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쓰기만 하고, 몸만 망가지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너는 술잔을 책상에 내려 놓았지. 


잔뜩 찌푸린 네 표정을 보며, 나도 소주를 홀짝였었던 게 기억이 나. 


"인생이 써서, 술이 좀 더 달아서 마신다던가 뭐라나."


"어후, 아무리 써도 그렇지, 이딴 걸 맨 정신에 마신다고?"


연신 병을 이리저리 형광등에 비추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네가 참 재미있었던 것도 기억이 나. 


"허이고, 못 버티겠으면 그냥 마시지 말아. 그러다가 토하면 더 힘들어져."


"그럼 너 마시는데 나는 구경만 하라고?"


"말동무만 해줘. 말동무만."


너를 바라보면서 술잔을 한번 더 기울였었던 것도, 기억이 나. 


"정말 그랬다고?"


"후우, 그랬지! 걔, 좋아했었지."


"...헤에."


내가 무슨 말을 내뱉었더라? 어... 내 첫사랑 얘기였나?


"그래봤자, 어릴 때 얘기지만. 지금 와서느으은, 유치한 발상이라고 생각되지만!"


"혀 꼬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야."


"으으, 너무 마셨나?"


몇 병을 마셨지? 서... 너 병?


"술 남기면 안 되니까, 딱 한잔만 더 마셔. 한잔만 더 마시면 되겠네."


"너무 힘든데? 어후으..."


"딱 한잔만 더!"


"에이씨, 될 대로 대라! 건배!"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넣으니, 올라오는 술 냄새가 너무 독했었던 것도 기억이 나. 


"도대체, 내가 얼마나 마신거야..."


"혼자 씻고 잘 수는 있고?"


"그 정도는 내가 혼자, 아아아?"


와당탕, 하고 성대하게 넘어진 나를, 네가 부축해 준 건 기억이 나. 


네가 날 데리고, 택시에 태운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 왜 우리가 모텔에 있는 건데.


너는 왜 벗은 채로 내 옆에서 자고 있는데. 


나는 왜 벗겨져 있고. 


"야, 야, 일어나 봐."


"...조금만 더어어..."


"아니, 장난 치지 말고, 일어나 보라고! 미치겠네 진짜..."


"좋은 아침, 히히."


행복하게 웃는 너를 보니, 뭔가 정말 이상했어. 이 상황이 말이 되는 거야?


너랑, 내가?


"아, 아니. 너랑 나랑. 어제 뭐했는데?"


"뭐했냐니. 기억, 안나는 척 할래?"


"우리, 진짜로..."


"그래, 정말 했었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기억 해 내야지?"


"그거 말고도, 내가 한 게 있다고?"


"너 설마, 내뱉은 말에 책임 안 질거야?"


내,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래서 얀붕아, 한번만 더 말해 주라. 나 좋아해?


좋아해... 많이... 음냐...


그럼 우리 사귀는거다?


응... 응....


그럼 너랑 나랑, 서로 사랑하는 거지?


그렇지.... 그런! 거겠지이?


그럼 해도 문제 없는 거지?


해라, 해...


...틀림 없는 내 목소리인데, 믿을 수가 없어.


내가 정말 저런 소리를 지껄였다고? 술을 마시고?


"취중 진담이라는 말도 있잖아 얀붕아."


"아...아니, 우리 분명 친구 사이 아니었어?"


"...고백해놓고, 친구라는 소리 할 거야?"


"뭐?"


"씨발, 나쁜 새끼. 개새끼. 어제 그렇게 해놓고 책임을 안 질 거라고 그래서?"


"아, 아니..."


녹음된 것만 보면, 날 취했을 때 덮친 거잖아. 


이게 말이 되는 일이야? 그리고, 취했을 때 고백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받아주는 나는 도대체  -


"짱구 굴리지 마, 개새끼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남자랑 여자랑 같이 잠을 자는 건, 좋아해서 그런 거겠지?"


"...그렇겠지?"


"그러면, 너랑 나는 어제 같이 잤지?"


"...그렇지만 - !"


"일단 그렇지? 그럼 너랑 나는 사랑하는 사이지?"


"저기, 얀순아."


"네, 아니오로만 대답해. 네야, 아니오야."


"너무 막무가내잖 - "


"예, 아니오로 하라고!"


무서워, 너. 


도대체 뭔데. 


우리 이런 사이 아니였잖아. 


술 친구 아니였어? 그냥 서로 푸념이나 들어주고, 술잔 기울이던?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데. 


"씨발,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렇게 나쁜 새끼가 될 거라고? 진짜로?"


천천히 흔들리는 네 어깨가, 


언젠가 한번 봤었던 네 우는 얼굴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나쁜 놈, 진짜 나쁜 놈..."


머리가 정말 멍했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지. 


뭔가 뒷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것 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어. 


전날 술을 마셔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 상황 자체가 너무 말도 안되는 것만 같아서 그런 걸까?


"얀순아, 저기 - "


"말도 걸지 마, 나쁜 놈아."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너를 꼭 껴안아 줬어. 


"야, 나는 사랑 좀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으에, 에에에?"


"얼빠진 소리 내지 말고. 정 고백할 거였으면, 좀 더 제대로 된 고백을 했을 텐데 말이야. 미안해."


너를 적어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적어도 맨 정신에 해 주지, 그랬으면 좀 더 제대로 - 음, 좀 더 로맨틱하게? 그렇게 했을 텐데. 


적어도 네가 진지하게 나한테 고백한 건 알게 됬으니까... 


그러면, 사귈까? 우리?"


네가 그대로 와락 껴안아 줬던 거, 정말 기뻤었지. 


제대로 데이트 코스를 검색하고, 카페와 화장품 가게를 이리 저리 데리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고, 제대로 된 샴페인도 돈을 모아서 집에 데리고 왔지. 


"우리 100일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이렇게 보면, 우리 관계 하나도 안 바뀌었네. 그치?"


"그래도 적어도 사랑하는 관계잖아. 안그래?"


"그렇지, 이제는 사랑하는 관계지."


이제 너만 보면 괜히 심장이 뛰고, 


예전에는 웃어넘겼던 네 미소도 이제는 정말이지... 


"어, 얼굴 빨개졌다. 술도 안들어갔는데."


"에이씨... 일단 마셔!"


"뭐야, 왜 얼굴 빨개졌는데?"


"...사랑해서 그런다."


"으응, 잘 못들었어."


"사랑해서 그런다고!"


"그래, 그렇지? 흐흥."


아, 이런 여자가 내 여자친구라니. 믿을 수가 없다 정말. 


"한잔 했는데, 이제... 어때? 100일 기념으로."


슬쩍 들어오는 네 손길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어. 


겨우 한 잔 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심장이 빨리 뛰는건 거짓말 같았지. 


네 손을 그대로 잡고, 침실로 갔어. 


기억나지 않던 첫날 밤의 기억을 되새기듯, 나는 너에게 온 힘을 다해서 부딪혔고 


너는 그 날, 내게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었지.


그래, 그런데. 


이거 뭔데. 왜 선혈이... 


"있잖아, 왜 술을 마시는 걸까? 아니, 아니지. 이 질문이 아니지."


이게... 어떻게 된 건데?


"술을 내가 너에게 왜 권했을까?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