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이 완전히 밤의 어둠 속 심연, 우리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내질뻔 했던 그 날의 사건 이후로, 우리의 관계도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다.


최근에 읽던 책 하나를 완독하고 나자, 나는 아직 책을 읽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권속에게 다가가 소파 옆자리에 앉아서 몸을 밀착했다.



"저기……주인님? 저 이제 막 새로운 장을 읽던 참이었다구요? 조금만 이따가……"



권속 아이는 곤란하다는 듯 내 반대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더욱 그 아이에게 몸을 밀착하며 말했다.



"건방진 권속이로구나. 세상 어디에 주인님이 말씀하시는데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하는 권속이 있단 말이냐?"


"그렇지만 주인님께서 전에 책을 읽을때 만큼은 신분에 상관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래, 말 잘했구나. 분명 그랬지. 그럼 그때 네가 내게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하더냐?"


"앗, 그건……."



난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끝끝내 내 쪽은 바라보지 않는 권속 아이에게 조금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복수를 겸해서 전에 그 아이가 내게 그랬듯이, 앞섶의 단추를 끌러서 맨 살을 드러내보였다.


그 아이는 분명 책을 보고 있을테건만, 어째선지 눈에 띄게 동요하면서 몸을 움찔거렸다.


승리를 직감한 나는 이참에 쐐기를 박을 참으로, 최대한 느끼하게 몸을 부비면서 소파 위로 올라왔고,


곧 소파의 등받이와 그 아이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서, 뒤에서 그 아이를 끌어안았다.



"하윽!?"


"왜 그러느냐? 책을 읽는 시간이 더 소중한게 아니었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책을 읽는게 아니었느냐?"


"그, 그치만 주인님의……."


"주인님의……?"


"……주인님은 정말 심술쟁이세요."


"그러는 너는 정말 터무니 없는 변태 권속이구나. 그렇지?"


"……."


"권속 주제에 주인님의 몸에 불순한 욕망을 품어서는……. 더군더나 이렇게 작고 빈약한 몸에다 말이지. 정말이지, 이런 변태가 대체 어디에 더 있단 말이냐?"


"……그만 해주세요. 그건 제가 주인님을……."


"변명은 듣기 싫구나. 그래서 이 조그만게 네가 좋아하는 것 아니더냐? 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를 빈약할 살덩이를 바라던게 아니었느냐?"


"아, 아앗! 안, 안돼요오오~ 아아아앗!"



우리 밤의 일족은 영원과도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불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의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는 없으리란 법은 없다.


매일, 영원히 이어질것 같은 이 행복한 일상도, 어느 한 순간의 일로 끝나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과도 같은 시간속에 안주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중요한 때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말고,


매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고, 상대의 마음을 마주하자고 그렇게 결심했다.


비록, 아직 그 아이의 이전 삶에 대해 물어볼 용기까진 가지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그 아이를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부딛친 결과 나는 이 아이가, 내가 그 아이에게 가지고 있는 것 만큼이나, 내 몸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소 엉뚱한 결론이긴 하지만.



"주인님! 정말! 주인님같이 고귀하신 분이 이러시면 못 써요! 체통을 지켜주세요!"



권속 아이는 드디어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몸을 들어올려서 자신의 앞에 세워두었다.


그러고는 내 풀어헤쳐진 앞섶의 단추를 잠그려도 시도했다.


물론 나는 그대로 이 아이의 의도에 어울려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때문에, 몸을 슬쩍 교묘하게 틀어서 단추를 잠그려던 그 손이 내 가슴에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아, 아아앗!"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아무리 욕정을 느낀다고 해도……."


"아, 아니, 이건, 주인님이―――"


"정말 터무니 없는 변태 권속이구나. 감히 주인에게 욕정을 느끼다 못해, 먼저 손을 대다니……."


"아, 아아아아아!"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조금은 자충수를 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권속 아이는 당황해서 내 가슴에서 손을 떼려고 하면서도, 좀처럼 쉽게 떼지 못했다.


그 대신, 정말 감질맛나게도 손을 빼려다 말면서 은근슬쩍 이곳저곳 만지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망설이며 방황하는 손의 감촉이 내 민감한 부분을 훝고 지나갈때마다, 나는 몸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온기를 느꼈고, 결국 한껏 참았던 달근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으읏!"


"……정말, 주인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실거면 처음부터 이런 장난은 하지 말아주세요."


"시, 시끄럽다! 애초에 네 손길이 너무 끈적한게 나쁜것 아니더냐? 겉으로는 점잖은 척 하면서, 은근슬쩍 그렇게 만져대고는!"


"주인님! 정말, 그런거 아닌거 아시잖아요? 저는……."



권속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더 이상 책을 읽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고 소파위에 올려져 있던 책에 책갈피를 끼우고는 덮어서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어휴, 알았어요. 정말 못말리시는 분. ……자요."



권속은 어쩔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내 앞에 서서는, 이미 본인도 주체하지 못하는 뜨거운 한숨을 내뱉으면서 스웨터를 젖혀, 자신의 가슴을 내게 들이밀었다.


이것도 최근에 와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 아이는 제법 쑥스럼을 타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 아이는 내게 가슴을 만지게 할 때마다 양 귀가 붉게 물들곤 했던 것이다.


막상 녀석이 그렇게 쑥스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 또한 평소처럼 섣부르게 그 가슴에 손을 대기 망설여졌다.



"자요, 여기. ……만지고 싶으셨던것 아니었나요?"


"……그, 그게……."



권속 아이의 쑥쓰러워하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서 쑥스러워지고, 그래서 분위기는 점점 어색해져만 갔다.


그렇지만 곧, 거의 동시에, 나도 그 아이도 서로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이전의 우리라면,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을때, 그대로 서로 변명의 말을 늘어놓고 부끄러운 마음에 도망갔을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는 달랐다.


지금이 아니면 말 할수 없는 기분, 전할 수 없는 마음도 있다.


지금이 아니면, 계속 미루기만 한다면, 이 마음을 영원히 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걸 깨달은 지금의 우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혹여나 내일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 사이처럼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주저했던 입맞춤도 지금은 일사천리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 새, 우리는 소파 위에서 반라로 뒹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최근의 우리는 몇번이고 민달팽이처럼 달라붙어 보비적거리곤 했다.


지금처럼 책을 읽다가도, 식사를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심지어는 산책을 하다가도…….


그것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전동 마차처럼,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알게되자, 하루라도 그것을 허투로 하고 싶지 않다, 조금도 상대를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욕망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자중해야 하지 않나 하면서도, 조금도 자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기만 하는 우리 둘 만으로는, 서로를 멈추게 할만한 의지도 동기도 부족할 수밖에…….


그래서 우리는 둘만의 정원에서 서로의 폭주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매일 매일을 감정의 폭풍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


언젠가, 정도를 모르고 폭주하는 이 마음이 지나친 사랑으로 인해 왜곡되고 뒤틀리지 않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그렇게 걱정하면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나날은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했다.


.

.

.

.

.


그 날도 우리는 평소처럼 반라로, 집안 여기저기를 적시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동생이 성역에 도착했다고 연락하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황급히 옷매무새를 고치고 우리가 벌인 "즐거운 흔적"을 치우느라 애를 썼다.


간신히 옷차림만 제대로 하고 동생을 맞이하러 현관으로 내려오자, 그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 조금 화난 기색을 덧씌우고 있는 동생이 우리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의 전화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니, 많이 늦네에."


"……갑자기 무슨 일이느냐. 그렇게 짐까지 바리바리 들고 와서는."



아닌게 아니라, 동생 본인도 등 뒤에 짐을 한가득 싣고서는, 등 뒤에 죽음의 하인으로 이루어진 등짐을 한가득 맨 일행을 줄줄히 동행했다.



"이사야."


"이사? 갑자기?"


"큰언니 부탁."


"……?"


"얼마전에 습격당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작은 주인님 말씀은 큰 주인님께서 최근 있었던 습격을 걱정하셔서 작은 주인님 일행을 보내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동생은 자신의 말을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권속에게 어느새 다가가선 그 품에 안겼다.


일전의 나였다면 그 모습을 보고 질투를 하거나 걱정을 품었을지도 모를일이지만, 지금의 나는 그 정도의 어리광은 부리게 내버려둬도 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건 권속 쪽도 마찬가지였는지, 내 쪽을 한번 보고는 자신의 품에 안긴 동생을 쓰다듬어주었다.



"보고싶었어. 걱정 많이했어. 다친데는 어디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괜찮아요. 주인님께서 잘 치료해 주셨거든요."


"……은탄에 맞았지? 그거 다 나으려면 값비싼 연고가 필요해. 알아?"


"……저도 알아요. 주인님께서 고작 저 때문에 그걸 구하느라 한동안 고생하셨거든요."



그 말에 희희낙낙해서 야구자켓의 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던 동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내 쪽을 말 없이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동생은 치료를 빌미로 내 권속으로부터 점수를 벌기를 기대했던것 같다.


나는 동생의 구겨진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한 마디 덧붙여주기로 했다.



"흠, 흠, 그래도 은상(銀傷)은 완전히 낫는데는 오래 걸리니만큼, 네가 가져온 연고가 도움이 되겠구나."


"그치?"



금방 표정이 풀어진 동생이 다시 권속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아주 죽이기라도 하려는듯이 매섭게 노려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는……."


"내 권속."



동생은 생각났다는 듯이 내 권속으로부터 떨어져서는, 우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던, 처음보는 권속의 뒤로 돌아가서 그 어깨를 잡고 대답했다.



"……츠음 뵙겠습니다, 둘째 큰주인님. 즈느은 주인님의 새 권속인 {relative2_name}라고 합니다."



그 아이는 어쩐지 지금 상황에 불만이 많은듯, 중간중간 이를 갈면서 대답했다.


그러더니 등 뒤에 있는 동생을 돌아보고는 표정을 헤벌쭉하게 해서는,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조금 화난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우리를 노려보았다.


……어쩐지 얘도 이상한 얘를 권속이랍시고 들인 것 같다.



내 권속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오늘의 갑작스러운 동생의 방문으로 조금 안심했다.


한편으로는, 이제 보는 눈이 있으니 대놓고 치근덕거리지는 못할테니 아쉬운 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브레이크라는 개념이 없는 나와 내 권속의 끝을 모르고 폭주하는 관계에 제동을 걸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엔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왜?"


"어차피 한 집에 여럿이서 살아봐야 낮에는 취약해진다는 점은 똑같지 않느냐?"


"……각자 일어나고 자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잖아."


"그렇다 해도 공통적으로 자는 시간이 있는건 그대로인것 아니느냐?"


"……그래서 하인들도 같이 데려왔잖아."


"……언니께서 정말로 나의 성역으로 이사오라고 하신게 맞느냐?"



동생은 어쩐지 진땀을 빼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면 이 아이, 잔머리는 잘 굴리지만 거짓말은 무진장 못했다.



"…………했어."


"그냥 문제가 생겼을때 대응하기 쉽게 가까운 곳에 성역을 마련하라고 한게 아니고?"


"……."



계속해서 시선을 피하던 동생은, 돌연 화난 얼굴을 하고 나를 쏘아보았다.



"근처에 갑자기 흡혈귀 집이 생기면 인간들도 신경쓸꺼 아냐! 그렇잖아도 저번엔 안하던 습격까지 했다며!


그런데 이 동네 흡혈귀들 늘어났어요~ 하고 광고해서 사냥꾼들 불러들일것도 아니고 굳이 새 성역을 만들필요는 없잖아!"


"그, 그렇구나."



왜 화를 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이 아이의 말을 들어보면 언니께서 이 아이를 근처로 보낸것까진 사실인거 같기도 하고,


이 아이도 자기 나름대로 판단을 해서, 내 성역으로 이사를 오는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낸 듯 하다.


아마도…….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꾸나."


"……그래."



사실 그것 말고도 신경쓰이는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얘."


"또, 왜?"


"언제 권속으로 만든 아이냐?"


"저번에 집에 가자마자."


"……그게 가능하느냐? 그렇게 짧은 시간만에?"


"저는 진심이니까요. 저기에 있는 가슴만 커서 멍청해보이는 여자랑은 다르게."



어쩐지 자랑스러운듯한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내 권속을 깎아내리는 동생의 권속이었다.


이 아이의 무례한 언행을 지적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내 권속은 이 아이의 공격적인 언행에 조금 놀랐을 뿐 딱히 기분이 상한것 같지는 않았기에 당장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아이는 이상할 정도로 내 권속에게 적대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얘, 비약을 썼어."


"비약? 혹시 그걸 말하는게냐? 그건 부작용도 심하고, 쓰는것도 많이 괴로울텐데……."


"저는 진심이니까요. 저기에 있는 안경쓴 더벅머리 여자랑은 다르게."


""…….""



동생의 권속이 내 권속에게 보내는 끝을 모르는 원인모를 적대감에 어이가 없어진 나와 내 권속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예절을 겉치레로 여기고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 동생도, 이건 한 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이젠 같이 살아야 하니까 사이좋게 지내."


"네, 네! 주인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앞으로 잘 부탁……드르긋씁느드……."


""…….""



이렇게 해서 나의, 아니 우리의 성역은 이전에 비해 조금 더 떠들썩해졌다.



.

.

.

.

.



"선배, 우리 주인님은 피 여기서 받으셔야 하는데 어떡……그흡느끄?"


"……그건 말이지, 일단 이쪽 재단으로 돌려서――"


"――그건 위장으로 당연히 하는거고, 뭐 특별하게 더 해야하는게 없냐고 물어본……급느드……."


"……그렇구나. 일단은 그 정도로만 처리해도 돼."



책상에서 서류를 만지고 있는 두 권속 사이에, 내 동생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동생은 접히는 전화기(처음 봤을때는 깜짝 놀랐다)를 깔짝거리면서 내 권속의 어깨를 주무르며 치근댔다.



"너, 그것만 하고 잠깐 나랑 같이 가. 재밌는거 보여줄게."


"아하하……. 아직 일이 조금 남아서……."


"……."



동생 일행이 내 성역으로 이사를 온지 조금 시간이 흘렀건만, 동생의 권속은 여전히 내 권속에게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잘 보고 있노라면, 말은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틱틱대면서도, 내 권속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불러주고,


시킨 일은 시킨대로 하고, 일을 가르치면 가르쳐주는대로 하는게, 첫인상이나 겉보기보단 성실한 아이였다.


다만 내 권속에게 보이는 기묘할 정도의 적대감만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는 자기의 주인이 내 아이에게 말만 걸어도 눈을 희번덕하게 떠서는 죽일듯이 노려보며 발을 구르곤 했다.


동생은 그 아이의 시선을 불편하게 느낄법도 하건만,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내 권속에게 하루종일 붙어있으려고 하는데,


중간에 껴서 중재해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 외에도 신경쓰이는 점이 더 있었는데,



"저기, 실례할게요."


"그러려무나."



오늘치 일을 마친 동생의 권속은 소파에 앉아 다과를 먹으면서 책을 읽고 있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아이는 어쩐지 자기 주인에게 붙어다니지 않고, 나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딱히 내게 할 말이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가는 곳마다 따라와서 옆에 앉곤 했다.



"주인님, 주인님. 그 책 언제 다 읽으시나요?"


"이전 권은 벌써 다 읽었느냐?"


"아직 다 읽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 권부터 읽는게 더 재밌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구나. 어차피 나도 다 읽어가던 차이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그럼 옆에 앉아도 될까요?"


"그렇게 하려무나."



내 권속은 내 옆에 남은 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의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기를 들여다보다가도, 이따끔 내가 잡고있는 책 내용이 여전히 신경쓰이는지 힐끔거리긴 했지만, "아, 안돼지, 안돼." 하면서 몇번이고 고개를 돌렸다.


동생의 권속은 나를 건너 반대편에 앉은 내 권속을 잠시 노려보긴 했지만, 딱히 그 아이가 내 옆에 앉는게 못마땅한건 아닌지 금방 팽 하고 고개를 돌려서 자기 전화기를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이 아이가 내게 보이는 기묘한 태도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그때, 동생이 이 기묘한 모임에 가세했다.



"여깄었구나. 저기, 나 궁금한게 있어."


"어떤건가요?"


"있잖아……. 저기 가서 말해도 될까?"


"으음, 글쎄요."



요즘 내 동생은 내 권속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꿔서, 뭔가 새로운 것들을 알려주려고 하기보다는 반대로 뭔가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시시콜콜한 상식의 재확인부터, 본인이 그 아이보다 훨씬 잘 알고있을 집안의 예법까지, 거의 생각나는대로 물어보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내 권속은, 어째선지 내 동생의 새로 개발한 어리광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 아이는, 어쩌면 어린아이 돌보는 일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곤란하기는 이만저만이 아닌지,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앙금은 없다고 해도, 이전에 있던 일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칫."



동생의 권속이 그 모습을 눈에서 피눈물이 나올것처럼 맹렬하게 노려보다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침, 나도 이 아이에 대해 짐작가는것도 있고, 슬슬 손을 쓰기는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대화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나는 눈짓을 해서 내 권속에게 동생을 따라가도록 신호했고, 그 아이도 내 의도를 대충 읽었는지 순순히 동생을 따라 멀리 떨어진 데 자리잡았다.


동생 일행이 충분히 멀리 떨어졌다고 판단한 나는, 동생의 권속에게 말을 걸어봤다.



"얘, 말해보거라."


"갑자기 뭔 말이세요?"


"너, 네 주인을 많이 좋아하고 있지 않느냐?"


"무, 무슨……!"



평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늘어지다 못해 무례하기까지 한 이 권속은, 그 한마디에 여태껏 보지 못한 정도로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튀어올랐다.



"난 다 알고 있단다."


"저, 저는 아무것도……미천한 권속 따위가 주인님을 어찌……."



말은 그리 하고 있지만, 피부도 까무잡잡한 아이가 눈에 띌 정도로 얼굴을 붉혀서는, 온 몸을 비비적대고 손가락을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대강 짐작은 했지만, 참 알기 쉬운 아이였다.


대충 그런 연유라고 짐작은 했기에, 섣부르게 그 아이의 무례를 꾸짖지 않았었다.


아무리 신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마음을 숨기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힘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참 밤의 일족이 세상을 휘어잡으려 하던 격동의 시절에도, 정말 드물긴 해도, 주인과 권속이 사랑을 하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던가.



"그리고 네가 요즘 날 쫒아다니는 것 말이다만……."


"쪼, 쫒아다닌 적 없는데요오?"


"……네 주인이 시킨 거겠지?"


"……!"



말만 안했다 뿐이지, 조금의 거짓도 없는 이 아이의 솔직한 반응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이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짐작이 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밤의 일족들의 미묘한 몸짓만으로 천 마디 말을 나누는 섬세한 세계에서, 연애 상담사 노릇을 한 경험도 있는 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나는 대충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에 희희낙낙해서, 찻잔을 하나 더 가져와서 그 아이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자, 일단 혈차 한 모금 하고 진정좀 하려무나."


"……네."



권속으로서의 의무감과 자신의 주인에 대한 일로 머릿속이 엉망일 녀석에게, 나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척 하면서 은근슬쩍 이 아이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내가 "네 주인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보자, 묻지도 않았던 내가 더 잘 알고있을 개인사부터, 최근의 동향까지 주절주절 내뱉기 시작했다.


……다소, 콩깍지 낀 양념이 첨가된 것은 물론이다.


어느 새, 자기도 모르는 새 내 앞에서 솔직한 마음을 술술 내뱉기 시작한 동생의 권속은, 곧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은 저를 조금도 봐주지 않으시고……. 저는 이렇게나 주인님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럼 역시 네 주인의 곁에 있는게 좋지 않겠느냐?"


"그건 안 돼요!"



동생의 권속이 깜짝 놀라서 테이블을 쾅 하고 치면서 소리쳤다.


너무 이목을 끌었나 싶었지만, 내 권속만이 잠시 이쪽을 봤을 뿐, 동생은 내 권속과 대화를 나누느라 다른 것들은 조금도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쩐지, 처음과는 다르게 공손해진 동생의 권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래, 조금 조심 하려무나. 감정도 조금 추스르고."


"……네. 그치만, 그래도 그건 안돼요. 주인님께서 시키신 일인걸요? 이 제게 직접 맡겨주신 일인걸요?"


"내 곁에 붙어다니는 일?"


"……네."


"그리고 가급적이면 친하게 되어서 관심을 끌고?"


"…………네."


"그게 잘 되면 꼬셔서 관심을 독차지하고? 그 아이에겐 눈길도 주지 않게?"


"……."


"좋아. 그럼 너의 그 한결같은 충성의 대가는 뭐지?"


"그런게 필요한가요? 주인님께서 저를 믿고 맡겨주신 일인데……."


"그래? 그럼 생각해보거라."


"……?"


"내가 만약 너를 마음에 들어해서 너한테 관심을 쏟기로 한다면, 그 틈을 타서 내 동생은 내 권속과 시간을 보내겠지?"


"……그렇겠죠?"


"그리고 결국 내 관심을 잃은 그 아이가 어쩔수 없이 동생에게 넘어가게 되면, 네 임무는 완수되겠지?"


"……그, 렇죠?"


"네가 내 곁에서 총애를 받는 동안, 그 아이가 네 주인님 품에서 총애를 받는 것. 이게 네가 바라던 일이느냐?"


"……아."



재미있게도 그 아이는 곧 자신의 머리를 감싸쥐며 "아아아아아아아!" 하면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동생이 시킨 일을 맹목적으로 따르느라, 그 결과는 생각해본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여전히 내 권속을 포기하지 않는데다, 새 권속까지 동원해서 그 마음까지 이용해먹으려 드는 동생의 뻔뻔함에는 한숨이 나왔지만,


나는 그 아이를 믿기도 했고, 어차피 뻔히 보이는 수작이기도 해서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대신, 나는 이 아이를 도와줄 겸, 일을 다른 방향으로 부추기기로 했다.


나는 아직도 머리를 벅벅 긁다못해, 슬슬 머리를 어딘가 내리치려는 듯 흔들기 시작한 동생의 권속엑 말을 걸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느냐?"


"아아아, ……네?"


"네가 직접 새로운 작전을 제안하는것은 어떻느냐."


"그, 그치만, 권속은 주인님의 의향을 따라야 하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다. 네 주인의 의향을 거스르지도 않으면서, 네 마음도 충족시키는게지."


"……어떻게요?"



이제는 내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듯한, 어찌보면 참 단순한 아이에게, 마음을 멋대로 주무르는듯한 느낌에 죄악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말을 이었다.



"분명 그 아이는 내 권속이 마음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초조해져 있겠지. 그러니 네 주인에게 너네 둘이 찰싹 달라붙어서 내 권속의 질투를 유발하자고 권하는건 어떠느냐?"


"! 말, 말은 그럴싸 하지만 그게 잘 먹힐까요?"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지?"


"내 하기 나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둘째 주인님께 상담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막상 둘 만의 시간의 제동이 걸려서 아쉬움이 생긴 차였기에, 새로운 즐거움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다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나도 내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고,


저번에 약속도 했기에 마냥 손 놓을 수 없었기에, 완전히 장난삼아 벌이는 일은 아니기도 했다.


저 둘이 어찌저찌 잘 되기 시작한다면, 나도 다시 내 권속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기회도 많아지겠다는,


스스로 생각해봐도 얄팍한 계산과 함께, 나는 조금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