이리를 계속 봐야하는걸.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아. 너와 함께 있는 아이리는.



"그래?"



이유를 알 수 있겠냐고 시이나가 물었다. 전부 알면서 묻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묻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던 싫은 녀석이다. 정말 심술 굳은 녀석이라고, 마유는 생각했다. 



"......내년에는 유학을 가야 하니까, 미리 외국어 쪽은 시험을 봐서 자격증을 받아두는게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그래." 시이나는 대답했다. "알았어."



그 쓸데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때려 엉망진창으로 만들면 아이리는 너를 포기할까. 마유는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 안쪽을 깨문다. 아니. 분명 그 녀석은 그런 너라도 좋아하겠지. 마유는 고개를 돌렸다.


"미안."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고는 병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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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녀석이랑 사귀다니, 딱히 좋아할 곳도 없는데 말이야. 눈치도 없고. 무신경하고. 나도 참 이상하지 않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왜 더 기다리지 않은 걸까?




"그래도 언제나 밝으니까, 시이나. 보고 있으면 재밌고."




그런 녀석을 칭찬해주지 말아줬으면 한다. 그래도 너는 그 녀석을 좋아하니까.




"아니, 굳이 따지면 시이나는 꽤 조용한 편이지? 쿨하다고 해야하나.”




아이리는 인상을 찡그리고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구나. 너에게 있어서 시이나 시즈카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마유는 그 사실이 싫었다. 다이아몬드로 된 혼인 반지를 관리하는 것 같은 섬세한 눈길을 시즈카에게 향하고 있는게. 조금 더 쾌활한 말투로 말을 걸어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라도 해줘.



"언제나 어릴 때 그대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누구나 그러겠지. 안 그래?"




마유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변했다. 내가 변한 만큼 내 안에 있던 너도, 네 안에 있던 시이나 시즈카도 변했다.'


그런데 왜 나만 알아보지 못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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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목요일이네요."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을 향해 올라간다. 손 안에 쥔 것은 영어 프린트. 어쩔 수 없다. 내가 이러지 않으면 그 녀석을 챙겨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마유는 복도를 저벅저벅 걷다가, 병실 앞에서 발을 멈췄다. 병실 안에서 아이리가 웃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천진난만한 미소였다. 마유에게 있어 그 미소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유는 핸드폰을 꺼낸다. 마유를 상대로는 지어주지 않을 미소가 핸드폰의 사진 칸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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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죄악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창문에 앉은 흰 새가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아이리는 주머니에서 머리 끈을 꺼내 머리카락을 한데 묶고 우동을 한 젓가락 입 안에 넣었다.



"묶는구나, 그거." 침묵을 깨고, 마유가 말했다. "어울린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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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는 적의가 가득 담긴 표정을 회상하며 접시 속 내용물을 쓰레기통 안에 쳐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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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아카사카 양?"


마유는 나중에 아카사카를 소개해달라고 달라붙은 학생들을 냉정한 눈빛으로 품평한다. '축구부지만 여자 소문이 좋지 않은 오오사와라는 논외다. 낭비벽이 심한 아사히나 양도 안 된다. 오오츠카, 너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잖아?'


"관둬, 아카사카 양은. 분명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안 되는거야.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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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 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감이 잡히지 않아. 하지만, 그 녀석하고 사귀게 된다면 적어도 그 녀석한테는 조금 더 잘해주지 않을래?'


시이나 시즈카는 답장을 하지 않고 문자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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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있는거야. 사람한테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부탁하지 않아도 해주고 싶은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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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참은 기분을 입술에 담는다. '단 한 번이야. 그 녀석이 병원에 틀어박혀서 너의 곁에 없는 이 한 순간이 지나면, 그 때는 포기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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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나는 적어도 네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슬픈 얼굴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좋아하는 녀석도 너를 좋아하고 있어. 알고 있어? 그리고 네가 이렇게나 싫어하는 나도 너를 좋아하고 있어. 너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거야. 단지 나는 내가 사라진다면 슬퍼할 아버지를 걷어 찰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런 식으로 밖에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는 귀찮은 사람이라는게 조금 흠일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너에게는 너무나도 귀찮은 걸림돌일지도 모르겠네.


이런 나를 용서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아. 그러니까 적어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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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려놓는다.


"나는 유학을 준비하느라 바쁜거야. 이제 할 걸 해야만 해. 어차피 옷도 말랐지? 그러니까, 가면 어때?"


"그치만-"


"가."


단호하게 말한다. 아이리가 주춤거리는 소리가, 그 다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마유는 가만히 서있었다.


마나베 마유가 아는 바로는, 시이나 시즈카는 언제나 아이리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다. 설령 고통을 주지 않더라도 필요할 때 아이리의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과거에는 어땠을 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닌가. 언제까지나 과거에 연연해 있는 녀석. 그런 주제에 허세는 있는대로 부리는데다가 조금 자아도취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녀석. 마유는 시즈카를 그런 밉고 재미없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심해도 좋아, 아이리. 나는 그 녀석의 싫은 점을 알고 있는 만큼 좋은 점도 알고 있으니까. 그 녀석은 낯선 사람에게 상처를 입은 집 강아지 같은거야. 주인이 아닌 사람은 믿지 못하고, 집을 지키려고 하지만 힘이 없어서 짖는 것 밖에 하지 못해. 하지만 주인이 찾아온다면, 분명 밝게 웃으면서 맞이해줄거야. 그런 사람이니까.'




"영국, 기대되네."


마유는 스스로를 달래듯 웃었다. 도시가 어두워졌다.























10000자씩 매일 쓰니까 힘이 빠지는 부분이 많이 생기는 듯


아마도 4화 내로 끝


댓글과개추를앙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