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괴이한 것.

처음 그것을 봤을 때 든 감상이었다.
부모도 없이 알에서 자라나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태어난 생명체.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전자를 조합하여 만든 괴물.

그것의 생김새는 아름다웠고, 동시에 이질적이었다.
잘 만든 조형처럼 가느다란 턱선과 새빨간 입술.
피부는 눈처럼 새하얗고, 허리까지 부드럽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또한 순백색이었다.
하지만 그것의 생김새에서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세로로 찢어져 핏빛처럼 달아오른 눈동자였다.
한없는 야성으로 불타는 그것의 눈동자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Imprinting.
연구원들은 그렇게 말했다.
갓 태어난 새끼오리가 처음 발견한 대상을 어미로 삼듯이, 그것 또한 나를 보호자로서 인식한 거라고 했다.
국가적인 예산이 투입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도대체 왜 단순한 하급 관리 인원인 나를 주목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확실한 건 그때부터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포악했다.
눈앞에 살아있는 모든 대상을 장난감처럼 여기며 살을 찢고 피를 보고 싶어했다.
공감 작용 실험을 위해 넣은 동물들은 여지없이 그것의 손에 의해 찢기고, 내장이 파헤쳐졌다.
예외는 없었다. 생명체의 고통은 그것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생존을 위한 사냥이 아님에도 마치 본능처럼 살육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제어할 수 없고, 늘 예상을 벗어나는 그것의 흉포함에 연구원들도 질려버릴 정도였다.
관찰을 위해 접근하다 방심을 해버린 관리자가 한순간에 그것에게 살해당하는 일마저 벌어지자, 마침내 상부에서는 나에게 그것의 관리를 맡겼다.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처음으로 그것에게 접근했을 때가 생각난다.
나는 문 뒤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꺼운 방탄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문 너머로 그것은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다리 사이로 파묻고 있었다.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치는 그 새빨간 두 눈도, 하얗게 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검은 유리창 너머에는 수많은 연구원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저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남겨진 가족에겐 확실한 보상이 돌아갈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의도는 뻔했다. 내가 보일 때만 이상하게 온순한 그것의 행동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어한 거겠지.
나에겐 그 명령이 목숨을 내다 버리라는 말과 똑같았지만,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가족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긴장감에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떨리는 손으로 문의 잠금을 풀자 그것이 고개를 들었다.
인간의 모습과 닮았지만, 결코 인간이 아닌 그것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이 굳어가는 걸 느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그것은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평소처럼 조금이라도 낌새가 보이면 바로 달려드는 공격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관찰하듯이 나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다가 내가 방 한가운데까지 걸어가자, 그것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유연하게 일어서는 그것의 움직임에 따라 엉덩이까지 닿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거렸다.
부드럽게 솟은 가슴 끝에 조그맣게 돋아난 분홍색 유두가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선명하게 두드러졌다.
옷 하나 걸치지 않았건만 그것의 얼굴에는 어떠한 수치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크게 들려오는 발소리가 내 귓가를 가득 메웠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나를 올려다봤을 때, 나는 그것의 눈동자에 얽매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태어날 땐 자그마한 아이 크기였던 것이 몇달만에 훌쩍 커서 머리가 내 턱까지 닿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내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내 옷에 코를 가져다 가볍게 킁킁대는 듯 싶더니 손가락으로 나의 팔을, 어깨를, 그리고 목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목 위로 드러난 맨살에 그것의 서늘한 체온이 스칠 때마다 소름이 차가운 불길처럼 번졌다.
언제라도 목을 쥐어뜯길 것 같은 공포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마침내 그것의 매끄러운 손가락이 나의 턱을 타고 뺨을 어루만졌을 때, 나는 눈을 감았다.
도저히 그것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빨갛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시야 한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성뿐이던 그 눈빛이 이제는 지성의 편린마저 희미하게 엿보이는, 그저 기묘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괴물의 눈동자가.

그때 나의 머릿속은 더할 나위 없이 복잡했던 거로 기억한다.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건지, 정말로 나를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 공포와 의문으로 뒤섞여 머리가 어지러웠다.
코앞에서 들리는 그것의 숨소리가 무서웠고, 눈가를 살며시 문지르는 차가운 손가락의 감각이 무엇보다 생생했다.
그래서 갑자기 가슴에 폭 하고 파묻히는 무게감이 느껴졌을 때, 나도 모르게 놀란 신음을 내뱉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것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양팔을 내 허리에 두르고 얼굴을 내 품에 깊숙이 묻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내가 몸을 뒤로 빼려고 할 때, 그것은 팔에 힘을 줘서 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애교라도 부리듯 볼을 부비적거리며 더욱더 강하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것이 지금 응석을 부리고 있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뇌가 이해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았던 그 괴물이 이 순간에는 무엇보다 인간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 후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나에게 달라붙은 그것을 떼어내려고 노력해봤던 것 같기도 하고, 마지못해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어떻게든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 실험실에서 나왔을 때, 나는 전례 없는 환대를 받았다.
그 고압적이고 냉정하던 연구원들이 서로 환호하며 흥분하였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연구원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앞으로 그것의 관리는 내가 맡게 될 것이라고.
그것에 대한 모든 관찰과 실험은 나를 통해 진행될 것이고, 이제부터 직책 또한 관리자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유례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일방적인 통보였다.
나는 꼼짝없이 그것과 함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건 간단했다.
내가 그것의 공격성을 억제할 수 있으니, 그토록 원하던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잠재성, 그리고 금전적 가치. 그들이 바라는 전부였다.

그들은 환상에 빠져 있었다.
바로 눈앞에 놓인 성과에 눈이 멀어 지금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을 만들어 낸 건지 깨닫지 못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냉정하게 바라만 봤다면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가지 않았을 텐데.

단순한 흉포함?
그것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지.
그건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보안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의 성질은 좀 더 본질적이었다.
한낱 인간 따위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닌, 그야말로 초자연적이라고 부를만한 기이하고 위험한 성질 말이다.


…그리고 전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 * *




다들 단순한 우연일 거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물건이 제자리에서 떨리거나, 올려놓았던 컵이 탁자에서 떨어지는 일 말이다.
어떤 사람은 연구소 주변에 있는 기차가 지나가면서 내는 진동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근처 단층에서 산발적인 지진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로 지목하는 원인은 다를 지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모두 그 현상이 바로 실험실 내부에서 비롯됐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그들은 과학자다. 무슨 음모론자나 마술사 따위가 아닌, 실증적인 물리 법칙만이 모든 걸 증명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초능력 같은 건 가설의 범주에도 들어갈 가치가 없는 미신이라고 여기는데, 어떻게 그 모든 원인이 자신들 바로 옆에 있었다고 생각하겠는가.

마침내 그들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그로부터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였다.

그동안 나는 그것에게 릴리아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
무슨 애정 같은걸 담아서 이름을 지어준 건 아니다.
연구원들은 내가 실험체와 더 가까워지기를 원했다.
실험체가 나와 같이 있어 줄 때만 보이는 애정과 인간성이 지지부진한 실험을 한 단계 진행할 수 있는 핵심 요소라고 생각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것에게 릴리아라는 이름을 불러 줬을 때, 릴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새 릴리아는 또다시 성장한 상태였다.
여성스러운 몸의 굴곡은 더욱더 깊어졌으며, 탐스러운 가슴 또한 보기 좋게 부풀어 올랐다.
여전히 위험하게 빛나는 빨간 눈동자만 제외한다면, 릴리아는 누가 봐도 완연히 성숙한 여자로 보였다.
내가 재차 릴리아의 이름을 부르자 릴리아는 마치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어렴풋한 눈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안겨 왔다.

솔직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매우 아름다운 릴리아의 외모는 꿈처럼 덧없고 동시에 눈을 확 잡아끄는 향긋함마저 가지고 있었으니까.
체향이라고 해야 할까, 릴리아가 폭 안길 때면 콧속까지 채우는 달착지근한 냄새가 느껴졌다.
맡고 있으면 절로 정신이 멍해지고, 알게 모르게 경계심을 풀게 되는 냄새.

그런 릴리아가 온 몸을 던지며 나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건 애써 꽉 다잡은 이성을 위태롭게 흔들리게 하는 자극이었다.
눈앞의 존재가 지극히 비인간적이고 위험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쩌면 릴리아는 그런 내 심정을 알고서도 일부러 그래왔던 걸지도 몰랐다.
릴리아는 그만큼 영리했으니까.

단순히 성장한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릴리아의 지능 또한 날이 갈수록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더욱 교묘해졌다.
처음에는 눈앞의 상황에만 반응하던 것이 이제는 자신의 주변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이해하는 듯 보였다.

내가 가위를 가져왔을 때였다.
릴리아는 잠시 내 손에 들린 가위를 쳐다보더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챈 릴리아는 등을 돌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어 주었다.
엉덩이까지 닿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위로 사르륵 자르는 동안, 릴리아는 조용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릴리아는 지금까지 가위를 본 적도 없고, 비슷한 날붙이를 본 적도 없었다.

여태 보지도 못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은 물건의 용도를 어떻게 단번에 알아챌 수 있는가?
경험을 뛰어넘어 본질을 파악하는 건 이미 통찰의 영역이었다.

이런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릴리아는 지능 테스트를 위해 가져온 하노이 퍼즐을 한 번에 풀어내었고, 4x4 큐브를 십 분도 되지 않아 전부 맞추었다.
그러고선 금방 흥미를 잃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며 내 소매를 주욱 잡아당겼다.

나에 대한 애정을 변함없이 보여주는 릴리아에게 서서히 정이 들어가는 한편, 릴리아가 점점 두렵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본능적인 두려움과는 달랐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미지의 공포였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고, 심지어 저 밖에서 거들먹거리는 엘리트 연구원들과도 궤를 달리하는 릴리아를 과연 통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오만에 사로잡혀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그 순간 나는 알아챘어야 했다.
릴리아가 주는 관능에 잠겨 눈이 멀지만 않았다면.
그래서 나의 직감이 속삭이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래, 지금 생각해 보니 알겠다.
릴리아는 전부 알고 있었다.
내가 릴리아에게 품는 감정, 생각. 그리고 두려움까지.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릴리아가 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릴리아는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릴리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그 붉은 눈동자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끝없이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늪 속으로, 그리고 깊은 바닷속으로.
요사스럽게 빛나는 그 눈동자가 뇌리에 끈적하게 남아 떨어지지 않았다.

갈증이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었다.
목이 바싹바싹 말라붙었고, 어느새 나는 릴리아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투명하고 창백한 피부 위에 핀 모란꽃처럼 가련한 분홍색으로 물든 입술.
어째서인지 그것이 조금 젖어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쓱 하고 손가락으로 훑으면 달콤한 습기가 묻어나올 것 같았다.
유혹하듯 살며시 벌어진 그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그 숨결을 들이마실 수만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정신이 들었다.
릴리아의 얼굴이 바로 코끝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내 무릎 위에 살포시 얹힌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릴리아가 몸을 기울여 나와 입맞춤을 하기 직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릴리아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충격이라도 받은 듯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가슴이 술렁이는 걸 느꼈다.
나는 동요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이토록 심란한 것인가.
어째서 릴리아의 고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사이로 드러난 뽀얀 어깨가 유독 눈에 들어오고, 왜 그것이 새하얀 현기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인가.

머리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왜 릴리아가 나에게 입맞춤을 하려고 했는지, 나는 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본 건지 알 수 없었다.
릴리아의 입술을 바라본 순간은 그 세세한 감각 하나하나 뚜렷하게 떠오를 정도로 생생했지만, 동시에 낯선 이물감도 느껴졌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모순적인 기분.

릴리아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을 느꼈다.
인간이 아닌, 괴물에게. 그걸 명확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 순간 릴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방 안의 물건이, 탁자가, 주변의 벽이 마치 강한 진동이라도 받은 것처럼 떨렸다.
땅은 울리지 않았다. 지진이 아니었다.
진동은 점점 커져 이내 탁자 위에 놓인 파일이 탁탁거리며 제자리에서 거칠게 튀었다.
총탄도 버티는 단단한 벽이 심하게 흔들리며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릴리아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이 소동과 자신은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이제는 숨길 수 없는 집착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눈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도망치듯 방에서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릴리아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디로든, 더는 릴리아의 눈빛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안전한 곳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미 깨지기 직전의 위태로운 살얼음 위를 걷는 꼴이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도 나약했다.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인 내 정신에 릴리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릴리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멀어지는 나의 등을 어떤 표정으로 바라봤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정신없이 연구실에 도착했지만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의 의미는 다양했다.
혼란, 부정,

그리고 두려움.




* * *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착각으로 눈이 멀어, 제멋대로 판단하고 행동했던 지난날의 꿈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시간 동안 나는 얼마나 큰 무지에 빠져 있었던가.

단편적이고 단락적인 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 하얀 살결, 부드럽게 푹 잠기는 그 향기와 살의 감촉이 희끄무레한 잔상으로 녹아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가운데, 타오르는 불씨처럼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릴리아의 모습, 내가 한때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그 눈빛은 이제 없다.
순진한 아이의 얼굴은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지고, 유혹적이고 색정적인 열기가 어느새 대신 자리 잡았던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정신이 들고 보니 나는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조명은 어두웠으며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불길할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기억이 이어지지 않는다. 어째서 내가 이곳에 서 있는 건지 설명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여기에 있었고, 머릿속이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는 기분이었다.
나를 둘러싼 이 공간은 이미 눈에 익숙했지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복도 깊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그 서늘하고 물기 어린 공기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안쪽으로 걸어갈 수록 흐릿하던 피 냄새가 진해지고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지만 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런 내 행동에 내 의지는 없었다. 나의 이성은 이 상황에 경고를 울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찰박찰박, 신발에 무언가가 튀는 소리가 들렸다.
미끌거리고 끈적한 점성을 가진 무언가가.
어두운 복도에 늘어진 거뭇거뭇한 액체가 다양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어떤 것은 손자국으로, 또 어떤 것은 발자국으로, 발버둥이라도 친 듯 벽과 바닥에 마구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 방향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복도 끝, 나에게는 너무 친숙한 그 방을 향해서.

각오라든지 두려움이라든지,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마비라도 된 것처럼 무감각했으며, 피 냄새에 취해버린 것처럼 착란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내가 실험실의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도 놀랍도록 초연한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피, 온통 피였다.
밝은 실험실의 조명 아래 드러난 벽은 빨갛고 뚝뚝 떨어지는 피로 뒤덮여 원래의 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형광등에서 나온 빛이 검붉은 색으로 산란하여 시야가 모조리 핏물로 뒤집어쓴 느낌이었다.
나는 실험실 한가운데 작은 산처럼 불룩 솟은 거대한 덩어리를 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하나의 살점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그 덩어리에는 수없이 많은 인간의 팔과 다리가 장식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있을 수 없는 기이한 각도로 뒤틀려진 신체들 사이로 사람들의 얼굴이 수면처럼 떠올라 있었다.

연구원들. 고압적이고 냉정했던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생을 갈구하듯 입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비명과 신음도 그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미 생기를 잃은 그들의 눈동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방안을 누르는 숨 막히는 적요는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곳엔 릴리아가 있었다.
사방이 피와 살점으로 얼룩진 이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홀로 하얀 천사같이 서 있는 릴리아가 보였다.

실오라기 없는 나체의 모습으로 릴리아는 나에게 다가왔다.
쭉 뻗은 늘씬한 두 다리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가 정리해 준 머리카락의 끝이 엉덩이 위를 살짝 스쳤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릴리아와 처음으로 마주한 그때와 같은….

릴리아가 내 앞에 서자 훅 끼치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더는 피냄새가 나지 않았다. 대신 릴리아의 체향이, 그 달콤하고 소금기 어린 냄새가 내 감각을 서서히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릴리아는 내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손으로 툭툭 하고 가볍게 건드리더니 이윽고 드러난 내 맨살을 더듬었다.
요염한 손놀림이 옆구리에 머물고, 나를 끌어안는 물컹이는 가슴의 촉감과 함께 조그맣게 굳은 릴리아의 분홍빛 유두가 내 피부를 짓눌렀다.
그 생생한 자극에 머리가 아찔해진다. 거칠어진 숨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흘렸다. 나의 숨, 어느덧 뜨거워진 그 열기가 릴리아의 이마에 스쳤다.
그러자 릴리아가 고개를 들더니 입술을 겹쳐 왔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나는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입안에 토해진 릴리아의 더운 숨결로 머리가 어지러웠고, 눈앞에 닥친 릴리아의 향기로운 용모가 시야 가득히 현란했다.
릴리아가 주는 이 감각적인 열락 앞에서 나의 자제심은 오로지 한 줌의 무상에 불과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입맞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릴리아는 나의 입술에 달라붙어 넘쳐흐르는 침을 정신없이 받아 마셨다.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는 눈동자는 기쁨에 잠겨 탁한 흐릿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꿀꺽꿀꺽, 릴리아의 목으로 내 타액이 넘어갈 때마다 릴리아의 달콤한 콧소리가 한숨처럼 인중을 뜨겁게 달구었다.

마침내 릴리아가 입을 떼자 끈적이는 투명한 실이 길게 이어지다가 끊어졌다.
나는 릴리아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봤다.
음란하게 젖은 붉은 입술이 일순 호선을 그리더니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내 이름을.

처음 듣는 릴리아의 목소리.
끊어질 듯 하면서도 그 투명한 울림은 정확히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은 내 이름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의문과 혼란으로 들끓던 머리가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다시 다가온 릴리아의 욕망에 불타는 눈동자와 옷감 너머로 발기한 내 성기를 누르는 새하얀 손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그제야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릴리아는 나를 보호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릴리아가 나에게 보여준 의존, 집착, 애정.
그것은 부모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아니 알을 깨고 나왔을 그 순간부터 나는 릴리아에게 선택받았고 또 사로잡혀 있었다.
벗어날 방법 따윈 없이.

우리가 진행했던 그 모든 실험과 관찰들, 그것들은 모조리 본질과 어긋나 있었고 결코 진실에 닿지 않았다.
릴리아는 태어나선 안 되는 존재였다.
릴리아가 가진 잠재력은 인류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돌이킬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다.
지극히 짧은 시간일지라도, 릴리아가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기 전에 멈출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들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커다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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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소재가 떠올라서 중구난방 손이 가는 대로 써봤음. 그래서 전체적으로 글이 깔끔하지는 않지만 습작용으로 남겨두기엔 아까워서 올려 봤어.